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경연 이여가 오시복 등을 서용한 일의 부당함을 아뢰다
주강에 나아갔다. 장령 김덕기(金德基)가 앞서 아뢴 오시복(吳始復)의 일을 거듭 아뢰니, 임금이 처음에는 윤허하지 않았다. 동지경연(同知經筵) 이여(李畬)가 나아가 아뢰기를,
"근자에 내린 비망기(備忘記)에서 간곡하고 진지한 말씀으로 진심을 열어 보이시니, 어찌 성의를 다해 받들려 하지 않겠습니까? 조정의 신하로서 당파의 논의에 병든 자를 비록 모두 버릴 수는 없으나, 무릇 사람을 쓰는 도리로 볼 때 아무 하자가 없는 자와 죄명이 조금 가벼운 자를 먼저 써야 하고, 중한 죄인에 이르러서는 햇수가 오래된 후에도 역시 수종(首從)080) 을 가려서 점차 선별해 써야 할 것입니다.
지금 오시복(吳始復) 등 여섯 사람은 그 죄가 국체(國體)에 크게 관계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기묘년081) ·을사년082) 사이에 사화(士禍)가 자주 일어났고, 많은 간사한 무리가 번갈아 나와 훌륭한 선비를 죄에 얽어 해쳤으니, 백년 뒤에도 오히려 원통하고 분해합니다.기사년083) 의 화(禍)는 기묘·을사 사화에 비하여 더욱 심하였으니, 선왕(先王)084) 의 고명(顧命)을 받든 원신(元臣)과, 3조(三朝)085) 에 걸쳐 예로서 존경하던 큰 선비를 오시복 등이 한 번의 상소로 얽고 무함하여 끝내 차례로 화를 입혔던 것인데, 얼마 되지도 아니하여 곧 도로 수록(收錄)하는 것은 한때의 인심을 거역하고 답답하게 할 뿐만 아니라, 후세 사람들이 장차 오늘날 조정의 처사를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전일의 비망기 속에 두 어진 신하를 무방하고 욕한 자는 종중 논죄(從重論罪)하라는 뜻으로 전교를 내리셨습니다. 송시열(宋時烈)의 학문의 깊고 얕음을 두 어진 신하에 비하여 어떤지 알지 못하겠으나, 얽어서 죽인 죄는 무함하고 욕한 죄보다 심한 것인데, 지금 만약 이 무리들을 거두어 쓴다면 결국에는 탕평(蕩平)하고 건극(建極)하는 본의(本義)에 어긋나게 될 것이니, 빨리 대간(臺諫)의 계청(啓請)을 윤허하시어 공의(公議)를 후련하게 하여 주소서. 이것이 바로 모든 신하들의 소망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오시복 등이 유현(儒賢)과 대신(大臣)을 얽어 죽인 것은 대단히 마음 아픈 일이다. 나 역시 이를 모른 바 아니지만 지난번에 내린 비망기에 이미 탕평의 뜻을 보였고, 또 세월도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특별히 서용(敍用)하라고 명한 것이다. 그러나 양사(兩司)가 이와 같이 굳게 간쟁하고 공의(公議)도 거의 모두 승복하지 않으니 또한 대비(臺批)에도 억지로 물리칠 수도 없다."
