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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37권, 숙종 28년 8월 11일 경인 3번째기사 1702년 청 강희(康熙) 41년

우의정 신완이 차자와 함께 8조의 책자를 바쳤다

우의정(右議政) 신완(申琓)이 차자(箚子)와 함께 8조(條)의 책자(冊子)를 바쳤다. 모두 수만(數萬) 글자이었는데 이르기를,

"첫 번째는 정치(政治)의 근본을 세우는 것이니, 제왕(帝王)이 다스리는 도리는 군주의 마음에 근본하지 않는 것이 한 가지도 없으며, 국가의 존망(存亡)과 정치의 득실(得失)도 모두 여기에 관계됩니다. 오늘날을 가지고 말한다면, 밖으로는 조정(朝廷)과 안으로는 궁금(宮禁)이 모두 전하(殿下)의 한 마음에 달려 있는데, 조정의 기강(紀綱)이 해이해지고 여러 가지 일이 번쇄(煩碎)하며, 궁장(宮庄)의 절수(折受)가 성덕(聖德)에 누(累)를 끼치고 있으니, 아마도 전하께서 근본을 바로잡고 근원을 깨끗하게 하는 공(功)이 완전하지 못한 바가 있어 그러한 듯합니다. 마음이 정밀(精密)하고 전일(專一)하여 중용(中庸)의 도(道)를 지키는 것이 본래 전하의 가법(家法)이니, 풍기 연익(豐芑燕翼)404) 의 계책을 더욱 깊이 생각할 만합니다.

두 번째는 인재(人才)를 얻는 것이니, 하늘이 인재(人才)를 낼 적엔 멀고 가까운 이유로써 차별을 두지 않았습니다. 우리 조정의 학문을 하는 선비로 영남(嶺南)·호남(湖南)에서 나온 자를 이루 손꼽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인데, 지금 관각(館閣)에서 선발하여 조정에서 사람을 천거할 때, 단지 문벌(門閥)의 고하(高下)로써 뽑으니, 어찌 멀리 외방(外方)에 있는 인재를 불러올 수 있겠습니까? 백성을 다스리는 관원은 수령(守令)만한 자가 없고, 수령의 기강(紀綱)은 감사(監司)에게 달려 있는데, 번병(藩屛)을 맡는 자를 예(例)에 따라 임명하고 장리(長吏)405) 가 되는 자를 정사(政事)에 임하여 구차스럽게 채운다면, 백성이 그 해를 입을 뿐만 아니라 혹시라도 위급한 일이 있을 경우, 국가가 장차 어디에 의지하겠습니까? 또한 조정에서 사람을 임용할 적엔 반드시 그 직임(職任)을 오래 맡게 한 연후에야 그 성과를 요구할 수 있는데, 가만히 오늘날을 보건대, 안으로는 대성(臺省)을 아침에 임명했다가 저녁에 옮기고, 밖으로는 주·군(州郡)이 쉬어가는 여관(旅館)처럼 되었으니, 어찌 많은 공적을 빛내고 성과를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세 번째는 붕당(朋黨)을 없애는 것이니, 불행하게도 우리 조정은 당론(黨論)이 선조(宣祖) 초년(初年)에 일어나 돌려가면서 서로 표방(標榜)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색목(色目)을 이루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한 집안 사이에서 적국(敵國)보다 심하게 싸우고, 한 당내(堂內)에서 병기[干戈]를 서로 찾고 있으니, 공경하고 협력하는 아름다움은 이미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으며, 점차 완전히 빠져들게 되는 어려움이 며칠 안으로 장차 이르고야 말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전하께서 마땅히 표준을 세우고 황극(皇極)406) 을 세우시어 편벽되지 않고 치우치지 않게 하시어서, 스스로 광대(廣大)하고 고명(高明)한 지경에 이르신다면, 붕당(朋黨)은 없어지기를 바라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질 듯합니다.

