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폐해 등에 상소한 충주 유학 최세일을 정배하라고 명하다
충주(忠州) 유학(幼學) 최세일(崔世鎰)이 상소하기를,
"정치(政治)와 교화(敎化)가 행해지지 않는 것은 인재(人才)를 얻지 못한 데에 연유하고, 인재를 얻지 못하는 것은 과거(科擧)가 공정하지 않은 데에 연유하는 것입니다. 이번 봄에 알성시(謁聖試)를 치른 후 온나라가 떠들썩하게 모두 말하기를, ‘한 방(榜)이 온통 고관(考官)의 친족이라.’라고 한 것을, 입이 있는 자는 모두 말하고 귀가 있는 자는 모두 들었습니다. 홍우서(洪禹瑞)는 홍수헌(洪受瀗)에게, 조도빈(趙道彬)은 조태채(趙泰采)에게, 임방(任埅)은 이여(李畬)에게 모두 삼촌(三寸)의 친척이고, 이재(李縡)는 이만견(李晩堅)·홍수헌(洪受瀗)·민진후(閔鎭厚)에게 또한 모두 삼촌(三寸)의 친척입니다. 김만근(金萬謹)은 바로 이사영(李思永)의 사위이고, 한영조(韓永祚)는 바로 김진귀(金鎭龜)·김진규(金鎭圭)의 사촌(四寸)이며, 홍만우(洪萬遇)는 바로 권세항(權世恒)의 사촌이고, 이해조(李海朝)는 민진후(閔鎭厚)·김진규(金鎭圭)에게 모두 인아(姻婭)433) 의 가까운 친족(親族)입니다. 모두 고관(考官)의 가까운 친척들로서, 전부 한 방(榜)을 차지하고 있으며, 고관(考官)의 친족이라는 혐의가 없는 자는 다만 이희태(李喜泰) 한 사람뿐입니다. 이는 실로 고금(古今)에 없던 큰 변고입니다. 설령 당일의 고관(考官)이 전혀 사사로운 마음이 없었음에도 우연히 이와 같이 된 것이라고 해도, 아홉 사람 가운데 여덟 사람이 모두 고관(考官)의 사사로운 친척이니, 사람들의 마음에 어찌 의혹이 없겠으며, 나라 사람들의 말이 어찌 시끄럽지 않겠습니까? 그 합동으로 고과(考課)할 때를 당하여, 만약 여러 시관(試官)들과 더불어 합좌(合坐)해서 함께 의논하여 그 취사(取舍)를 공정하게 하였다면, 사람들의 말이 어찌 이처럼 떠들썩하겠습니까? 각자가 사정(事情)을 쓰도록 일체 맡겨 두고서 일찍이 억제하지 않았으니, 당일의 명관(命官)434) 이 성상(聖上)의 아주 공정한 마음을 본받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시험지의 규정을 낮추기도 하고 높이기도 하는 것은, 전적으로 국자감(國子監) 당상관(堂上官)의 손에 달려 있는데, 조금이라도 견양(見樣)에 벗어난 것은 모두 도장을 찍도록 허락하지 않았으나, 과거 날이 임박한 때에 이르러 몇몇 사람의 정초(正草)는 견양(見樣)도 논하지 않고 유독 도장을 찍어 주도록 허가하였습니다. 이번 참방(參榜)435) 에서는 정초(正草)의 길이와 넓이가 모두 견양에 벗어났으니, 여기서 간사한 짓을 한 한 가지 단서를 볼 수 있습니다. 나라 사람들의 말이 많이 전파되어 여러 사람의 말을 막기가 어렵게 되자, 단지 주장관(主掌官)을 붙잡아 오도록 청하는 아룀으로써 뒤늦게 책임을 면하려 하였으나, 그래도 일의 단서가 혹시 탄로날까 두려워 조급히 서둘러 논의를 정지하였습니다. 그 뒤에 간신(諫臣)이 아룀을 정지한 사람을 논박하여 체직(遞職)시켰고, 유신(儒臣)이 의심스러운 형적을 잇달아 진술하였으니, 여기에서 공의(公議)가 오래 갈수록 더욱 결렬해짐을 알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끝내 만약 그대로 두고 묻지 않으신다면, 나라 사람들이 침을 뱉고 욕을 해도 족히 아까울 것이 없으며, 한미(寒微)한 선비의 실망을 걱정할 것도 없으며, 후세(後世)의 공의(公議)를 두려워할 것도 없으며, 과거(科擧)를 다시 실시할 수 없다는 것도 또한 논할 겨를도 없을 것입니다. 오직 신(臣)이 두려워하는 바는, 주상(主上)께서 윗자리에 고립되어 있고 권세가 모두 아래로 옮겨가는 것이니, 전하께서 비록 후회함이 있다 하더라도 오히려 어찌 미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그 방(榜)을 파(罷)하고 인재를 뽑는 규정을 엄하게 신칙하여, 지극히 공정한 마음을 보이도록 하소서."