하고, 계달한 대로 하라고 고쳐 내렸다. 대개 이여의 경연에서 대답과 장주(章奏)는 거의가 정밀 자상하고 매우 긴절하여 임금의 마음을 계발(啓發)한 적이 많았다. 그런 까닭에 지금 청을 따른 것도 모두 이에 힘입었다고 한다. 당초 조정의 논의가 기사년에 관계된 여러 사람의 죄를 말끔히 씻어주고 조화롭게 화합하여 거두어 쓰려고 하자, 최석정(崔錫鼎)이 더욱 이를 극력 주장하여 김창협(金昌協)에게 편지를 보내 물으니, 김창협은 주자(朱子)가 정명도(程明道)의 설을 논한 것을 인용하여 반박하였으나, 최석정이 건백(建白)으로 오시복 등의 서용을 청한 것이다. 오시복은 바로 기사년 당시의 경재(卿宰)가 상소한 가운데 한 사람이며 김수항(金壽恒)을 안률(按律)할 것을 청했던 자이다. 김창협은 이에 최석정에게 편지를 보내어 절교하며 이르기를,
"오늘의 이 일은 실로 합하(閤下)의 건백에서 나온 것으로서, 비록 그 깊고 먼 생각과 계책이 나라를 진정시키려는 데 급급하여 저 깊은 지하에 사무친 억울함과 필부의 지극한 아픔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을 것이나, 작은 나의 사사로운 의리로는 다시 옛 정의를 온전하게 함은 용납되지 않는 것이니, 기부(記府)086) 의 물음도 이로부터 마땅히 끊어져야 할 것입니다. 합하의 그 날의 물음은 어떤 일을 하고자 하여 물은 것인데도, 김창협은 이를 알지 못하고 경망하게 대답하였으니, 그 혼미하고 그릇됨이 심하다고 이를 만합니다. 그러나 그윽이 괴이하게 생각되는 것은 합하가 물을 것이 아닌 것을 물었던 것입니다. 대저 어떤 사람이 남의 어버이를 죽였는데, 자신은 죽인 사람을 용서하고, 또 그를 총애하려고 죽음을 당한 사람의 아들에게 ‘옳으냐, 옳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 아들이 ‘옳지 않다.’고 대답한다면 사람들의 공언(公言)과 다르게 되고, 그 ‘옳다.’고 대답한다면 또한 짐승만도 못하게 됩니다. 두 가지에 하나도 옳은 것이 없는데, 이를 묻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혹시 우선 이것으로 사람을 시험해 보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합하의 사람 대함이 역시 매우 성실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김창협의 아우 김창흡(金昌翕) 역시 편지로써 최석정의 마음 씀씀이를 빠짐 없이 열거하였는데, 더욱 통쾌하였다. 대략에 이르기를,
"옛날 나의 증조부 【김상헌(金尙憲)이다.】 는 새 황제(皇帝)에게 잘 아첨하지 않는다 하여 귀하의 조부 지천(遲川) 상공(相公) 【최석정(崔錫鼎)의 조부 최명길(崔鳴吉)이다.】 에게 큰 미움을 받았고, 억지 웃음 속의 노여움이 국서(國書)를 찢던 날 가득히 담겨 있었고087) , 밀치고 누르던 손이 복상(卜相)을 삭제하던 날 차츰 드러났습니다. 유석(柳碩)과 이도장(李道長)의 무리가 그 비위를 맞추어 고슴도치처럼 몰려들어 물여우[蜮]의 독기를 뿜어내며 기필코 나의 증조부를 해치려 하였으나, 다행히도 하늘의 정함이 견고하고 인묘(仁廟)께서 지극히 총명하시어 증조부께서 큰 화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지천공(遲川公)이 패합(捭闔)088) 에 능숙하여 이를 죽이고 살리는 데 잘 이용하였음에도 그 계책이 또한 다 행하지 못한 것이 있었는데, 유독 그 자손에게 준 계책이 흉악한 무리의 기세를 배양해 왔으며,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 여파(餘波)가 한없이 넓고 크게 퍼졌습니다. 저 유석·이동장의 무리의 잔당들이 더욱 번성하고 극성스러워져 우익(羽翼) 이외에 또다른 우익이 생겨났는데, 그 중에서도 한(漢)나라의 얼굴에 오랑캐의 마음을 가지고 겉으로는 외면하면서도 은밀하게 비호(疪護)한 자 【소론(少論)을 가리킨다.】 들이 그들을 보호하고 방어함에 이르러서는 더욱 힘이 있었습니다.
