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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35권, 숙종 27년 9월 29일 계축 3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인정문에 나아가 궁녀 설향·숙영 등을 친국하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서 친국(親鞫)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부터 흉역(凶逆)한 변고(變故)가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는가마는, 요사하고 흉악함이 어찌 오늘날과 같은 경우가 있었겠는가? 안팎에서 기도하여 온갖 방도로 모해(謀害)한 것은 여러 죄인들이 이미 실토(實吐)하였고, 저주(咀呪)한 한 가지 일도 단서가 드러났으니, 이 일은 끝까지 심문하여 그 사실을 캐내지 아니할 수가 없다. 이 뜻을 국청(鞫廳)에 분부(分付)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이전에 심문한 것과 여러 사람들이 말한 것을 가지고 시영(時英)을 장차 다시 형신(刑訊)하였는데, 시영축생(丑生)과 더불어 면질(面質)하기를 청하므로,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이여(李畬)가 말하기를,

"마땅히 허락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시영이 오랫동안 그곳에 있었으니, 어찌 알지 못하는 것이 있겠는가? 이것은 진실로 의심할 만한 여지도 없으나, 시험삼아 또 면질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두 사람을 면질시키자, 축생시영에게 말하기를,

"9월에 네가 같이 참여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시영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4월 8일이었다. 네가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혼자 가는 것은 상(祥)스럽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고 하였다. 축생시영에게 말하기를,

"내신당(內神堂)에서 내가 찬(饌)을 마련하여 바쳤지만, 네가 어찌 거기에 있지 아니할 때가 있었느냐?"

하니, 시영이 말하기를,

"네가 과연 희빈과 더불어 온돌(溫堗)에 같이 왕래하면서 신사(神祀)를 행하지 아니하였느냐? 나는 가지 아니하였다."

하였다. 축생시영에게 말하기를,

"네가 갔는데도 스스로 가지 아니하였다고 하니, 어떻게 된 것이냐? 네가 어찌 엎드려 손을 모으고 기도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시영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하였다. 드디어 형신(刑訊)을 더 한 차례 더하였으나, 기꺼이 자복(自服)하지 아니하고, 다만 말하기를,

"취선당(就善堂) 서쪽 온돌방이 단단히 잠겨 있었기 때문에 그 가운데를 엿보았으나, 병풍(屛風)으로 막혀 있었습니다. 일렬(一烈)에게 물었더니, 일렬이 ‘금침(衾枕)을 펴 놓았는데, 마치 영침(靈寢)259) 을 마련한 것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렬·숙영·축생은 모두 그 연유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취선당 서쪽 가장자리의 신당에 설치한 물건들은, 이달 초에 발각될까 두려워하여 죄다 불태워버렸다. 그러나 내전에서 엄하게 묻자, ‘과연 여당의(女唐衣)를 불태워버렸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사실을 가지고 설향숙영에게 엄하게 물어보라."

하고, 또 말하기를,

"문목(問目) 이외의 잡담(雜談)은 쓰지 말라."

하였다. 전에 심문한 것과 여러 사람들이 말한 것을 가지고 설향을 형신하니, 그제서야 말하기를,

"신당에서 축원한 말은 요기(妖氣)와 사기(邪氣)를 없애고 그 소원을 이루고자 한다는 것이었고, 제가 숙영과 더불어 같이 축원하였습니다. 이른바 사기와 요기란 중궁전(中宮殿)을 가리키는 것이며, 이른바 소원이란 중전이 승하하고 희빈이 다시 중전으로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숙영이 나에게 ‘죽은 사람의 옷은 처음에 무녀(巫女)의 말을 따라 만들었는데, 모양이 작았으므로 보는 사람이 반드시 요괴(妖怪)스럽게 여길 것이기 때문에 불태워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대개 당초에는 이것을 보자기로 싸서 취선당 서쪽가의 온돌방에 두었는데, 그 크기가 말[斗]만 하였습니다. 태자방 신사(神祀) 때에 축원한 말은, 주상(主上)께서 희빈을 다시 금석(金石)처럼 대우하고, 세자를 안녕(安寧)하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무녀가 일어나 춤을 추면서 축원하기를, ‘주상께서 희빈을 대우하기를 전과 같이 하여, 다시 옛날의 자리에 오르게 하소서.’라고 하였으며, 이 밖에는 말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설향이 이미 자복하였으니, 빨리 죽을까 염려스럽다. 오늘 반드시 주살(誅殺)하라."

