관학 유생 홍계적 등이 송시열을 무욕한 전 판서 박세당을 배척하는 소를 올리다
관학 유생(館學儒生) 홍계적(洪啓迪) 등 1백 80명이 상소하기를,
"천하에 용납하지 못할 바는 성인(聖人)을 업신여기는 것보다 큰 것이 없고, 왕법(王法)으로 마땅히 토벌할 바는 정인(正人)을 욕하는 것보다 먼저할 것이 없습니다. 전(前) 판서(判書) 박세당(朴世堂)은 요려(拗戾)196) 한 성품과 사왕(邪枉)197) 한 소견으로, 염퇴(恬退)198) 하다는 헛 이름을 가지고 문자(文字)의 작은 재주를 자랑하여, 무리를 모아 가르치면서 감히 사도(師道)로 자처(自處)하여, 주자(朱子)의 사서 장구 집주(四書章句集註)에 고친 것이 많아 저술하여 논설을 이루었고, 근래에는 또 고(故) 상신(相臣) 이경석(李景奭)의 비문(碑文)을 지으면서,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을 무욕(誣辱)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성인(聖人)을 업신여기고 정인(正人)을 욕하는 죄’에 처할 만합니다. 아! 예로부터 성현(聖賢)이 천하 만세에 누가 공히 있지 않겠습니까만, 우리 유학자(儒學者)가 된 이가 반드시 주자를 일컫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진실로 공자(孔子)·증자(曾子)·자사(子思)·맹자(孟子)의 도(道)가 모두 경서(經書)에 있는데, 주자가 아니면 그 뜻을 밝힐 수 없었으니, 주자의 공은 대저 우리 부자(夫子)보다 못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진(秦)·한(漢) 이래로 여러 유학자가 경(經)을 전(傳)하였지만, 지리(支離)하고 천착(穿鑿)하여 성인의 뜻을 어지럽게 해서 배우는 이가 알지 못하고 따라서 배울 바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주자(周子)199) ·정자(程子)200) 여러 현인(賢人)이 나와서 비로소 능히 그 대의(大義)를 밝혀 내었으나, 그래도 일정한 학설을 저술하지 못하였는데, 주자에 이르러서 여러 경서(經書)를 표장(表章)201) 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더욱 사서(四書)에 힘을 써서 여러 해설을 모아 절충하여, 그 말이 순수 정백(純粹精白)하고 평실 적확(平實的確)하여 한 자(字)·한 구(句)를 가감(加減)할 수 없으니, ‘백세(百世)에 성인(聖人)을 기다려도 의혹하지 아니한다.’고 이를 만합니다. 그런데 박세당은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다른 견해를 억지로 내어, 잘되고 잘못된 것을 드러내 비평하고 혹은 선후의 차례를 뒤바꾸기도 하며, 혹은 그 명의(名義)와 윤류(倫類)202) 를 변란(變亂)시키기도 하여 하나의 학설을 만들어 이름을 통설(通說)이라고 하였는데, 그 뜻은 ‘주자의 해설이 통하지 않는 것이 있으므로, 반드시 나의 해설과 같이 해야만 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무리들이 몰래 서로 전해 주어서 높이 받들어 논의하고 익혔는데, 세상에서 전본(全本)을 얻어 본 이가 드물며, 신 등도 일찍이 전하는 말로만 들었습니다. 대개 《맹자(孟子)》의 호연장(浩然章)에, ‘무시뇌야(無是餒也)’의 ‘시(是)’를 ‘도(道)’라고 하였고, 《논어(論語)》의, ‘학지위언효야(學之爲言效也)’를 ‘수업(受業)’이라고 하였습니다. 《대학》 성의장(誠意章)을 전(傳)의 수장(首章)으로 삼으면서 이르기를, ‘정본(鄭本)이 애초에 탈오(脫誤)가 아니다.’라고 하였고, ‘정(正)’으로 ‘격(格)’을 풀이하였는데, 이르기를, ‘격물(格物)은 본래 궁리(窮理)를 이르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저 궁리(窮理)로써 치지(致知)하고, 치지로써 성의(誠意)하는 것이 바로 《대학》의 첫째 뜻인데, 그 두뇌(頭腦)를 깨뜨리고 그 계급(階級)을 뒤바꾸었으니, 도(道)를 배반하고 이치를 해침이 대개 이와 같은 것들입니다.’ 《중용》에 이르러 더욱 큰 말로 꾸짖었는데 ‘그 명의(名義)를 어지럽게 하였다.’고 하고, ‘전도착란(顚倒錯亂)하다.’라고 하였으며, ‘사람을 어지럽히고 어둡게 하였다.’고 하고, ‘전후의 말이 모순(矛盾)된다.’고 하며, ‘사람을 가르쳐 그 마음을 잘못 쓰게 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한 책의 뜻을 세상에 명백하게 나타나지 않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성현(聖賢)이 후인을 위하는 정성된 뜻이겠는가? 그 글이 비록 있을지라도 없는 것과 같다.’고까지 하였습니다. 또 스스로 이르기를, ‘이를 하기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다.’라고까지 하였으니, 그 말이 아주 사리(事理)에 어긋남이 이와 같습니다. 대저 주자를 농동(儱侗)203) 한 처지에 두고 스스로 고명(高明)한 지경에 서려고 하였으니, 어찌 사문(斯文)의 변괴이며 오도(吾道)의 난적(亂賊)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박세당의 이 일은 처음 만든 것이 아니라, 소종래(所從來)가 있습니다. 아! 하늘이 마침내 사문(斯文)을 돌보아 돕지 아니하여, 주자의 후에 진헌장(陳獻章)204) ·왕수인(王守仁)205) 의 무리가 있어 이단(異端)의 말이 시끄러웠으나, 경서 장구(經書章句)를 쓸어버렸다는 말은 또한 듣지 못하였습니다. 불행히 휴적(鑴賊)206) 이 동국(東國)에서 불쑥 나와서 요사스러운 기운이 모인 곳에 온갖 나쁜 것이 갖추어져, 이에 감히 주자를 업신여기고 《중용》을 아주 거짓 해석하여, 마침내 홍수(洪水)·맹수(猛獸)와 같은 화(禍)가 있었습니다. 지금 박세당은 윤휴(尹鑴)의 그르친 자취를 찾아 스스로 성문(聖門)의 반역자가 되어, 주자를 비난해 헐뜯음은 이미 박세당의 기량(技倆)이 되었으니, 무릇 주자의 글을 읽고 주가의 도(道)를 높이는 사람은 마땅히 매우 미워해야 될 것입니다. 송시열이 모욕과 무함을 마구 입은 것도 대개 또한 이에 인연한 것입니다. 송시열이 평생에 존경하고 믿는 바는 다만 주자에게만 있으므로,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일 하나라도 주자를 모범으로 삼지 않음이 없었는데, 휴적(鑴賊)이 주자를 욕하는 것을 보고는 극력 배척하여 이적(夷賊)과 금수(禽獸)로 지목하였습니다. 이때에 일종의 거짓된 말이 있어서 휴적을 편들기를 매우 힘썼으니, 송시열도 그 잘못을 공격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드디어 음·양(陰陽), 흑·백(黑白)의 분파(分派)를 이루었습니다. 박세당은 바로 그 당시 휴적을 편드는 무리이므로, 박세당이 송시열을 모함하는 것과 주자의 주설(註說)을 고치는 것은, 서로 본말(本末)이지 서로 각기 다른 일이 아닙니다. 