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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38권, 숙종 29년 3월 15일 경신 1번째기사 1703년 청 강희(康熙) 42년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여, 북한산성의 축성하는 일을 논의하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견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김구(金構)가 아뢰기를,

"나라의 보장(保障)은 다만 강도(江都)와 남한(南漢)이 있을 뿐인데, 전일에 성상의 하교에 또한 이르기를, ‘남한은 외롭게 떨어져 있고 강도는 조금 멀며, 또 해구(海寇)를 피하는 데에 적합하지 못하다.’라고 하셨으나, 신의 염려하는 바는 다만 이것만이 아닙니다. 양도(兩都)가 비록 믿을 만하더라도 군기(軍器)와 군량[糧餉]을 서울에 저장하였으니, 만일 피란하는 일이 있으면 다만 도적에게 이용되는 자료가 될 뿐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만약 급한 때에 임하여 파천(播遷)할 계책을 하려고 한다면, 미곡은 날마다 먹는 식량이므로 비록 폐기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병기(兵器)에 이르러서는 절대로 만들지 말게 하여 한갓 재력만 허비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득책(得策)이 될 것입니다. 예전에 완풍 부원군(完豐府院君) 이서(李曙)가 남한산성을 쌓을 때에 조정의 의논이 갈래가 많았는데, 이서가 홀로 자신이 담당하여 마침내 그 역사(役事)를 완성하여 병자년104) ·정축년105) 난리에 힘을 크게 얻었습니다. 또 듣건대, 이서가 공조 판서(工曹判書)가 되어 대선(大船) 10여 척을 감독해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의혹스레 여기므로 함릉 부원군(咸陵府院君) 이해(李澥)가 그 만든 까닭을 물으니, 이서가 말하기를, ‘만일 사변이 있어 장차 강도(江都)로 들어가게 되면, 건너갈 배를 만들어 기다리게 하려고 한다.’라고 하였으니, 선배(先輩)가 나라를 위하는 깊은 생각이 대개 이와 같았습니다. 방금 국가가 안일에 빠져서 구차하게 무사한 것만 바라고 있는데, 갑자기 사변이 있으면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는데도, 한 사람도 깊이 근심하고 먼 앞일을 생각하는 이가 없으니 진실로 한심스럽습니다. 신이 일찍이 북한산성(北漢山城)이 편리하다고 여겨 다시 가서 거듭 살펴보니, 천지 만엽(千枝萬葉)이 둘러 쌓여서 진실로 아주 안전하고 함락되지 아니할 형세가 있었으며, 또 깍아지른 듯한 곳이 많아서 성을 쌓을 즈음에 공역(功役)이 크게 줄어들고, 위급할 때에 힘을 얻음이 이곳보다 더 낳은 곳이 없었으니, 큰 계책을 빨리 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도성(都城)을 지켜야만 된다.’고 하지만 군부(君父)를 받들고 외로운 성을 지키는 것은 진실로 위태로운 일이니, 먼저 북한산성을 쌓아서 도성과 안팎으로 서로 의지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대가(大駕)를 따르는 군병(軍兵)은 북한산성을 지키고, 도성 백성과 다른 군사는 도성을 지키면, 설령 도성이 함락된다 하더라도 족히 급함에 임하여 물러가서 지킬수 있습니다."

하니, 우의정(右議政) 신완(申琓)은 말하기를,

"이 일을 발단(發端)한 자는 신(臣)인데 조정 의논이 서로 달라서 아직 결정하지 못하였으니, 신은 저으기 개탄하고 있습니다. 국가가 승평(昇平)한 지 70년에 재이(災異)가 거듭 이르고, 세도(世道)가 더욱 떨어져서 어느 때에 어떤 화변(禍變)이 있을지 알지 못하니, 사전(事前)에 준비하는 계책을 어찌 늦출 수 있겠습니까? 전일에 소란[騷屑]이 있자, 도성 백성이 모두 북한산성을 빨리 쌓기를 원하여 재물을 내어 부역(赴役)하려고까지 하였으니, 모든 일이 진실로 나라에 이(利)로우면 백성이 비록 하고자 하지 않더라도 행할 수가 있습니다. 하물며 지금은 인정(人情)을 크게 볼 수 있으니, 지리(地利)와 인화(人和)란 이를 이르는 말입니다. 혹은 말하기를, ‘흉년에 백성을 부역시킬 수 없다.’고 하지만 이것도 그렇지 아니합니다. 기민(飢民) 가운데 장정(壯丁)을 거두어 모아서 양식을 주어 부역하게 하면, 무슨 의심스러움이 있겠습니까? 이기하(李基夏)가 전번에 도성을 지키기를 청하였는데, 신도 반드시 도성을 버리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북한산성은 지세가 높아서 도성 안을 눌러 내려다 보고 있으니, 사람에 비유하면 목을 조르고 등을 누르는 형세입니다. 만약 도성을 수축하여 북한산성을 자성(子城)으로 삼고 힘을 합하여 같이 지킨다면 진실로 좋을 것이나, 북한산성을 버린다면 도성이 아무리 튼튼하다 하더라도 결코 홀로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형편을 알지 못하고 다만 말하기를, ‘도성을 지켜야만 된다.’고 하니, 진실로 웃을 만한 일입니다. 대저 일을 행할 시초에는 여러 의논이 뜰에 가득한 것인데, 오직 위에 있는 사람이 때를 헤아리고 힘을 헤아려서 단연코 시행할 뿐입니다."