나의 선인(先人)께서는 홀로 충직(忠直)한 길을 지키면서 그 가운데 서서 눈앞에 이해(利害)가 가득하다 하여 몸에 배이도록 익혀온 선대의 유훈을 조금도 바꾼 적이 없었으니, 어찌 갑자기 닥친 화를 면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 선인이 당한 화는 그 유래한 바가 멀고 얽어 만든 자가 많습니다. 경신년으로부터 기사년까지 진실로 은밀히 도운 자가 있어 그들의 일이 성취되었음을 기뻐하여 소곤소곤 술잔을 들어 경하하였고, 기사년으로부터 갑술년(甲戌年)까지 역시 크게 기뻐하지 않는 자가 있어 그 일이 뒤엎어졌음을 민망히 여겨 급히 머리를 풀고 구원(救援)했던 것이니, 앞서 이른바 겉으로는 외면하면서 은밀하게 비호한 자들이 여기에 과연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합하의 형적(形迹) 역시 십중팔구는 의심스러운 데 관계됩니다. 속으로는 이미 교칠(膠漆)같이 지냈으니, 겉으로 비록 부월(斧鉞)로써 그들을 치려 하여도 진실로 억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역시 이미 그들과 모의를 같이 하였고, 그 이익을 나누었으니, 그들과 어깨를 견주며 동행하지 아니하여도 정이야 어찌 잠시인들 잊겠습니까?
오늘날 과연 모두 씻고 털어서 끌어들이면 죄가 없다고 말할 뿐 아니라, 다시 그들의 공로를 무언 중에 상찬(賞贊)할 것이니, 합하의 심술(心術)이 여기서 그 전모가 다 드러났습니다. 합하는 지금 또 선대의 교훈을 계승하여 밝히고 사문(師門)을 세우는 것으로써 【최석정은 곧 남구만(南九萬)의 문생(門生)이다.】 능사로 삼고 있는데, 어느 겨를에 사화(士禍)를 근심하고 아파하며 나라의 명맥(命脈)을 아끼겠습니까? 인후(仁厚)로써 군자를 대접하고 법제로써 간흉한 무리를 징계해야 하는데도 지금은 모든 것이 그 반대가 되었으니, 이택당(李澤堂)089) 의 이른바 거꾸로 행하고 거슬러 베푼다는 말이 어찌 이러한 일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합하의 행위는 오히려 매우 명쾌하지 못한 바가 있으니, 그 마음을 관찰하면 마음속에 깊숙이 감추어진 것이 모두 드러나지 아니한 것이 없고, 그 행위를 추적하면 반간(半間)도 한계를 짓지 않은 것이 있음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들이 과연 소인(小人)이라면 나는 억울하게 되어 저들의 죄를 다스려야 하고, 내가 만약 어질지 않고 바르지 않다면 저들은 나를 법으로 묶어 내가 패하는 것은 진실로 당연합니다. 요컨대 이 세상에서 둘이 공존할 수 없는 것인데, 지금 이와 같은 조치를 하고자 하면, 차라리 과거의 옥안(獄案)을 모두 번복하여 국시(國是)를 시원하게 정하고, 성상의 교지(敎旨) 중에 흡족하지 않았던 것도 빨리 반한(反汗)090) 을 청할 것이며, 스스로 과거의 논의가 잘못되고 합당하지 않았던 것도 역시 분명히 자백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하여 소인을 소인이 아니라 하고 해독을 입은 사람이 어진 사람도 아니고 바른 사람도 아니었다고 뒤집어 엎은 연후에 차례로 거행한다면, 스스로 일이 되어 나갈 것인데, 어찌하여 이렇게도 급급하게 한단 말입니까?
갑술년 이후부터 대신을 높이 반드는 도리를 하늘처럼 높이하여 황상(黃裳)091) 에도 침을 뱉을 수 있고 역린(逆鱗)092) 도 친압(親狎)할 수 있게 되니, 말 한 마디가 정승과 관계될 겨우 차꼬를 채우지 않으면 먼 변방으로 귀양보냈습니다. 대신의 소중함이 이와 같아 대신을 범한 자는 곧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선인의 화벽(化碧)의 한(恨)093) 이 지하에 영원히 맺혀 있는데, 저 흉악한 무리의 붉은 슬갑[朱芾]은 여전히 휘황하게 진신(搢紳) 사이에서 빛나고 있으니, 오늘날 대신된 자가 어찌 차마 이를 보고 있단 말입니까? 똑같은 대신인데 어떤 사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사람은 썩은 풀보다도 가벼우니, 아! 어찌 이처럼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까? 혹 오늘날의 대신이 지난날의 대신보다 본시 소중함이 있어서입니까, 아니면 멀어진 사람은 홀대하기 쉽고 가까이 있는 사람은 업신여기기 어려운 탓입니까? 아니면 오늘날의 도리는 지난날의 도리가 아니며, 들어오는 자는 주인이 되고, 나가는 자는 노복이 되어서 그러합니까?
