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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38권, 숙종 29년 4월 5일 경진 1번째기사 1703년 청 강희(康熙) 42년

행 사직 이인엽이 북한 산성의 역사를 신중히 해야 한다는 뜻으로 상소하다

행 사직(行司直) 이인엽(李寅燁)이 상소하기를,

"지금 성(城)을 만들기에 적합한 땅을 의논하는 자들은 반드시 탕춘 대성(蕩春臺城)과 홍복 산성(洪福山城)이라고 말하는데, 형세의 험준함이 어느 곳이 낫고 어느 곳이 못한지를 피차 비교해 헤아리지 않고서, 곧 한 마디 말하는 사이에 갑자기 막대한 일을 결정하였습니다. 자량(資糧)과 기계(器械) 같은 것은 원근을 물론하고 오히려 인력으로 운반할 수 있지만, 성자(城子)에 이르러서는 한 번 쌓은 뒤에 뜻에 따라 옮길 수 있겠습니까? 성을 지키는데 쓰는 것은 샘물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탕춘대성(蕩春臺城) 앞의 한 굽이의 물은 여름에는 가물고 겨울에는 마르며, 땅이 모두 모래와 돌이므로 비록 흙을 쌓아서 물을 가둔다 하더라도 쉽사리 이루어지지 못할 듯합니다. 이같은 형세를 마땅히 먼저 살펴야 할 것이니, 가볍게 큰 역사를 일으키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입니다. 약조(約條)의 말은 여러 신하들이 이미 여러 번 진달하였는데, 지금 큰 성을 서울 가까운 땅에 새로 쌓으면 성벽이 가로세로 뻗쳐서 길에 다니는 사람이 다 보게 될 것인데, 저들이 만약 물으면 무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반드시 그렇다고 감히 말할 수 없으나, 또한 그럴 염려가 전연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나라를 꾀하는 방법은 만전(萬全)을 기하기에 힘써야 하는데, 어찌 혹시라도 무사하기를 바라겠습니까? 북성(北城)의 동쪽 기슭은 바로 서울 내룡(來龍)의 산맥인데 술가(術家)의 말은 비록 깊이 믿을 것이 못되지만, 성조(聖祖)160) 께서 처음으로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설치하여 3백년 동안 아끼고 보호하던 땅을 마땅히 쉽사리 파서 깨뜨릴 수는 없습니다. 성터를 닦고 쌓을 즈음에 산을 파고 돌을 깨뜨려서 지맥(地脈)을 파손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만약 뒷날에 작은 불길함이 있으면 근거없는 의론이 떼 지어 일어나서 반드시 허물을 이에 돌릴 것인데, 장차 무슨 말로 그 의혹을 풀겠습니까? 아! 해마다 거듭 흉년이 들어 백성이 곤궁하고 재물이 고갈되었는데, 가령 성을 쌓아서 백 가지 이익이 있고 한 가지 해(害)도 없다고 하더라도 결코 시의(時宜)에 아주 어긋남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나라에 삼공(三空)161) 이 있어 공사(公私)가 텅 비었으니, 그 형세가 또 고을의 흠부(欠賦)162) 를 독촉해 받고 시호(市戶)의 포채(逋債)163) 를 가혹하게 징수하지 않을 수 없는데, 신은 이 일은 장차 환난(患難)을 대비하려는 것이지만 난(亂)만 불러 일으킬까 싶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굶주린 백성이 길에 가득하여 구제하는 일이 날로 급한데도, 너무 오래 지연시켜 비난하는 의논이 마구 일어납니다. 대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하여야만 나라가 편안하므로, 옛부터 성철(聖哲)의 교훈은 반드시 백성을 구호하는 일로써 근본을 삼았고, 성지(城池)를 먼저하고 인민을 뒤에 하는 일로써 국가의 깊고 먼 장래의 생각으로 삼았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선왕(先王)의 적자(赤子)가 불행히 흉년의 재앙을 만나서 오직 부모164) 가 가까이 있다는 마음으로써 의지하여 먹여 주기를 바라는데, 구휼을 맡은 신하가 이에 ‘둘째 일’이라고 말하니, 저 소민(小民)들이 이 말을 듣는다면 실망하여 마음이 떠나는 일이 없겠습니까? 비록 높은 성벽이 솟아 있더라도 백성이 진심으로 붙좇지 않는다면, 누구와 더불어 지키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마땅히 진정(賑政)165) 에 전심하여 때에 맞추어 구호하면, 바야흐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할 수 있을까 합니다. 대저 나라를 튼튼하게 하는 방법은 산과 계곡이 험준한 데 있다고 하더라도, 오기(吳起)166) 가 이른바, ‘군주의 덕에 있고, 지세의 험준함에 있지 않다.’