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령을 자주 옮기지 말도록 하는 일을 전조에 신칙하게 하다
사간(司諫) 여필용(呂必容)이 소(疏)를 올려 성궁(聖躬)을 보양(保養)하고 비용을 절약하며 백성을 사랑하는 도리를 진달하고, 또 말하기를,
"국면(局面)이 여러 번 바뀌고 조정의 의논이 갈라져 임용되는 신하는 그 수효가 얼마 되지 않고, 산림(山林)에서 자중(自重)하는 인사와 일찌감치 쉬려고 물러난 사람들을 거두어 불러들이기를 한갓 부지런히 하지만 조정으로 나오는 데 관심이 없습니다. 심지어 정재희(鄭載禧)·이수언(李秀彦)·이여(李畬) 같은 이는 본래 벼슬하지 않은 사람도 아닌데, 성상의 기체(氣體)가 불편하셨을 때 한 번도 와서 문안 드리는 반열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더욱 책망하고 힘쓰시어 그들로 하여금 수수방관(袖手傍觀)하고 있을 수 없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백성들과 가까이 지내는 관원으로 수령(守令)만한 이가 없는데도, 전조(銓曹)에서의 주의(注擬)037) 가 이미 모두 공정하지 못하고, 감사(監司)가 출척(黜陟)하는 데 있어서도 사사로운 뜻이 많이 작용합니다.
나주 목사(羅州牧使) 이인혁(李寅爀)은 자상하고 성실하게 잘 다스렸으며, 종성 부사(鍾城府使) 박명의(朴明義)는 임기가 거의 찼으며, 삼척 부사(三陟府使) 한성우(韓聖佑)는 부임(赴任)한 지 오래 되지 않았는데도 모두 벼슬을 깎아 체임(遞任)시켰으니, 그 제목(題目)을 살펴보면 부당하게 한 자취를 엄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해당 도(道)의 감사에게는 경책(警責)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시종(侍從)하던 신하가 외직(外職)으로 나갔을 경우 〈임기를〉 2주년(周年)으로 하는 것이 정식(定式)인데,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조(銓曹)에서 의례 의망(擬望)하고 은점(恩點)038) 이 따라서 내리니, 신은 성상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전라 감사(全羅監司) 김만길(金萬吉)은 마음을 다하여 굶주린 백성을 진휼해서 살렸으므로, 도내(道內)에서 아끼며 떠받들고 있으니, 이광하(李光夏)의 예(例)에 의하여 보릿가을039) 까지를 기한으로 하여 그대로 유임하게 하는 것이 아마도 사의(事宜)에 맞을 듯합니다.
그리고 신이 듣건대, 금강산(金剛山) 유점사(楡岾寺)에 하나의 전각(殿閣)을 설치하여 세 분의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하고, 용주(龍舟)040) 로 모셔다가 여러 부처 사이에 두고는 중의 무리들이 망령되게 선조 대왕(宣祖大王)·인조 대왕(仁祖大王)·현종 대왕(顯宗大王) 삼조(三朝)의 쉬용(晬容)이라고 하면서, 춘추(春秋)로 부처에게 공양(供養)을 올릴 때 심지어 함께 올리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현종의 영정은 회록(回祿)041) 의 변고가 있어 장차 고쳐서 그린다고들 하니, 일의 미안(未安)함이 어찌 이보다 큰 것이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빨리 철폐(撤廢)하여 후세의 비난하는 의논을 면하게 하소서.
신(臣)이 또 들으니, 내사(內司) 및 각궁(各宮)의 하인배들이 치우치게 불사(佛事)를 닦으려고 이 산에 왕래(往來)하는 것을 해마다 상례(常例)로 삼아, 심지어 궁녀[紅袖]와 함께 간다는 말이 있으며, 향(香)·다(茶)·장막·기[幡] 등의 물품은 모두 내전(內殿)에서 내려 준다고들 합니다. 또 들으니, 여승의 무리가 성(城) 밖에 가까이 머물러 있으면서 높은 누각을 새로 지었는데, 금벽(金碧)이 영롱(玲瓏)하며, 수진궁(壽進宮)에서 세운 것이라고 자랑하면서 심지어 성비(聖妃)의 기일에도 초제(醮祭)042) 지내는 일을 크게 베풀면서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꺼려함이 없다고 하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습니까? 원하건대 새로 지은 여승의 집을 빨리 철거하도록 하시고, 또 그 일을 맡았던 사람을 치죄케 하시며, 내사(內司)와 각궁(各宮)을 엄하게 신칙하시어 초제를 지내는 일을 일체 금하도록 해서 폐습을 제거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세 신하가 전리(田里)로 물러나 생활하면서 편안히 누워 벼슬에 나오지 않고 있으니, 사체(事體)의 미안(未安)함이 어찌 이보다 더 심하겠는가? 수령을 가끔 시종(侍從)으로 차침(差任)해 보내되 정식(定式)에 의하여 자주 옮기지 말도록 하는 일을 전조(銓曹)에 신칙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그리고 호남(湖南)의 방백(方伯)은 유임시킬 필요가 없으며, 소(疏)의 끝부분에 진달한 것을 보니, 매우 이상스럽다. 유점사(楡岾寺)에 봉안(奉安)된 영정(影幀)은 본도(本道)로 하여금 매안(埋安)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른바 여승의 집을 수진궁(壽進宮)에서 지었다고 하는 말은 매우 맹랑(孟浪)하다마는, 어찌 꼭 철훼(撤毁)해야 하겠는가? 그렇지만 초제(醮祭)를 지내는 한 가지 일은 더욱 사리에 맞지 않은 짓이니, 각별히 엄하게 금하도록 하라. 그리고 내사(內司)를 혼동(混同)해서 거론(擧論)하는 것은 사실과 어긋남을 면하지 못한다."
