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문에 나아가 무녀의 딸 정 등을 친국하다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서 친국(親鞫)하였다. 오례(五禮)의 말을 가지고 정(貞)을 형신(刑訊)하니, 한 차례가 채 끝나기도 전에 정이 말하기를,
"지난해 4월에 장희재(張希載)의 첩과 새 무녀(巫女) 【오례(五禮)를 가리킨다.】 와 차씨(車氏) 성의 궁인(宮人)이 가마를 타고 와서 신사(神祀)를 같이 행하였는데, 축원한 내용은 민 중전(閔中殿)이 승하(昇遐)하고 희빈(禧嬪)이 다시 중전(中殿)으로 되며 사도(使道)가 석방되어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사도(使道)가 석방되어 돌아오도록 우리가 쉽게 도모하자. 사도가 석방되어 돌아오면 희빈이 다시 중전이 되는데, 무슨 어려운 일이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자근례(者斤禮)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 기도를 축원할 때 차씨 성의 궁인과 나이 어린 궁인이 붉은 옷을 입고 일어나 춤을 추었는데, 새 무녀가 활과 화살을 잡고 마구 쏘면서 ‘내가 이미 민 중전(閔中殿)을 쏘아 맞혔다. 금년 8, 9월에 사도가 마땅히 돌아올 것이며, 또 좋은 일이 많을 것이다.’라고 하니, 여러 사람들이 손뼉을 치면서 ‘참으로 다행이다. 참으로 다행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새 무당이 숙정(淑正)과 두 궁인과 현수(絃手) 등과 더불어 방문(房門)을 걸어 잠그고 암암리에 기도하고 축원하였으나, 저는 정말 그 말한 내용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이수장과 정의 말을 가지고 오례를 형신하니, 오례가 대답하기를,
"과연 한 상궁(韓尙宮)과 장희재의 첩과 더불어 자주 신사를 행하였습니다. 태자방이 살아 있을 때부터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활과 화살을 마련하였는데, 태자방이 죽자 그 신(神)이 저에게 내렸으므로, 제가 드디어 그 신청(神廳)을 세우고 활과 화살을 잡고 축원하기를, ‘민 중전이 이미 쇠 그물에 들어간 것이 이미 내 눈 가운데 보였으니, 마땅히 8, 9월 사이에는 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숙정과 큰 무수리[大水賜]·한 상궁 등이 모두 저에게 ‘청컨대 민 중전을 죽이고 희빈을 다시 중전이 되게 해 달라는 뜻으로 축원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제가 과연 그런 말을 썼으며, 이른바 방(房) 안에서 암암리에 축원한 것도 또한 이러한 뜻이었습니다. 이 밖에 방재(龐災)【세속(世俗)에서 무축(巫祝)·염매(魘魅)·고독(蠱毒)의 술책을 방재(龐災)라고 한다. 대개 방연(龐涓)257) 이 손빈(孫臏)을 저주한 뜻을 취한 것이다.】 의 일은 제가 본래 배우지 못하였고, 들으니, 숙정이 궁내(宮內)에서 방재를 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또 들으니 장희재의 처 형제들이 묘산(墓山)에서 방재를 행하였다가 곧 발각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달 19일에 숙정이 저를 불러서 묻기를, ‘방재를 곳곳에서 행하였는데, 지금 비록 찾아서 파낸다 하더라도 능히 찾을 수가 없다. 나의 아비·할아비의 신(神)이 나를 도와주지 아니하여서 그런 것인데, 방재에 대한 말이 이미 나왔으니, 걱정스럽다. 만약 혹시 반중(反中)한다면, 【그 재앙(災殃)이 그 일을 주관하는 자에게 되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시험삼아 나를 위하여 길흉(吉凶)을 점쳐 달라.’고 하기에, 제가 점을 쳐보고 ‘9월 그믐에 불길한 일을 당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자근례(者斤禮)를 잡아다가 이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본래 태자방의 현수로서 지난해 5, 6월에 신사를 같이 행하였는데, 숙정과 큰 상전(上典), 【세속에서 궁인(宮人)을 상전(上典)이라 일컫는데, 시영(時英)을 가리킨다.】 큰 무수리[大水賜]와 태자방이 같이 앉아서, ‘장 사도(張使道)가 속히 바다를 건너올 것’을 축원(祝願)하였습니다. 그 뒤에 오례가 신사를 행할 때에 숙정 등 여러 사람들이 또 같이 참석하여 축원하기를, ‘기해생(己亥生) 【장씨(張氏)가 기해년(1659)에 났다.】 