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 모의에 관련된 이절·유선기 등은 복주되고 이익화·장영우 등은 귀양 보내다
날이 저문 뒤에 이절(李梲)·유선기(兪選基) 등이 상변(上變)027) 하기를,
"어느 날 이영창(李榮昌)이 이절의 집에 와서 자면서 갑자기 묻기를, ‘그대가 장지(葬地)를 얻으려고 한다면 우리 스승을 가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스승이란 중은 바로 운부(雲浮)로서, 당시 나이 70세로 송조(宋朝)의 명신(名臣)이었던 왕조(汪藻)의 후손인데, 명나라가 망한 뒤 중국에서 표류하여 우리 나라에 도착하였으며, 머리를 깎고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갔는데, 그 사람은 위로는 천문(天文)을 통달하고 아래로는 지리(地理)를 통찰하고 중간으로는 인사(人事)를 관찰하여 재주가 옛날의 공명(孔明)028) 과 유기(劉基)029) 에 밑돌지 않는다는 자였습니다. 그가 불경(佛經)을 승도(僧徒)들에게 가르쳤는데, 그 중에서 뛰어난 자로는 옥여(玉如)·일여(一如)·묘정(卯定)·대성(大聖)·법주(法主) 등 1백여 인을 얻어 그 술업(術業)을 전수(傳受)시키면서 팔도(八道)의 중들과 체결(締結)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장길산(張吉山)의 무리들과 결탁하고, 또 이른바 진인(眞人) 정(鄭)·최(崔) 두 사람을 얻어 먼저 우리 나라를 평정하여 정성(鄭姓)을 왕으로 세운 뒤에 중국을 공격하여 최성(崔姓)을 왕으로 세우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절이 유선기에게 말하기를, ‘이영창이 갑자기 흉악(凶惡)한 말을 지껄이니 형적(形迹)을 상세하게 탐지(探知)하여 처치(處置)하는 방도를 삼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11월 초3일에 이영창이 이절 등에게 말하기를, ‘우리 무리가 큰 일을 경영(經營)하려면 최상중(崔尙仲)·최상성(崔尙晟)의 【최상중 등은 바로 전 병사(兵使) 최운서(崔雲瑞)의 첩(妾)의 아들인데, 이절의 세전 노자(世傳奴子)로 숨은 것을 찾아내고 인해서 속(贖)바치도록 허락은 하였지만, 문권(文券)을 아직도 내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속(贖)바치게 하는 문권(文券)을 먼저 내어 주고, 이어 함께 의형제(義兄弟)를 맺어 같이 새로 나라를 세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하므로, 이절 등이 허락하였습니다.
4일에는 이영창이 최상중의 형제와 같이 이절의 집에 와서 문권을 내어 줄 것을 청하고, 그들과 함께 맹세하며 밤이 새도록 요망스런 말을 하였고, 이튿날 아침에는 유선기를 시켜 종이를 접어 둥글게 만들도록 하고, 그 가운데다 하나의 황(黃)자를 쓰고, 황(黃) 자의 획(畫) 가운데 가늘게 ‘의(義)를 맺어 형제가 되었으니, 마음으로 맹세하며 함께 나라를 세운다.’고 쓰므로, 유선기가 말하기를, ‘황(黃) 자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하니, 이영창이 말하기를, ‘일찍이 보니 운부(雲浮)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맹세할 때 이렇게 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영창이 이어 그의 성명(姓名)을 써서 착명(着名)한 뒤에 네 사람에게 밀어 주면서 그들로 하여금 여기에 의거하여 나열하여 쓰라고 하므로, 그의 말대로 각자가 쓰자, 이영창이 말하기를, ‘동시에 향(香)을 피우고 꿇어앉아 절을 하고, 의(義)를 맺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절(李梲) 등이 그대로 따르니, 이영창이 둥글게 접은 종이를 유선기에게 주고는, 파(罷)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뒤 유선기가 이절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이 김경함(金慶咸)·김정열(金廷說)과는 정의(情誼)가 형제와 같으니 함께 일을 의논할 만하다.’고 하므로, 이절이 직접 가서 청하여다 그들과 함께 서로 의논한 뒤에 또 이영창을 불러다 시험삼아 탐지하여 물어 보니, 흉악하고 요사스런 말이 한결같이 전일(前日)과 같았습니다. 이러한 곡절을 가지고 김정열을 시켜 병조 판서에게 먼저 고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뒤에 이영창이 동행하기를 요구하기에 용궁사(龍宮寺)에 가서 금강산(金剛山)에서 왔다는 중 묘정(卯定)을 보려고 하는 즈음에 이익화(李翊華)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마침 왔습니다. 