하였다. 【비답을 내렸다가 즉시 도로 들여오게 하여 유점사(楡岾寺) 이하 12자(字)를 삭제하여 버리고, 나는 숭봉(崇奉)했거나 신봉(信奉)하는 일이 없으며, 오랜 된 일은 제기(提起)할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고쳐서 내렸다.】
- 【태백산사고본】 33책 31권 6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44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사(宗社)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사상-불교(佛敎)
- [註 037]주의(注擬) : 관원을 임명할 때 먼저 문관(文官)은 이조(吏曹), 무관(武官)은 병조(兵曹)에서 후보자 세 사람[三望]을 정하여 임금에게 올리던 것.
- [註 038]
은점(恩點) : 임금의 최종 낙점(落點).- [註 039]
보릿가을 : 음력 4월.- [註 040]
○甲子/司諫呂必容, 疏陳保養聖躬, 節用愛民之道, 且言:
局面屢換, 朝議岐貳, 任用之臣, 其數無幾, 而山林自重之士, 早歲休退之人, 收召徒勤, 造朝漠然。 至如鄭載禧、李秀彦、李畬, 本非不仕之人, 聖候違豫, 一不來參起居之班。 宜加責勉, 俾不得袖手傍觀也。 親民之官, 莫如守令, 而銓曹注擬, 旣未盡公, 監司黜陟, 多有私意。 如羅州牧使李寅爀之慈諒善治, 鍾城府使朴明義之瓜期將滿, 三陟府使韓聖佑之赴任未久, 而皆以貶遞, 察其題目, 難掩曲爲之迹。 該道監司不可無警責也。 侍從出外, 以二周年定式, 未幾銓曹例擬, 恩點隨降, 臣未知聖意也。 全羅監司金萬吉, 盡心賑活, 道內愛戴。 依李光夏例, 限麥秋仍任, 恐合事宜。 臣聞金剛山 楡岾寺, 設置一閣, 奉安三影幀, 御以龍舟, 間于諸佛, 而僧徒妄謂宣祖大王、仁祖大王、顯宗大王三朝睟容, 春秋供佛時, 至有薦獻之事。 顯廟影幀, 有回祿之變, 將爲改繪云。 事之未安, 豈有大於此者乎? 伏願亟命撤罷, 以免後世之譏議。 臣又聞, 內司及各宮下輩, 頗修佛事, 往來此山, 歲以爲常, 至有紅袖同往之說, 香、茶、惟、幡等物, 皆自內降云。 且聞尼徒, 留接城外, 新起高閣, 金碧玲瓏, 誇以壽進宮所建, 至於聖妃忌辰, 大設醮事, 略無畏憚, 豈不寒心哉? 亦願亟撤新建尼宇, 且治任事之人, 嚴飭內司、各宮, 切禁設醮之事, 俾祛弊習。
答曰: "三臣之退處田里, 牢臥不起, 事體之未安, 孰有甚於此乎? 守令間以侍從差遣, 依定式勿爲數遷事, 當申飭銓曹。 湖南方伯, 不必仍任, 而疏末所陳, 看來極可異也。 楡岾寺奉安影幀, 令本道埋安。 所謂尼宇壽進宮所建之說, 大是孟浪, 則何必撤毁, 而設醮一款, 尤涉無理, 各別嚴禁。 內司之混同擧論, 未免爽實也。" 【批答旋卽還入, 楡岾寺以下十二字刪去, 以崇奉、信奉, 我無是事, 久遠之事, 不必提起, 改下。】
- 【태백산사고본】 33책 31권 6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44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사(宗社)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사상-불교(佛敎)
- [註 0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