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여, 창의문 외성의 축성 등을 논의하다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는데, 좌의정 이세백(李世白)이 말하기를,
"근래 도둑이 대단히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신(臣)이 들은 바 또한 매우 낭자(狼藉)하나, 토포사(討捕使)가 착실하게 탐사하여 잡지 못하니, 만일 곤궁한 봄철이 되면 장차 길이 반드시 통하지 못할 것입니다. 마땅히 각도(各道)의 병사(兵使)와 토포사를 신칙(申飭)하여, 특별히 탐사하여 잡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로 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유(李濡)가 말하기를,
"근래에 토포사가 도둑을 잡은 후 계문(啓聞)한 중에, 지시(指示)하여 붙잡은 데 관계되지 않은 사람을 사사롭게 장부에 많이 기록하여 외람되게 큰 상(賞)을 받게 하니, 또한 마땅히 감사(監司)와 병사(兵使)를 엄중하게 신칙해서, 사실을 조사하여 계문(啓聞)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우의정 신완(申琓)이 한 폭의 지도(地圖)를 받들어 올리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곧 창의문(彰義門) 외성(外城)의 기지도(基址圖)입니다. 신이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과 양국(兩局)489) 의 대장(大將)과 함께 가서 보고, 그 곳의 지형(地形)을 그려 성상께서 열람하시도록 마련하였습니다."
하자, 임금이 열람을 마치고 묻기를,
"형세(形勢)를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어떠하던가?"
하였는데, 신완이 말하기를,
"신이 옛날에도 일찍이 보았고 지금도 또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정말 천험(天險)입니다. 또 창의문(彰義門)에 근접하여 더욱 편리하고 좋습니다. 여러 군영(軍營)으로 하여금 힘을 합하게 한다면 성 쌓기는 역시 어렵지 않으나, 다만 근거없는 의논이 떠돌까 두렵습니다."
하고, 이유(李濡)는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 변란(變亂)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강화도(江華島)나 남한산성(南漢山城)을 돌아가는 곳으로 삼는데, 만일 양화도(楊花渡)·갑곶진(甲串津)·삼전도(三田渡)·송파진(松坡津)에 배가 없으면 건너 갈 수가 없습니다. 대가(大駕)는 혹시 건널 수 있지마는, 사민(士民)은 다 버리는 형편이 될 것이고, 여러 강창(江倉)의 식량과 각 군문(軍門)의 치중(輜重)490) 에 이르러서는, 또한 적(敵)에게 도움을 주는데로 돌아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진실로 염려됩니다. 신이 일찍이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있을 때, 홍복산(洪福山)에 축성(築城)할 뜻을 진달하였으나, 모두 근거없는 의논이라 하여 저지(沮止)당하였는데, 만일 이 성을 쌓으면 홍복산보다 더욱 가깝고 편리할 것입니다."
하고, 행부호군(行副護軍) 이인엽(李寅燁)은 말하기를,
"성터는 과연 좋으나, 다만 이 성이 바로 칙사(勅使)가 왕래할 때에 바라보이는 곳입니다. 성을 쌓고 못을 파는 것은 약조(約條) 중에 금함이 있어 뜻밖의 입씨름이 있을까 두려우니, 이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이곳은 도성(都城)의 주맥(主脈)이니 뚫고 판다면 또한 풍수설(風水說)에 해로울까 두렵습니다."
하고,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창집(金昌集)이 또한 말하기를,
"입씨름이 가히 염려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연석(筵席)에서 잠깐 동안에 결정할 일이 아니니, 조용히 헤아려 생각해서 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김진귀(金鎭龜)가 말하기를,
"중궁전(中宮殿)이 대궐에 들어온 이튿날, 왕세자(王世子)와 세자빈(世子嬪)이 마땅히 조알(朝謁)하는 절차가 있어야 하나, 예조에서 전례(前例)를 의방할 것이 없으니,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인년491) 대례(大禮) 때에는 소현 세자(昭顯世子)가 멀리 심양(瀋陽)에 가 있었고, 신유년492) 에는 세자(世子)를 두지 못하였으므로, 이 일은 마땅히 전례(前例)가 없을 것이니, 중궁(中宮)이 대궐에 들어온 다음날에 세자가 먼저 조알하고, 빈궁(嬪宮)이 잇달아 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3책 37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701면
- 【분류】사법-치안(治安) / 과학-지학(地學) / 군사-관방(關防) / 왕실-의식(儀式)
- [註 489]양국(兩局) : 어영청(御營廳)·훈련 도감(訓鍊都監).
- [註 490]
○壬午/引見大臣、備局諸臣。 左議政李世白曰: "近來賊患熾盛, 以臣所聞, 亦甚狼藉, 而討捕使不能着實譏捕, 若當窮春, 行路必將不通。 宜勑各道兵使及討捕使, 另加譏捕。" 上曰: "依爲之。" 兵曹判書李濡言: "近來討捕使捕賊啓聞中, 指示捕捉, 多以不干之人, 循私懸錄, 濫蒙重賞。 亦宜嚴飭監、兵使, 査實以聞。" 上可之。 右議政申琓, 奉一地圖進曰: "此乃彰義門外城基址圖也。 臣與備局諸臣及兩局大將, 偕往見之, 圖其地形, 以備睿覽。" 上取覽訖, 問曰: "詳察形勢, 果何如耶?" 琓曰: "臣舊曾見之, 今又詳察, 儘是天險。 且近接彰義門, 尤爲便好。 令諸軍門合力, 則築之亦非難, 但恐浮議撓之。" 李濡曰: "我國每有變難, 必以江都、南漢爲歸, 而若楊花渡、甲串津、三田渡、松坡津, 無船則不可渡。 大駕或可渡, 而士民勢將盡棄, 至於諸江倉糧餉, 各軍門輜重, 亦不免爲資敵之歸, 是誠可慮。 臣曾任楊州, 以洪福山築城之意陳達, 而輒爲浮議所沮。 若築此城, 視洪福尤爲便近。" 行副護軍李寅燁曰: "城基果好, 但此城正當勑使往來所望見之處。 城池修築, 約條中有禁, 恐有意外嘖言, 此不可不慮。 且此是都城主脈, 穿鑿亦恐有妨於風水。" 戶曹判書金昌集亦曰: "嘖言可慮。" 上曰: "此非筵席立談間所可定之事, 從容商度而爲之。" 禮曹判書金鎭龜曰: "中宮殿入闕翌日, 王世子、世子嬪, 宜有朝謁之節, 本曹無前例之可倣者, 何以爲之乎?" 上曰: "戊寅大禮時, 昭顯世子, 遠在瀋中, 辛酉年則未有世子, 此事宜無前例。 中宮入闕之翌日, 世子先爲朝謁, 嬪宮繼之宜矣。"
- 【태백산사고본】 43책 37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701면
- 【분류】사법-치안(治安) / 과학-지학(地學) / 군사-관방(關防) / 왕실-의식(儀式)
- [註 4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