그러자 이영창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일을 함께 할 만하다.’고 하면서, 함께 그의 집으로 데리고 갔으며, 밤에 이익화와 같이 이절의 집에 와서 자면서 흉악한 말을 주고받았습니다. 이익화가 운부(雲浮) 및 이른바 진인(眞人)의 사주(四柱)를 물으니, 이영창이 말하기를, ‘운부는 정묘생(丁卯生)이고, 이른바 진인은 기사년(己巳年) 무진월(戊辰月) 기사일(己巳日) 무진시(戊辰時)에 태어났다.’ 하니, 이익화가 말하기를, ‘비기(秘記)에 이르기를, 「중국 장수인 묘생(卯生)030) 의 사람이 중국에서 와서 팔방(八方)을 밟고서 일어난다.」고 하였는데, 바로 운부(雲浮)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기사년 무진월 기사일 무진시에 태어났다면, 바로 뱀이 변하여 용(龍)이 되는 격이다. 숭정 황제(崇禎皇帝)031) 의 사주(四柱)에는 뱀이 변하여 용이 되는 격이 하나였으나, 천자(天子)가 되었는데, 이 사람의 경우는 그런 격이 둘이나 있으니 참으로 매우 기쁘고 다행스럽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비기(秘記)에 이르기를, 「진년(辰年)032) 과 사년(巳年)에는 성인(聖人)이 나고, 오년(午年)과 미년(未年)에는 즐거움이 대단하다.」고 하였는데, 이것도 이 진인(眞人)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영창이 말하기를, ‘이른바 진인은 세 번 변화하는데, 지금은 고성(高城)의 진재(鎭材)인 용장(勇將) 정학(鄭涸)의 집에 있으며, 더러는 운부(雲浮)가 머물고 있는 옥정암(玉晶菴)에 있기도 한다. 그런데 운부가 정학 및 그의 아우 정신(鄭愼), 그리고 최헌경(崔憲卿)·유찬(柳鑽)·설유징(薛有澄) 등을 시켜 서로 번갈아 가면서 호위(護衛)하게 한다. 그리고 중 묘정(卯定)·일여(一如)·옥여(玉如)·무변(無邊)·현성(玄聖)·일안(一鴈)·해안(海鴈)·도강(渡江)·월강(越江)·혜일(惠一)·도운(道運)·도영(道英)·계탄(戒坦)·성주(聖珠)·명근(命根)·금벽(金碧)·인징(寅澄)·능흡(能洽)·세운(世雲)·원정(元井)·헌일(憲日)·죽무(竹茂)·지평(地平)·천성(天成)·은상(銀象)·초룡(草龍)·직수(直守)·흑수(黑守)·희담(希淡)·황헌(黃憲)·장계(藏季)·운극(雲極)·한무(漢茂)·법징(法澄)·풍열(楓悅)·설제(雪霽)·신원(新元)·개혜(開惠)·자징(字澄)을 기내(圻內)와 여러 도의 각 사찰에 나누어 보내어 3월 21일에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침범하는 입장에 있는데, 강계 부사(江界府使) 신건(申鍵)·상토 첨사(上土僉使) 신일(申鎰) 및 이영창의 아우 이동백(李東伯), 이영창의 외숙인 김문하(金文夏), 김화(金化)에 살고 있는 부자(富者) 지대호(池大豪)·엄준길(嚴俊吉)·진융종(秦戎宗)과 함경도에 살고 있는 술사(術士) 주비(朱棐), 춘천에 살고 있는 용장(勇將) 최흥복(崔興福), 수원에 살고 있는 역사(力士) 한이태(韓以泰), 용인에 살고 있는 거사(居士) 조종석(趙宗碩), 부사(府使) 홍하신(洪夏臣)·양한석(楊漢奭), 금성(金城)에 살고 있는 충의(忠義) 안석명(安碩明) 등 3형제와 강거사(康居士)라고 부르는 사람, 그리고 전 군수(郡守) 임동정(林東靖), 수원 군기 감관(水原軍器監官) 임필흥(林弼興) 등도 흉역(凶逆)에 참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영창이 또 이절에게 말하기를, ‘산인(山人)이 오면 특별히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다.’고 하더니, 조금 있다가 와서 말하기를, ‘운부(雲浮)가 중 한 명을 보내어 「진인(眞人)이 멀지 않아 보개산(寶盖山)에 당도할 터이니 그대들 네 사람은 내일 아침 일찍이 일제히 와서 모이도록 하라.」고 하였다.’ 하고는 혜찰(惠察)이란 이름을 가진 한 명의 중을 데리고 와서 처음으로 운부의 소식을 전하기를, ‘우리들의 일이 이미 모두 이루어졌는데, 경중(京中)의 경영(經營)은 지금 어느 경지에 이르렀는가?’ 하면서 이어 세 사람의 손을 잡고 의논하며 서로 말하기를, ‘머지않아 틀림없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고 하고는 떠났습니다. 실정과 형적(形迹)이 대단히 놀랍기 때문에, 별무사(別武士) 김체건(金體乾)으로 하여금 이영창 및 그의 아우 이영만(李榮萬)과 그의 종 중길(仲吉)과 그의 처(妻) 선옥(仙玉) 등을 뒤쫓아서 체포하여 구속시키고 결박하여 두고 달려와서 고합니다."