하였다. 김구(金構)는 말하기를,

"신의 생각에는, 쌀 1만 석·면포(綿布) 1천 동(同)과 역군(役軍) 1만여 명으로 두어 달 역사(役事)를 하면 완전히 쌓을 수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만약 통영 순검(統營巡檢)의 쌀과 베를 가져와 쓴다면, 재물이 없음을 근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혹시 파월(播越)106) 하는 일이 있으면, 비록 쌀과 베가 산처럼 쌓였다 하더라도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이는 대사(臺榭)107) 를 영작(營作)한 것에 비할 것이 아니고, 장차 종사(宗社)가 의탁할 곳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니, 재력(財力)을 아낄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 형혹성(熒惑星)이 남두성(南斗星)에 들어갔는데, 선조(宣祖)경인년108)신묘년109) 무렵에 이런 천변(天變)이 있자, 충신 조헌(趙憲)이 천문(天文)에 정통(精通)하여 남에게 보낸 글과 조정에 올린 상소에, ‘어찌 이런 천변이 있는데 병란(兵亂)이 일어나지 않겠느냐?’고 한 말이 있었는데, 얼마되지 아니하여 임진(壬辰)·계사(癸巳)의 병화(兵禍)가 있었습니다. 앞의 일이 이미 징험되었으니, 일찍 계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승지(承旨) 홍수주(洪受疇)는 말하기를,

"대개 민정(民情)을 들어 보건대, 모두 말하기를, ‘진실로 이 성(城)에 들어가기만 하면 난리에 이르러서 처자(妻子)를 보호할 수 있다.’고 하며, 모두 같은 말로 성을 쌓기를 원하는데, 이제 만약 중지하면 반드시 크게 실망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신완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경(卿)이 올린 책을 내가 이미 자세히 보았다. 대저 조용히 생각하건대, 양도(兩都)의 보장(保障)은 믿을 수 없음이 저와 같고, 도성(都城)은 넓고 커서 또한 지킬 수 없으니 형편으로 말하자면 북한산성이 가장 좋다. 인조(仁祖) 병인년110) 에 비로소 남한산성을 쌓았는데, 병자년 난리에 처음에는 강도(江都)로 들어가려고 하였다가 마침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으니, 그때에 만약 남한산성이 없었다면 나랏일이 어느 지경에 이르렀을지 알지 못하겠다. 생각이 이에 이르자 마음이 떨림을 깨닫지 못하겠다. 오늘날 사변의 준비를 어찌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신완이 말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진실로 그러합니다. 옛날에 유선주(劉先主)111)강릉(江陵)으로 달아날 적에 강한 도적이 뒤에서 추격하는데, 백성들이 어린애를 업고 서로 따르자 선주가 차마 버리고 가지 못하여 하루에 수십 리만 갔으니, 이는 이른바 신의(信義)가 천하에 드러난 것입니다. 이제 도성 백성이 우러러 받드는 바는 오직 국가인데, 난리에 임하여 창졸간에 버리기를 잊은 것처럼 한다면, 왕자(王者)가 백성과 더불어 어려움을 함께 하는 뜻이 아니니, 백성이 어찌 윗사람을 친하고 장관(長官)을 위해 죽을 마음이 있겠습니까? 만약 이 성을 쌓아서 군기(軍器)를 단련하고 식량을 저장하여 군신(君臣) 상하가 한 마음으로 굳게 지키면, 종사(宗社)가 파월(播越)하는 욕됨이 없고 도성 백성이 흩어질 염려가 없으며, 온 성(城)의 안팎이 문득 부자(父子)와 같아서 병졸(兵卒)은 죽음으로써 싸워서, 마침내 천험(天險)의 요새지를 지키게 될 것이니, 어찌 만전의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형조 판서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도성을 지키기를 청하였는데, 성상께서 넓고 커서 지키기 어렵다는 것으로 하교하셨으니, 신은 진실로 병사(兵事)에 어두워서 끝내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일 도성을 지킬 수 있다고 하면 또한 마땅히 더 쌓아야 할 것인데, 공력(功力)이 새로 쌓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김구가 말하기를,