대저 송시열이 이경석(李景奭)에게 애초에 은혜와 원한이 없었는데, 이경석이 일찍이 삼전도(三田渡)의 문자(文字)207) 에 그들208) 의 공덕을 굉장하게 칭찬했으니, 송(宋)나라 신하 손적(孫覿)이 금(金)나라 사람을 위해 어떤 글을 지은 것과 서로 같기 때문에, 주자가 손적의 일을 기록한 한 구(句)의 말을 인용(引用)하여 풍자(諷刺)하였고, 송시열이 효종(孝宗)의 능지(陵誌)를 지을 적에 비풍(匪風)·하천(下泉)의 시209) 를 뜻에 두었는데, 이경석이 또 노(虜)210) 에게 거슬린 것을 두려워하여 문득 그 사실을 기록한 말을 깎아 없애려고 하였으니, 만약 우리 현고(顯考)211) 께서 선왕(先王)212) 의 뜻과 사업을 잘 계승하지 않았으면 효종의 뜻과 사업이 거의 어둠 속에 묻혀서 후세에 밝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 때가 옮겨지고 해가 가서 뽕나무 밭이 바다로 변하여, 송시열의 운명이 펴지고 굽혀짐이 일정하지 못하였는데, 온 세상을 돌아보매 늙고 덕있는 대신이 남아 있지 아니하여, 세도(世道)가 날마다 내려가고 인심이 더욱 사설(邪說)에 빠져서, 박세당 같은 자가 자기의 견해를 오늘날에 행하게 되어, 그 원한의 붓을 떨쳐 거짓으로 꾸며 저술하여 평생의 감한(憾恨)과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행하였습니다. 신 등이 그 이른바, 비문(碑文)이라는 것을 살펴보건대, ‘송모(宋某)213) 는 노성(老成)한 사람을 업신여겨서 상서롭지 못한 사실이 있고, 상서롭지 못한 보복(報復)이 있었다.’라고 한 것이 있고, 명(銘)에 이르기를, ‘거짓을 행하고 그릇됨을 순종하여 세상에 이름이 있는 사람이 있다. 올빼미와 봉황은 성질이 다르니, 성내기도 하고 꾸짖기도 한다. 착하지 못한 자가 미워하게 되니, 군자(君子)가 어찌 근심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송시열이 이경석을 풍자(諷刺)한 것은 주자의 전한 뜻에 따르고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밝힌 것인데, 《상서(商書)》214) 에 이른바, ‘노성을 업신여긴다.[侮老成]’라는 것과, 《맹자》에 이른바, ‘상서롭지 못하다[不祥]’라는 것이 과연 여기에 비길 수 있겠습니까? 만약 현인(賢人)과 군자(君子)가 불행히 화(禍)를 당한 것을 불상(不祥)의 보복(報復)이라고 한다면, 주자가 위학(僞學)이라는 지목을 받은 것도 손적(孫覿)을 비난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까? 공자(孔子)가 정치를 문란시킨 대부(大夫) 소정묘(少正卯)를 주(誅)하면서 그 범죄 행위를 일일이 들어 책망하기를, ‘거짓을 말하면서도 변명을 잘하고, 그릇됨을 순종하면서도 덕을 자랑했다.’고 하였는데, 박세당의 인용한 바가 실로 이에서 나왔으니, 이미 송시열이 거짓되고 그릇되다고 하였으면, 반드시 이경석과 같이 한 연후에 진실되고 옳겠습니까? 추노(醜虜)215) 가 마음대로 우리를 속국으로 만들었는데, 그는 뜻을 다해 찬송(贊頌)하였고, 송시열은 《춘추》의 대의에 복종하여, 효종(孝宗)께 몸을 바쳤으며, 주자의 사실을 기록하는 의(義)를 인용(引用)하여, 천하(天下) 대방(大防)의 경계(警戒)를 남겼으니, 이 두 가지 일을 박세당이 어찌 참으로 알지 못한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알면서도 일부러 거꾸로 두고 역(逆)으로 베푸는 것입니까? 아! 말세(末世) 이래로 성인(聖人)의 길이 막히고 거칠어졌는데, 주자의 말이 홀로 어두운 길의 지남철(指南鐵)이 되어 우리 동방(東方) 도학(道學)의 적전(嫡傳)216) 은 실로 송시열에게 있으니, 진실로 윤휴(尹鑴)·허목(許穆)의 무리가 아니면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도, 박세당은 위로 주자를 업신여기고 아래로는 송시열을 욕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이른바 성인(聖人)을 업신여기고 정인(正人)을 모욕하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한 치의 구름이 매우 작지만 혹은 해를 가리는 데 이르고, 졸졸 흐르는 물이 매우 가늘지만 혹은 하늘까지 넘치는 큰 물에 이르기 때문에, 군자(君子)는 반드시 그 조짐을 막고 그 근원을 막는 것입니다. 무릇 주자의 도(道)는 긴 밤의 해와 달과 같은 존재이며, 송시열의 어짐은 격류(激流) 속에 우뚝 서있는 바위와 같은 존재인데, 박세당의 간범(干犯)한 바는 한 치의 구름이나 졸졸 흐르는 작고도 가늘은 물의 존재가 아닙니다. 만약 박세당에게 징계해 토벌하는 법을 면하게 하여 더욱 무패(誣悖)한 말을 함부로 하게 된다면, 신의 생각에는 어두움이 해를 막는 재변과 홍수가 땅에 넘치는 화(禍)가 마침내 해를 덮고 하늘까지 넘치게 될 듯하며, 조짐을 막고 근원을 막는 방법 또한 베풀 수가 없을 것이니 두렵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박세당은 그릇되게 대우하는 은혜를 입어 이름과 지위가 높으며, 그 문도(門徒)가 진신(搢紳)의 자제가 많으니, 더욱 서로 이끌고 본받아 배워서 주자를 업신여기게 할 수는 없습니다. 상신(相臣) 묘도(墓道)의 글은 사체(事體)가 중하고 장차 돌에 새겨서 영구히 전할 것인데, 그 무패(誣悖)한 바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만일 후일의 소인(小人)으로 하여금 박세당을 빙자해 구실로 삼으면, 그 화(禍)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전에 이지무(李枝茂)가 학문을 논한 책을 올렸는데 효종(孝宗)께서 곧 송시열에게 주며 이르시기를, ‘이 논설이 정자(程子)·주자(朱子)의 학설에 어긋남이 없는가?’라고 하시자, 송시열이 말하기를, ‘주자 이후로 의리(義理)가 크게 밝혀졌으니, 이 뒤에 저술이 있는 것은 모두 쓸데없는 말이며, 더러 주자의 학설에 어긋나는 이설(異說)입니다.’라고 하니, 효종께서 이를 옳다고 하셨습니다. 성조(聖祖)께서 선유(先儒)를 높이고 이설(異說)을 배척하시면서, 송시열의 말을 소중하게 여긴 것이 이미 저와 같았습니다. 지난 해에 박태순(朴泰淳)이 역적 허균(許筠)의 시권(詩卷)을 간행할 때, 이이(李珥)의 시가 아닌 것을 이이의 시라고 하여서 그 거짓이 사실이 증명되자, 성명(聖明)께서 노여워하시어 그 판각(板刻)을 허물어뜨리고 그 사람을 처벌하였으니, 성명께서 선현(先賢)을 추존하고 그 속인 것을 바로잡음이 이와 같았습니다. 지금 이 일에 성도(聖道)를 호위하고 간무(奸誣)를 분변하는 책임이 전하께 달려 있는 것이, 어찌 더욱 중하고도 크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빨리 명하여 박세당이 지은 사서주설(四書註說)과 이경석의 비문을 거두어 들여서 물이나 불에 던져서 그 근본을 끊고, 박세당의 죄를 법관(法官)에게 맡겨서 온 세상으로 하여금 주자의 말은 헐뜯을 수 없고 송시열의 어짊은 모함할 수 없으며, 성인을 업신여기고 정인(正人)을 욕하는 죄는 징계하지 않을 수 없음을 분명히 알도록 하여, 학술(學術)이 하나로 정해지고 선비의 취향(趣向)이 바른 데로 돌아가서 세도(世道)의 무궁한 화(禍)를 면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박세당이 성인을 업신여기고 정인(正人)을 욕한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사문(斯文)에 관계되는 바이므로 결단코 그대로 두기 어렵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복계(覆啓)하기를,