하니, 임금이 대신(大臣)과 금부 당상(禁府堂上)·양사 장관(兩司長官)·좌우 포도 대장(左右捕盜大將)에게 명하여 상변(上變)한 글 가운데에서 이른바 결박하여 구류(拘留)한 중 혜찰(惠察)과 이영창(李榮昌)·이영만·중길(仲吉)·선옥(仙玉) 등을 즉시 잡아다 내병조(內兵曹)에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문초하도록 명하였다. 국청에서 또 이절(李梲) 등이 바친 입장 문서(立張文書) 6도(度), 책자(冊子) 1봉(封)을 봉하여 바쳤다. 【입장문서는 바로 이절 등이 바친 책자로, 바로 상변한 글에서 이른바 병조 판서(兵曹判書)에게 써서 보고했다는 것이며, 그 가운데 요사스럽고 흉악한 말은 상변한 글과 대략 같았다.】
그리고 김정열(金廷說)과 김경함(金慶咸) 및 문서(文書) 가운데 이름을 쓴 장영우(蔣永祐)·장한경(蔣漢卿) 등을 잡아다 가두었다. 이영창의 공초(供招)에는 요사스럽고 흉악한 말을 이절 등 여러 사람에게 돌렸으며, 혜찰(惠察)의 공초에는 그가 한 짓은 모두 이영창이 교사하고 유인한 데서 나왔다고 하였으므로, 국청에서 서로 대질(對質)시켜 궁문(窮問)하고, 장영우 등 여러 사람은 우선 그대로 가두어 두자고 계청(啓請)하였다. 그리고 최상중(崔尙仲)과 최상성(崔尙晟)을 잡아오도록 청하였다. 이영창이 대질할 때에 말이 막히는 데가 많았으며, 혜찰의 경우는 이영창이 드러나게 교유(敎誘)한 흔적이 있었다. 그래서 국청에서 이영창을 형추(刑推)033) 하도록 계청하고, 또 이절 등과 최상성의 형제를 대질시킬 것을 청하고, 또 이익화(李翊華)를 잡아오게 하였다. 이영창이 두 차례의 형추를 받고서야 비로소 자백[承欵]하였는데, 【자백한 공초 내용은 상변(上變)한 글과 대략 같았다.】 공사(供辭) 가운데 끌어댄 중 운부(雲浮)·풍열(楓悅)·묘정(卯定)·옥여(玉如)·일여(一如)·혜일(惠日)·정학(鄭涸)·유찬(柳鑽)·정신(鄭愼)·최헌경(崔憲卿)·신건(申鍵) 등 11인을 국청에서 계청(啓請)하여 모두 잡아오게 하였으며, 정학의 형제는 북변산(北邊山) 외진 곳에 숨어 있다고 하여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함께 체포하여 송치하도록 하고, 그 밖에 끌어댄 승인(僧人)과 적인(賊人) 등도 본도(本道)로 하여금 널리 기포(譏捕)를 더하도록 하였으며, 이영창은 우선 그대로 가두어 두고서 여러 죄인들이 잡혀 오기를 기다리게 하였다.