대개 일찍이 자전(慈殿)을 관속(管束)한 적이 있었으므로 선인이 그들의 칼날 같은 기세를 저촉하면서 토벌할 것을 청하였고, 나약한 임금이라고 대행 대왕(大行大王)094) 을 무함(誣陷)하였으므로 선인이 명을 받들어 그들의 죄를 다스렸습니다. 이러한 도리는 오늘날 묘당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역적을 비호해 육성하며 제 몸을 아끼고 군왕은 뒷전으로 돌리는 것과는 진실로 다른 것이 있으니, 별다른 사의(事宜)가 있는 것입니다. 그 중하게 여김이 이와 같고 그 가볍게 여김이 이와 같으니, 또한 세도(世道)를 관찰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세상의 여론이 이미 이와 같다면, 선인이 어질지도 않으며 바르지도 않다는 것과 저 흉악한 무리들이 소인이 아니라는 것을 가지고는 본시 시비할 것이 없으나, 감히 묻건대, 선인이 합하에게 미움을 받은 것은 무슨 일이었으며, 저 흉악한 무리들이 합하에게 덕을 입은 것은 무슨 일이었습니까? 저 흉악한 무리의 공적과 능력은 달리 보이지 않고, 특히 선인(先人)을 해친 것에서만 드러났는데, 합하로부터 칭찬받고 기용되었다면, 선인을 해친 사람은 정(鄭)나라의 원수가 아니요 바로 자서(子西)입니다.095) 그렇다면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니, 어찌 한 간(一間)의 차이뿐이겠습니까? 이처럼 이미 드러난 면모(面貌)에 의거하여 과거의 행적을 더듬고, 다시 기타의 맥락(脈絡) 관계를 참작 고찰하여 숨겨 둔 장물을 뒤추적하여 보면, 앞서 이른바 술잔을 들어 서로 경하하고 머리를 푼 채 달려가 구원한 자가 결단코 다른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십중팔구 그러리라고 의심했던 자가 지금은 십분(十分) 결정적이어서, 전해 오던 이런저런 말들을 확실히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도 역시 간특함이 드러나는 데서 마음이 약해지고 바른 것과 견주는 데서 담이 작아지는 자가 있어서, 언행이 겉과 속이 일치하지 못하고, 마음을 운용(運用)함에 있어 분열됨을 면하지 못하게 되면 크게 검은 속 한 변두리에 미약한 흰 점을 남겨 두고, 길게 굽은 끝머리에 조금 곧은 것을 붙여 두었습니다. 마음은 검으면서도 옥(玉)이 검다고 비웃는 것을 두려워하여 얼굴을 돌려 아양을 떨며 말하기를, ‘나도 흰 것을 좋아 한다.’하고, 본심은 굽어 있으면서 현(絃)이 굽었다고 질책하는 것이 두려워서 허리를 펴고 앞을 향하여 말하기를, ‘나도 곧은 것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하는 등 이러한 방법으로 꾸미고는 스스로 이르기를, ‘유리한 지점(地點)을 교묘하게 점거하였다.’라고 하면서 중용(中庸)을 가장하지만, 유식(有識)한 사람이 곁에서 볼 때 순전히 검고 완전히 굽은 것보다 과연 크게 낫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합하는 평소에 표리(表裏)가 다른 태도와 안색을 잘 지어서 사람을 부리곤 하였는데, 평범한 이야기 가운데서도 말이 선인에게로 미치면 온화한 태도로 예모(禮貌)를 갖추어, ‘문생(門生)096) ’·‘좌주(座主)097) ’로 일컬었고, 불녕(不佞)098) 에 대해서도 본래 젊은 벗으로 대하면서 친밀하게 기리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세가 다시는 이와 같이 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감히 먼저 짧은 서간으로 주목(朱穆)의 고의(古義)에 붙일 뿐이며, 감히 〈합하가〉 회답을 번거롭게 보내시어 체면을 손상케 하는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김창흡(金昌翕)의 편지가 온화해서 핍박하지 아니하여 고약한 소리를 내지 않은 의(義)를 얻은 김창협만 못하지만, 그 골수(骨髓)를 깊이 찔러 소인의 심간(心肝)을 깎아낸 것은 명백하고도 정직하여 더욱 사람의 마음을 경계할 만하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4책 32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489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역사-고사(故事)
- [註 080]수종(首從) : 주범과 종범.