"박세당이 지은 주설(註說)과 상신(相臣)의 비문(碑文)을 박세당과 이경석의 후손으로 하여금 바치게 하여, 과연 유생의 상소에 진달한 바와 같으면, 상소의 말에 의하여 물이나 불에 던져야 할 것이니, 바치기를 명한 뒤에 다시 품처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이경석의 손자 이진양(李眞養)이 비문을 바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므로, 곧 체포당한 뒤에 바쳤다. 예조에서 주설과 비문을 가져와서 관학(館學)의 상소에 조열(條列)한 바를 가지고 상고해 보니, 다만 《대학》의 성의(誠意) 한 조항(條項)만 어긋나고, 비명(碑銘)의 ‘행위순비(行違順非)’ 네 글자는 잘못되어 ‘자위사탄(姿僞肆誕)’이라고 되어 있었으며, 그 나머지 성인을 업신여기고 정인(正人)을 욕하는 말은 모두 유생의 상소와 서로 부합하였다. 드디어 찌[籤]를 붙여 입계(入啓)하여 예람(睿覽)에 대비(對備)하고 이어 아뢰기를,
"책에 기록한 바는 또 새로운 말을 창작한 것이 많은데 본 뜻과 서로 위배되고, 《중용》에서는 바로 장구(章句)를 변하고 바꾸기를 더욱 거리끼는 바가 없었습니다. 마땅히 밝게 분변하고 엄하게 물리쳐야만 할 것이니,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조목마다 변파(辨破)하게 하소서. 상신(相臣)의 비문은 비록 경주(經註)와는 차이가 있지만 그 말한 바가 무패(誣悖)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것을 세상에 남겨서 전하도록 맡겨 둘 수는 없습니다. 유신의 변파를 기다린 뒤에 비문과 책자를 한꺼번에 전일의 품(稟)한 바에 의하여 처치할 것이며, 징토(懲討)한 조항은 신의 조(曹)에서 주관하는 바가 아니므로 오직 성상께서 재결하소서."
하니, 임금이 판결하기를,
"어제 ‘정납(呈納)한 뒤에 다시 품하라.’는 전교는 관학(館學)의 상소를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을 자세히 살펴서 처분하는 도리에 있어서 그와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박세당이 지은 사서주설(四書註說)을 보건대, 그가 주자를 능멸하며 도(道)를 배반하고 이치를 해친 것이 진실로 한둘이 아니며, 《중용》에 이르러서는 장구(章句)를 변경해 바꾸고 마음대로 헐뜯은 것이 차마 바로 볼 수 없는데, 끝에 말하기를, ‘마지 못한 데에서 나온 것이지 하기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말의 순서 없음이 이 지경에 이르러 다시 여지가 없다. 아! 춘추경(春秋經) 하오(夏五)에 호씨(胡氏) 전(傳)에 이르기를, ‘세상에 혹시 자기 개인의 뜻으로 옛글을 고치는 자가 있으니, 이를 보고 거울로 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그 의리가 어찌 명백하고 정당하지 않겠는가? 아! 지나간 성인(聖人)을 계승하고 장래의 학자를 열어 준 공은, 주자보다 큰 이가 누구이겠는가? 그런데도 박세당은 어찌 감히 성인을 업신여기기를 이처럼 거리낌없이 하는가?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에 이르러서는 여러 조정에서 예우(禮遇)하는 대로(大老)217) 이며 나도 평일에 존경하고 신임함이 어떠하였는데, 감히 상신(相臣)의 묘도(墓道)의 글에 바로 무패(誣悖)한 말을 가하였으니, 더욱 마음이 아프다. 밝게 분변하여 엄하게 물리쳐서 무궁한 근심을 막지 않을 수 없으니, 박세당을 먼저 삭탈 관작(削奪官爵)하여 문외 출송(門外黜送)하고, 곧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조목마다 변파(辨破)하게 한 뒤에 비문과 책자를 한꺼번에 불속에 던져버리라."
하였다. 박세당이 경(經)을 헐뜯는 말이 세상에 오래 행하였으나 그 전편(全篇)을 본자가 없었는데, 이경석의 비문이 나오자 사림(士林)이 더욱 놀래고 분개하여 드디어 죄를 성토(聲討)하기를 청하니, 그 말이 의리(義理)가 엄하고 바르므로 임금이 곧 기꺼이 받아 들여서, 치우치고 방탕한 말을 엄하게 물리쳐 사론(士論)이 통쾌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보다 먼저 처사(處士) 김창흡(金昌翕)이 박세당의 문인(門人)에게 편지를 보내어, 박세당을 논척(論斥)하기를,
"요즈음 듣건대, 서계(西溪) 【박세당의 자호(自號)이다.】 가, 노(魯)나라문인(聞人)218) 으로써 우옹(尤翁) 【송시열의 호가 우암(尤庵)이다.】 에게 비하였다고 하는데, 대저 우옹이 서계에게 죄를 얻은 것은 세어서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지만, 생각하건대, 한 가지 죄는 용서하기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대저 주자의 도(道)가 반드시 모두 옳은 것은 아니고 주자의 말이 반드시 모두 마땅한 것은 아니며, 때에 따라 오르내리는 것은 또한 쇠퇴한 말세(末世)의 사의(事宜)입니다. 우옹은 이 도리에 전연 어두워서 한결같은 뜻으로 존경하고 믿어서 목숨을 버리면서 호위하고, 그 말을 높이 받드는 것은 시축(屍祝)219) 이 종묘의 신주[宗祏]를 받드는 것과 같고, 그 무례함을 보면 매가 참새를 쫓는 것처럼 하여 시종 힘써 싸워서 공의(公議)의 우뚝함이 지주(砥柱)와 같으니, 대저 사나운 물결을 돌이켜서 동쪽으로 가게 하여, 민중(閩中)220) 의 바른 연원(淵源)을 접(接)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흑수(黑水) 【윤휴를 가리킨다.】 가 이미 서쪽으로 와서 이산(尼山) 【윤증(尹拯)을 가리킨다.】 