이영창의 공초 안에서 또 말하기를, ‘최상중이 복직(卜直) 【바로 속언(俗諺)의 담부자(擔負者)이다.】 이 되었으므로 최상성에게 먼저 시행해야 한다는 말을 일찍이 언급(言及)하였더니, 두 사람 모두 응락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다시 최상성 등을 추문하니, 최상성은 ‘이영창의 말을 길에서 들었는데 종을 추쇄(推刷)하는 일인 줄 여겼다.’고 하였으며, 최상중은 ‘원래 들은 바가 없다’고 말하므로, 이어 이영창과 대질(對質)시킨 뒤에 최상성 형제가 연달아 형신(刑訊)을 받았으나, 자복하지 않고 죽었다. 장한경(蔣漢卿)은 이절 등의 흉서(凶書) 가운데 장한경을 시켜서 중들의 종적(蹤迹)을 가서 탐지하도록 했다는 말이 있다고 하여 곤형(棍刑)을 집행하도록 청하고, 혜찰(惠察)은 국청(鞫廳)에서 결죄(決罪)하여 석방해서 보내도록 청하자, 임금이 결죄하지 말고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죄인이 자복한 뒤에는 고발한 자는 으레 목에 씌운 칼을 풀어 주나, 이번의 경우는 앞질러 석방할 수 없는 점이 있다 하여 목에 씌운 칼을 풀어 주는 것이 적당한가의 여부를 국청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였는데, 국청에서 말하기를,
"이절(李梲)·유선기(兪選基) 등은 이영창(李榮昌)과 마음을 같이하여 의형제를 맺고 밤낮으로 모였으며, 맹세를 같이하는 글에 반역의 마음이 이미 드러났습니다. 김경함(金慶咸)과 합하여 한마음이 되어 이제 상변(上變)하였으나, 그것도 처음에는 양성[醞釀]시키는 대로 따라 성취시키려고 하였다가 뒤에 드러날까 두려워서 발설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이 세 사람은 결단코 목에 씌운 칼을 풀어줄 수 없습니다. 청컨대 김정열(金廷說)의 목에 씌운 칼을 먼저 풀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또 국청(鞫廳)에 하교(下敎)하기를,
"극적(劇賊) 장길산(張吉山)은 날래고 사납기가 견줄 데가 없다. 여러 도(道)로 왕래(往來)하여 그 무리들이 번성한데, 벌써 10년이 지났으나, 아직 잡지 못하고 있다. 지난번 양덕(陽德)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체포하려고 포위하였지만 끝내 잡지 못하였으니, 역시 그 음흉(陰凶)함을 알 만하다. 지금 이영창(李榮昌)의 초사(招辭)를 관찰하니, 더욱 통탄스럽다. 여러 도(道)에 은밀히 신칙(申飭)하여 있는 곳을 상세하게 정탐하게 하고, 별도로 군사를 징발해서 체포하여 뒷날의 근심을 없애는 것도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니, 국청에서 청하기를,
"여러 도에다 은밀히 유시를 내려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별도로 방략(方略)을 베풀게 하고 널리 기찰(譏察)을 더하며, 또 비국(備局)으로 하여금 은밀히 군문(軍門)과 포청(捕廳)에다 분부하여 후한 상(賞)과 높은 벼슬을 아끼지 않겠다는 뜻으로 일깨워서 안팎이 한마음이 되어 틀림없이 체포하는 데 기약하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영창이 끌어댄 승인(僧人) 혜일(惠一)과 풍열(楓悅)을 잡아왔다. 혜일을 이영창과 대질시키니, 이영창이 또한 교유(敎誘)한 흔적이 있었으며, 풍열 역시 전혀 모른다고 하였다. 이익화(李翊華)를 이절(李梲)과 대질시키니, 역시 서로 다투면서 변명하므로, 모두 그대로 가두어 두었다. 얼마 지나 전 첨사(僉使) 홍기주(洪箕疇)란 자가 또 상변(上變)하여 말하기를,
"지난해 겨울에 김정열(金廷說)이 말하기를, ‘이영창(李榮昌)이란 자가 있어 멋대로 요사스럽고 흉악한 말을 하였는데, 그때 주비(朱棐)의 이름도 그의 입에서 나왔으니, 시험삼아 문천(文川)에서 가서 사정(事情)을 탐문(探問)해 보십시오.’ 하므로, 정말로 문천(文川)에 내려가서 이 말을 군수(郡守) 조석(曹錫)에게 말하고 편지를 보내어 주비(朱棐)를 맞아보니, 그의 사람됨이 바보 같기도 하고, 미치광이 같기도 하며, 그가 말하는 것도 거짓말 같기도 하고 사실 같기도 하였습니다. 인하여 그로 하여금 마음속에 품은 것을 써내라고 하였더니, 써낸 것이 무릇 일곱 차례였었는데, 그 요사스럽고 흉악함이 극도에 달했으므로, 즉시 올라 와서 고발하여 알립니다."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주비(朱棐)를 잡아다 추문(推問)하니, 주비의 공사(供辭)에 이르기를,
