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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31권, 숙종 23년 6월 3일 신해 1번째기사 1697년 청 강희(康熙) 36년

사군 개척 등에 관하여 영의정 유상운이 아뢰다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유상운(柳尙運)이 말하기를,

"지난번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남구만(南九萬)이 성경도(盛京圖)를 부연하여 바치고 이어서 서북(西北) 지방에 설치해야 할 일의 적합성을 진달하였습니다. 대체로 남구만이 일찍이 병조 판서가 되었을 적에 폐지한 사군(四郡)을 다시 설치하는 일로 경계를 갈라서 정한 바가 있었습니다. 신이 그때에 진달한 것이 있었는데, 신이 본 바로는 남구만과 다릅니다. 남구만의 경우는 국경을 넘어가는 죄를 범하는 것은 그곳에 사람이 없는 데에 말미암는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아무리 백성을 모집하여 들어가 살게 하더라도 모집해서 들어간 자들이 또다시 국경을 넘어가는 죄를 범한다면, 방어하고 수비하기가 어찌 더욱 어렵지 않겠습니까? 남구만이 또 저들이 급하게 돌아갈 일이 있게 되면 하필 빨리 갈 수 있는 길을 버리고 다른 나라에 길을 빌리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노성(老城)에서부터 영고탑(寧固塔)에 이르기까지는 비록 천리(千里)라고 말하지만 가까운 편이며, 바로 인가(人家)가 없는 지경입니다. 만약 우리 국경의 강(江)을 따라 진(鎭)을 설치하여 서북 지방으로 길을 통하게 한다면, 식량을 싸지 않아도 갈 수 있는데, 어떻게 다른 염려가 없다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신이 여기에서 별도로 마음에 품었던 바가 있습니다. 임진년207)선조(宣祖)의주(義州)로 거둥하였을 때에 영변(寧邊)으로 나아가 머물면서 강계(江界)로 거둥하려는 의논이 있었으며, 명나라 조정에 나아가 하소연하려다 그만두었습니다. 시대와 형세는 옛날과 지금이 다른데,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은 단지 강도(江都)뿐이고, 천하(天下)의 사변(事變)은 한이 없으니, 혹시라도 임진년과 같은 일이 있다면 어떻게 외로운 섬으로 거두어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강계 한 구역은 땅의 면적이 이미 넓으며, 서쪽으로 의주와 통하는데 험하고 좁은 길이 천리나 되고, 북쪽으로는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에 닿는데 중간에는 총령(葱嶺)이 막혀 있으며, 오직 한 면으로 남쪽의 적유령(狄踰嶺)만 지키면 실로 사방이 모두 막힌 험준한 곳으로, 촉중(蜀中)의 동서천(東西川)과 같음이 있습니다. 다만 그 북쪽은 한 줄기의 띠와 같은 좁은 시냇물이 막혀 있는데, 지금 또 사군(四郡)을 개척한다면 특별히 험한 곳에 방비를 설치하는 뜻이 아니니, 이것이 신이 남구만과 다른 점입니다. 둔전(屯田)을 설치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신의 생각도 그러합니다. 신이 일찍이 강계(江界)를 맡았을 적에 자성(慈城)에 가서 보았는데, 만약 그 묵고 황폐한 땅에다 한 둔전을 설치하여, 전토(田土)가 없는 백성들을 모아 그곳에 들어가 살면서 개간하고 농사짓게 하여 곡식 수만 석을 저축해서, 일이 있으면 때아닌 수요를 삼게 하고 흉년이 들면 진구(賑救)하는 자료를 삼도록 한다면, 어찌 훌륭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진휼을 베푸는 즈음에는 적합한 사람을 얻기가 어려우며, 백성들을 모집하여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

하고, 좌의정 윤지선(尹趾善)은 말하기를,

"신이 비록 확실하게 이롭고 해로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10년 안에는 국가의 형세를 소생시키기 어려울 듯하니,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조용히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타당하며, 갑자기 시행해야 할 일은 아니다. 그러니 우선 서북의 어사(御史)가 들어갔다가 온 뒤에 품정(稟定)하는 것이 적합하다."