에게서 넘치고, 서계(西溪)에게 물을 대니 흘러서 파(派)가 갈리고 나누어져서 무리로 모이니, 향배(向背)가 이와 같음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대저 우옹이 평생에 고집해 지키는 바는 대강(大綱)이 넷이 있으니, 피음(詖淫)221) 을 막아서 삼성(三聖)222) 을 이어받드는 것과, 절의(節義)를 숭상하여 동주(東周)223) 를 높이는 것과, 징토(懲討)를 엄하게 하여 윤기(倫紀)를 붙드는 것과, 향원(鄕愿)224) 을 미워하여 정경(正經)에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네 가지 의(義)를 행함은, ‘천지를 세우고 해와 별처럼 비쳐서 나를 알아 주고 나를 죄하는 것이 오직 여기 있다.’고 하였습니다. 서계가 원망과 노여움을 둔 바는, 그가 남에게 이기기를 좋아하고 과거를 옹호하는 것이 지나쳐 주자의 위로 돌진하여 지나가려고 하는 데 있어, 마침내 그가 가장 신봉(信奉)하는 것을 미워함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일체 그가 하는 바를 반대하여, 그 피음(詖淫)을 막는 것을 미워하는 데에는 자신이 경(經)을 헐뜯고 의(義)를 파괴하는 일을 꺼리지 아니하였고, 그 절의(節義)를 숭상함을 미워하는 데에는 비린내 나고 더러운 자취를 깨끗이 씻어주었으며, 그 징토(懲討)를 엄하게 하는 것을 미워하는 데에는 반역(反逆)을 옹호하여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무리를 붙들어 세웠고, 그 향원(鄕愿)을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는 데에는 흐름을 같이하고 더러움을 합한 무리를 높이 받들었습니다. 그래서 무릇 세상에서 부끄러워할 만한 덕과 씻기 어려운 더러움이 있어서, 예전에 이른바 ‘효도하는 아들과 사랑하는 손자라도 그 부조(父祖)의 악행(惡行)을 고칠 수 없다.’는 자들이 모두 앞에 엎드려 명령을 기다리며 끊어져 가는 원망의 글을 빌기를 원하자, 부월(鈇鉞)225) 을 바꾸어서 화곤(華袞)226) 을 만들고, 동철(銅鐵)을 변조하여 금은(金銀)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에 어지러이 옥백(玉帛)227) 을 바치고 달려가 성하게 연수(淵藪)228) 의 모임이 되었으니, 헌상(軒相) 【이경석(李景奭)의 호(號)가 백헌(白軒)이다.】 의 집 일도 그 하나입니다. 대저 우옹이 헌상(軒相)에게 대하는 바는 스스로 설화(說話)가 있습니다. 그의 기절(氣絶)이 모자라는 것을 논하자면 삼전도(三田渡)의 송공문(頌功文)에서 극력 칭찬한 것이고, 그 의견이 더럽고 낮음을 논하자면 신덕 왕후(神德王后)를 부묘(祔廟)하는 논의에 억지로 이의(異義)를 낸 것이며, 또 그가 악(惡)을 꾸짖고 선(善)을 칭찬한 것도 없이 흐리멍덩하여 향원(鄕愿)의 규모(規模)와 비슷함이 있기 때문에, 공격하기를 더욱 힘써서 감히 말과 얼굴 빛에 용서하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우옹의 사사로운 뜻이겠습니까? 주자가 여정헌(呂正獻)229) 부자(父子)가 부처를 섬긴 일에 놀라 탄식하며 말하기를, ‘만약 전배(前輩)인 이유로써 감히 그 잘못을 비평하지 못한다면, 이는 공자(孔子)가 장문중(藏文仲)의 어질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함을 비평하지 못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같은 말은 우옹이 대개 전해 받은 바가 있는 것입니다. 우옹은 다만 한 사람의 우옹이어서 처음부터 나중까지가 금(金)이 될 것인지 철(鐵)이 될 것인지는, 스스로 정한 값이 있을 것이므로 바꿀 수 없습니다. 도(道)는 굴신(屈伸)이 있고 때는 성쇠(盛衰)가 있는데, 그 향하고 배반하고 부축하고 공격하는 즈음에, 어지럽게 머리를 고치고 얼굴을 바꾸는 것이 몇 명의 공백료(公伯寮)230) 가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사리(事理)에 어두운 자는 옆에서 보고 혹시 덕(德)에 손실이 있는가 의심하지만, 세상 사람은 떳떳함이 없으나 서공(徐公)231) 은 떳떳함이 있음을 자못 알지 못한 것입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그 사람을 알지 못하거든 그 벗을 보라."고 하였으니, 우리 효종(孝宗)께서는 뛰어나게 명철하시고 문덕(文德)을 갖추어서 만백성이 우러러보는 바이지만, 우옹에게는 감히 신하로 대하지 않고서 스승과 벗의 사이로 처우하시면서 이르시기를, ‘그대는 오직 나의 감반(甘盤)232) 이며, 오직 나의 공명(孔明)233) 이다.’라고 하셨고,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호(號)이다.】 의 넓고 깊은 정성과 신재(愼齋) 【김집(金集)의 호가 신독재(愼獨齋)이다.】 의 정명 단확(精明端確)함으로써 모두 ‘창[戈]을 잡고 입실(入室)하여 우리 도(道)가 의탁함이 있다.’고 칭찬하였고, 금성 옥색(金聲玉色)의 춘로(春老) 【송준길(宋浚吉)의 호가 동춘당(同春堂)이다.】 는 ‘태산 교악(泰山喬岳)’이라는 높은 칭찬을 돌렸습니다. 그가 조정에 있을 적에는 충성스럽고 청백한 기천(沂川) 홍공(洪公) 【홍명하(洪命夏)이다.】 같은 이도 매양 출입하면서 아뢰기를, ‘송모(宋某)는 어찌 쓰지 못할 말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고, 침착하고 깊은 양파(陽坡) 정공(鄭公) 【정태화(鄭太和)이다.】 같은 이도 취미(臭味)는 서로 같지 않으면서도 항상 존경하고 복종하며 말하기를, ‘송모(宋某)는 도(道)를 이룬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옹이 한 시대 상하(上下)의 칭찬을 얻은 것이 이와 같이 빛났는데, 만약 마음을 정제하고 의복을 갖추어서 구학(丘壑)234) 과 운소(雲霄)235) 사이에 조용히 진퇴(進退)하였더라면, 사유(四維)236) 가 이로써 넓게 펴지고 백료(百僚)가 꺼리는 바가 있어, 어리석은 자가 조경(躁競)237) 하는 뜻을 거두고 정백(精白)한 자가 더욱 가다듬기를 생각했을 것이니, 비유하건대, 산이 높이 솟아있으면 만 사람의 눈이 우러러 보고, 사자(獅子)가 떨쳐 일어나면 온갖 짐승이 놀라 두려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시에 서계(西溪)도 일찍이 뭇 기러기를 탄 열(列)에 비유하였지 불가함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데, 어찌 또한 옳지 못하다는 마음을 품어 쌓음이 두텁지 못하여 머뭇거리다가 노성(老成)한 사람이 이미 없어진 날을 기다렸습니까? 중년(中年) 이후의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행실을 모두 공평하게 살필 수 있는데, 원인된 바는 다름이 아니라, 여전히 절의(節義)를 숭상하고 피음(詖淫)을 막으며 징토(懲討)를 엄하게 하고 향원(鄕愿)을 미워하는 논의에 있는 것입니다. 