"지난해 겨울에 문천 군아(文川郡衙)에서 홍기주를 만났었는데, 홍기주가 말하기를, ‘학포(鶴浦)로 옮겨 가려고 하는데 누구와 같이 사귈 만하겠는가?’고 하기에, 약간인(若干人)을 써서 주었더니, 또 말하기를, ‘영흥(永興)의 원[倅]도 본고을의 인물(人物)을 알고 싶어하니, 모름지기 향임(鄕任)034) 에 적합한 사람을 나열하여 쓰라.’고 하기에, 또 본고을 사람 수십여 명을 써서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밖에 한계(寒溪)의 도인(道人) 정혜(鄭惠)의 술업(術業)이 신비(神秘)하다는 말과 청륙포(靑陸浦)에 귀신인지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사람이 있는데, 정가(鄭家)의 사당(祠堂)에 와서 제사를 지냈다는 말을 모두 홍기주에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른바 일곱 차례 썼다는 문서(文書)는 모두 거짓으로 쓴 글이었으며, 그것도 더러는 그가 직접 쓴 것을 인하여 미루어 덧붙인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였는데, 홍기주와 면질(面質)시킴에 미쳐서는 두 사람 모두 조석(曹錫)으로 증거를 삼으므로, 국청(鞫廳)에서 조석을 잡아오도록 청하였다. 조석은 공사(供辭)에 이르기를,
"홍기주가 와서 주비(朱棐)에게 불측(不測)한 마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광은군(光恩君)과 신 대장(申大將)이 그로 하여금 탐문(探問)하도록 하였다고 하므로, 정말 주비를 불렀으며, 홍기주가 주비와 같이 별처(別處)에서 이틀 동안 묵었습니다. 그 뒤에 홍기주가 주비가 점을 쳤다는 해도점(海島占)을 내어 보이면서 말하기를, ‘주비가 울릉도(鬱陵島)가 이미 왜지(倭地)가 되었지만 청하여 맞아 올 수 있다고 하였다.’ 하기에, 다시 주비에게 삼만위(三萬衛)의 일에 대하여 점(占)을 치도록 청하자, 주비가 즉시 엽전을 던져 점괘를 만들었는데, 대체로 주비의 말에 이르기를, ‘삼만위(三萬衛)는 영흥(永興)에 있으며, 지역이 넓고 높아, 만약 토적(土賊)035) 의 근심이 있게 되면 동지(同志)들을 규합하여 거느리고 삼만위(三萬衛)로 들어가면 된다.’고 하고, 또 손수 그가 마음속에 품었던 것들을 여러 장의 종이에다 써서 홍기주에게 보이기에, 그 자리에서 참여하여 보았습니다. 그 밖에 주고받은 대화의 내용은 전부 홍기주가 주비를 자랑하는 데서 나온 것들이었습니다."
하므로, 국청(鞫廳)에서 다시 주비(朱棐)와 홍기주를 면질하도록 청하였다. 주비가 말한 일곱 차례 썼다는 문서(文書)는 그가 스스로 썼으며, 한계 도사(寒溪道士)에 대한 말은 양양(襄陽) 사람 송시한(宋時釬)에게서 들었다고 하였는데, 다시 추문(推問)하기에 이르러서는 주비가 그 사실을 도로 숨기므로, 열 차례의 형신(刑訊)을 받다가 죽었다. 송시한(宋時釬)은 자신이 요망스런 말을 지어냈다고 자복하였으므로 참형(斬刑)에 처하고, 홍기주와 조석(曹錫)은 국청에서 청대(請對)하여 자복을 받아 감단(勘斷)하도록 청했는데, 그 또한 형장(刑杖)을 맞다가 죽었다. 그리고 이영창(李榮昌)이 증거로 끌어댄 신건(申鍵)을 잡아 왔는데, 역시 사실이 저절로 밝혀졌으며, 그 나머지 여러 사람들은 모두 기포(譏捕)하려 하였지만, 그런 사람이 없으므로, 국청에서 다시 추문하도록 청하였다. 이영창이 초사(招辭)를 변경하여 말하기를,
"중은 떠다니는 구름 같기 때문에 운부(雲浮)로 중 이름을 허위로 지었고, 이형징(李衡徵)·윤두서(尹斗緖)·윤창서(尹昌緖)가 찾아와 심단(沈檀)의 집에서 함께 앉아 있었으며, 심단의 아들 심득천(沈得天)과 윤두서가 은전(銀錢)을 두둑히 주자, 이형징이 정성(鄭姓)의 사람과 옥여(玉如)·정학(鄭涸)·최헌경(崔憲卿) 등의 이름을 지어내었으며, 일여(一如)와 혜일(惠一)은 일찍이 서로 아는 사이이며, 풍열(楓悅)은 이름이 알려진 중이기 때문에 빙자(憑藉)하여 말했으며, 묘정(卯定)의 이름 역시 자신이 지어내었습니다."