네 번째는 백성들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니, 오늘날 백성들의 생활은 극도에 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을해년407) ·병자년408) 의 기근과 무인년409) ·기묘년410) 의 전염병은 예전에 없던 바로써, 곡식이 다 없어지도록 나누어 진휼(賑恤)하였으나 그래도 부족하였습니다. 다른 나라에 양곡을 팔기로 요청함은 일찍이 어렵지 않았는데, 이제 백성들의 힘이 조금 회복되기에 이르자, 침해하고 독촉하는 혹독함은 지난날보다 심하여, 군사들의 군포(軍布)와 각사(各司)의 공물(貢物)을 징납(徵納)함이 그치지 않고, 오래되어 묵은 전지(田地)와 유망(流亡)한 호구(戶口)에 대해서도, 조금의 차별도 두지 않으며, 침해하고 독촉하는 근심이 이웃과 친족에게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근본(根本)이 되는 지역에 이르러서는 도리로 보아 마땅히 넉넉하게 구휼(救恤)해야 할 것인데, 삼사(三司)에서 금란(禁亂)411) 하는 폐해와, 추조(秋曹)412) 에서 구류(拘留)하는 법규에 대해 성명(聖明)께서 특별히 신칙(申飭)하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날과 똑같으니, 여기에서 명령이 시행되지 않고 백성이 더욱 곤궁함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해에 흉년이 든 끝에 수재(水災)가 또 참혹하여 농사를 마침내 망치고 백성들의 목숨이 끊어지게 되었으니, 이때에 백성들을 살리는 계책을 더욱 충분히 강구하여야 마땅하겠습니다.

다섯 번째는 군제(軍制)를 정하는 것이니, 우리 태조(太祖)·태종(太宗)께서 난(亂)을 평정하고 나라를 처음 세워서, 전조(前朝)413) 의 제도를 혁파(革罷)하고 오위(五衛)414) 의 군대를 두었습니다. 이는 대개 한(漢)·당(唐)·송(宋)·명(明)의 법제(法制)에서 취한 것인데, 애석하게도 이 법이 한 번 바뀌자 군제(軍制)에 계통(系統)이 없어졌고, 모집하여 모으는 문이 넓게 열린 것도 투속(投屬)하는 길을 열어준 것이 되어, 군액(軍額)415) 이 점차 방대해지고 문란함이 날로 심해지고 있습니다. 만약 크게 변통하려 한다면, 예전 제도를 따르고 거짓 장부를 없앨 것이며, 이를 할 수 없다면, 여러 도(道)에 흩어져 있는 군사를 전부 바꾸어 정해서, 부근에서 대(隊)를 만들어 조발(調發)하기에 편하도록 하며, 경외(京外)의 군사가 바치는 군포(軍布)는 모두 균일하게 해서 경중(輕重)이 없게 한다면, 어찌 오늘날과 같이 문란함이 있겠습니까?

여섯 번째는 신역(身役)을 고르게 하는 것이니, 군보(軍保)에게 포(布)를 징수하는 규정은 실로 삼대(三代)416) 와 한(漢)·당(唐)·송(宋)나라에서는 없던 것입니다. 온나라 사람들이 모두 포를 바치는 일이 없는데, 유독 군인이라 이름하여 마치 원수처럼 여기며 침학(侵虐)하여 포를 징수하되, 근심이 이웃과 친족에게 미치고 심한 경우는 백골(白骨)에까지 이르게 되니, 정한 제도가 이미 잘못되었습니다. 비록 포를 징수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바치는 바를 마땅히 균등하게 해야 하는데도, 혹은 한 사람이 3필(疋)을 바치기도 하고 혹은 세 사람이 아울러 1필을 바치기도 하며, 혹은 일생동안 한가롭게 놀면서 영구히 안락하게 지내는 백성이 되기도 하니, 어찌 그 균등하지 않음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인조조(仁祖朝)부터 일찍이 군적(軍籍)·호포(戶布)·구전(口錢)에 대한 의논이 있었으나, 군적(軍籍)은 지금의 기강(紀綱)으로는 결코 시행할 수가 없으며, 호포(戶布)도 균일하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구전(口錢)에 이르러서는 한(漢)나라 때부터 이미 시행하였는데, 지금 만약 나라에서 1년 동안 군포(軍布)에 의지하는 바를 통틀어 계산해서, 중외(中外)의 호구(戶口)에 균등하게 나누되, 귀천(貴賤)을 논하지 않고 호구를 헤아려 돈[錢]을 거두어서 겨우 잇대어 쓸 만할 정도로 그쳐 군포(軍布)를 대신하게 한 연후에 양민(良民)과 천민(賤民)을 논함이 없어, 정장(丁壯)을 잘 골라 뽑아서 취재(取才)하여 충군(充軍)한다면, 백성에게서 취하는 것은 매우 적은데도 나라의 쓰임새는 넉넉해지며, 군대의 사기(士氣)는 왕성해질 것입니다.