고집하기를 너무 굳게 하여 굽히고 빼앗기는 바가 없었으며, 또 인정(人情)을 돌보아 주어 글을 팔아 죽은 사람에게 아첨하지 못하여, 뭇사람의 감정이 함께 일어나서 주먹질과 발길질이 어지럽게 초래(招來)된 것입니다. 이에 왕도(王道)와 패도(霸道)를 아울러 써야 한다는 말이 이산(尼山)238) 에서 맹렬히 일어나고, 거짓을 행하고 그릇된 점을 순종한다는 꾸짖음이 서계(西溪)에서 분연히 일어났으니, 참으로 때를 엿보고 불쑥 일어난 것은 과연 스스로 분명합니다. 꿈틀거리는 온갖 괴물(怪物)의 태도를 볼 수 있겠는데, 우옹은 다만 한 사람의 우옹일 뿐입니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천하에 업신여기지 못할 사람은 중니(仲尼)239) 이고 천하에 침범할 수 없는 사람은 주자(朱子)인데,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시(詩)에, ‘우주(宇宙) 사이에 두 사람이 있으니, 중니의 원기와 자양의 진원(眞元)이다.’라고 하였으니, 확실한 말입니다. 백성이 난 이후로 공자와 같은 이가 진실로 있지 않지만, 주자가 그 지극한 이치를 발명함이 없었으면 공자의 공자됨을 누가 참으로 명쾌하게 알 것이며, 또한 어찌 후인을 깨우치고 도와서 그 문로(門路)를 미혹하지 않도록 하였겠습니까? 주자가 일찍이 이르기를, ‘의리는 한정이 없는데 사람의 보는 것은 한도가 있으니, 마음 속의 망상(妄想)을 버리고 기운을 침착하게 가져서 의심스러운 것은 놓아두고, 이를 구하여 완색(玩索)240) 의 요지로 삼았다. 한 격막(膈膜)을 벗기면 한 격막이 막히고, 한 절(節)을 풀면 또 한 절을 만나게 되니, 마음을 진정하고 깊이 생각하며 무르녹게 씹고 녹여서 통하고, 그 극진함을 모아서 이에 훈의(訓義)를 짓고 그 구두(句讀)를 바로잡았으니, 모두 자세히 헤아리고 저울질한 위에서 나온 것이 아님이 없으며, 보통 한 글자의 훈(訓)도 혹시 천백 번 개고(改稿)한 것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대체 이러한 뒤에야 의리가 정밀하고 확실하여 넘어지고 두드려도 깨뜨려지지 아니하여, 비록 공자와 증자(曾子)가 다시 나오고, 자사(子思)와 맹자의 영(靈)이 있을지라도 머리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거칠고 얕으며 막히고 걸리는 소견으로 쉽사리 이론을 세워 깨뜨릴 수 없습니다. 서계의 역량(力量)이 이에 비하여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지만, 이제 하루아침에 거침없이 지나가려고 합니까?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세간의 오직 마음이 공평하지 못한 사람은 글을 읽을 줄 모른다.’고 하였는데, 좌우(左右)도 일찍이 소사(素沙) 비석(碑石)의 분변을 들었습니까? 그 남북(南北)에 있는 위치의 판결은, 바로 말을 달려 한 번 가서 이미 승부가 났는데도, 말을 남기기를, ‘어제 내[川] 북쪽에 있던 돌이 어찌하여 내 남쪽으로 날아서 건너 왔는가?’라고 하였으니, 그 그릇된 것에 따르는 것이 심히 굳지 않습니까? 【박세당이 일찍이 그 형과 더불어 비석의 남북을 가지고 다투어 분변하였는데 같이 가서 보고 이같이 말한 것이 있었으며, 그 집요(執拗)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저 드러나게 눈에 보이는 물건도 오히려 흰 것을 검다고 쉽게 말하는데, 하물며 천하의 의리는 복잡하여 천차만별(千差萬別)이 있습니다. 성현의 말씀은 자세하고 간략함과 드러나고 미묘한 즈음에, 한 번 나가고 한 번 들어오는 것을 무엇으로 그 통함을 알아서 절충(折衷)하겠습니까? 생각하건대, 허명 관광(虛明寬廣)함이 이미 그 마음이 아니고 고집 불통하여 단지 남을 꼬집는 재주를 부리기만 좋아하고, 때로는 흐릿한 검은 그림자 사이로 한 줄의 통할 만한 것을 조금 보고는 차양[蔀]으로 두성(斗星)241) 을 엿본 것과 같고,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 알아낸 것을 놀란 듯이 기특하게 여겨서 예전 사람이 이르지 못한 바라고 여기지만, 그 실상은 전대의 사람이 초고(初稿) 때에 이미 버린 지 오래 된 울타리가의 물건인데, 반드시 사사로이 비밀히 간직하여 천금의 보화로 삼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처음에는, ‘어리석은 사람도 천 번 생각하면 한 가지 좋은 생각이 있다.’는 데에 스스로 의탁하여 겸손함을 삼았으나, 중간에는, ‘모두 서로 득실(得失)이 있다.’는 것으로 돌려서 적수로 삼고, 끝에 가서는 ‘그들은 한 가지 좋은 생각을 얻은 다행함도 없었는데, 나는 천 번 생각하여 다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하니, 사람을 속이고 의혹하게 하되 점차로 들어감이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 얕은 말학(末學)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조금 식견이 있는 것까지도, 또한 선택할 바를 알지 못하여 이를 인연하여 그르치고 말았습니다. 아! 세상의 화(禍)가 참혹한 나머지 사라지고 허물어져서 선비의 기풍(氣風)이 날마다 경박하여, 점점 사람은 당고(黨錮)의 화242) 를 징계하고 집에서는 기묘년243) 에 도학(道學)을 꺼려서 이욕(理欲)244) 과 왕패(王霸)245) 의 분변을 강론할 날이 짧은데, 춥고 따뜻함과 굶주리고 배부른 기틀에는 나아가고 피함이 더욱 밝아서, 앞에 이른바, ‘천지를 세우고 일성(日星)처럼 비치고 있다.’는 말은 옛 책을 보아서 힘입음이 없으니, 우주(宇宙)사이에 진정한 한 맥(脈)이 실처럼 끊어지지 아니하여 면면히 이어져 오다가 점점 가늘어서 끊어져 가는 것이 이때입니다. 그런데 사설(邪說)을 그 사이에 외쳐서 모든 백성 가운데 준수(俊秀)한 자를 몰아다가 서로 사벽(邪僻)함을 향하게 하고, 고요한 곳에서 입을 귀에 붙이고 밤낮으로 흉터를 들추어내어, 주자의 결점을 찾아 내기를 일삼으니, 아! 그 어질지 못함이 심합니다."
하였다. 이때 박세당의 글이 조금씩 전해져 말하게 되니, 혹은 공격할 것이 못된다고 하고 혹은 공격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는데, 홀로 김창흡이 개연(慨然)히 세도(世道)를 근심하여 다른 사람에게 준 글에서 선정(先正)의 뜻과 일을 밝혀 내었고, 박세당의 치우친 말을 물리쳤는데, 그 말이 통쾌하여 사림(士林)을 격려 선동시켜 조금 뒤에 태학(太學)의 상소가 과연 올라갔으니, 박세당의 무리가 김창흡을 원망함이 더욱 깊어졌다.
- 【태백산사고본】 44책 38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18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사법-탄핵(彈劾)
- [註 196]요려(拗戾) : 비꼬이고 어긋남.