하였으므로, 국청에서 공초(供招)를 변환(變幻)하였다고 하여 형신(刑訊)을 가하도록 청하고, 일곱 차례에 이르도록 형신하자 죽었다. 이에 먼저 가두었던 여러 죄인(罪人)들을 감처(勘處)하였다. 이절(李梲)·유선기(兪選基)·김경함(金慶咸) 등은 복주(伏誅)되고, 이익화(李翊華)·장영우(蔣永祐) 등은 먼 곳에다 귀양보냈었으며, 혜일·각선(覺禪)·풍열(楓悅)·일여(一如)·신건(申鍵) 등은 석방하여 보내고, 김정열(金廷說)은 석방하여 보낸 뒤에 논상(論賞)하려 하였다가, 다시 고발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하여 논상하지 말도록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3책 31권 3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446면
- 【분류】사법-치안(治安) / 사법-행형(行刑) / 외교-야(野) / 외교-왜(倭) / 변란-민란(民亂) / 사상-불교(佛敎)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註 027]상변(上變) : 급변(急變)을 상고(上告)함.
- [註 028]
공명(孔明) : 제갈양(諸葛亮).- [註 029]
유기(劉基) : 명나라 초기의 전략가.- [註 030]
묘생(卯生) : 12지지(地支) 중 묘년(卯年)에 출생한 사람.- [註 031]
숭정 황제(崇禎皇帝) : 명나라 의종(毅宗).- [註 032]
진년(辰年) : 12지지 중 진(辰)에 해당되는 해.- [註 033]
형추(刑推) : 죄인에게 형장(刑杖)을 가하며 신문함.- [註 034]
향임(鄕任) : 향리(鄕吏)의 악폐를 방지하고 수령을 보좌하기 위하여 두었던 좌수(座首)·별감(別監) 등 향청(鄕廳)의 직임(職任).- [註 035]
토적(土賊) : 어떤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도둑의 떼.○昏後, 李梲、兪選基等上變曰: "一日李榮昌來宿梲家, 猝然問曰: ‘君欲得葬地, 則往見吾師可也。’ 師僧卽雲浮, 而時年七十, 宋朝名臣汪藻之後也。 大明亡後, 自中原飄到我國, 削髮入金剛, 而其人上通天文, 下察地理, 中觀人事, 才不下於古之孔明、劉基者也。 以佛經敎僧徒, 得其中拔萃者玉如、一如、卯定、大聖、法主等百餘人, 傳其術業, 締結八道之僧。 且結張吉山之輩, 又得所謂眞人鄭、崔兩人, 先平我國, 立鄭姓後, 攻中原, 立崔姓云云。’ 梲謂曰: ‘榮昌猝發凶惡之說, 當詳探形迹, 以爲處置之道。’ 十一月初三日, 榮昌謂梲等曰: ‘吾輩經營大事, 則崔尙仲、尙晟 【尙仲等卽前兵使崔雲瑞妾子, 而梲之世傳奴子, 隱匿推出, 仍爲許贖, 而文券猶未出給故也。】 贖文, 爲先出給, 仍與結義兄弟, 同爲開國好矣。’ 梲等許之。 四日榮昌與尙仲兄弟, 來到梲家, 請出給文券, 與之同盟, 達夜妖言。 翌朝使選基折紙爲團, 中書一黃字, 黃字之畫中, 細書結義爲兄弟, 誓心共開國。 選基曰: ‘黃字之意何在?’ 榮昌曰: ‘曾見雲浮與人共盟時, 如此故爲之。’ 榮昌仍書其姓名, 着名後, 推與四人, 使之依此例書, 依其言各自書, 則榮昌曰: ‘一時焚香跪拜, 結義可也。’ 梲等從之, 則榮昌給其團紙於選基, 而罷歸。 