하였다.

가 살펴보건대, 사군(四郡)을 폐지하여 버리고 진(鎭)을 설치하지 않은 지가 오래이다. 비록 조종조(祖宗朝)의 한창 왕성하던 때라 하더라도 오히려 지키기 어려운 염려가 있었는데, 더구나 이러한 말세에 거듭 큰 흉년을 겪은 시기를 당하여 아직도 이러한 일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미 설치한 뒤에도 그 이익은 매우 적고 그 해로움이 매우 큰 것이겠는가? 사리에 어두운 남구만(南九萬)의 말이었다. 이는 다만 남구만이 특별히 자기의 지식과 견해를 과시하려고 의사를 진달했을 뿐이며, 기필코 설치하여 시행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쓸데없는 말이 국가에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윤지선(尹趾善)의 지식은 비록 여기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의 말은 적합함을 얻은 것이었다.

유상운(柳尙運)이 말하기를,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이명(李頤命)통진부(通津府)문수 산성(文殊山城)에 전속(專屬)하도록 청하였으니, 신하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적합하겠습니다."

하고, 요상(僚相) 윤지선(尹趾善)은 말하기를,

"한 고을에 사는 백성으로 각 아문(衙門)에 구실이 있는 사람이 많은데, 만약 본부(本府)를 문수 산성에 전속시킨다면 구실이 있는 사람으로 교대할 자를 장차 어느 곳으로 이송(移送)하여야 합니까? 당초 성(城)을 쌓을 때에 윤지완(尹趾完)이 성역(城役)을 총융사(摠戎使)에게 위임하도록 청하여 그대로 신지(信地)를 삼도록 하였습니다. 그 뒤 논의(論議)가 한결같지 않아 마침내 진무영(鎭撫營)에 소속되었는데, 이렇게 편리하지 않은 형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구만(南九萬) 역시 강도(江都)에 소속시키지 않을 수 없다고 여겼었으나, 신의 뜻은 그렇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닥쳐올 일은 진실로 미리 알기가 어려우며, 지금 조정에서 구획(區劃)하는 것은 오직 강도를 뒷날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으로 삼고 있는 것이니, 뜻밖의 일을 미리 헤아려 고집하거나 의심을 둘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뒤로는 총융사가 산성(山城)을 주관(主管)하도록 하라."

하였다. 유상운(柳尙運)이 말하기를,

"박태순(朴泰淳)의 소(疏) 가운데 중강(中江)에서 호시(互市)하여 쌀을 요청하자고 한 한 건에 대해서는 다시 의논하라는 전교가 있었습니다. 국경에서 개시(開市)208) 하여 전에 없었던 물화(物貨)를 한 가지 더 보태는 것은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대합니다. 그리고 또 피중(彼中)의 미곡(米穀)은 틀림없이 먼 지역에서 운반하여 올 터인데, 이미 운반하여 온 뒤에는 역시 교역을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러한 길을 한 번 열게 되면 아마도 처리하기 어려운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봄 사이에 이미 이런 의논이 있었지만, 단지 의주 부윤[灣尹]으로 하여금 사사로이 서로 화매(和買)하여 인마(人馬)가 되돌아오는 편에 수송(輸送)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잇따라 들으니, 되돌아오는 무렵에 피중(彼中)에게 잡히게 되어 뇌물을 주고서야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금번 주청사(奏請使)가 아직 일을 마치고 돌아오지 않았는데, 다시 이런 청을 하는 것은 더욱 온당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호시(互市)하게 한 일은 대체로 관서(關西) 지방에 기근이 거듭 심하여 별도로 진념(軫念)하지 않을 수 없기에 애당초 품처(稟處)하라는 명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폐단이 없지 않을 듯하니, 사신(使臣)이 되돌아온 뒤에 다시 품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3책 31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461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군사-병참(兵站) / 농업-전제(田制) / 구휼(救恤) / 외교-야(野) / 무역(貿易)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註 207]
    임진년 : 1592 선조 25년.
  • [註 208]
    개시(開市) : 시장을 열어 물건을 매매함.