- [註 197]
사왕(邪枉) : 바르지 못함.- [註 198]
염퇴(恬退) : 영리(營利)에 초월함.- [註 199]
주자(周子) : 송대의 학자 주돈이(周敦頤).- [註 200]
정자(程子) : 송대의 학자 정호(程灝)·정이(程頤).- [註 201]
표장(表章) : 드러내어 밝힘.- [註 202]
윤류(倫類) : 인륜(人倫)의 종류.- [註 203]
농동(儱侗) : 논설이 정확하지 못함.- [註 204]
진헌장(陳獻章) : 명나라 학자.- [註 205]
왕수인(王守仁) : 왕양명(王陽明).- [註 206]
휴적(鑴賊) : 윤휴(尹鑴)를 가리킴.- [註 207]
문자(文字) : 삼전도(三田渡) 비문을 가리킴.- [註 208]
그들 : 청나라.- [註 209]
비풍(匪風)·하천(下泉)의 시 : 비풍·하천은 모두 《시경(詩經)》의 편명. 대의는 현재 국가 정세의 불안함을 근심하고 예전 주(周)나라의 태평성세를 그리워 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청나라를 미워하고 명나라를 사모하는 뜻임.- [註 210]
노(虜) : 청국.- [註 211]
현고(顯考) : 현종.- [註 212]
선왕(先王) : 효종.- [註 213]
송모(宋某) : 송시열을 가리킴.- [註 214]
《상서(商書)》 : 《상서(尙書)》.- [註 215]
추노(醜虜) : 청국.- [註 216]
적전(嫡傳) : 바른 전통.- [註 217]
대로(大老) : 덕망높은 늙은 대신.- [註 218]
문인(聞人) :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 [註 219]
시축(屍祝) : 축을 읽는 사람.- [註 220]
민중(閩中) : 주자(朱子)가 있던 곳.- [註 221]
피음(詖淫) : 치우치고 부정한 말.- [註 222]
삼성(三聖) : 우왕(禹王)·주공(周公)·공자(孔子)를 이름.- [註 223]
동주(東周) : 주(周)나라.- [註 224]
향원(鄕愿) : 향리(鄕里)에서 겉으로는 덕(德)이 있는 사람이라 칭송을 받으나, 실제의 행실은 그렇지 못하여 남을 속여서 사복(私腹)을 채우던 악덕 토호(土豪).- [註 225]
부월(鈇鉞) : 폄론(貶論)을 이른 말.- [註 226]
화곤(華袞) : 표창(表彰)을 이른 말.- [註 227]
옥백(玉帛) : 예물.- [註 228]
연수(淵藪) : 새와 물고기가 모여드는 곳.- [註 229]
여정헌(呂正獻) : 여공저(呂公著)의 시호.- [註 230]
공백료(公伯寮) : 춘추 시대 노(魯)나라 사람. 공자의 제자인데 동문(同門)의 선배(先輩)인 자로(子路)를 계손씨(季孫氏)에게 참소한 일이 있음.- [註 231]
서공(徐公) : 서문중(徐文重).- [註 232]
감반(甘盤) : 은(殷)나라 고종(高宗) 때의 현신(賢臣). 고종(高宗)이 즉위하기 전에는 감반에게서 수학(受學)하였고 즉위한 뒤에는 그를 재상으로 삼았음.- [註 233]
공명(孔明) : 제갈량(諸葛亮).- [註 234]
구학(丘壑) : 전야(田野).- [註 235]
운소(雲霄) : 높은 지위.- [註 236]
사유(四維) : 예·의·염·치(禮義廉恥).- [註 237]
조경(躁競) : 승진을 다툼.- [註 238]
이산(尼山) : 윤증(尹拯).- [註 239]
중니(仲尼) : 공자.- [註 240]
완색(玩索) : 연구.- [註 241]
두성(斗星) : 북두성(北斗星)과 남두성(南斗星).- [註 242]
당고(黨錮)의 화 : 당인(黨人)이 살육(殺戮)당한 화(禍)를 말함. 후한(後漢) 말에 환관(宦官)들이 정권(政權)을 전담함을 분개하여 이를 공박한 지사(志士)들이 환관의 미움을 받아 하옥되었는데, 죽은 자가 백여 인이고 처자(妻子) 등 많은 사람이 종신 금고(終身禁錮)의 형(刑)을 받았음.- [註 243]
○館學儒生洪啓迪等百八十人, 上疏曰:
天下之所不容, 莫大於侮聖; 王法之所當討, 莫先於醜正。 前判書朴世堂, 以拗戾之性, 邪枉之見, 挾其恬退之虛名, 務其文字之小技, 聚徒敎授, 敢以師道自居, 於朱子四書章句集註, 多所改易, 著爲成說, 近又撰故相臣李景奭碑文, 誣辱先正臣文正公 宋時烈。 此眞可以伏侮聖醜正之罪矣。 嗚呼! 自古聖賢, 孰非有功於天下萬世, 而爲吾儒者, 必稱朱子, 何哉? 誠以孔、曾、思、孟之道, 具在經書, 而非朱子, 不能明其旨, 朱子之功, 蓋有不下於吾夫子者矣。 秦、漢以來, 諸儒傳經者, 支離穿鑿, 汨亂聖旨, 學者貿貿焉莫知所從入。 周、程諸賢出, 則始克發明其大義, 猶未有著爲一定之說, 及至朱子, 於諸經無不表章, 而尤用力於四書, 會衆說而折其衷。 其言純粹精白, 平實的確, 一字一句, 加減不得, 可謂百世以竢聖人而不惑者。 世堂何人, 乃敢强生岐貳, 顯議得失, 或顚倒其先後次第, 或變亂其名義倫類, 作爲一說, 名以通說? 其意謂朱子之說, 有所不通, 必如吾之說而後可通。 其徒陰相傳授, 尊奉而論習之, 世罕得見全本, 而臣等亦嘗得於傳說。 蓋以《孟子》 《浩然章》, 無是餒也之是爲道, 以《論語》學之爲言效也, 爲受業。 《大學》則以《誠意章》爲傳首章, 而謂鄭本初非脫誤, 以正訓格, 而謂格物本非謂窮理。 夫窮理以致知, 致知以誠意, 卽《大學》第一義, 而破其頭腦, 倒其階級, 背道害理, 大抵類此。 至於《中庸》 尤昌言詆之, 有曰亂其名義, 曰顚倒錯亂, 曰使人眩瞀, 曰前後之言矛盾, 曰敎人枉用其心, 至謂使一書旨意, 不白於世。 此豈聖賢爲後人眷眷之意? 