後選基謂梲曰: ‘吾輩與金慶咸、金廷說, 情同兄弟, 可與議事。’ 梲躬往請來, 與之相議後, 又招榮昌, 試爲探問, 則凶言妖說, 一如前日。 將此曲折, 使金廷說先告於兵曹判書。 其後榮昌, 要與同行, 往見龍宮寺, 自金剛來僧卯定之際, 李翊華稱名人適來。 榮昌曰: ‘此人可與同事。 ’ 仍與携去其家, 夜與翊華, 來宿梲家, 酬酢凶言。 翊華問雲浮及所謂眞人四柱, 則榮昌曰: ‘雲浮丁卯生, 而所謂眞人, 則己巳戊辰、己巳戊辰。’ 云。 翊華曰: ‘秘記曰: 「唐將卯生人, 來自中國, 當踏八方而起。」, 正指雲浮而言也。’ 又曰: ‘己巳戊辰、己巳戊辰, 卽蛇變爲龍之格。 崇禎皇帝四柱, 蛇變爲龍者一, 而能爲天子, 此則有二, 誠極喜幸。’ 又曰: ‘秘記曰: 「辰、巳聖人出, 午、未樂堂堂。」 亦指此眞人而言也。’ 榮昌言: ‘所謂眞人三變, 時在高城 鎭材勇將鄭涸家, 或在於雲浮所住玉晶菴, 而雲浮使鄭涸及其弟愼、崔憲卿、柳鑽、薛有澄等, 相替護衛, 而分送僧卯定、一如、玉如、無邊、玄聖、一鴈、海鴈、渡江、越江、惠一、道雲、道英、戒坦、聖珠、命根、金碧、寅澄、能洽、世雲、元井、憲日、竹茂、地平、天成、銀象、草龍、直守、黑守、希淡、黃憲、臧季、雲極、漢茂、法澄、風說、雪霽、新元、開惠、宇澄, 於圻內及諸道各寺, 以爲趁三月二十一日, 起兵犯闕之地, 江界府使申鍵、上土僉使申鎰及榮昌弟東伯、榮昌外叔金文夏、金化居富者池大豪ㆍ嚴俊吉ㆍ秦戎宗、咸鏡道居術士朱棐、春川居勇將崔興福、水原居力士韓以泰、龍仁居士人趙宗碩、府使洪夏臣ㆍ楊漢奭、金城居忠義安碩明等三兄弟、康居士稱號人、前郡守林東靖、水原軍器監官林弼興等, 亦參凶逆。’ 榮昌又言于梲曰: ‘山人來到, 別有好消息。’ 俄而來言曰: ‘雲浮送一僧以爲, 眞人匪久當到寶盖山, 君等四人, 趁明早一齊來會。’ 云, 率一僧惠察稱名者而來, 初傳雲浮消息曰: ‘吾事旣已盡成, 京中經營, 今至何境耶?’ 仍執三人手而論相曰: ‘匪久必有好事。’ 云云而去。 情迹尤極痛駭, 故使別武士金體乾, 跟捕拘留榮昌及其弟榮萬其奴仲吉、其妻仙玉等, 結縛奔告。" 上命大臣、禁府堂上、兩司長官、左右捕盜大將, 竝命招卽拿, 變書中所謂結縛拘留者僧惠察、李榮昌ㆍ榮萬、仲吉、仙玉等, 設鞫於內兵曹鞫廳。 又封納梲等所納立張文書六度, 冊子一封。 【立張文書卽李梲等所進冊子, 卽變書所謂書告兵判者, 其中妖惡之說, 與變書略同。】 又拿囚廷說、慶咸及文書中着名蔣永祐、蔣漢卿等。 榮昌之供, 以妖惡之言, 歸於李梲等諸人, 惠察之供, 則以爲渠之所爲, 皆出於榮昌之所敎誘。 鞫廳啓請面質窮問, 蔣永祐等諸人姑爲仍囚。 又請拿崔尙仲、尙晟。 榮昌面質時, 多語屈, 惠察則榮昌顯有敎誘之跡。 鞫廳啓請刑推榮昌, 又請梲等與尙晟兄弟面質, 又拿李翊華。 榮昌受刑二次, 始爲承款, 【承款招辭與上變書略同。】 而供辭中, 援引僧雲浮、楓悅、卯定、玉如、一如、惠日、鄭涸、柳鑽、鄭愼、崔憲卿、申鍵等十一人。 鞫廳啓請竝拿, 而又以鄭涸兄弟, 隱伏北邊山僻中, 令所在官一同捉送, 其外所援引僧人、賊人等, 亦令本道廣加譏捕, 榮昌則姑爲仍囚, 以待諸罪人拿來。 榮昌招內又言: "尙仲當爲卜直, 【卽俗諺擔負者也。】 尙晟可爲先行之說, 曾已言及, 而兩人皆應諾。" 云。 故以此更推於尙晟等, 尙晟則以爲: "聞榮昌之言於路上, 而意謂推奴之事。" 云, 尙仲以爲: "元無所聞。" 云。 仍與榮昌面質後, 尙晟兄弟連受刑訊, 不服而斃。 蔣漢卿以梲等凶書中, 有使漢卿往探僧人蹤迹之說, 請決棍, 惠察則鞫廳啓請決罪放送, 上命勿爲決罪而放之。 