하니, 드디어 공초(供招)한 것을 가지고 역모(逆謀)를 도모한 것으로 결안(結案)하고 법(法)대로 정형(正刑)하였다. 신월(信月)이 자복하지 아니하므로 한 차례 형신하니, 다만 말하기를,

"달과 날짜는 정말 기억하지 못하나, 일찍이 눈이 내리던 날 아침에 무녀의 집에 갔더니, 신사를 거의 끝마쳤는데, 숙정이 손을 모으고 ‘사도(使道)께서 오랫동안 석방되어 돌아오시지 아니하시니, 축원(祝願)하건대, 이보았다 큰 일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며, 이 밖에는 말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무녀 열이(烈伊)를 잡아왔는데, 즉 앞에서 이른바 신선방(神仙房)이었다. 오례(五禮)의 말을 가지고 물으니, 기꺼이 자복하지 아니하고, 다만 말하기를,

"금년 2월에 숙정자근례(者斤禮)와 같이 와서 저에게 말하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삼재(三災)가 내리니, 무녀와 친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태자방은 이미 죽고 오례는 또 도망쳤으므로, 신당에 주인이 없다. 너희가 모름지기 고비(高飛)를 붙여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고비란 종이를 벽(壁)에 붙이고 금단(錦段) 따위의 물건을 그 사이에 끼워서 왕신(王神)을 받드는 것입니다. 같은 달 20일에 과연 가서 자근례와 더불어 본궁(本宮)에다 고비를 같이 붙이고, 술과 과일를 마련하여 부(缶)를 두들기며 축원하기를, ‘세자께서 두창(痘瘡)을 잘 넘겼기 때문에 만명(萬命)260) 을 두는 것입니다. 지금 주인 무녀는 몸이 죽어 신당에 주인이 없으니, 부득이 이곳에다 옮겨 설치합니다. 오로지 세자께서 안녕(安寧)하시고 국가가 태평하기를 축원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같이 참여한 자는 숙정과 연로한 나인[內人]과 나이 어린 나인이었는데, 저는 돌아온 뒤에 다시 왕래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하였다. 숨기고 모두 말하지 아니한다고 하여 한 차례 형신하였으나, 또한 전의 말을 고집하고 바꾸지 아니하였다. 순례(順禮)를 잡아와 심문하였는데, 곧 이수장(李壽長)이 말한 서귀산(徐龜山)의 누이이고 설향(雪香)의 언니였다. 대답하기를,

"시골에서 새로 왔고, 또 마침 옴병[疥瘡]을 앓고 있어서 감히 신사(神祀)를 설행한 곳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모든 기도하는 말들을 정말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며, 그가 기꺼이 고(告)하려고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한 차례 형신을 더하였으나, 또한 자복하지 아니하였다. 그때 판부사(判府事) 윤지선(尹趾善)이 병(病)이라 하여 국문(鞫問)에 나오지 아니하고 상소하기를,

