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의정 유상운과 우의정 신익상이 유집일의 논죄, 궁가의 절수 문제 등을 의논하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유상운(柳尙運)과 우의정(右議政) 신익상(申翼相)이 밖에 있는 원임(原任) 두 대신을 불러들여 국사(國事)를 함께 하기를 청하였으니, 이때에 남구만(南九萬)이 잠시 소분(掃墳)230) 으로써 말미를 받아 나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유상운이 말하기를,
"유집일(兪集一)을 당초에 논죄(論罪)할 때에 다만 파직(罷職)하여 서용(敍用)하지 않기로 한 것은 장차 그 죄를 더하려 한 것입니다. 대관(臺官)의 소 안에, 그 기사(欺詐)를 제 마음대로 자행하였다고 말한 것은, 그 실상(實狀)은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당초에 왜인(倭人)이 회답받기를 청하였을 때에 유집일이 엄사(嚴辭)로 준절(峻截)하게 물리치지 못하고 도리어 조정에 계청(啓請)하였으니 이미 준절함을 잃었으며, 하물며 회보(回報)를 기다리지 않고 경솔하게 앞질러 올라왔으니, 조가(朝家)에서 비록 답서(答書)를 만들어 준다고 한들 누구를 시켜 이를 전한단 말입니까? 신(臣)의 뜻은 이것으로써 바로 감죄(勘罪)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고, 신익상의 말도 또한 그러하였으니, 임금이 명하여 삭직(削職)하였다. 유상운이 이어 궁가(宮家)의 절수(折受)의 일을 진달하여 말하기를,
"궁(宮)마다 2백 결(結)을 절수하는 것이 곧 정식(定式)인데, 이제 정한(定限)을 넘는 것이 매우 많습니다. 만약 2백 결의 정한 이외의 것은 모두 혁파(革罷)하고, 조가(朝家)에서 미(米)·포(布)·은화(銀貨)를 양급(量給)하여 해궁(該宮)으로 하여금 스스로 장토(庄土)를 마련하여 모양을 이루게 한다면 좋겠습니다."
하고, 신익상도 또한 이를 찬성하고 또 말하기를,
"2백 결을 주는 것은 반드시 실결(實結)로써 채워 주고, 이것 외에는 결코 절수를 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였다. 유상운이 말하기를,
"장토를 아직 갖추기 전에는 연도(年度)를 한정(限定)하여 공부세(公賦稅)를 내려 준다면 공·사(公私)가 모두 편리하겠습니다."
하고, 형조 판서(刑曹判書) 민진장(閔鎭長)은 말하기를,
"2백 결은 그 좋은 곳을 스스로 선택케 함이 좋습니다."
하였다. 유상운이 또 말하기를,
"수진(壽進)·명례(明禮)·어의(於義)·용동(龍洞)은 사체(事體)가 다른 궁가의 일과 달라서 일찍이 별판부(別判付)가 있었으니, 이 네 궁가 및 명선(明善)·명혜(明惠)의 두 궁방(宮房)은 무진년231) 을 한계(限界)로 하여, 무진년 이전의 절수한 곳은 그대로 두고 이후의 절수는 모두 혁파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르고, 이어 말하기를,
"이 뒤로는 영구히 절수하지 않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민진장이 말하기를,
"신미년232) 사이에 호남(湖南) 사람 정무서(鄭武瑞) 등의 소를 인하여 고(故) 상신(相臣) 정철(鄭澈)의 관작(官爵)을 추삭(追削)하였는데, 상년(上年)의 겨울 사이에 호남의 유생(儒生) 박윤(朴碖) 등이 또 진소(陳疏)하여 정무서를 죄주기를 청하니, 비답 안에 정무서의 죄상을 해조(該曹)233) 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회계(回啓)하지 않았으므로 신이 본조(本曹)에 대죄(待罪)한 뒤에 그 소를 취하여 보았는데, 기축 옥사(己丑獄事)234) 와 경신 옥사(庚申獄事)235) 의 두 옥사(獄事)가 수미(首尾)로 서로 관련되었으므로, 신은 이 혐의를 가지고 감히 회계치 못하였습니다. 대신에게 하순(下詢)하시어 처리하심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유상운은 말하기를,
"그 소(疏)가 기축 옥사를 논하여 이어 경신 옥사에 미쳐서, 이것으로써 백유양(白惟讓)·이발(李潑)·이길(李洁) 등은 모두 복작(復爵)되고, 정철은 추삭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은 죄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신익상은 말하기를,
"정철을 무함(誣陷)하여 추삭(追削)에 이르렀으니 이미 극히 근거가 없으며, 경신 옥사에 미친 데에 이르러서는 그 죄가 더욱 큽니다."