其書雖存, 與未有同, 又自謂非樂爲也, 不得已也, 其言之絶悖無倫, 如此。 蓋欲置朱子於儱侗, 而自立於高明之域, 豈非斯文之變怪, 吾道之亂賊也? 然, 世堂此事, 非其作俑, 而有所從來矣。 嗚呼! 天不終眷佑斯文, 朱子之後, 有陳獻章、王守仁輩, 異言喧豗, 而亦未聞掃去經書章句。 不幸鑴賊, 闖生於東國, 沴氣所鍾, 萬惡俱備, 乃敢凌轢朱子, 厚誣《中庸》, 卒之有洪水猛獸之禍。 今世堂, 尋其前轍, 自作反卒於聖門。 非毁朱子, 旣爲世堂伎倆, 則凡於讀朱子之書, 尊朱子之道之人, 宜其深疾, 時烈之橫被醜誣, 蓋亦坐此焉耳。 時烈平生所尊信, 只在朱子, 一言一事, 無一不以朱子爲法。 見賊鑴之誣悖朱子, 極力觝排, 指以爲夷狄、禽獸。 時有一種躛言, 右鑴甚力, 時烈又不得不攻其非, 遂成陰陽黑白之分, 而世堂卽當日右鑴者之流派, 則世堂之誣時烈與改朱子註說, 相爲本末, 蓋非各項事也。 夫時烈之於景奭, 初無恩怨, 而景奭嘗於三田渡文字, 盛稱其功德, 與宋臣孫覿之爲金人, 作某文相類, 故引朱子所記覿事一句語, 以諷規之。 及時烈之撰孝廟陵誌也, 致意於《匪風》、《下泉》之詩, 景奭又恐觸忤彼虜, 輒欲刪沒其記實之語。 倘非我顯考之善於繼述, 則孝廟志業, 幾乎䵝昧, 不白於後矣。 嗚呼! 時移年邁, 桑海互變, 時烈之屈伸不常, 而顧瞻一世, 耆宿靡餘, 世道日下, 人心益陷, 如世堂者, 得行胸臆於今日, 奮其懟筆, 誣飾粧撰, 以售其平生憾恨媢嫉之心。 臣等按其所謂碑文, 有以爲宋某侮老成之人, 有不祥之實, 有不祥之報, 銘曰: "行僞順非, 世有聞人。 鵂鳳殊性, 載怒載嗔。 不善者惡, 君子何病?" 噫嘻! 此何言也? 時烈之風景奭, 遵朱子之遺旨, 明《春秋》之大義, 則《商書》所謂侮老成, 《孟子》所謂不祥, 果可擬議於此, 而若以賢人、君子之不幸罹禍, 諉以不祥之報, 則朱子被僞學之目, 亦由譏覿而然耶? 孔子誅亂政大夫少正卯, 數其罪曰: "言僞而辨, 順非而澤。" 世堂所引, 實出於此。 旣以時烈爲僞爲非, 則必如景奭然後, 可以爲眞爲是耶? 醜虜之肆然屬國我也, 彼乃極意贊頌, 時烈則服膺於《春秋》, 鞠躬於孝廟, 引朱子記事之義, 存天下大防之戒, 此兩事耳。 世堂豈眞不知耶? 抑知之而故爲倒置逆施也。 噫! 叔季以來, 聖路榛蕪, 朱子之言, 獨爲迷塗之指南。 吾東方道學之嫡傳, 亶在時烈, 苟非鑴、穆之徒, 靡不尊尙, 而世堂上蔑朱子, 下辱時烈, 至於如此, 豈非所謂侮聖醜正者哉? 寸雲至微, 而或至於障日; 涓流至細, 而或至於滔天。 是以, 君子必防其漸而杜其源。 夫朱子之道, 長夜之日月也, 時烈之賢, 橫流之砥柱也, 而世堂之所干犯, 又非寸雲涓流之微且細也。 若使世堂, 或逭懲討之典, 益肆誣悖之言, 則臣恐昏蝕之災, 懷襄之禍, 終至於障日滔天, 而防漸杜源之道, 亦無所施, 可不懼哉! 況世堂, 誤辱恩遇, 名位崇隆, 其門徒多搢紳子弟, 尤不可使之相率效學, 慢侮朱子。 至於相臣墓道之文, 事體亦重, 將刻之金石, 傳之永久, 而其所誣悖至此, 如使後之小人, 藉世堂以爲口實, 則其禍不可說。 昔李枝茂進論學冊子, 孝廟卽授時烈曰: "此說得無悖於程、朱否?" 時烈曰: "朱子之後, 義理大明。 後此而有著述, 皆剩語, 又或違於朱子則異說也。" 孝廟善之。 聖祖之尊先儒斥異說, 而以時烈之言, 爲重者旣如彼。 頃年朴泰淳之刊行逆筠詩卷, 以非李珥詩爲珥詩者, 以實其誣, 聖明赫然命毁其板罪其人。 聖明之追尙先賢, 申其誣枉者如此。 今於玆事, 所以衛聖道辨奸誣之責, 在殿下者, 豈不益重且大乎? 伏願亟命收入世堂所爲《四書註說》、李景奭碑文, 投之水火, 絶其根本, 世堂之罪, 付之司敗, 使一世曉然知朱子之言, 不可毁, 宋時烈之賢, 不可誣, 侮聖醜正之罪, 不可不懲。 學術定于一, 士趣歸于正, 以免世道無窮之禍。
答曰: "朴世堂之侮聖醜正, 一至於此, 則斯文所關, 決難置之。 令該曹稟處。" 禮曹覆啓: "朴世堂所著註說及相臣碑文, 使世堂及李景奭後孫呈納, 果如儒疏所陳, 則依疏辭投之水火, 命呈納後, 更稟處之。" 景奭孫眞養, 不肯納碑文, 卽被逮後乃呈納。 禮曹取註說及碑文, 以館學疏所條列憑考, 惟《大學》誠意一款差爽, 碑銘行僞順非四字訛誤, 有曰恣僞肆誕。 其餘侮聖醜正之語, 率皆與儒疏相合。 遂付籤入啓, 以備睿覽, 仍啓曰: "冊子所錄, 又多創立新說, 與本旨相背。 其於《中庸》, 直爲變易章句, 尤無忌憚, 宜明辨而嚴斥之, 令儒臣, 逐條辨破。 相臣碑文, 雖與經註有間, 其所爲言, 誣悖至此, 亦不可任其留傳。 待儒臣辨破後, 碑文、冊子, 一時依前所稟處置, 懲討一款, 非臣曹所管, 惟上裁。" 上判曰: "日昨呈納後更稟之敎, 非不信館疏也, 其在詳審處分之道, 自不得不如此矣。 今觀朴世堂所撰《四書註說》, 其凌蔑朱子, 背道害理, 固非一二, 而至於《中庸》, 其所以變易章句, 恣意詆毁者, 有不忍正視, 而末乃曰, ‘出於不得已, 非樂爲言之’, 無倫至此, 而更無餘地也。 噫! 《春秋》經夏五, 胡氏之傳曰: ‘世或以私意, 改易古書者有矣, 盍亦視此爲鑑可也。’ 此其義理豈不明白正當乎? 噫! 繼往開來之功, 孰有大於朱子, 而世堂何敢侮聖, 若是其無忌憚耶? 至若先正臣宋時烈, 以累朝禮遇之大老, 寡昧之平日尊信, 爲如何, 而敢於相臣墓道之文, 直加誣悖之言, 尤可痛心。 不可不明辨嚴斥, 以杜無窮之患。 朴世堂爲先削奪官爵, 門外黜送, 仍令儒臣, 逐段辨破後, 碑文、冊子, 一時投火。" 世堂毁經之說, 久行於世, 而無有見其全篇者, 及景奭碑文出, 士林益駭憤, 遂聲罪請討。 其言義嚴理正, 上卽賜嘉納, 痛闢詖淫之說, 士論莫不爲快焉。 先是, 處士金昌翕, 抵書于朴世堂門人, 論斥世堂曰:
近聞西溪, 【世堂自號。】 以魯之聞人, 比尤翁。 【宋時烈號尤庵。】 夫尤翁之得罪西溪, 未知可數爲幾, 而竊謂有一罪難赦。 夫朱子之道, 未必盡是, 朱子之言, 未必盡當, 而隨時軒輊, 亦是衰末事宜, 乃尤翁則專昧此道, 一意尊信, 捨命衛護。 尊閣其言, 則如尸祝之奉宗祏, 見其無禮, 則如鷹隼之逐鳥雀, 其終始力戰。 公議屹(我)〔若〕 砥柱, 蓋欲回狂瀾而東之, 以接乎閩中正源, 而黑水 【指尹鑴。】 旣西, 懷襄乎尼山 【指尹拯。】 , 灌注乎西溪, 則流以派別, 方以類聚, 無怪乎向背如此也。 蓋朱子之道, 爲尤翁平生所執守者, 大綱有四: 曰距詖淫, 以承三聖也; 曰崇節義, 以尊東周也; 曰嚴懲討, 以扶倫紀也。 曰惡鄕愿, 以反正經也。 四義之行, 建天地而懸日星, 知我罪我, 其惟在此。 若西溪怨怒所在, 則豈不以其務勝護前之甚, 欲突過朱子上頭, 而遂惡其最所信奉者乎? 於是, 一反其所爲, 惡其距詖淫也, 則不憚以身爲詭經破義之事, 惡其崇節義也, 則灑濯其腥膻汚衊之跡, 惡其嚴懲討也, 則扶植其護逆自全之徒, 惡其惡鄕愿也, 則尊奉其同流合汚之流。 凡世之有可慙之德, 難洗之累, 古所謂孝子慈孫, 亦不能改者, 莫不匍匐而歸命, 願假其垂絶之懟筆, 昜鈇鉞爲華衮, 點銅鐵爲金銀, 紛然玉帛之趨, 鬱爲淵藪之萃。 軒相 【李景奭號白軒。】 家事, 亦其一也。 若夫尤翁之所以處軒相者, 則自有說話。 論其氣節之疲軟, 則極力揄揚於三田頌功之文, 論其意見之汚下, 則强生崖異於神德祔廟之議。 又以其無剌無擧, 依俙有似乎鄕愿規模, 故攻之尤力, 不敢假以辭色, 此豈尤翁之私意哉? 朱子於呂正獻父子崇佛事, 大發駭歎而曰: "若以前輩之故而不敢議其失, 則是孔子不當議藏文仲之不仁不智也。" 此等說話, 尤翁蓋有所受焉耳。 尤翁只是一箇尤翁, 自本至末, 其爲金爲鐵, 自有定價, 而不可易。 道有屈伸, 時有汚隆, 而向背扶擊之際, 紛紛乎改頭換面者, 不知有多少公伯寮也, 昧者旁觀, 或疑夫於德有貶, 而殊不知世人無常, 而徐公有常也。 《傳》曰: "不知其人, 視其友。" 我孝廟濬哲文明, 萬物攸覩, 而於尤翁, 不敢臣焉, 而處以師友間曰: "爾惟我甘盤, 爾惟我孔明。 以沙溪 【金長生號】 之溥博淵懿曁愼齋 【金集 愼獨齋。】 之精明端確, 而皆許以操戈入室, 吾道有託; 以金聲玉色之春老, 【宋浚吉號同春堂。】 歸泰山喬岳之巍稱。 其在朝廷, 忠淸如沂川 洪公, 【命夏。】 每出入陳告曰: "宋某豈有不可用之言?" 沈深如陽坡 鄭公 【太和。】 , 臭味不同, 而嘗景服曰: "宋某, 成道人也。" 尤翁一時得譽於上下, 如是煒燁。 若其齊明盛服, 雍容進退於兵壑雲霄之間, 則四維以之恢張, 百僚有所矜憚。 闒茸者斂意躁競, 精白者益思砥勵。 比之山岳凝峙, 萬目聳瞻; 獅子奮迅, 百獸腦裂。 當時西溪, 亦嘗比數於乘雁之列, 而未聞有不可之言。 豈亦心懷不可, 而包蓄未厚, 逡巡有待夫老成旣盡之日耶? 中年以後, 一言一行, 皆可夷考。 所坐非他, 依然在崇節義、距詖淫、嚴懲討、惡鄕愿之論, 執之太確, 無所撓奪。 又不能周旋人情, 賣文諛墓, 以致群憾蝟起, 拳踢紛然。 於是王伯竝用之說, 猛起於尼山, 而行僞順非之詆, 奮然於西溪。 信乎伺時闖發, 果自有日, 蜿蜿百怪, 物態可見, 而尤翁則只是一箇尤翁而已。
又曰:
天下不可侮者, 仲尼; 天下不可侵者, 朱子。 金河西 麟厚有詩曰: "宇宙中間有二人, 仲尼元氣紫陽眞。" 確哉言乎! 自生民以來, 固未有如孔子者, 而不有朱子發明其極致, 則孔子之所以爲孔子, 孰知其眞箇明快, 而亦何以啓佑後人, 不迷其門路乎? 朱子嘗自謂: "義理無窮, 人見有限, 虛心平氣, 闕疑而求之, 以爲玩索之要。 剝一膜, 又一膜隔焉; 解一節, 又一節遇焉。 沈潛浸灌, 醲郁咀嚼, 融而通之, 會其有極。" 於是作爲訓義, 正其句讀, 莫不從其細細斟秤上出來, 尋常一字之訓, 或千百改藁者有之。 夫然後義精理確, 顚撲不破。 雖孔、曾復起, 思、孟有靈, 不得不點頭。 要不可以粗淺拘滯之見, 容易立說破也。 未知西溪力量比此如何, 而乃欲一朝突過之乎? 程子曰: "世間惟心不公底人, 不會讀書。" 左右亦嘗聞素沙碑石之辨乎? 其南北之決, 卽在於走馬一往, 而旣見輸矣, 猶有餘言曰: "昨在川北之石, 何以飛渡川南也?" 甚矣, 其順非之堅也! 【世堂嘗與其兄, 以碑石南北爭辨, 同往見之, 有此云云。 其執物多如此。】 彼顯然眼中物, 猶不難以白爲黑。 況天下義理綜錯, 有千差萬別? 聖賢言語, 一出一入於詳略顯微之際者, 抑何由會其通而折其衷乎? 意者虛明寬廣, 旣非其心胸, 膠固執拗, 只好做扭捏伎倆, 時於儱侗黑影間, 粗見一線可通, 如蔀窺斗, 如盲摸象, 則得之若驚, 以爲奇特。 意前人之所未到, 而其實則前人初藁時, 所委棄久矣, 芭蘺間物也。 其必欲私自秘藏, 以爲千金之享者, 何哉? 始焉自托於千慮一得, 以爲謙, 中焉混歸諸互有得失, 以爲敵, 終則曰彼無一得之幸, 而我有千慮之全。 其誑惑人也, 漸次以入, 亦復如是。 始於膚淺末學, 而終至於稍有識見者, 亦不知所擇而坐爲所誤耳。 嗚呼! 世禍斬伐之餘, 銷鑠陵夷, 士風日渝, 駸駸乎人懲黨錮之火色, 家諱己卯之道學。 理欲王伯之辨, 則講論日短, 寒煖飢飽之幾, 則趨避益明。 向所謂建天地懸日星者, 無賴乎陳編之見。 在宇宙間眞正一脈, 不絶如線, 綿綿延延, 寖以微絶。 於是時也, 而倡邪說於其間, 驅凡民俊秀者, 而相與向僻靜處附耳, 日夜以洗瘢, 索出朱子之垢爲事, 嗚呼! 其亦不仁甚矣。
時, 世堂之書, 稍稍傳說, 或以爲不足攻, 或以爲不必攻, 獨昌翕, 慨然以世道爲憂, 與人書, 發揮先正之志業, 廓闢世堂之詖說, 其言痛快, 鼓動士林。 俄而太學疏果上, 世堂之徒, 怨昌翕益深。
- 【태백산사고본】 44책 38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18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사법-탄핵(彈劾)
- [註 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