- [註 081]
기묘년 : 1519 중종 14년.- [註 082]
을사년 : 1545 명종 즉위년.- [註 083]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註 084]
선왕(先王) : 현종(顯宗).- [註 085]
3조(三朝) : 인조(仁祖)·효종(孝宗)·현종(顯宗).- [註 086]
기부(記府) : 의정부(議政府)의 별칭으로, 여기서는 최석정을 가리킴.- [註 087]
억지 웃음 속의 노여움이 국서(國書)를 찢던 날 가득히 담겨 있었고 : 병자 호란(丙子胡亂) 당시 주화파(主和派)에서 작성한 청나라에 대한 국서(國書)를 김상헌(金尙憲)이 찢으며 주전파(主戰派)의 입장을 내세우던 일을 말함.- [註 088]
패합(捭闔) : 전국 시대에 귀곡자(鬼谷子)가 주장한 변론술(辯論術)로서, 원래의 뜻은 열고 닫음. 변론의 개폐(開閉)·억양(抑揚)·허실(虛實)이 끝없이 이어지므로 지어진 이름.- [註 089]
이택당(李澤堂) : 이식(李植).- [註 090]
반한(反汗) : 명령을 취소하는 것. 한 번 나온 땀은 도로 들어갈 수 없지만 나온 땀을 들여보내는 것처럼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 명령은 회수(回收)되어야 한다는 비유. 흔히 왕명(王命)의 취소를 요청하는 데 쓰임.- [註 091]
황상(黃裳) : 《주역》 곤괘(坤卦) 육오(六五)의 효사(爻辭)에 나오는 말로 왕후(王后)의 정위(正位), 곧 왕후를 뜻함.- [註 092]
역린(逆鱗) : 용(龍)의 턱 밑에 거슬러서 난 비늘이 있는데, 이것을 건드리면 노하여 건드린 자를 죽인다 함. 즉 제왕(帝王)의 분노에 비유됨.- [註 093]
화벽(化碧)의 한(恨) : 주(周)나라 경왕(敬王) 때의 대부(大夫)인 장홍(萇弘)이 왕게게 간하다가 죽음을 당했는데, 그의 피가 벽색(碧色)으로 변했다는 고사. 곧 충성을 다하다가 살신(殺身)함을 이르는 말.- [註 094]
대행 대왕(大行大王) : 임금이 죽은 뒤 아직 시호를 올리기 전의 칭호. 여기서는 현종(顯宗)을 말함.- [註 095]
선인을 해친 사람은 정(鄭)나라의 원수가 아니요 바로 자서(子西)입니다. : 춘추 시대 정(鄭)나라의 자사(子駟)가 국정을 잡자,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울지(尉止)·사신(司臣)·후진(候晉)·도녀보(堵女父)·자사복(子師僕) 등이 난을 일으켜 자사·자국(子國)·자이(子耳) 등을 죽이고 정백(鄭伯)을 협박하여 북궁(北宮)으로 가게 했는데, 자사의 아들 자서(子西)가 이 소식을 듣고 시체를 거두어 들인 뒤 북궁으로 들어가 난을 일으킨 고사. 곧 정나라에서 난을 일으킨 것은 울지·사신 등이지만 그 난을 일으키게 한 것은 자서(子西)의 아버지인 자사(子駟)이었음. 여기서는 나라를 어지럽힌 자는 오시복 등이지만 그 원인이 된 것은 최석정이라는 뜻임.- [註 096]