"도성은 넘보는 산[窺山]이 많이 있고, 성첩(城堞)이 낮고 약하며 지세가 낮고 평탄하므로, 비록 더 쌓는다 하더라도 역시 지킬 수 없습니다."

하자, 민진후가 말하기를,

"신도 도성(都城)을 더 쌓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산성(山城) 중에 넘보는 산이 없는 것은 아주 적으니, 비록 넘보는 산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방어할 대책이 없겠습니까? 그렇지만 신은 감히 도성의 일은 다시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김구의 말에는 서로 힐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만약 북성을 쌓은 뒤에 도성을 포기하여 청야(淸野)의 법112) 과 같이 한다면 혹시 될 수가 있겠지만, ‘우선 민병(民兵)으로 성첩을 지키다가 급할 때에 다다라서 물러가 지킨다.’고 하는 것은,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황급히 옮겨 들어갈 즈음에 백성이 장차 짓밟혀서 모두 죽을 것이며, 북성의 사민(士民)의 마음도 또한 반드시 놀라 소란할 것인데 어찌 능히 성을 지키겠습니까? 이 일은 거의 아이의 장난과 같으므로 결코 옳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전일 성상의 하교에, ‘책언(嘖言)113) 을 근심하셨으니, 다시 마땅히 선후책(善後策)을 깊이 생각하여 역사를 시작하더라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김구가 말하기를,

"노약자와 군량[粮餉]을 먼저 옮겨 들이고, 지존(至尊)114) 을 모시어 성첩(城堞)을 파수하면, 사민(士民)의 용기나 백 배나 더할 것이니 견고하지 못함을 근심할 것이 없으며, 인하여 남은 군사로서 도성을 아울러 지키고, 설령 도성이 함락된다 하더라도 높은 데 올라가 험한 곳에 웅거하기를 고사(古史)에 이른 바와 같게 한다면, 또한 족히 스스로 튼튼할 것이며 평지에 진영(陣營)을 연한 것과는 아주 다를 것인데, 어찌하여 짓밟혀서 남는 백성이 없는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이쪽과 저쪽 두 성이 서로 순치(脣齒)115) 의 형세를 이루면, 적(賊)이 감히 침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물며 거가(車駕)가 머무는 곳에는 적(賊)이 그곳에만 마음을 써서 공격할 것이니, 반드시 북한산성을 놓아 두고 도성을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며, 비록 도성을 탈취한다 하더라도 백악(白岳)과 인왕산(仁王山) 밑은 형세가 오래 머물기는 어려우니, 공격과 수비의 형세가 서로 달라서 적의 형세 또한 피폐해질 것입니다."

하자, 민진후가 말하기를,

"하나의 도성도 오히려 넓고 크다고 하면서, 새로이 성을 쌓아서 남은 힘으로 두 성을 다 지킨다고 하는 것은, 어찌 그럴 이치가 있겠습니까? 성을 지키는 자가 처음에는 비록 금성 탕지(金城湯池)116) 로 믿을지라도, 진(陣)에 임하여 적과 대하면 오히려 두려움과 겁내는 마음이 있게 되는데, 하물며 반드시 지키지 못할 형세를 먼저 보이고서 급함에 임하여 옮겨 피하게 하면 군사의 마음이 이미 흉흉(洶洶)할 것이니, 어찌 능히 굳게 지키겠습니까? 이미 도성을 잃으면 북한산성의 사람들이 형세를 바라보고서 기운이 빠져 또한 곧 함락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진실로 사리가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므로, 어린아이도 쉽사리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일을 시작하는 데에도 오히려 아주 안전하기를 생각하는데 하물며 제왕(帝王)이겠으며, 일이 작은 것도 살피고 삼가야 할 것인데 하물며 군비(軍備)의 일이겠습니까? 다시는 위험한 일을 행하는 데 유의하지 않으시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니, 신완이 말하기를,

"북한산성은 도성 안을 눌러 내려다 보고 있어서 포(砲)와 돌이 서로 미칠 수 있으니, 우리가 북한산의 형세를 웅거하여 굽어보면서 적의 사명(死命)을 제압하면 적이 쳐다보고 공격할 수 없을 것이니, 어찌 능히 오래 머물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먼저 북한산에 웅거하면 비록 사대문(四大門)을 열어 놓을지라도 적이 감히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하였다. 어영 대장(御營大將) 윤취상(尹就商)은 말하기를,

"두 성의 형세가 내외성(內外城)과는 다름이 있으니, 가령 도성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어찌 북한산성을 보존하지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오직 수어(守禦)는 적임자를 얻는 데 있을 뿐입니다."