을 몰래 도와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오례는 활과 화살을 차고 문밖으로 나가 스스로 ‘사살신(四殺神)’ 【무신(巫神)의 호(號)이다.】 이라고 일컫고 기축(祈祝)하였는데, 그 음성이 낮아서 상세히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큰 상전이 꾸짖기를, ‘너는 어찌하여 목을 벤다는 말을 하는가? 희빈에게 이미 세자(世子)가 있는데, 무슨 그리 상하게 할 일이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지난해 6월에 오례가 숙정에게 ‘10월에 마땅히 뇌동(雷動)하는 일이 있을 것이니, 원컨대 상사(賞賜)를 받게 해 주소서.’라고 하니, 숙정이 ‘만약 그와 같이 된다면 마땅히 중한 상을 받을 것이니, 반드시 세자와 기해생을 몰래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12월에 오례가 숙정에게 ‘10월에 과연 뇌동이 있었는데, 어찌하여 나에게 상을 주지 않는가?’라고 하니, 숙정이 ‘비록 뇌동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어찌 귀(貴)하게 될 일이 있다고 너에게 상을 주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금년 정월에 오례가 숙정에게 ‘금년에 기해생에게 3재(三災) 【무복가(巫卜家)의 말이다.】 가 있을 터이니, 삼가고 다시 신사를 행하지 말라.’고 하였고, 태자방의 지아비가 오례를 내쫓자 신당은 드디어 텅비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월에 이를 희빈궁(禧嬪宮)으로 옮겼던 것입니다."
하였다. 장씨(張氏) 집 종으로서 옥씨(玉氏) 성을 가진 자를 잡아 왔는데, 그 이름이 학옥(學玉)이었다. 이수장(李壽長)의 말을 가지고 그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종은 바깥에 있고 신사의 일은 안에서 있었으니, 안팎이 막혀서 듣거나 알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장씨 집의 계집종 신월(信月) 【즉 정월(正月)의 어미이다.】 을 잡아 와 또 이수장의 말을 가지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새로 시골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모든 일의 본말(本末)을 알지 못합니다. 신사 때에 일찍이 참여하여 본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곧 이수장과 정과 오례의 말을 가지고 숙정을 형신(刑訊)하였는데, 한 차례를 마쳤으나 자복하지 아니하였다. 전에 물었던 내용과 여러 사람의 말을 가지고 축생을 형신하니, 곧 자복하며 말하기를,
"지난해 9월 9일·동지(冬至)와 금년 2월 초하루에 매양 4경(更)이 되면 제가 취선당(就善堂) 서쪽 우물 가에서 찬(饌)을 마련하여 희빈의 침실(寢室)에 바치면 희빈과 숙영·시영이 손을 모아 축원하기를, ‘원하건대, 원망하는 마음을 풀어 주소서. 요사이의 소원(所願)은 곧 민 중전(閔中殿)을 죽이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태자방 신당인 경우에는 숙정이 항상 주관하였습니다. 지난해 11월 신사(神祀) 때에는 무녀가 갓을 쓰고 붉은 옷을 입은 채 활과 화살을 가지고 춤추고 또 활을 쏘면서 ‘내가 마땅히 민 중전을 죽이리라. 민 중전이 죽는다면, 어찌 좋지 않으랴? 어찌 좋지 않으랴?’라고 하였습니다. 저와 숙정·시영도 과연 손을 모아서 빌기를 ‘이와 같이 된다면 너무나 다행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11월의 신사에는 서강(西江)의 무녀 【오례이다.】 가 이렇게 하였고, 2월에 신당(神堂)을 철거하자 금천교(禁川橋) 가에 사는 무녀가 하였는데, 철생(鐵生)이 그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또 전의 심문한 내용과 여러 사람들의 말을 가지고 시영을 형신하였으나 시영이 기꺼이 자복하지 아니하고, 축생이 찬(饌)을 마련한 것과 희빈이 손을 모아 기도하며 축원하였다는 것은 시인하면서 오히려 말하기를,
"그 기도 축원하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또 무녀 오례가 신사를 행하였다는 것은 시인하면서 단지 말하기를,
"좌윤(左尹) 장희재가 빨리 석방되기를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을 뿐입니다."