"희빈(禧嬪)이 전하(殿下)께 대하여 단지 한 사람의 후궁(後宮)일 뿐이라면, 그 처리하는 방도에 있어서 매우 결단하기 어려운 점이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무진년261) 이전에 국본(國本)을 의탁할 데가 없었던 시절을 생각하지 아니하십니까? 전하께서 밤낮으로 근심하시고, 신민(臣民)들은 밤낮으로 기다리고 바랐는데, 희빈이 곧 우리 왕세자(王世子)를 낳고, 즉시 위호(位號)를 정하자 상하(上下)에서 모두 함께 경사스러워 하였습니다. 덕(德)을 기르고 공부에 부지런하니, 아름다운 소문이 날로 더하여, 전하께는 주왕(周王)의 걱정이 없던 경사(慶事)262) 가 있었고, 목을 내놓고 죽음으로 충성을 다하려는 마음은 온 나라가 꼭 같았습니다. 그런데 비록 조종(祖宗)의 신령(神靈)들이 몰래 도와주시고 전하의 훌륭한 덕(德)이 융성하신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나, 그 낳아서 기른 공로를 말하자면, 실로 희빈에게 있습니다. 오늘날 성상께서 희빈을 처리하는 데 어찌 일분(一分)의 자중(自重)하는 방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의 제왕(帝王)은 비록 요사스럽고 부도(不道)한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가 앞서 세운 공로를 생각하여 특별히 너그러웁게 용서를 베풀었으니, 지금 희빈이 성사(聖嗣)를 낳아서 기른 공적은 범인(凡人)이 앞서 세운 공로와 비교할 바가 못됩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왕세자의 지극한 효성은 천성(天性)에서 나왔는데, 큰일을 당하자 애훼(哀毁)263) 하심이 제도를 넘었습니다. 그 사친(私親)에 대해서 의리는 비록 가볍다고 하나 은혜는 무거우니, 금일 갑자기 이처럼 사람의 도리상 감당하지 못할 경우를 당한다면, 지극한 괴로움이 마음을 상하게 하여, 틀림없이 몸이 상하거나 병이 들 것입니다. 말과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기(氣)가 줄어드는 것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지난번 비망기에 구익 부인(鉤弋夫人)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증거로 삼았으나, 이 경우는 그렇지 아니함이 있습니다. 대개 한(漢)나라 무제(武帝)는 나이가 이미 칠순이었으므로, 정말 어미는 장년이고 아들은 어린 걱정이 있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춘추(春秋)가 바야흐로 한창이시니, 후일의 염려를 족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세자께서 만약 이로 인하여 만에 하나라도 몸을 상(傷)할 우려가 있다면, 종사(宗社)의 근심과 성명(聖明)의 뉘우침이 마땅히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고 충분히 헤아려서, 정(情)과 법(法) 사이에 융통성을 보이시고 한편으로 세자를 보호하실 것을 생각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어제 비망기의 말뜻에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느냐? 한편으로는 종사를 위한 것이고, 한편으로는 세자를 위한 것이었다. 경(卿)은 그것을 생각하고 헤아려 보라."

하였다.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이 바야흐로 임금을 모시다가, 또 수차(袖箚)를 올려 이르기를,

"생각건대, 우리 대행 왕비(大行王妃)께서는 지극히 인자하고 성스럽고 덕스러워 태임(太任)264) ·태사(太姒)265) 의 칭송을 일제히 받았으나, 도중에 운수가 나쁜 일을 만났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지금 또 복위(復位)된지 얼마 아니되어 선어(仙御)하여 빈천(賓天)하시니, 상하(上下)에서 애통해 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이에 요악(妖惡)한 변고(變故)가 있었으므로, 무릇 혈기(血氣)가 있는 자들은 모두 놀라고 가슴 아파하며, 분개하는 마음으로 곤전(坤殿)을 위하여 토죄(討罪)하려고 하는 사람이 이에 지극히 많습니다. 다만 의혹스러움을 일으킨 쪽은 바로 희빈(禧嬪)이지만 희빈은 곧 춘궁(春宮)의 어머니이니, 금일의 사건은 실로 너무나 처리하기가 어렵습니다. 전하(殿下)께서 인륜(人倫)의 변고를 처리하시는 데 있어서,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미진(未盡)한 점이 있다면 어찌 성덕(聖德)을 거듭 손상시키지 아니하겠으며, 후일의 끝없는 후회를 어찌 이루 다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신(臣)이 전대(前代)의 역사를 보았더니, 한(漢)나라회남왕(淮南王)266)여태자(戾太子)267) 가 반역(反逆)한 정상이 비록 드러났지만, 당시의 임금이 능히 잘 처리하지 못하여 청사(靑史)의 비웃음을 면하지 못하였고, 끝내 경제(景帝)양왕(梁王)268) 에게 법을 굽히면서까지 은혜를 온전히 한 것만 같지 못하였습니다.