하고, 김구는 말하기를,

"지금 재이(災異)가 이와 같은데, 만일 병화(兵禍)가 있으면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백성을 구제하는 것은 도리어 둘째 일이니, 성을 쌓는 일을 어찌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북성의 형편은 진실로 아주 안전하므로 이때에 비록 역사(役事)를 시작하지 못하더라도, 내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먼저 여러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경리(經理)하도록 하라."

하자, 신완이 일어나 하례하기를,

"성상의 계책을 이미 굳게 정하셨으니, 진실로 종사(宗社)의 다행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수령이 자주 갈려서 영접하고 전송하는 폐단이 있는데, 고을의 탕패(蕩敗)는 진실로 이에 말미암은 것이다. 대계(臺啓)는 풍문(風聞)에서 나왔으니 비록 모두 믿을 수는 없지마는, 상하(上下)가 서로 버티면 한갓 사체(事體)만 손상시킬 뿐이어서 윤허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뜬소문으로 전하는 말은 사실과 틀리기가 쉬우며, 바꾸는 장리(長吏)117) 또한 반드시 어질지는 못할 것이다. 이 뒤로는 대각(臺閣)에서 마땅히 발론(發論)할 처음에 자세히 살필 것이다."

하니, 신완이 말하기를,

"예전에는 사실과 어긋남으로써 인피(引避)한 사례가 있었는데, 지금은 다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전일에 최진한(崔鎭漢)은 잘 다스린다는 명성(名聲)이 있었으나 탄핵을 받고 떠나가므로, 신이 잉임(仍任)을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뒤 발론한 대신(臺臣)이 오히려 끝까지 스스로 옳다 하니, 진실로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홍수주(洪受疇)는 말하기를,

"요즘의 대계(臺啓)로써 말하면 연안(延安)의 은결(隱結)과 전화(錢貨)는 거의 장오(贓汚)에 가까운데도 죄가 파직에만 그쳤으니, 비록 억울한 단서가 있더라도 어떻게 변명해 밝힐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것은 마땅히 잡아다 사실을 조사하면 죄가 있고 없음은 저절로 드러날 것입니다."

하고, 대사간(大司諫) 이건명(李健命)은 말하기를,

"대각(臺閣)의 풍문은 간혹 사실과 어긋남이 있지만, 만약 이로 인해 외축되어 탄핵하는 일이 없으면 탐관 오리(貪官汚吏)가 무엇을 징계하고 두려워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염려하심이 민폐(民弊)에 미치시니 뜻이 매우 거룩하십니다만, 만일 대계(臺啓)에 대해 문득 자세히 살피지 못한 것으로 의심하시면 대각을 가볍게 여기는 잘못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각의 논의가 어찌 반드시 모두 옳겠으며, 또한 어찌 모두 그르겠는가? 탄핵이 한 번 일어나면 반드시 벼슬이 갈리고야 말게 되니, 내가 자세히 살피도록 하려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4책 38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9면
  • 【분류】
    군사-관방(關防) / 인사-임면(任免)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註 104]
    병자년 : 1636 인조 14년.
  • [註 105]
    정축년 : 1637 인조 15년.
  • [註 106]
    파월(播越) : 임금이 파천(播遷)함.
  • [註 107]
    대사(臺榭) : 정자.
  • [註 108]
    경인년 : 1590 선조 23년.
  • [註 109]
    신묘년 : 1591 선조 24년.
  • [註 110]
    병인년 : 1626 인조 4년.
  • [註 111]
    유선주(劉先主) : 삼국 시대 촉(蜀)의 유비(劉備).
  • [註 112]
    청야(淸野)의 법 : 전시에 적의 이용을 없애기 위하여 건물이나 들에 있는 곡식 등을 없애는 것.
  • [註 113]
    책언(嘖言) : 청국의 비난.
  • [註 114]
    지존(至尊) : 임금.
  • [註 115]
    순치(脣齒) : 이해관계가 밀접함.
  • [註 116]
    금성 탕지(金城湯池) : 견고한 성지.
  • [註 117]
    장리(長吏) : 수령.