하였으며, 유상운이 말하기를,
"한 옥사를 신구(伸救)함도 오히려 호역(護逆)이 되거든, 하물며 두 옥사를 모두 구(救)하려 했으니, 그 죄가 더욱 어떻다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정무서를 변방의 먼 곳에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1책 29권 4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389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외교-왜(倭) / 재정-상공(上供) / 재정-역(役)
- [註 230]소분(掃墳) : 선영(先塋)에 성묘하는 것.
- [註 231]
무진년 : 1688 숙종 14년.- [註 232]
신미년 : 1691 숙종 17년.- [註 233]
해조(該曹) : 형조(刑曹).- [註 234]
기축 옥사(己丑獄事) : 선조 22년(1589)에 동인(東人)인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謀反事件)으로 일어난 옥사(獄事). 서인(西人)인 정철(鄭澈)이 이 옥사를 맡아 다스려서 동인의 백유양(白惟讓)·이발(李潑)·이길(李洁) 등이 처형되고, 정언신(鄭彦信)·정언지(鄭彦智) 등이 유배(流配)되었음.- [註 235]
경신 옥사(庚申獄事) : 숙종 6년(1680)에 김익훈(金益勳) 등이, 영의정(領議政) 허적(許積)의 서자(庶子) 허견(許堅)이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 등 종실(宗室) 3형제와 더불어 역모(逆謀)를 한다고 고변(告變)하여서 일어난 옥사. 많은 사람이 처형당하고 남인(南人) 일파가 몰락하였음. 이를 경신 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도 함.○癸未/引見大臣、備局諸宰。 左議政柳尙運、右議政申翼相, 請召致原任兩大臣之在外者, 共做國事。 時, 南九萬纔以掃墳, 受由出去故云然, 上從之。 尙運曰: "兪集一當初論罪時, 只爲罷職不敍者, 蓋將以加其罪也。 臺官疏中逞其欺詐云者, 其實狀未必然, 而但當初倭人請受回答之時, 集一不爲嚴辭峻斥, 乃反啓請於朝廷, 已欠峻截, 況不待回報, 徑先上來, 自朝家雖成給答書, 誰使傳之耶? 臣意則以此直爲勘罪, 似可矣。" 翼相之言亦然, 上命削職。 尙運仍陳宮家折受事曰: "每宮二百結折受, 乃是定式, 而今則過於定限者甚多。 若於二百結定限之外, 盡爲革罷, 自朝家量給米、布、銀貨, 使該宮自備庄土, 得以成樣則好矣。" 翼相亦贊之, 又曰: "所給二百結, 則必以實結充給, 此外切勿許折受可也。" 尙運曰: "庄土未備之前, 限年賜以公賦稅, 則公私俱便矣。" 刑曹判書閔鎭長曰: "二百結則使之自擇其好處可矣。" 尙運又曰: "壽進、明禮、於義、龍洞則事體異於他宮事, 曾有別判付矣, 此四宮及明善、明惠兩房則以戊辰年爲限, 戊辰以前折受處則仍存, 以後折受則盡爲革罷, 似好矣。" 上皆從之, 仍曰: "此後永勿折受可也。" 鎭長曰: "辛未年間, 因湖南人鄭武瑞等之疏, 追削故相臣鄭澈官爵矣。 上年冬間, 湖南儒生朴碖等, 又爲陳疏, 請罪武瑞, 批答中, 有武瑞罪狀, 令該曹稟處之命, 而尙未回啓, 故臣待罪本曹之後, 取見其疏, 則以爲己丑、庚申兩獄, 首尾相關, 臣以此嫌不敢回啓矣。 下詢大臣而處之何如?" 尙運曰: "其疏論己丑獄事, 仍及庚申, 以此白惟讓、李潑、李洁等, 皆復爵, 鄭澈則至於追削, 此人不可不罪矣。" 翼相曰: "誣陷鄭澈, 至於追削, 已極無據, 至及於庚申獄事, 則其罪尤大矣。" 尙運曰: "伸救一獄, 猶爲護逆, 況竝救兩獄, 其罪尤何如也?" 上曰: "鄭武瑞邊遠定配。"
- 【태백산사고본】 31책 29권 4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389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외교-왜(倭) / 재정-상공(上供) / 재정-역(役)
- [註 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