아조(我朝)의 근래의 일로 말씀드린다면, 조씨(趙氏)269)강씨(姜氏)270) 두 서인(庶人)의 옥사(獄事)는 죄명(罪名)은 지극히 무거웠으나 법으로 다스릴 적에 오히려 직언(直言)을 하는 선비 【홍우원(洪宇遠)을 가리키는 것으로, 효종(孝宗) 때 있었다.】 의 진언(進言)이 있었습니다. 인성군(仁城君)271) 의 죄는 모두 ‘죽여야 한다.’라고 하였으나, 유신(儒臣) 【정온(鄭蘊)의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조(仁祖) 때 있었다.】 이 너그러이 용서해 주도록 청(請)한 것을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림(士林)의 정론(正論)이라고 칭송합니다. 심지어 기묘년272) 무고(巫蠱)의 옥사에 있어서도 공주(公主) 정명 공주(貞明公主)273) 의 사건인데, 인조(仁祖) 때 있었다.】 는 이미 간섭(干涉)한 바가 없었으나, 계집종이 또한 무당의 집에 왕래한 흔적이 있었으므로, 그 일이 위태로왔습니다. 하지만 핵문(覈問)은 오직 그 계집종에게만 그쳤고 귀주(貴主)274) 는 아무 일이 없었으니, 인조의 거룩한 덕(德)을 사방에서 칭송하여 마지않았습니다. 진실로 문내(門內)의 다스림에서는 은혜로 의리를 덮어버리는 것이니, 천륜(天倫)에 관계된 일은 용서하고 덮어 주는 것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금일의 옥사는 비록 법에 의거하여 끝까지 다스리더라도, 그 자취가 희빈(禧嬪)에게 미친다면 법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설혹 엄하게 신문(訊問)하는 아래에서 여러 죄수들이 사실대로 실토해서 그 죄상이 낭자하더라도 똑같이 법대로 다스릴 수가 없을 바에는, 당초부터 끝까지 깊이 심문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공자(孔子)께서 말하기를, ‘아비는 자식을 위해서 숨겨 준다.’ 하였고, 《춘추(春秋)》의 대의(大義)에서는, ‘어버이를 위해서 숨겨 준다.’라고 하였으니, 지금 춘궁은 희빈에 대하여 한 몸에서 나뉘어졌고, 전하께서도 춘궁에 대하여 또한 한 몸에서 나뉘어진 것이니, 지금 희빈의 죄에 비록 용서하지 못할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하의 도리로서는 다만 마땅히 춘궁을 위하여 숨겨 주는 것이 경서(經書)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그 일을 끝까지 파헤쳐서 그 죄를 폭로하고 조금도 돌보지 아니하십니까? 비록 내종(內宗)이나 여러 친족에게 관계된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오히려 마땅히 참작해서 적당하게 처리할 방도가 있어야 할 터이니, 하물며 세자 모자(母子)와 같은 지친(至親)의 사이인 경우이겠습니까? 아! 전하께서 춘궁을 두신 것은 장차 종사(宗社)의 무거운 책임을 맡기시려는 것이니, 그를 보안(保安)하고 보호할 방도를 마땅히 극진히 다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지금 악역 부도(惡逆不道)의 죄로 그 어머니를 감단(勘斷)하여 참혹한 죽음을 더하고서야 춘궁을 편안하게 잘 보호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만약 세자가 놀라고 애통하고 몹시 두려워하는 가운데 대단한 질환(疾患)이라도 나게 된다면, 종사의 근심이 어떠하겠습니까? 모자는 천성(天性)의 지친(至親)이므로 길흉 화복(吉凶禍福)이 서로 관계되지 않음이 없으니, 전하께서 비록 희빈을 버리시더라도 춘궁의 처지만은 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대(前代)를 상고하더라도 그 득실(得失)이 저와 같고, 금일의 일을 미루어 보더라도 그 이세(理勢)가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만약 전하께서 뇌정(雷霆)과 같은 노여움을 타고 가볍고 급작스레 처분하시어, 전하의 인륜의 변고를 처리하심에 털끝만큼이라도 미진(未盡)한 점이 있게 하신다면, 천하 후세에 금일의 여러 신하들을 어떠하였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은, 마땅히 요얼(妖孽)의 무리들을 빨리 제거하여 나라의 법을 밝히되, 특별히 희빈의 죄를 용서하여 춘궁을 편안하게 하고 곧 국문(鞫問)하는 일을 도로 거두어 끝까지 죄를 파헤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금일에 변고를 처리하는 방도로는 이것보았다 나은 것은 없을 것이니, 대저 그렇게 하신다면 순문(詢問)하는 일은 저절로 마땅히 중지되고 행하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영명하신 성상께서는 잘 생각하시고 먼 앞날을 염려하시어 훌륭히 처리하소서.