일곱 번째는 성지(城池)를 수축(修築)하는 것이니, 우리 나라 산천(山川)의 험조(險阻)함은 천하에 으뜸인데, 병자년417) 에 피인(彼人)들이 승리를 거둔 것은 모두 서쪽 변방을 지키지 못하고, 도성(都城)을 지키지 못하고 버린 소치에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지금 의논하는 자들은 말하기를, ‘만약 사변(事變)이 있게 되면 마땅히 남한산성(南漢山城)과 강도(江都)를 반드시 귀의(歸依)할 곳으로 삼아야 한다.’ 하는데, 위급할 때에 도성(都城)이 믿을 만한 곳이 아님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신이 일찍이 보건대,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는 탕춘대(蕩春臺)의 옛터는 사면이 험준하고 벽(壁)이 깍아지른 듯이 서 있으니, 산세(山勢)를 따라 돌을 포개어 치성(雉城)418) 을 덧붙여 쌓되, 창고의 곡식을 예치해 두고 먼저 무기(武器)를 쌓아 두어 경성(京城)과 안팎이 되어 서로 응원하게 하고 힘을 합쳐서 굳게 지킨다면, 나라에는 파월(播越)할 근심이 없고 백성은 견고한 뜻이 있게 될 것인데, 가까운 거리에 있는 천연(天然)의 험준(險峻)한 곳을 오히려 지금까지 비어둔 채 버려두었으니, 그 애석함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또한 옛사람들은 반드시 큰 길의 좁고 막힌 곳에서 있는 힘을 다하여 수어(守禦)하였으니, 서쪽의 동선(洞仙)·청석(靑石) 및 세 개의 큰 강(江)과 남쪽의 낙동강(洛東江)·조령(鳥嶺)·한수(漢水)·여강(驪江)과 북쪽의 세 개의 큰 고개[嶺]가 모두 미리 정한 신지(信地)가 아니었는데도, 험준한 곳으로 설정하여 굳게 지킨 것은 어떤 이유입니까? 오늘날 태평한 때에 이르러 싸우고 지킬 계책을 미리 강구하여, 무릇 여러 도(道)의 좁고 막힌 요해처(要害處)를 신지로 삼아 기필코 사수(死守)하도록 하고, 또한 경성(京城)의 사방 가까운 곳에 보군(輔郡)419) 을 정하여, 한(漢)·당(唐)·송(宋)나라의 옛 제도와 같이 서로 앞뒤가 되어 번갈아 싸우고 지켜야 합니다. 수군(水軍)에 이르러서는 또 육군(陸軍)의 제도와 같이, 남아 있는 보(堡)에 군사를 합하여 큰 진(鎭)을 이루게 한다면, 비어(備禦)하는 방법에 거의 합당할 것입니다.

여덟 번째는 경계(經界)를 바르게 하는 것이니, 우리 나라의 양제(量制)는 처음에 매우 소략하였는데, 육등(六等)420) 으로 고친 후에 조금 균등하게 되었다가, 임진 왜란(壬辰倭亂) 후 갑진년421) 에 비로서 양서(兩西)422)관동(關東)423)개량(改量)424) 하였습니다. 인조(仁祖)갑술년425)양남(兩南)426) 을 개량(改量)한 지가 이제 이미 70년이 되었고, 호서(湖西)427) 와 관동(關東)을 반쯤 개량하다가 중지하였으며, 해서(海西)428) 는 단지 네 고을만 개량한 지도 또한 40년이 되었습니다. 중간에 간사하게 속이는 폐단을 모두 막을 수 없고, 세력이 강한 자들이 이익을 독점하여 세입(稅入)이 더욱 줄어들게 되니, 한 번 고쳐서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작년 유집일(兪集一)의 방전(方田)의 법(法)은 그가 지부(地部)429) 에 올린 구정 양법(丘井量法)과 수의(繡衣)의 서계(書啓)로 본다면, 실로 간사함을 막는 묘법(妙法)이 될 것이니, 진실로 이를 팔도(八道)에 두루 시행한다면, 수백 년 동안 문란해진 경계(經界)를 정돈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성상(聖上)께서 뜻을 결정하여 시행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답하기를,

"경(卿)의 차자(箚子)를 살펴보고 이어서 책자(冊子)를 보건대, 나라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이 말의 표면에 넘치므로, 내가 매우 감탄하였다. 마음에 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변통할 만한 일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충분히 강구해서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3책 37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695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재정-역(役) / 농업-양전(量田)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역(軍役) / 구휼(救恤)