○辛亥/引見大臣、備局諸臣。 領議政柳尙運曰: "頃日領府事南九萬, 演進盛京圖, 仍陳西北設置事宜。 蓋九萬曾爲兵判時, 以復設廢四郡事, 有所區畫。 臣於其時, 有所陳達, 而臣之所見異於九萬九萬則以犯越由於無人爲言, 而今雖募民入居, 募入者又復犯越, 則防守豈不尤難乎? 九萬又以爲彼有急歸之事, 則何必捨其捷路, 而借道於他國乎云, 而自老城寧固塔, 雖曰千里而近, 乃無人之境也。 若於我境沿江設鎭, 通道西北, 則可以不齎糧而往, 安保其無他慮乎? 且臣於此, 別有所懷。 壬辰西幸時, 進住寧邊, 有欲幸江界之議, 而爲赴愬天朝而止之矣。 時勢則古今有異, 而我之所恃者, 只是江都, 天下之事變無窮。 脫有如壬辰之事, 則豈可捲入孤島乎? 江界一區, 幅員旣廣, 西通義州, 鳥道千里, 北接, 中隔葱嶺, 獨以一面, 南守狄踰嶺, 實四塞之國, 有若中之東西川矣。 第其北則只隔一衣帶水, 今又開拓四郡, 殊非設險之意。 此臣所以異於九萬, 而至於設屯事, 臣意亦然。 臣曾任江界時, 往見慈城。 若於其陳廢之地, 設置一屯, 募得無田土之民, 入居耕墾, 貯穀數萬石, 有事則爲不時之需, 凶年則爲賑救之資, 豈不好乎? 但設賑之際, 旣難得其人, 而募入人民最難矣。" 左議政尹趾善曰: "臣雖不能的知利害, 而十年之內, 國勢似難蘇息, 不可輕議。" 上曰: "此事當從容議定, 非倉卒可行之事。 姑待西北御史入來後, 稟定宜矣。" 謹按, 四郡之廢而不設久矣。 雖以祖宗全盛之時, 尙有難守之慮。 況當此季世, 荐遭大殺之餘, 尙可爲此等事乎? 且旣設之後, 其利甚少, 而其害甚大者乎? 迂矣九萬之言也! 但九萬特欲誇其知見, 陳其意慮而已, 非必欲設行之也。 然則陳此空言, 何補於國乎? 趾善之知識, 雖不及此, 而其言則得之矣。 尙運曰: "江華留守李頤命, 請以通津府, 專屬於文殊山城, 宜下詢。" 僚相趾善曰: "一邑居民, 多各衙門有役之人。 若以本府, 專屬山城, 則有役人之代, 將移送於何處乎? 當初築城時, 尹趾完請以城役, 委之摠戎使, 仍爲其信地矣。 其後論議不一, 終屬鎭撫營, 而有此難便之勢矣。 南九萬亦以爲不可不屬之於江都云, 而臣意有不然者。 前頭事, 固難預知, 而卽今朝家之所區畫, 惟以江都爲他日必歸之地, 不可逆料意外之事, 而有所持疑矣。" 上曰: "今後使摠戎使, 主管山城。" 尙運曰: "朴泰淳疏中, 中江互市請米一款, 有更議之敎。 邊上開市, 增一無前之物貨, 關係甚重。 且彼中米穀, 必自遠地運來, 旣來之後, 亦不可不交易, 一開此路, 恐有難處之弊。 春間已有此議, 而只令灣尹, 私相和買, 回還人馬, 因便輸送矣。 似聞回還之際, 見捉彼中, 行賂脫免云。 況今番奏請使, 未及竣還而復有此請, 尤極難便。" 上曰: "今此互市之事, 蓋以西飢荐甚, 不可不別樣軫念, 故初有稟處之命, 而似不無弊端, 使臣回還後, 更爲稟處。"


  • 【태백산사고본】 33책 31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461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군사-병참(兵站) / 농업-전제(田制) / 구휼(救恤) / 외교-야(野) / 무역(貿易)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