○庚申/引見大臣、備局諸宰。 吏曹判書金構曰: "國之保障, 只有江都、南漢, 而前日聖敎亦曰: ‘南漢孤絶, 江都稍遠, 且不合於避海寇。’ 臣之所慮不特此也。 兩都雖曰可恃, 軍器、糧餉, 積峙京師, 萬一有去之擧, 適足爲藉寇之資。 臣謂若欲爲臨急播遷之計, 則米穀是日用口食, 雖不可廢, 至於兵器, 絶勿造成, 毋徒費財力之爲得也。 昔完豐府院君 李曙之築南漢也, 廷議多岐, 而獨以身擔當, 卒完其役, 丙、丁之亂, 大得其力。 且聞判工曹, 督造大船十餘隻, 人皆疑惑。 咸陵府院君 李澥, 問其故, 曰: ‘脫有緩急, 將入江都, 欲造過涉船以待之。’ 先輩爲國深慮, 類如此。 方今國家恬嬉, 苟冀無事, 猝有事變, 無一可恃, 而無一人深憂遠慮者, 良可寒心。 臣嘗以北漢爲便, 復往重視, 則千枝萬葉, 盤回稠疊, 實有萬全不拔之勢。 且其巉削處居多, 營築之際, 大省功役。 緩急得力, 無踰此地, 不可不速定大計也。 議者謂都城可守, 而奉君父處孤城, 實是危事。 莫如先築北漢, 與都城表裏相依。 從駕軍兵守北城, 都民及他兵守都城, 藉令都城失守, 亦足以臨急退守矣。" 右議政申琓曰: "玆事發端者, 臣也, 朝議携貳, 尙未決定, 臣竊慨然。 國家升平七十年, 災異荐臻, 世道益下, 不知何時, 有何禍變, 綢繆之策, 豈可緩也? 向日有騷屑, 都民咸願速築北城, 至欲輸財赴役。 凡事苟利於國, 民雖不欲, 亦可行之。 況今人情大可見矣。 地利、人和, 此之謂也。 或謂凶歲, 不可役衆, 而此亦不然。 飢民中收募丁壯, 給糧赴役, 則民將樂赴, 何疑之有? 李基夏, 頃以守都城爲請, 臣亦非欲必棄都城也。 北漢地勢高峻, 壓臨都內, 譬之人, 則扼項撫背之勢也。 若修築都城, 以北漢爲子城, 竝力同守則固好。 苟棄北漢, 則都城雖固, 決不可獨守, 而人皆不知形便, 但曰都城可守, 良可笑也。 凡作事之始, 衆議盈庭, 惟在上之人, 量時度力, 斷然行之而已。" 構曰: "臣意米萬石、綿布千同、役軍萬餘, 數月之役, 足以完築。 若取用統營巡檢米布, 則不患無財。 苟或有播越之擧, 雖米布山積, 將安用之? 此非如臺榭營作者比, 將欲爲宗社依歸之所, 則財力非可惜也。 近者熒惑入南斗。 宣廟庚寅、辛卯間, 有是變, 忠臣趙憲, 精通天文, 抵人書及疏章, 有安有有此變, 而兵亂不作之語, 未幾有龍蛇之禍。 前事已驗, 不可不早爲之計。" 承旨洪受疇曰: "槪聞民情, 皆以爲苟入此城, 可以臨亂保妻子, 莫不同辭願築。 今若中寢, 必大缺望。" 上顧曰: "卿所進冊子, 予已詳覽。 蓋嘗從容思之, 兩都保障之不足恃者如彼。 都城闊大, 亦不可守。 以形便言之, 北城最勝矣。 仁廟丙寅, 始築南漢。 丙子之亂, 初欲入江都, 而卒入南漢。 其時若無南漢, 未知國事稅駕於何地? 言念及此, 不覺心憟。 今日陰雨之備, 豈可少忽?" 曰: "聖敎誠然。 昔劉先主之奔江陵也, 强寇在後, 而百姓襁屬相隨, 先主不忍棄去, 一日行數十里。 此所謂信義著於天下也。 今都民所仰戴者, 惟國家, 而臨亂倉卒, 棄之如遺, 殊非王者與民共難之意, 民豈有親上死長之心乎? 苟能築斯城, 錬器械峙餱糧, 君臣上下, 一心堅守, 宗社免播越之辱, 都民無渙散之慮。 一城內外, 便是父子, 兵以死戰之, 卒守天險之地, 豈非萬全之策也?"刑曹判書閔鎭厚曰: "嘗臣請守都城, 聖上以闊大難守爲敎。 臣誠昧於兵事, 而終未曉也。" 