  • [註 404]
    풍기 연익(豐芑燕翼) : 《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유성(文王有聲)편의 ‘豐水有芑 武王豈不仕 詒厥孫謀 以燕翼子’란 글귀를 줄여서 쓴 말인데, "풍수(豐水)에도 기(芑:풀이름)가 있으니, 무왕(武王)이 어찌 일이 없겠는가? 자손(子孫)에게 좋은 계책을 끼쳐주어 편안하게 한다."는 뜻임.
  • [註 405]
    장리(長吏) : 수령(守令) 등 지방관을 달리 이르는 말.
  • [註 406]
    황극(皇極) : 제왕이 국가를 다스리는 대중지정(大中至正)의 도(道).
  • [註 407]
    을해년 : 1695 숙종 21년.
  • [註 408]
    병자년 : 1696 숙종 22년.
  • [註 409]
    무인년 : 1698 숙종 24년.
  • [註 410]
    기묘년 : 1699 숙종 25년.
  • [註 411]
    금란(禁亂) : 금제(禁制)의 법령을 어겨 난동하는 것을 금지함.
  • [註 412]
    추조(秋曹) : 형조(刑曹).
  • [註 413]
    전조(前朝) : 고려(高麗).
  • [註 414]
    오위(五衛) : 조선조 때의 군대 편제의 이름. 중위(中衛)로 의흥(義興), 좌위(左衛)로 용양(龍驤), 우위(右衛)로 호분(虎賁), 전위(前衛)로 충좌(忠佐), 후위(後衛)로 충무(忠武)를 두고, 한 위를 다섯 부로 나누고, 한 부를 네 통(統)으로 나누어, 한 통에는 각각 약간의 여(旅)를 두었으며, 여는 각각 다섯 대(隊)로, 오는 대는 다시 다섯 오(伍)로, 오는 다시 다섯 졸(卒)로 편성되었음.
  • [註 415]
    군액(軍額) : 군대의 정원.
  • [註 416]
    삼대(三代) : 하(夏)·은(殷)·주(周).
  • [註 417]
    병자년 : 1636 인조 14년.
  • [註 418]
    치성(雉城) : 성위에 낮게 쌓은 담.
  • [註 419]
    보군(輔郡) : 서울을 도우는 고을.
  • [註 420]
    육등(六等) : 나라 안의 모든 토지의 품등을 6등급으로 구분한 것인데, 그것을 측량하는 전척(田尺)은 토지의 등급이 하급(下級)일수록 전척의 길이가 길어짐.
  • [註 421]
    갑진년 : 1604 선조 37년.
  • [註 422]
    양서(兩西) : 황해도와 평안도.
  • [註 423]
    관동(關東) : 강원도.
  • [註 424]
    개량(改量) : 토지를 다시 측량함.
  • [註 425]
    갑술년 : 1634 인조 12년.
  • [註 426]
    양남(兩南) : 전라도와 경상도.
  • [註 427]
    호서(湖西) : 충청도.
  • [註 428]
    해서(海西) : 황해도.
  • [註 429]
    지부(地部) : 호조(戶曹).