上以罪人承款後, 告者例爲釋枷, 而此則有不可徑放者, 解枷當否, 令鞫廳議啓, 鞫廳啓言: "梲、選基等, 與榮昌同心結腹, 日夜聚會, 同盟之書, 逆節已著, 而與慶咸合而爲一, 今此上變, 亦不過初因醞釀而成, 後恐敗露而發, 此三人決不可解枷。 請先解金廷說之枷。" 從之。 上又下敎鞫廳曰: "劇賊張吉山, 慓悍無比。 往來諸道, 徒黨寔繁, 已過十年, 尙未斯得。 頃自陽德, 發軍圍捕, 而終未捉得, 亦可知其陰兇矣。 今觀榮昌之招, 尤極痛惋。 不可不密勑諸道, 詳探所在, 別爲發軍勦捕, 以除後患, 亦爲議啓。" 鞫廳請令密諭于諸道, 使道臣、帥臣, 另施方略, 廣加譏察, 且令備局, 密爲分付於軍門及捕廳, 諭以不惜厚賞高爵之意, 內外一心, 期於必捕, 從之。 榮昌所援僧人惠一、楓悅拿來。 惠一與榮昌面質, 榮昌亦有敎誘之迹, 楓悅亦以爲全然不知。 李翊華與李梲面質, 亦互相爭辨, 竝姑仍囚。 俄而, 有前僉使洪箕疇者, 又上變言: "上年冬, 金廷說言曰: ‘有李榮昌者, 肆爲妖惡之言, 而朱棐之名, 亦出其口, 試往文川, 探問事情。’ 云, 故果爲下往文川, 以此言于郡守曺錫, 送簡邀棐, 其爲人如癡如狂, 其爲言, 若虛若實。 仍使之書出所懷, 則所書出者, 凡七度, 極其妖惡, 故卽爲上來告知之。" 鞫廳拿朱棐問之, 棐供曰: "去年冬, 遇箕疇於文川郡衙。 箕疇言: ‘欲爲移去鶴浦, 誰可與交者?’ 果爲書給若干人。 又言: ‘永興倅欲知本邑人物, 須列書鄕任可合人。’, 故又書給本邑人數十餘名。 其外寒溪道人鄭惠術業神秘之說及靑陸浦有疑鬼疑人之人, 來祭鄭家祠堂之說, 皆聞於箕疇, 而其所謂七度文書, 皆是僞書, 而亦或因其手書, 多有推演云。" 及與箕疇面質, 兩人皆以曹錫爲證, 鞫廳請拿錫。 錫供稱: "箕疇來言棐有不測心, 光恩君及申大將, 使之探問云, 故果爲招棐, 箕疇與棐再宿於別處。 其後箕疇出示棐所爲海島占曰: ‘棐以爲鬱陵島, 已作倭地, 可以請來。’ 云, 更請棐, 占三萬衛事, 棐卽擲錢作卦。 蓋棐之言曰: ‘三萬衛在永興, 地闊而高。 若有土賊之患, 糾率同志, 入于三萬衛。’ 又手書其所懷於諸紙, 以示箕疇, 卽所參見, 而其餘酬酢, 都出於箕疇賣弄棐者云。" 鞫廳更請棐、箕疇面質。 棐言七度文書, 渠自書, 寒溪道士之說, 聞於襄陽人宋時釬。 及更推, 棐還諱之, 被刑十次而斃。 時釬以自做妖言, 承款處斬。 箕疇、錫, 鞫廳請對, 請取服勘斷, 亦杖斃。 榮昌援引申鍵拿來, 亦自明, 其餘諸人, 皆譏捕而無其人, 鞫廳請更問。 榮昌變辭言: "僧如浮雲故, 以雲浮假作僧名, 李衡徴、尹斗緖ㆍ昌緖來見, 同坐沈檀家, 檀子得天及斗緖, 厚給銀錢, 衡徵仍做出鄭姓人、玉如、鄭涸、崔憲卿等名。 一如、惠一, 曾所相知, 楓悅名僧故, 憑藉爲言, 卯定之名, 亦自做出。" 云。 鞫廳以變幻納供, 請加刑, 至七次而斃。 於是勘處先囚諸罪人。 梲、選基、慶咸等伏誅, 李翊華、蔣永祐等遠配, 惠一、覺禪、楓悅、一如、申鍵等放送, 金廷說放送後論賞, 更以與告者有異, 勿爲論賞。
- 【태백산사고본】 33책 31권 3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446면
- 【분류】사법-치안(治安) / 사법-행형(行刑) / 외교-야(野) / 외교-왜(倭) / 변란-민란(民亂) / 사상-불교(佛敎)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註 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