문생(門生) :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고시관(考試官)에 대해 자신을 이르는 말.- [註 097]
좌주(座主) :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시관(試官)을 이르는 말. 은문(恩門)이라고도 함.- [註 098]
불녕(不佞) : 자기의 겸칭(謙稱).○壬戌/御晝講。 掌令金德基, 申前啓吳始復事, 上始不允。 同知經筵李畬進曰: "頃日備忘, 辭意勤摯, 赤心開示, 豈不欲至誠奉承乎? 朝臣之病於黨論者, 雖不可盡棄, 而凡用人之道, 唯當先用無故者及罪名稍輕者, 至於重罪, 則年久之後, 亦宜別其首從, 漸次甄錄。 今始復等六人, 其罪大關國體。 我朝己卯、乙巳年間, 士禍屢作, 群奸迭進, 構害善類, 百載之下, 尙切痛惋。 己巳之禍, 比己卯、乙巳, 尤有甚焉。 先王顧命之元臣, 三朝尊禮之大儒, 始復等以一疏構誣, 終使次第被禍, 而曾未幾何, 乃反收錄, 不但一時之人心咈菀, 後世之人, 將以今日朝廷擧措, 爲何如耶? 前日備忘中, 以誣詆兩賢臣者, 從重論罪之意爲敎。 宋時烈學問淺深, 未知此兩賢如何, 而構殺之罪, 甚於誣詆。 今若收用此輩, 則終有乖於蕩平建極之義, 亟允臺啓, 以快公議, 是群下所望也。" 上曰: "始復等構殺儒賢、大臣, 殊甚絶痛。 予亦非不知此, 而頃下備忘, 旣示蕩平之意, 且歲月已久, 故有特敍之命矣。 兩司爭執如此, 公議擧皆未允, 亦不可强拂" 臺批。 以依啓改下。 蓋畬筵對、章奏, 類多精詳剴切, 開發上心, 故今此準請, 蓋亦賴此云。 初朝議欲蕩滌己巳諸人之罪, 調合收用, 崔錫鼎尤力主之, 書問於金昌協, 昌協引朱子論程明道之說以折之, 及錫鼎建白, 請敍吳始復等。 始復卽己巳卿宰疏中人, 請按律金壽恒者也。 昌協乃貽書錫鼎絶之曰: "今日事, 實出閤下建白, 雖其深慮遠計, 急於靖國, 未暇顧夫九地之沈冤, 匹夫之至痛, 而區區私義, 不容復全舊好, 記府之問, 當自此絶矣。 閤下當日之問, 有爲而發, 而昌協乃不知而妄對, 其昏迷謬錯, 可謂甚矣。 然亦竊怪夫閤下, 非所問而問也。 夫人殺人之親, 已則原之, 又將寵之, 而從而問其子曰, 可乎不可乎, 其曰不可乎, 則異乎人之公言, 其曰可乎, 則又禽獸之不若也。 二者無一可, 而問之何哉? 豈亦姑以是嘗試其人歟, 則閤下之待人, 亦太不誠矣。" 昌協弟昌翕, 亦以書歷數錫鼎心術, 益痛快。 其略曰:
昔我曾王父 【卽金尙憲也。】 以不能善媚新皇帝, 大見惡於尊王大父遲川相公, 【錫鼎之祖鳴吉也。】 嘻笑之怒, 載蓄於裂書之日, 擠軋之手, 稍露於削卜之辰。 碩與道長輩, 承其氣息, 蝟集而蜮射之, 必欲甘心於曾王父, 幸其天定孔固, 仁廟至明, 曾王父得免大禍。 雖以遲川公工於捭闔, 利用殺活, 而計亦有不盡行者, 獨其貽厥孫謨, 培長凶黨之氣勢者, 至於今浩浩餘波也。 蓋碩與道長輩, 遺孽餘黨, 益滋而熾, 羽翼之外, 又生羽翼, 最是漢面胡腸, 陽睽而陰比者, 【指少輩也。】 至於調護而捍衛之也, 尤有氣力。 先人則以孤忠直道, 立於其間, 曾不以利害之滿前, 而少變宿講之先訓, 則焉得免夫卒罹大禍? 嗚呼! 先人之禍, 所由來者遠, 所構成者衆? 自庚申爲己巳, 固有所幽贊之者, 喜其成也, 則竊竊酌酒而相慶, 自己巳爲甲戌, 亦有所大不悅者, 悶其覆也, 則汲汲被髮而營救, 向所謂陽睽而陰比者, 於此果有力焉, 而閤下之形迹, 亦八九分涉乎疑似。 