신이 삼사(三事)275) 의 자리를 더럽히다 이러한 온갖 환난을 당하여 길이 나라의 일을 생각하면 근심스런 마음이 불타듯 하여 한밤중에도 자리에 들지 못하고 벽(壁)을 맴돌면서 방황하고 생각이 능히 끊이지 않아 다시 이처럼 신문(申聞)하는 것입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내 마음의 시름이여! 마음 졸이기를 방망이로 치는 듯하네. 옷입은 채 누워서 길게 탄식을 하니 오직 걱정 때문에 늙어가고, 마음의 근심으로 열병을 앓는 듯하네.’라고 하였으니, 신의 처지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신은 눈물이 흐르는 것을 주체하지 못하면서 간절하게 바라옵니다."

하니, 임금이 다 읽어보고 나서 하교(下敎)하기를,

"내가 전고(前古)에 없던 일을 지금 당하였고 대행 왕비(大行王妃)를 위해 국좌(鞫坐)에 연달아 나아가도 피로한 줄도 알지 못하는데, 신자(臣子)는 나의 마음과 같지 못하도다. 신자의 도리에 있어서 오로지 마땅히 목욕하고 토죄(討罪)하자고 청(請)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터인데, 어찌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는가? 이 옥사가 어떠한 옥사인가? 그런데도 곧 ‘모름지기 끝까지 파헤쳐서는 안된다.’고 하니, 만약 이와 같이 한다면, 의리(義理)가 어두워지고 막혀서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최석정이 말하기를,