하였다. 이에 숙정이 자복하지 아니하므로, 압슬형(壓膝刑)을 한 차례 행하고 심문하니, 그제서야 대답하기를,
"지난해 9, 10월 사이에 오례의 집에 갔더니, 오례가 왕신(王神) 【무신(巫神)의 호(號)이다.】 의 관대(冠帶)와 붉은 치마를 입고 춤을 추면서 축원(祝願)하기를, ‘9, 10월 사이에 중전이 승하하고, 희빈이 전의 자리대로 되리라.’ 【전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라고 하였고, 축생과 시영도 또한 손을 모으고 ‘참으로 다행이다. 참으로 다행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례에게 점을 친 일은 이달 19일에 있었고, 과연 희빈의 명령으로 무수리와 비자(婢子)를 보내어 오례를 맞이해 묻기를, ‘근래에 취선당(就善堂)이 저절로 울리고, 옥에 갇힌 궁녀가 많으며, 재변(災變)도 또 많다. 그리고 요사이 대궐 안의 여러 곳을 모조리 조사하여 파헤치니, 장차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하니, 오례가 ‘우리가 신당(神堂)을 철거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큰 이변이 생기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어 자근례(者斤禮)가 전에 대답한 것이 여전히 상세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다시 형신(刑訊)을 더하니, 비로소 대답하기를,
"오례가 갓과 수의(繡衣)·붉은 치마를 입고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왕신(王神)의 첩(妾)인데, 기해생(己亥生)은 곧 나의 자손이다. 마땅히 남몰래 도움을 내려 내상고(內廂庫)를 기해생(己亥生)에게 옮겨 주소서.’라고 하였으며, 또 사살신(四殺神)이라고 일컫고, 활과 화살을 잡고 북쪽을 향해 마구 쏘면서 ‘신(神)께서 바야흐로 나가서 사냥하신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태자방이 설치한 신당에서 축원한 바는, 희빈이 다시 중궁이 되고 사도(使道)가 바다를 건너 석방되어 돌아와 훈련 대장(訓鍊大將)이 되며 세자(世子)를 안녕(安寧)하게 해 달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오례가 신사를 설행할 때 또 활과 화살을 잡고 마구 쏘면서 ‘내가 마땅히 민씨(閔氏)를 죽이겠다.’라고 하였고, 서씨(徐氏) 【서설향(徐雪香).】 가 흰 비단 장삼(長衫)으로 제석(帝釋)을 위하여 일어나 춤을 추었으며, 저도 부(缶)258) 를 두들기면서 같이 참여하였습니다. 숙정은 큰 무수리와 입을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소근거렸는데, 이어서 태자방의 딸로 하여금 서찰(書札)을 만들어 희빈방에 보내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0책 35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614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궁관(宮官) /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上御仁政門親鞫。 以五禮言, 刑訊貞, 未準一次, 貞曰: "上年四月, 張希載妾與新巫 【指五禮。】 及車姓宮人, 乘轎而來, 同行神祀, 所祝則閔中殿昇遐, 禧嬪復爲中殿, 使道蒙放而還也。 仍言: ‘吾易圖使道放還。 使道放還, 則禧嬪之復爲中殿, 有何難事?’ 問于者斤禮, 可知之。 且當其祈祝也, 車姓宮人與年少宮人, 着紅衣起舞, 而新巫持弓矢亂射曰: ‘吾已射閔中殿。 今年八九月, 使道當還, 且多好事。’ 