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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35권, 숙종 27년 3월 22일 기유 1번째기사 1701년 청 강희(康熙) 40년

이사영·이인엽이 마천령·철령·성진 등을 요새화하여 북방에 힘쓸 것을 건의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특진관(特進官) 이사영(李思永)이 말하기를,

"북도를 방어하여 지키는 데 근심스러움이 있으니, 무릇 저들은 옛날 번호(蕃胡)와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만약 급한 경보(警報)가 있어 회령(會寧)으로부터 곧장 큰길로 달려나온다면 철령(鐵嶺) 이북 천여 리의 요해처(要害處)에 지키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도신(道臣)이 일지(一枝)의 외로운 병사을 가지고 어떻게 능히 대적하겠습니다까? 음우(陰雨)053) 의 계책은 반드시 평소에 갖추어야 할 것이니, 마땅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강정(講定)하게 하소서. 또 박하천(朴下川)무산(茂山)의 서남 40리에 있는데, 땅이 매우 기름지고 비옥(肥沃)하며 인하여 초피(貂皮)와 산삼의 이익이 있어 간민(奸民)으로서 함부로 들어온 자가 거의 백여 호(戶)에 이르고 있습니다. 지름길로부터 곧바로 경성(鏡城)에 이르면 백여 리에 불과하고, 영고탑(寧固塔)과 거리가 또한 6일 정(程)이 되니, 다른날 적(敵)이 이 길로 말미암아 경성(鏡城)을 막아 끊는다면 부령(富寧) 이북은 우리 나라 땅이 아니게 됩니다. 옥련보(玉連保)는 요충(要衝)이 아니니, 마땅히 박하천(朴下川)으로 옮겨 설치해야 할 것이며, 함부로 들어온 백성을 진졸(鎭卒)로 삼는다면 편리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성진(城津)은 적(敵)이 꼭 노리는 땅이고, 길주(吉州)는 감사가 행영(行營)하던 옛터인데 지금 만일 다시 시설하여 성을 쌓고 못을 파며 식량과 기계를 갖추어 성진(城津)과 협력하여 지키게 하면 위급할 때에 힘을 얻을 수가 있고, 또 남병사(南兵使)로 하여금 나누어 마천령(磨天嶺)을 지키게 한다면 적이 어찌 날아서 넘어오겠습니까? 다만 요즈음 성진(城津)의 첨사(僉使)는 낮고 미천한 유가 많아서 목사(牧使)로 더불어 서로 대항하지 못하고 사졸 역시 본주(本州)의 침해를 당하여 스스로 보전하기 어려운 형편이니, 마땅히 첨사(僉使)를 가려 보내야 합니다."

하였으며, 동경연(同經筵) 이인엽(李寅燁)이 말하기를,

"북로(北路)의 관방(關防)은 마천령(磨天嶺)철령(鐵嶺)성진(城津)보다 나은 데가 없습니다. 성진은 곧 신의 조부 이시발(李時發)이 방백(方伯)으로 있을 때에 영축(營築)한 것인데, 만일 다시 수치(修治)하여 경기(經紀)로 삼는다면 반드시 요해처(要害處)가 될 것이고, 행영(行營)은 별안간 설치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첨사(僉使)만은 더욱 마땅히 극히 가려 보내야 할 것입니다. 대저 마천령(磨天嶺)철령(鐵嶺) 두 재는 실로 하늘이 설치한 험한 요새로서 포기하기에는 아까우니, 마땅히 그 공어(控禦)할 방법을 강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묘당(廟堂)에 명하여 확실하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이사영(李思永)이 말하기를,

"함경도(咸鏡道)육릉(六陵)054) 참봉(參奉)을 모두 생원과 진사로써 제수하고 임기가 만료되면 도로 유생(儒生)이 되어 마땅히 이들을 차례로 준원전(濬源殿)055) 의 참봉으로 옮겨준다면 여러 사람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해조에 명하여 품의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9책 35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592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인사-관리(管理)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註 053]
    음우(陰雨) : 미리 위험한 것을 방비함.
  • [註 054]
    육릉(六陵) : 함경도에 있는 여섯 능(陵). 함흥의 덕릉(德陵)·의릉(義陵)·순릉(純陵)·정릉(定陵)과 안변의 지릉(智陵), 문천(文川)의 숙릉(淑陵)임.
  • [註 055]
    준원전(濬源殿) : 태조(太祖) 탄생 때 태(胎)를 묻었던 곳에 세운 조선 왕조 발상(發祥)을 기념하던 전각. 함경도 영흥(永興)에 있었는데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奉安)하였음.

○己酉/御晝講。 特進官李思永曰: "北路防守, 有可憂者。 夫彼中非昔日蕃之比, 脫有警急, 當自會寧, 直馳大路。 鐵嶺以北千餘里, 無一人守於要害處, 道臣以一枝孤兵, 安能抵敵? 陰雨之計, 必須素具, 宜令廟堂講定。 且朴下川在於茂山西南四十里, 而土甚膏沃, 仍有貂、蔘之利, 奸民冒入者, 殆至百餘戶。 自徑路直抵鏡城, 則不過爲百餘里, 距寧固塔, 亦爲六日程。 他日賊由此路, 遮截鏡城, 則富寧以北, 非我國之有也。 玉連堡不在要衝, 宜令移設於朴下川, 仍以冒入之民, 爲鎭卒則爲便。" 又曰: "城津爲必爭之地, 而吉州是監司行營舊地。 今若復設, 而築城池儲糧械, 與城津協守, 則緩急可以得力, 且使南兵使, 分守磨天嶺, 則賊豈能飛度耶? 但近者城津僉使, 多是卑微之類, 與牧使不能相抗, 土卒亦皆被侵於本州, 勢難自保, 僉使固宜擇差。" 同經筵李寅燁曰: "北路關防, 無過於磨天鐵嶺城津, 而城津卽臣祖臣時發, 爲方伯時所營築者。 若復修治經紀, 則必爲要害立地, 行營雖不可猝設, 僉使則尤宜極擇差遣。 若夫兩嶺, 實爲天設之險, 抛棄可惜, 宜令講究其控禦之道。" 上竝命廟堂確議。 思永曰: "咸鏡道六陵參奉, 皆以生、進差除, 及滿官, 還爲儒生。 宜以次遷濬源殿參奉, 則可慰衆心。" 上命該曹稟處。


  • 【태백산사고본】 39책 35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592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인사-관리(管理)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