"신의 구구한 뜻은 오직 희빈을 보호하려고 하는 데 있을 뿐이지, 이러한 흉악한 역적들의 무리를 말한 것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후일에는 더욱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어찌 이것을 헤아리지 아니하는가? 금일의 일은 종사를 위하고 세자를 위한 것이다. 나의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결단코 마음을 바꿀 수가 없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0책 35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615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궁관(宮官) /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註 259]
    영침(靈寢) : 대렴(大殮)한 뒤 시신을 두는 것.
  • [註 260]
    만명(萬命) : 원래 김유신(金庾信)의 어머니의 이름인데, 무당이 김유신의 어머니를 신격화(神格化)하여 이르는 신을 말함. 말명이라고도 함.
  • [註 261]
    무진년 : 1688 숙종 14년.
  • [註 262]
    주왕(周王)의 걱정이 없던 경사(慶事) : 순(舜)과 우(禹)는 고수(瞽瞍)와 곤(鯀)을 아버지로 두고, 요(堯)와 순(舜)은 단주(丹朱)와 상균(商均)을 아들로 둔 데 반하여, 문왕은 그렇지 않고 훌륭한 부모와 아들을 두었음. 출처는 《중용(中庸)》에 있는 "근심이 없는 분은 오직 문왕이시다. 왕계(王季)를 아버지로 두시고 무왕(武王)을 아들로 두시니, 아버지는 작성하였고 아들은 계술하였다."라고 한 공자(孔子)의 말임.
  • [註 263]
    애훼(哀毁) : 상을 당하여 몹시 슬퍼함.
  • [註 264]
    태임(太任) : 문왕(文王)의 어머니.
  • [註 265]
    태사(太姒) : 무왕(武王)의 어머니.
  • [註 266]
    회남왕(淮南王) :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여섯째 아들이며 문제(文帝)의 동생인 유장(劉長). 문제 때 모반을 도모하였다가 패배하여 촉군(蜀郡)에 유배되었는데, 분함을 참지 못해 굶어죽었음. 문제는 그를 유배시키고 슬퍼한 나머지 밥을 먹지 않았다 함.
  • [註 267]
    여태자(戾太子) : 한(漢)나라 무제(武帝)의 장자(長子)인 유거(劉據). 강충(江充)이 유거가 무제를 무고(巫蠱)로 해친다고 무고(誣告)하므로 유거가 장락궁(長樂宮)의 위졸을 동원하여 강충을 죽이고 이어 자살하였는데, 무제가 뒤에 그 억울한 사정을 알고서 사자궁(思子宮)을 짓고 ‘여(戾)’란 시호(諡號)를 내려 주었음.
  • [註 268]
    양왕(梁王) : 양 효왕(梁孝王).
  • [註 269]
    조씨(趙氏) : 인조(仁祖)의 후궁(後宮)인 조 귀인(趙貴人). 며느리인 숭선군(崇善君)의 아내 신씨(申氏)를 저주하였으므로 사사(賜死)되었음.
  • [註 270]
    강씨(姜氏) : 소현 세자빈(昭顯世子嬪) 강씨(姜氏). 인조 23년(1645)에 세자와 세자빈이 청나라에서 귀국하여 조소용(趙昭容)과 반목이 생겨 싸우던 중, 세자가 죽자 이것을 기화로 조소용이 세자를 강빈이 죽였다고 무고하고 왕실을 저주한다고 고하여 강빈은 후원에 유치(幽置)되었다가 인조 24년(1646) 3월에 왕이 내리는 독약을 마시고 죽었음.
  • [註 271]
    인성군(仁城君) : 이공(李珙). 선조(宣祖)의 일곱째 서자(庶子). 1628년(인조 6) 유효립(柳孝立)이 대북(大北)의 잔당(殘黨)을 규합하여 모반을 기도할 때 왕으로 추대된 일이 있으며, 뒤에 자살을 강요받고 죽었음.
  • [註 272]
    기묘년 : 1639 인조 17년.
  • [註 273]
    정명 공주(貞明公主) : 선조(宣祖)의 첫째 공주. 인조 기묘년(1639)에 궁중에 무고(巫蠱)의 사건이 일어나자 인조가 정명 공주를 의심하여 옥사를 일으켜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어 죽었음.
  • [註 274]
    귀주(貴主) : 공주(公主).
  • [註 275]
    삼사(三事) : 영의정·좌의정·우의정.

○上御仁政門親鞫。 上曰:

"自古凶逆之變, 何代無之, 而妖惡凶慘, 豈有如今日者乎? 內外祈禱, 百般謀害, 諸罪人旣爲吐實, 而咀呪一款, 又發其端, 此事不可不窮問得實也。 此意分付鞫廳。" 時以前所問者及諸人所言, 將更刑訊時英, 時英請與丑生面質。 判義禁李畬曰: "宜許之。" 上曰: "時英長在其處, 豈有不知者乎? 此固無疑, 而然試又面質。" 及面質, 丑生時英曰: "九月, 汝不同參耶?" 時英曰: "不然。 四月八日, 丑生謂俺曰: ‘吾獨行不祥。" 丑生時英曰: "內神堂吾設饌以入, 汝豈有不在之時乎?" 時英謂曰: "汝果不與禧嬪同往來於溫堗而行祀乎? 吾則不往。" 丑生時英曰: "汝去而自謂不去, 奈何? 汝豈不伏而攅手乎?" 時英曰: "不然" 遂加刑訊一次, 不肯自服, 但曰: "就善堂西房堅鎖之故, 窺見其中, 以屛風障之。 問于一烈, 一烈曰: ‘鋪陳衾枕, 有若設靈寢者然。’ 一烈淑英丑生, 皆知其由矣。" 上曰: "就善堂西邊神堂所設之物, 今月初, 恐其發覺, 盡爲燒火, 而自內嚴問, 以果火女唐衣爲對。 其以此嚴問雪香, 淑英。" 又曰: "問目外雜談勿書。" 以前所問者及諸人所言, 刑訊雪香, 乃曰: "神堂所祝之說, 是欲除妖氣、邪氣而成其所願, 俺與淑英同祝。 所謂邪氣、妖氣者, 指中宮殿, 所謂所願, 指中殿昇遐, 禧嬪復爲中殿也。 淑英言于俺曰: ‘死人之衣, 初因巫言造成, 以體樣之小, 見者必以爲妖怪故焚之。’ 蓋當初裹之以袱, 置于就善堂西邊溫堗, 其大如斗矣。 太子房神祀時所祝者, 是 主上待禧嬪, 復如金石, 世子安寧云云。 巫女起舞而祝曰: ‘主上之待禧嬪如前, 復置舊位。’ 而此外無可言耳。" 上曰: "雪香旣自服, 徑斃可慮。 今日必誅之。" 遂以所供結案爲謀逆, 正刑如法。 以信月不服, 刑訊一次, 只曰: "月日固不記, 嘗於雪下時, 朝往巫女家, 則神祀垂畢, 而淑正攅手曰: ‘使道久不放還, 祝願無上於此耳。’ 此外無所言。" 拿巫女烈伊以至, 卽上所謂神仙房也。 以五禮言問之, 不肯服, 只曰: "今二月, 淑正者斤禮來言於俺曰: ‘國家不幸, 三災下降, 不可不親巫女。 而太子房已死, 五禮又逃, 神堂無主。 爾須貼高飛。’ 所謂高飛, 以紙付壁, 錦段等物, 揷於其間, 以奉王神者也。 同月二十日果往, 與者斤禮, 同貼高飛於本宮, 設酒果擊缶祝曰: ‘世子好經痘患, 故爲置萬命。 今者主巫身死, 神堂無主, 不得已有此移設。 惟願世子安寧, 國家太平。’ 其時同參者, 淑正及年老內人、年少內人, 而俺歸後, 更不往來矣。" 以諱不盡言, 刑訊一次, 亦持前說無變。 拿順禮以問之, 卽壽長所謂龜山之妹而雪香之兄也。 對曰: "自鄕新來, 且適患疥瘡, 不敢入神祀之所, 凡所祈禱說話, 固所不聞也。" 以其不肯告, 加刑一次, 亦不服。

時, 判府事尹趾善, 以病不赴鞫, 上疏曰:

禧嬪之於殿下, 特一後宮耳。 其所以處之之道, 似若無甚難斷者, 而殿下何不思戊辰以前國本無托之時乎? 殿下日夜憂煩, 臣民日夜顒望, 禧嬪乃誕我王世子, 卽定位號, 上下同慶。 養德懋學, 令聞日彰, 殿下有周王無憂之慶, 而延頸願死之心, 擧國惟均, 而雖由於祖宗神靈之陰騭, 殿下盛德之隆厚, 而若其誕育之功, 則實在禧嬪。 今日聖上所以處禧嬪者, 豈可無一分顧藉之道乎? 古之帝王, 雖有妖惡不道之人, 念其先功而特加寬貸。 今此禧嬪之誕育聖嗣, 有非凡人先功之比。 惟我王世子誠孝之篤, 出於天性, 自遭巨創, 哀毁踰制。 其在私親, 義雖輕而恩則重, 乃於今日, 猝遇此人理所不堪之境, 至痛薰心, 傷病必至。 言念及此, 不覺氣短。 日者備忘, 以鈎弋事, 引以爲證, 而此則有不然。 蓋 武帝, 壽已七袟, 實有母壯子弱之憂。 今殿下春秋方盛, 則他日之慮, 有不足憂也。 世子若因此而有萬一致傷之患, 則宗社之憂、聖明之悔, 當復如何? 願聖明深思審量, 宛轉於情法之間, 一以保護世子爲念。

答曰: "日昨備忘辭旨, 豈有他哉? 一則爲宗社也, 一則爲世子也。 卿其思量焉。"