라는 것이 진실로 격언(格言)입니다. 오직 성명께서 실덕(實德)으로써 실정(實政)을 행하여, 서민으로 하여금 모두 윗사람을 친하고 장관(長官)을 위해서 죽는 의(義)를 알게 하면, 모든 사람의 마음이 성(城)을 이루어 반석처럼 안전할 것인데, 어찌 ‘어디로 가서 의탁하겠느냐?’ 하는 한탄이 있겠습니까? 신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감히 저지(沮止)시키기 위한 의론만이 아닙니다. 일찍이 생각하건대, 천하의 일은 스스로 근본과 말단(末端)이 있는데, 지금 관방(關防)과 군정(軍政)이 허술하여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으니, 먼저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신칙하여 수륙(水陸)의 형편을 살펴보고, 각각 믿을 만한 곳을 정하여 많은 병력을 나누어 두고 지방 방비의 형세를 증가시킨다면, 비록 외구(外寇)가 있을지라도 국도(國都)에 접근하는 근심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신이 이른바, 마땅히 먼저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이를 생각하지 않고서 한 성(城)으로 거두어 들어가는 계책만 힘쓰는데, 진실로 변경 밖에서 적을 방어하지 못하여 안팎 산하(山河)를 모두 적에게 주고 한갓 고단한 군사를 데리고 홀로 외로운 성을 지키면, 비록 반수(般倕)167) 로 하여금 성을 쌓게 하고, 묵적(墨翟)168) 으로 하여금 성을 지키게 할지라도 나라가 위망(危亡)하는 데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듣건대, 홍복 산성(洪福山城)은 형세가 북성에 견줄 수 없다 하지만, 이미 육로(陸路)에 연하였고 또 남한(南漢)과 기각(掎角)의 형세가 있으니, 마땅히 양주(楊州)로 하여금 부치(府治)169) 를 홍복 산성 안으로 옮기게 하여 세월을 끌면서 차차로 쌓게 할 것입니다. 만일 해방(海防)을 근심한다면 강화(江華)·교동(喬桐)과 영종도(永宗島)·대부도(大阜島) 등 섬에 전함(戰艦)을 더 두고 서로 연락하여 각각 제어하게 하고, 수원(水原) 등의 고을을 좌보(左輔)로 삼고 장단(長湍) 등의 고을을 우보(右輔)로 삼으며, 안흥(安興) 등의 진(鎭)은 남해(南海)를 방비하고 소강(所江) 등의 진은 서해(西海)를 방비하게 하여, 섞여서 서로 바라보고 서로 성원(聲援)하면 적이 감히 바로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이를 미루어 다른 도(道)의 육로에도 모두 그렇게 하지 아니함이 없으면, 울타리가 중복되고 산하(山河)의 지세(地勢)가 견고(堅固)하여, 비록 급변을 당하더라도 거의 믿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고(故) 상신(相臣) 유성룡(柳成龍)이 임진년 초기에 진관(鎭管)의 제도를 회복하기를 청하였는데, 진관은 조종조(祖宗朝)에서 설치한 바로 군정(軍政)의 대강령[大綱]입니다. 한가할 때에 옛 제도를 수복(修復)하여 군사를 훈련하고 군량을 저축하며 험한 요새를 골라 지키면, 이와 같은 일들은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물을 허비하는 데 비할 바가 아니며, 한 번 규제(規制)를 정하면 저절로 점차 성취될 수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묘당(廟堂)에 내려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신(大臣)의 차자(箚子)에 대한 비답(批答)에 이미 내 뜻을 밝혔다. 이른바, 내룡(來龍)을 파괴한다는 말은 해감(該監)으로 하여금 널리 물어서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뒤에 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 김창집(金昌集)이 여러 지사(地師)를 불러 모아서, 이인엽(李寅燁)의 진달한 바를 가지고 각각 의논을 올리게 하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교리(校理) 권상유(權尙游)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감여가(堪輿家)170) 는 허황하여 본래 믿을 것이 못되며 축성(築城)은 나라의 큰 일인데, 한두 지사(地師)의 말로써 결정하려고 하면 사체(事體)에 어긋날까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나라를 정하실 때에도 지사에게 물으셨으니 대저 ‘밭을 가는 일은 마땅히 종[奴]에게 물어야 한다.’는 까닭이다. 한번 논난(論難)하는 것이 무엇이 방해되겠는가?"