內旣有膠漆之好, 外雖欲斧鉞其討, 誠不可强爲也。 亦旣同其謀、分其利矣, 不與之比肩周行, 情豈須臾忘乎? 果然今日, 一竝洗拂牽復, 不惟曰無可罪, 且將默賞其功也, 閤下之心術, 於是乎全體呈露矣。 閤下方且以紹明先訓, 建立師門, 【錫鼎卽南九萬門生也。】 爲能事, 奚暇夫愍痛士禍, 愛惜國脈乎? 仁厚以待君子, 法制以懲奸凶, 今乃一切反之矣, 李澤堂所謂倒行而逆施者, 豈指此等事耶? 雖然, 閤下所爲, 猶有未暢快者。 觀其心, 非不畢露底蘊, 而迹其施爲, 未免有半間不界者。 彼果宵人也, 則我爲冤而彼罪可誅, 我若非賢非正, 則彼有執而我敗固當。 要之不可兩存於天地之間, 今欲作如許擧措, 則無寧盡翻舊案, 而快定國是, 上旨之曾所未愜者, 亟請反汗, 自家前議之紕繆失當者, 亦宜分明首實, 而反覆乎宵人之非宵人, 所戕所毒之非賢非正而後, 次第擧行, 自有事在, 寧容若是怱怱乎? 甲戌以後, 崇奉大臣之道, 峻極于天, 黃裳可唾也, 逆鱗可狎也, 一語之涉乎台鼎, 非桁楊則瘴癘。 若是乎大臣之重, 而犯大臣者, 乃爲罪也。 先人化碧之恨, 永結於泉壤, 而彼凶之朱芾斯煌, 依舊於搢紳, 今之爲大臣者, 胡寧忍此? 等大臣耳, 或重於泰山, 或輕於腐草, 嗚呼! 何其懸絶也? 豈今之大臣, 固有重於昔之大臣耶? 將遠者所易忽, 而近者所難侮者耶? 抑今之道理, 非昔之道理, 入者主之, 出者奴之而然歟? 蓋嘗有管束慈殿者矣, 先人犯鋒而請討之, 有以弱主誣大行者矣, 先人奉命而按治之。 惟此道理, 誠異乎今之坐廟堂者, 護逆而育賊, 愛身而後君, 別自有事宜矣。 其重如彼, 其輕如此, 亦可以觀世道。 已矣! 時議旣如此, 則先人之非賢非正, 與彼凶之非宵人, 固無奈何, 敢問先人之所見惡於閤下者何事, 彼凶之所見德於閤下者何事? 彼凶之功與能, 他未見焉, 特著於戕害先人, 而乃蒙閤下所褒用, 則所戕害先人者, 非鄭之仇, 乃子西也。 是則當體便是, 豈但曰一間也哉? 據此已露之面, 尋其旣往之迹, 參互於脈絡之間, 覰跟其窩贓所在, 則向所謂酌酒而相慶, 被髮而營救者, 果非別人矣。 疑似之八九分者, 今則十分決矣, 傳說之所云云, 無不的然可信矣。 古亦有心弱於露慝, 膽小於角正者, 於其言行, 不能表裏一致, 而不免於用心支離, 則於是存殘白於大黑之邊, 寄寸直於長曲之端。 情則漆也而恐玉之嗤墨, 則回面而媚之曰: " 余攸好白也。" 志則鉤也而恐絃之責曲, 則伸腰而向之曰: "余未嘗不愛直也。" 以此粧點, 自謂巧占便宜, 假冒中庸, 而自有識而旁觀, 果以爲大勝於純黑而全曲者乎? 閤下平日, 善爲陰陽, 態色以籠絡人, 尋常語及於先人, 則雍容其禮曰門生座主, 於不侫, 固亦嘗待以少友而親譽之有素。 今則勢不可復爲如此, 敢先以咫尺之書, 竊附於朱穆古義, 不敢望致煩巍覆, 以損體面。
世謂昌翕之書, 雍容不迫, 有得於不出惡聲之義, 遜於昌協, 而若其剌骨洞髓, 剔出宵小心肝者, 則明白直截, 尤可以警人心云。
- 【태백산사고본】 34책 32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489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역사-고사(故事)
- [註 0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