諸人抃手曰: ‘幸甚幸甚。’ 新巫與淑正及二宮人及絃手等, 鎖房門暗暗祈祝, 俺固不得聞其辭語耳。" 遂以壽長與貞之言, 刑訊五禮, 五禮對曰: "果與韓尙宮等及希載妾, 頻行神祀。 自太子房生時, 設神堂置弓矢, 及太子房死, 其神降于俺, 俺遂立其神廳, 持弓矢祝之曰: ‘閔中殿旣入於鐵網, 已見于吾目中, 當觀八九月間矣。’ 蓋淑正及大水賜、韓尙宮等皆謂俺曰: ‘請以殺閔中殿, 禧嬪復爲中殿之意祝之。’ 故俺果用其言, 所謂房中暗祝, 亦是此意。 此外龐災 【俗以巫祝、魘魅、蠱毒之術, 謂之龐災。 蓋取龐祚詛孫臏之意也。】 之事, 俺素不學。 聞淑正行龐災於宮內。 又聞希載妻兄弟, 行龐災於墓山, 旋卽發覺。 今月十九日, 淑正招俺而問曰: ‘龐災處處爲之, 今雖搜捉, 不能得。 吾父祖之神, 不佑而然, 龐災之說已出, 可憂也。 若或反中, 【謂其災反歸於主其事者。】 則奈何? 試爲我卜吉凶。’ 俺卜之曰: ‘九月之晦, 當不吉矣。" 遂拿者斤禮而問之, 對曰: "本以太子房絃手, 上年五六月, 同行神祀, 淑正及大上典 【俗稱宮人爲上典, 指時英。】 大水賜與太子房同坐, 祝張使道速爲渡海。 其後五禮行神祀時, 淑正等諸人, 又同參而祝之, 以佑騭己亥生。 【張氏生己亥。】 五禮佩弓矢出門外, 自稱四殺神, 【巫神之號。】 有所祈祝, 語低不可詳。 大上典叱之曰: ‘汝何爲斬頭之言耶? 禧嬪旣有世子, 有何可傷之事乎?’ 上年六月, 五禮謂淑正曰: ‘十月當使有雷動, 願得賞賜。’ 淑正曰: 苟如是, 當重賞之。 其必陰助世子與己亥生也。’ 十二月, 五禮謂淑正曰: ‘十月果雷, 而何不與我賞乎?’ 淑正曰: ‘雖雷, 有何可貴者而賞汝乎?’ 今年正月, 五禮謂淑正曰: ‘今年己亥生有三災, 【巫卜家言。】 愼勿復行神祀。’ 及太子房之夫逐五禮, 神堂遂空。 二月移之于禧嬪宮矣。" 拿張家奴玉姓者以至, 其名學玉。 以壽長言問之, 對曰: "奴在外, 神祀事在內, 內外隔絶, 不得聞知。" 拿張家婢信月 【卽正月母也。】 又以壽長言問之, 對曰: "新自鄕來, 不知凡事本末。 神祀時未嘗參見也。" 乃以壽長、貞及五禮言, 刑訊淑正, 一次不服。 以前所問者及諸人言, 刑訊丑生, 乃自服曰: "上年九日、冬至, 今年二月初吉, 每於四更, 俺設饌於就善堂西井邊, 以進于禧嬪寢室, 則禧嬪與淑英、時英, 攅手祝曰: ‘願釋怨心。 近來所願, 卽殺閔中殿。’ 若太子房神堂, 淑正常主之。 上年十一月神祀時, 巫女着笠衣紅衣持弓矢舞且射曰: ‘吾當殺閔中殿。 閔中殿若死, 豈不好哉? 豈不好哉?’ 俺與淑正、時英, 果攅手曰: ‘如此則幸幸。’ 蓋十一月神祀, 江巫 【五禮。】 爲之, 二月撤神堂, 禁川橋邊巫女爲之。 鐵生知其名矣。" 又以前所問者及諸人言, 刑訊時英, 不肯服, 以丑生設饌及禧嬪攅手禱祝爲是, 而猶曰不聞其禱祝之辭。 又以巫女五禮行神祀爲是, 而只曰聞其祈左尹希載之速放而已。 乃以淑正不服, 壓膝一次而問之, 乃對曰: "上年九十月間, 往五禮家, 五禮着王神 【巫神之號。】 冠帶及紅裳, 舞而祝之曰: ‘九十月間, 中殿昇遐, 禧嬪依前坐。’ 【謂復前位。】 丑生及時英, 亦攅手曰: ‘幸甚幸甚。’ 問卜於五禮事, 今月十九日, 果以禧嬪之令, 送水賜及婢子, 邀五禮以來, 問之曰: ‘近來就善堂自鳴, 宮女多就囚, 又多災變。 且近日闕內諸處, 盡爲搜掘, 吉凶將如何?’ 五禮曰: ‘撤吾神堂之故, 有此大異’ 云矣。" 乃以者斤禮前所對者猶不詳, 更加刑訊, 始對曰: "五禮着笠與繡衣、紅裳, 自言曰: ‘吾爲王神之妾, 己亥生, 乃吾之子孫也。 當降冥佑, 移內廂庫於己亥生。’ 又稱以四殺神, 持弓矢向北亂射曰: ‘神方出獵。’ 蓋太子房設神堂所祝, 則禧嬪復爲中宮, 使道越海放還, 爲訓鍊大將, 世子安寧而已。 五禮設祀時, 又持弓矢亂射曰: ‘吾當殺閔氏。’ 徐氏 【雪香。】 持白綃長衫, 爲帝釋起舞, 俺擊缶同參。 淑正與大水賜附耳細語, 仍令太子房之女, 作書送于禧嬪房矣。"
- 【태백산사고본】 40책 35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614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궁관(宮官) /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