하였다. 두서너 달이 지나서 여러 지사(地師)들이 비로소 모여 의논하였는데, 모두 말하기를, ‘내룡(來龍)의 맥을 파서 깨뜨리는 것은 해가 있다.’고 하였으나, 유독 동지(同知) 신경윤(愼景尹)은 해가 없다고 하였는데, 마침 성역(城役)이 중지되었다. 이인엽은 평소에 묘당(廟堂)의 계략을 스스로 맡아서 경기(經紀)171) 함이 많았으나 빈말 뿐이고 실시됨이 없었으며, 그 상소에 조목별로 진달함이 자못 많았는데도 임금이 받아 들이지 않았으며, 품처(稟處)를 명한 것은 다만 내룡을 파서 깨뜨리는 일 뿐이어서, 식자(識者)들이 이를 애석히 여겼다. 그러나 그가 진휼(賑恤)을 논할 일은 같이 일하는 사람을 침해하고 자기는 관여한 바가 없는 것처럼 한 것이 있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 마음의 자취를 의심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4책 38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15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 / 구휼(救恤)

  • [註 160]
    성조(聖祖) : 태조.
  • [註 161]
    삼공(三空) : 조정(朝廷)이 텅 비고, 창고(倉庫)가 텅 비고, 전야(田野)가 텅 빈 것을 이른 말.
  • [註 162]
    흠부(欠賦) : 세액 미납.
  • [註 163]
    포채(逋債) : 공채 미수.
  • [註 164]
    부모 : 임금.
  • [註 165]
    진정(賑政) : 빈민 구제.
  • [註 166]
    오기(吳起) : 전국 시대의 명장.
  • [註 167]
    반수(般倕) : 고대의 정교한 기술자.
  • [註 168]
    묵적(墨翟) : 전국 시대의 사상가.
  • [註 169]
    부치(府治) : 부의 소재지.
  • [註 170]
    감여가(堪輿家) : 지사(地師).
  • [註 171]
    경기(經紀) : 경륜하여 처리함.

○庚辰/行司直李寅燁上疏曰:

今夫宜城之地, 議者必曰蕩春洪福, 形便險阻, 孰勝孰否, 今不較量彼此, 乃於片言之頃, 遽決莫大之擧。 如資糧、器械, 無論遠近, 猶可以人力搬運, 至於城子一築之後, 其可隨意推移乎? 城守之用, 莫過於水泉, 而蕩春臺前一曲之水, 夏旱冬涸, 地皆沙石, 雖欲築土儲水, 恐未易辦。 此等形勢, 宜先審視, 而徑擧大役, 必有後悔。 約條之說, 諸臣已屢陳, 而今創大城於京都密邇之地, 雉堞縱橫, 行路之所共見。 彼如問之, 可得無事而已乎? 此不敢謂必然, 亦不可謂全無此慮。 謀國之道, 務出萬全, 何可冀無事於或然乎? 北城東麓, 卽京都來龍之脈也, 術家之說, 雖不足深信, 而聖祖肇創, 建邦設都, 三百年慳護之地。 不宜容易鑿破, 而城基開築之際, 不得不鑿山破石, 侵傷地脈。 倘於異日, 有些休咎, 則浮議朋興, 必歸咎於此, 將何辭而解此惑乎? 噫! 連歲荐飢, 民窮財竭, 就令築城, 有百利無一害, 決知其大咈於時宜也。 且國有三空, 公私赤立, 其勢又不得不誅求縣邑之欠賦, 刻徵市戶之逋債。 臣恐此擧, 將以備患, 而適所以召亂也。 見方飢民滿路, 賑事日急, 而遷延太久, 訾議橫生。 夫民惟邦本, 本固邦寧。 自古聖哲之訓, 必以恤民爲本, 未聞以先城池後民人, 爲國家深長慮者。 先王赤子, 不幸而罹災凶, 惟以父母之孔邇, 依歸仰哺, 而主賑之臣, 乃以爲第二件事, 彼小民聞之, 得無絶望離心乎? 縱令崇墉屹屹, 民不歸心, 誰與守之? 臣謂宜專心於賑政, 及時而救之, 庶收方散之民情也。 大抵固國之道, 雖在山谿之險, 而吳起所謂在德不在險者, 實格言也。 惟在聖明, 以實德行實政, 使民庶皆知有親上死長之義, 則衆心成城, 安如磐石, 夫焉有何歸之歎乎? 臣之爲此說者, 亦非敢徒爲沮止之論也。 嘗以爲天下事, 自有本末, 今關防、軍政之踈虞, 無一可恃, 先飭道臣、帥臣, 審視水陸形便, 各定信地, 分置重兵, 以增藩垣之勢, 則雖有外寇, 亦不至有傅國都之患, 此臣所謂當先者也。 不先慮此, 而規規於斂入一城之計, 誠不能禦之於邊外, 表裏山河, 盡以與敵, 而徒擁單師, 獨守孤城, 則雖使般倕築之, 墨翟守之, 顧何補於危亡乎? 蓋聞洪福形便, 不可與北城比, 旣連陸路, 又與南漢爲掎角之勢, 宜令楊州, 移府治於洪福之內, 持以歲月, 旋旋營築。 如以海防爲憂, 則江華喬桐永宗大阜等島, 增置戰艦, 羅絡相連, 使各控制, 水原等邑爲左輔, 長湍等邑爲右輔, 安興等鎭備禦南海, 所江等鎭備禦西海, 參錯相望, 互爲聲援, 則敵不敢徑突。 推之他道陸路, 莫不皆然, 藩籬重複, 襟抱固密, 雖當緩急, 庶有所恃矣。 故相臣柳成龍, 壬辰初請復鎭管之制。 鎭管者, 祖宗朝所設置, 而軍政之大綱也。 及時閑暇, 修復舊制, 鍊兵峙糧, 擇守險要, 此等事件, 非如勞民費財之比, 一定規制, 自可漸就。 伏願下廟堂稟處焉。

答曰: "大臣箚批, 已諭予意, 而所謂來龍之說, 令該監, 廣詢稟處。" 後, 觀象監提調金昌集, 請招集諸地師, 以寅燁所陳, 各令獻議, 許之。 校理權尙游白上曰: "堪輿家茫昧, 本不足信, 築城, 國之大事, 而欲決於一二地師之口, 恐乖事體。" 上曰: "太祖大王定鼎時, 亦問于地師, 蓋以耕當問奴也。 一番論難, 庸何妨也?" 居數月, 諸地師始會議, 皆以爲, 鑿破來脈, 有害, 獨同知愼景尹以爲無害, 會城役中寢。 寅燁平居, 以廟略自任, 多所經紀, 而空言無施, 其疏條陳頗多, 而上不賜採納, 命稟處者, 惟來龍事而已, 識者惜之。 然其論賑事, 侵軋同事之人, 有若已無所與者然, 人皆疑其心迹。


  • 【태백산사고본】 44책 38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15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 / 구휼(救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