○右議政申琓, 箚進八條冊子, 凡數萬言。

一曰立治本。 帝王爲治之道, 無一不本於人主之心, 國家存亡、政治得失, 皆於是乎係焉。 以今日言之, 則外而朝廷, 內而宮禁, 皆在於殿下之一心, 而朝綱渙散, 庶事叢脞, 宮庄折受, 貽累聖德, 則恐殿下端本淸源之功, 有所未盡而然也。 精一執中, 自是殿下家法, 豐芑燕翼之謨, 尤可深念也。 二曰得人才。 天之生材, 不以遠近有別。 我朝文學之士, 出於嶺南、湖南者, 指不勝屈, 而今則館閣掄選, 朝廷薦人, 只取門地高下, 則何以致遠外之人才乎? 臨民之官, 莫如守令, 守令之綱,在於監司, 而任藩屛者, 循例差除, 爲長吏者, 臨政苟充, 則不但民愛其害, 或有緩急, 國將何賴? 且朝家用人, 必久其任而後, 可責其效, 而竊觀近日, 內而臺省, 朝除暮遷, 外而州郡, 如舍逆旅, 則其何以熙庶績而責成效乎? 三曰祛朋黨。 不幸我朝黨論, 起於宣廟初年, 轉相標榜, 因成色目。 及至今日, 同室之鬪, 有甚敵國, 一堂之上, 干戈相尋, 寅協之義, 已矣難望, 及溺之患, 不日將至。 臣愚以爲, 殿下宜建中建極, 無偏無頗, 自底於廣大高明之域, 則朋黨不求祛而自祛矣。 四曰恤民隱。 今日之民生, 可謂極矣。 乙、丙饑饉、戊、己癘疫, 振古所無, 竭粟分賑, 猶爲不足。 請糶他國, 曾不爲難, 及今民力小蘇, 侵督之嚴, 甚於曩日, 軍兵之布、各司之貢, 徵納無已, 舊陳之田、流亡之戶, 無少差別, 侵督之患, 及於隣族。 至於根本之地, 理宜優恤, 而三司禁亂之弊、秋曹拘留之規, 聖明特令申飭, 而一如前日, 於此可見命令之不行, 而生民之愈困矣。 昨歲凶歉之餘, 水患又慘, 穡事卒痒, 民命近止, 此時活民之策, 尤當熟講矣。 五曰定軍制。 推我太祖太宗, (勘)〔戡〕 亂創業, 罷前朝之制, 置五衛之軍。 蓋取法制, 而惜乎此法一變, 軍制無統, 廣開募聚之門, 亦開投屬之路, 軍額漸廣, 紊胤日甚。 如欲大變, 則遵古制而罷虛簿, 未能爲此, 則散在諸道之軍, 沒數換定, 附近作隊, 以便調發, 京外軍兵所納之布, 竝皆均一, 無有輕重, 則豈有如今日之紊亂乎? 六曰均身役。 軍保徵布之規, 實三代、所無者也。 一國之人, 皆無納布之事, 而獨以軍爲名者, 侵虐徵布, 有同仇讎, 患及隣族, 甚至白骨, 定制旣誤。 雖有徵布之事, 所納宜均, 而或一人納三疋, 或三人竝一疋, 或一生閑遊, 永作逸民, 何其不均之至此耶? 自仁祖朝, 曾有軍籍、戶布、口錢之議, 而軍籍, 以今紀綱, 決不可行, 戶布, 亦難均一, 至於口錢, 自已行之, 今若通計國中, 一年所資於軍布者, 均別於中外之戶, 勿論貴賤, 計口收錢, 使其僅可繼用而止, 以代軍布然後, 無論良賤, 精擇丁壯, 取才充軍, 則取於民者甚微, 而國用裕, 軍容壯矣。 七曰修城池。 我國山川之險阻, 甲於天下, 而丙子彼人之取勝者, 皆由西藩失守, 都城失棄之致。 今之議者以爲, 脫有事變, 當以南漢、江都, 爲必歸之地, 而知非緩急可恃之地。 臣曾見彰義門蕩春臺舊址, 四面嶄絶, 壁之如削, 仍山累石, 附築雉城, 預置倉穀, 先積器械, 與京城表裏相應, 竝力固守, 則國無播越之患, 民有堅固之志, 而咫尺天險, 尙今空棄, 可勝惜哉! 且古人必於大路隘塞處, 極力守禦, 而西之洞仙靑石及三大江、南之洛東鳥嶺漢水驪江、北之三大嶺, 皆不預定信地, 設險固守者, 何也? 及今昇平之時, 預講戰守之策, 凡於諸道隘塞要害處, 作爲信地, 期以死守, 亦於京城四近之地, 立爲輔郡, 如舊制, 互爲首尾, 迭相戰守, 至於舟師, 亦如陸軍之制, 合兵殘堡, 俾成巨鎭, 則庶合於備禦之道矣。 八曰正經界。 我國量制, 初甚踈略, 改以六等之後, 稍得均平, 而壬辰亂後甲辰, 始改量兩西、關東。 仁廟甲戌, 量兩南, 今已七十年, 湖西、關東之半量中止, 海西之只量四邑, 亦將四十年。 中間奸欺之弊, 不能盡防, 豪强專利, 稅入轉縮, 不可不一番釐正, 而昨年兪集一方田之法, 以其上送地部, 丘井量法及繡衣書啓見之, 則實爲防奸之妙法, 誠以此遍行八路, 則數百年紊亂之經界, 可以整頓, 惟聖上決意行之焉。

答曰: "省覽卿箚, 繼視冊子, 憂愛之忱, 溢於言表, 予甚感歎。 可不留心焉? 可以變通事, 令廟堂熟講而處之。"


  • 【태백산사고본】 43책 37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695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재정-역(役) / 농업-양전(量田)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역(軍役) / 구휼(救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