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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36권, 숙종 28년 5월 12일 계사 1번째기사 1702년 청 강희(康熙) 41년

주강에 나아가고, 석강에 나아가다

주강(晝講)에 나아가고, 이내 석강(夕講)에 나아갔다. 시강관(侍講官) 이관명(李觀命)이 글의 뜻으로 인하여 붕당(朋黨)의 폐단을 남김없이 진달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전부터 비록 당론(黨論)이 있었으나 큰 의논에 이르러서는 애이(崖異)147) 가 없었다. 오늘 합계(合啓)한 것으로 논하더라도 지난해 겨울 국모(國母)의 화변은 옛날에는 없던 일로서, 《춘추(春秋)》의 의리에는 적을 토벌(討伐)하는 것보다 엄함이 없는데, 갑술년(甲戌年)148) 에 대신이 처음부터 장희재(張希載)의 사건을 엄중히 다스리지 않았고, 또 업동(業同)의 옥(獄)이 느슨함을 면치 못하여 한 번 그르치고 다시 잘못 처리해서 그들이 달가운 마음으로 끝없는 화를 빚어내게 한 것이다. 나 역시 대신이 미연(未然)의 전에 미리 헤아리지 못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일의 큰 머리는 이러하니, 대각(臺閣)에서 죄를 주라고 청하는 의논이 진실로 잘못이 아닌데도, 심지어 대사헌 서종태의 인피하는 말은 전혀 가리지 않고 나와서 실로 아주 근거가 없으니, 세도(世道)가 참으로 개탄스럽다."

하니, 시강관 이만성(李晩成)이 아뢰기를,

"오늘날 대론(大論)의 명의(名義)에 관계된 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마는, 오히려 치우치게 사정(私情)에 얽매여 벼슬이 높은 사람도 또한 이의(異議)를 제기하니, 세도(世道)의 한심함이 참으로 성교(聖敎)와 같습니다. 성상께서 만약 위에다 표준[極]을 세워 대공 지정(大公至正)의 도리로써 시비를 분별하면, 자연히 나쁜 일은 없어지고 좋은 일은 유지되어 국가의 복이 될 것입니다."

하고, 지경연(知經筵) 이유(李濡)는 아뢰기를,

"호포(戶布)의 논의가 전부터 있어 왔는데, 대의(大意)는 비록 좋지만, 신의 생각으로는 구포(口布)149) 의 좋은 점만은 같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태정(汰定)150) 의 유(類)를 조사해 밝히는데, 강(講)에서 떨어진 교생(校生)은 태정하지 말고, 다만 속포(贖布) 1필을 받고 그대로 유명(儒名)을 존속시켜 학궁(學宮)151) 에 출입시켜서 이듬해에 이르러 다시 시강(試講)을 허락하여, 능통(能通)한 자는 그 포(布)를 면제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그들이 이미 목전(目前)의 정역(定役)에 대한 원망이 없고, 또한 권장하는 방도에도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거둔 포(布)를 감영(監營)에다 맡아 두고 각읍에서 도망하거나 죽어서 대정(代定)하지 못한 수효를 그 포(布)로써 이급(移級)한다면, 수용(需用)도 또한 모자라지 않을 것입니다. 각항(各項)의 모속(冒屬)152) 하는 유(類)도 또한 모두 이름을 존속시켜 그 포(布)를 거두어 각읍의 도고(逃故)의 수효를 점차 보충해 나가면 포(布)는 여유가 있게 되니, 2필, 3필의 역(役)을 이로써 1필로 감해 주면 고르게 하는 한 방법일 듯합니다. 이로 인하여 또 구포(口布)의 법을 행하기에 이르러서도 역시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성상께서는 마음에 두고 물어보셔서 변통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 신역(身役)의 한 조항은 실로 큰 폐단이 되고 있다. 이는 변통하는 방도가 끝내 없어서는 안될 것이니, 진달한 바가 마땅하다. 뒷날 등대(登對)할 때에 마땅히 헤아려 확정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2책 36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681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비빈(妃嬪) / 정론-간쟁(諫諍) / 정론-정론(政論) /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 재정-역(役)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147]
    애이(崖異) : 모가 나서 남과 틀림.
  • [註 148]
    갑술년(甲戌年) : 1694년 숙종 20년.
  • [註 149]
    구포(口布) : 인구수대로 내는 신포.
  • [註 150]
    태정(汰定) : 면직.
  • [註 151]
    학궁(學宮) : 성균관(成均館).
  • [註 152]
    모속(冒屬) : 함부로 종속시킴.

○癸巳/御晝講, 仍御夕講。 侍講官李觀命, 囚文義極陳朋黨之弊, 上曰: "自前雖有黨論, 至於大議論, 則不敢崖異。 以今日合啓而論之, 則前冬國母禍變, 前古所無之事。 《春秋》之義, 莫嚴於討賊, 而甲戌大臣, 初不能嚴治於希載之事, 又不免緩解於業同之獄, 一誤再誤, 仍致渠輩之甘心, 釀成罔極之禍。 予亦非以大臣爲逆, 揣於未然之前, 而蓋事之大頭䐉則如此矣。 臺閣請罪之論, 固不爲非, 而至於大司憲徐宗泰之避辭, 專不擇發, 誠極無據, 世道良可慨然。" 侍講官李晩成曰: "今日大論之關係名義, 人孰不知, 而猶不免偏係之私, 秩高之人, 亦且立異, 世道之寒心, 誠如聖敎。 自上若建極於上, 以大公至正之道, 分別是非, 則自然消瀜保合, 爲國家之福矣。" 知經筵李濡曰: "戶布之論, 自前有之, 大意雖好, 臣則以爲不若口布之爲愈也。 凡査覈汰定之類, 如落講校生, 則勿爲汰定, 只收贖布一疋, 仍存儒名, 使得出入於學宮, 而至明年更許試講, 能通者免其布。 如是則渠輩, 旣無目前定役之怨, 而亦有益於勸奬之方。 以所收之布, 留置監營, 各邑逃故未代定者, 以其布移給, 則需用亦不乏矣。 各項冒屬之類, 亦皆存其名而收其布, 各邑逃故之數, 漸至充補而布有餘, 則如二疋三疋之役, 以此減爲一疋, 似是均平之一道矣。 因此而又至於行口布之法, 亦無不可。 自上留心詢訪而變通好矣。" 上曰: "我國身役一款, 實爲大弊。 此不可終無變通之道, 所達宜矣。 後日登對時, 當商確焉。"


  • 【태백산사고본】 42책 36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681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비빈(妃嬪) / 정론-간쟁(諫諍) / 정론-정론(政論) /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 재정-역(役)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