하니, 승지(承旨) 임순원(任舜元)과 여필용(呂必容)이 아뢰기를,
"최세일(崔世鎰)의 상소의 말이 매우 위험한데, 주상(主上)께서 윗자리에 고립되어 있고 권세가 모두 아래로 옮겨간다고까지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예전같지 않고 세상의 도의(道義)가 더욱 떨어지고 있어, 근년에 과거를 실시한 후로 비록 떠들썩한 말이 많기는 하였으나, 생각해낸 뜻의 불미(不美)스러움과 말한 것의 망극(罔極)함이 어찌 최세일 같은 것이 있었습니까? 마땅히 물리쳐야 할 바이나, 유소(儒疏)에 관계되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전교(傳敎)하기를,
"이번에 최세일의 상소를 보건대, 한 편(篇)의 정신이 방(榜)을 파(罷)하는 데 있지 않고, 오로지 천청(天廳)을 현혹시키고 조정(朝廷)을 모함하려는 계획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생각해낸 뜻의 위험함이 한결같이 이지경에 이르게 될 것을 생각했겠는가? 더구나 시험지에 간사한 짓을 하였다고 한 것은 윤성준(尹星駿)의 상소의 말과 일맥상통하니, 이것이 어찌 한낱 시골의 선비가 혼자할 수 있는 바이겠는가? ‘윗자리에 고립되어 있고 모두 아래로 옮겨가니, 비록 후회함이 있더라도 오히려 미칠 수 있겠습니까?’ 하는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방자하게 글에 써서 조정의 신하를 망측(罔測)한 죄과(罪科)에 바로 몰아넣었으니, 더욱 매우 마음이 아프다. 최세일은 정배(定配)하고, 이 상소는 도로 내어 주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3책 37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696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註 433]인아(姻婭) : 인척(姻戚).
- [註 434]
명관(命官) : 시험관(試驗官)의 하나. 특별히 과거를 보는 경우, 임금이 과장(科場)에 친림(親臨)하여 직접 임명하는 시관(試官).- [註 435]
참방(參榜) : 방목에 이름이 기록된 것.○戊戌/忠州幼學崔世鎰上疏曰:
政化之不行, 由於人才之不得, 人才之不得, 由於科擧之不公。 今春謁聖之後, 一國喧藉, 皆以爲一榜皆是考官之私親, 有口皆言, 有耳皆聞。 洪禹瑞之於洪受瀗, 趙道彬之於趙泰采, 任埅之於李畬, 皆三寸之親也。 李縡之於李晩堅、洪受瀗、閔鎭厚, 亦皆三寸之親也。 金萬謹, 卽李思永之壻也, 韓永祚, 卽金鎭龜、鎭圭之四寸也, 洪萬遇, 卽權世恒之四寸也, 李海朝之於閔鎭厚、金鎭圭, 皆是姻婭之昵屬也。 俱以考官至親, 全據一榜, 無考官親嫌者, 只是李喜泰一人。 此實古今所未有之大變也。 設有當日考官, 全無私心, 而偶致如此, 九人之中, 八人皆是考官之私親, 則人心安得不疑惑, 國言安得不狼藉乎? 當其合考之際, 若與諸試官, 合坐同議, 以公其取舍, 則人言豈若是其喧騰乎? 一任其各自濟私, 曾莫之裁抑, 當日命官, 其可謂體聖上大公至正之心乎? 況試紙低昻, 專在於國子堂上之手, 稍過見樣者, 皆不許打印, 而及其科日迫頭之日, 若干人正草, 無論見樣, 獨許打給。 今番參榜, 正草長廣, 皆是見樣之外, 此可見用奸之一端。 及其國言狼藉, 衆口難防, 則只以主掌官請拿之啓, 晩出塞責, 而猶恐事端之或露, 汲汲停論。 厥後諫臣駁遞停啓之人, 儒臣繼陳可疑之迹, 於此可見公議之久而愈激也。 殿下終若置而不問, 則國人之唾罵, 不足恤也, 寒士之缺望, 不足憂也, 後世之公議, 不足畏也, 科擧之不得復設, 亦不可暇論也。 獨臣所懼者, 主上孤立於上, 權勢盡移於下矣, 殿下雖有後悔, 尙何及哉? 伏願殿下, 特罷其榜, 申嚴取人之規, 以示至公之心。
承旨任舜元、呂必容啓曰: "世鎰疏語, 極其危險, 至以主上孤立於上, 權勢盡移於下爲言。 人心不古, 世道益下, 近年設科之後, 雖多嘵嘵之言, 而造意之不美, 爲言之罔極, 豈有如世鎰哉? 所當退却, 而係是儒疏, 故不得不捧入。" 傳曰: "觀此崔世鎰上疏, 一篇精神, 不在於罷榜, 而專出於熒惑天聽, 傾陷朝廷之計, 豈料造意之危險, 一至於此哉? 況試紙用奸云者, 與尹星駿疏辭, 一串貫來, 則此豈一鄕儒之所可獨辦耶? 至以孤立於上, 盡移於下, 雖有後悔, 尙及哉等語, 肆然筆之於書, 直驅廷臣於罔測之科, 尤極痛心。 崔世鎰定配, 此疏還出給。"
- 【태백산사고본】 43책 37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696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註 4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