領議政崔錫鼎方侍上, 又進袖箚曰: "惟我大行王妃, 至仁聖德, 齊美, 中遭屯否, 國人憐之。 今又復位未幾, 仙御賓天, 上下哀痛, 靡所逮及, 而乃於斯際, 有妖惡之變, 凡有血氣, 擧切驚痛, 憤惋之忱, 其欲爲坤聖討復者, 容有極哉? 但致疑之處, 乃在禧嬪, 而禧嬪卽春宮之母也。 今日之事, 實爲萬分難處。 在殿下, 爲處人倫之變, 而苟有一毫未盡, 則豈不重損聖德, 而日後無窮之悔, 又豈可勝道哉? 臣歷觀前史, 淮南戾園, 反狀雖著, 而時君不能善處, 未免靑史之貽譏, 終不若景帝之於梁王, 屈法而全恩也。以我朝近事言之, 兩庶人之獄, 罪名至重, 而致法之際, 猶有直士 【指洪宇遠事, 在孝宗朝。】 之進言。 仁城之罪, 皆曰可殺, 而儒臣 【指鄭蘊等事, 在仁祖朝。】 寬貸之請, 至今稱爲士論。 至於己卯巫蠱事, 公主 【貞明公主事, 在仁祖朝。】 旣無干涉, 而婢子亦有往來巫家之迹, 則其事危矣。 覈問止於婢子, 而貴主無恙, 仁廟聖德, 四方頌之不衰, 誠以門內之治, 以恩掩義, 事關倫屬, 貴在容覆故也。 今日之獄, 雖據法窮治, 而迹至禧嬪, 則不可致法。 設或嚴訊之下, 諸囚吐款, 罪狀狼藉, 等是不可致法, 曷若初無窮問? 孔子曰: "父爲子隱。" 《春秋》之義, 爲親者諱。 今春宮之於禧嬪, 一體而分, 殿下之於春宮, 亦一體而分, 今禧嬪之罪, 雖在罔赦, 爲殿下之道, 只當爲春宮隱諱, 以不悖於經訓。 何可窮竟其事, 暴揚其罪, 而莫之恤耶? 雖係內宗諸親之事, 尙當有稱量得中之道, 而況儲貳母子至親之間耶? 噫! 殿下之有春宮, 將以托宗社之重也, 其安保調護之方, 宜無不用其極。 今以惡逆不道, 勘罪於其母, 行慘怛之誅, 而謂春宮保可平善乎? 若於驚痛震薄之中, 致有大段疾患, 則宗社之憂, 爲如何哉? 母子, 天性之親, 吉凶禍福, 靡不相關。 殿下縱棄禧嬪, 獨不爲春宮地乎? 考之前代, 得失如彼, 推之今日, 理勢如此, 而倘殿下乘雷霆之怒, 處分輕遽, 使殿下處人倫之變, 毫有未盡, 則天下後世, 謂今日群臣何如哉? 故臣謂宜速除妖孽之徒, 以明王法, 特寬禧嬪之罪, 以安春宮, 旋收鞫事, 毋致窮竟。 今日處變之道, 無出於此。 夫然則詢問之擧, 自當寢而不行矣。 惟明主却顧長慮而審處之。 臣忝位三事, 逢此百罹, 永念國事, 憂心如焚, 中宵不寐, 繞壁彷徨, 懷不能已, 復此申聞。 《詩》云: "我心憂傷! 惄焉如擣。 假寐永歎, 惟憂用老。 心之憂矣, 疢如疾首", 臣之謂矣。 臣無任涕泣懇祝。

上覽訖下敎曰: "予今遭前古所無之事, 爲大行王妃, 連御鞫坐而不知疲, 臣子則不如予心矣。 在臣子之道, 惟當沐浴請討之不暇, 而豈容如是云云耶? 此獄何許獄, 而乃曰不須窮竟? 如此則義理晦塞, 國不爲國矣。" 錫鼎曰: "區區之意, 只欲保禧嬪, 非謂此凶逆輩也。" 上曰: "卽今猶且如此, 他日尤當如何? 何不諒此耶? 今日之擧, 爲宗社也, 爲世子也。 予意已定, 決不可撓改也。"


  • 【태백산사고본】 40책 35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615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궁관(宮官) /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