上曰: "如以都城爲可守, 則亦當加築, 而功力與新築何異?" 曰: "都城多有窺山, 城堞卑弱, 地勢低平, 雖加築, 亦不可守。" 鎭厚曰: "臣亦以爲都城宜加築。 山城之無窺山者, 絶少。 雖有窺山, 亦豈無捍禦之策乎? 然, 臣不敢復言都城事, 而但於言, 有不可不相難者。 若於築北城之後, 抛棄都城, 如淸野之法, 則容或可也, 而姑以民兵守堞, 臨急退守云者, 是何言也? 蒼黃移入之際, 民將蹂躪盡死, 北城士民之心, 亦必驚擾, 其安能守城乎? 此事殆同兒戲, 決知其不可。 且前日聖敎以嘖言爲憂。 更宜深思善後之策, 而始役未晩。" 曰: "老弱、糧餉, 先爲移入, 陪扈至尊, 把守城堞, 則士民勇氣百倍, 不患不固, 因以餘兵, 竝守都城, 設令都城失守, 登高據險, 如古史所云, 則亦足自固, 此與平地連營, 大異, 何至於蹂躪無遺乎? 彼此兩城, 互成唇齒, 賊不敢侵軼。 況車駕所駐, 賊所專意, 必不肯舍北漢而攻都城, 雖奪都城, 白岳仁王之下, 勢難久住, 攻守之形相懸, 賊勢亦已弊矣。" 鎭厚曰: "一都城猶以爲闊大, 則築新城, 而以餘力兼守云者, 寧有是理? 守城者, 初雖恃爲金湯, 而臨陣對敵, 尙有怖怯之心。 況先示以必不可守之形, 而使之臨急移避, 則軍心已洶洶矣, 安能堅守乎? 旣失都城, 則北城之人, 望風奪氣, 亦將立見其淪陷, 此實事理之所必然, 童孺之所易知。 凡人作事, 尙思萬全, 況帝王乎; 事之小者, 亦且審愼, 況兵事乎? 勿復留意於行險陷危之事幸甚。" 曰: "北城壓臨都內, 砲石可以相及。 我據北山之勢, 而俯制其死命, 則彼不得仰攻, 亦安能久住耶? 臣愚謂先據北山, 則雖洞開四門, 敵不敢入矣。" 御營大將尹就商曰: "兩城形勢, 與內外城有異。 假令都城失守, 豈有不保北漢之理耶? 惟在守禦得人而已。" 曰: "今災異如此, 脫有兵禍, 事無可爲。 念及于此, 百姓賑救, 反是第二件事。 築城之役, 何可少緩?" 上曰: "北城形便, 實爲萬全。 此時雖不可始役, 予志已定, 先令諸軍門經理。" 起賀曰: "聖算堅定, 誠宗社之幸也。" 上曰: "守令數遞, 迎送有弊, 郡邑蕩敗, 實由於斯。 臺啓出於風聞, 雖不可盡信, 上下相持, 徒損事體, 自不得不允從, 而風傳之說, 易歸差爽, 所易長吏, 又未必賢。 此後臺閣, 宜詳審於發論之初也。" 曰: "古有爽實引避之例, 而今不可復見矣。 向日崔鎭漢, 有治聲而被劾去, 臣請仍任。 厥後, 發論臺臣, 猶終始自是, 誠未知其可。" 受疇曰: "以近日臺啓言之, 延安隱結、錢貨, 殆近贓汚, 而罪止罷職, 雖有冤端, 何由辨暴? 若此之類, 宜令拿覈, 有罪無罪, 自可見矣。" 大司諫李健命曰: "臺閣風聞, 間或差爽, 而若因此懲羹, 而無彈劾之擧, 則貪官汚吏, 何所懲畏? 殿下念及民弊, 意甚盛也, 而苟於臺啓, 輒疑其不審, 則恐有輕臺閣之失也。" 上曰: "臺論豈必盡是, 亦豈盡非耶? 彈劾一發, 必遞乃已, 予之欲令詳審者, 此也。"


  • 【태백산사고본】 44책 38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40책 9면
  • 【분류】
    군사-관방(關防) / 인사-임면(任免)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