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 남구만은 사행과 남한의 별성을 신축하는 공사를 물리기를 청하다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이 말하기를,
"사행(使行)이 마땅히 5월에 출발해야 할 터인데, 듣건대 저 땅에 흉년이 들어 굶주리고 있다 하니, 허다한 사람과 말(馬)들을 반드시 접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장마철이 되어서 다만 길을 가기가 대단히 곤란할 뿐만 아니라, 방물(方物) 또한 손상되고 더렵혀질 염려가 있습니다. 마땅히 7월로 물려서 결정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남구만이 계청(啓請)하기를,
"이조 정랑 김진규(金鎭圭)가 공무를 집행하지 않고, 전(前) 좌랑(佐郞) 심권(沈權)은 또 피죄(被罪) 중에 있으므로, 전례에 따라 당상관(堂上官)으로 하여금 서로 의논하여 낭관을 차출(差出)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조 판서 윤지선(尹趾善)이 말하기를,
"낭관(郞官)이 현재 있는 사람이 없다면 당상관이 혹 서로 의논하여 차출(差出)할 수 있지만, 지금은 이미 낭관이 있으니 당상관이 어찌 격식을 깨뜨리고 비망(備望)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김진규의 벼슬을 갈라고 명하였다. 이때 요로(要路)에 있는 사람들이 그 사당(私黨)을 끌어들여 전랑(銓郞)으로 임명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전망(前望)의 사람들이 연고가 있는 틈을 타서 이런 청을 하게 된 것이다. 대개 전망(前望) 가운데서 이건명(李健命)은 외직(外職)으로 보임되고, 민진후(閔鎭厚)는 또 상피(相避)로 구애를 받고 있으며, 김진규는 이미 공무를 보지 않고 있고, 심권은 또 좌파(坐罷)되었으니, 법도로 보아서는 마땅히 서임(敍任)을 청하거나, 아니면 상피를 아울러 의망(擬望)할 것을 청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에 격식을 깨뜨리는 청을 하고, 이정겸(李廷謙)을 비의(備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또한 이건명이 전랑(銓郞)으로 있을 때 정호(鄭澔)를 추천하였는데, 미처 의망에 들지 않았다고 핑계대어 공공연히 쓰지 않았다. 이정겸은 노둔하고 용렬하여 매우 인망(人望)에 맞지 않는 사람인데도, 다만 시의(時議)에 영합하려고 갑자기 청선(淸選)에 오르니, 물의(物議)가 해괴하게 여겼다. 남구만이 또 경상 감사(慶尙監司) 이인환(李寅煥)이 자못 성적(聲績)이 있는데도 대사간으로 자리를 바꾸어 임명하였다 하여, 잉임(仍任)시켜 성효(成效)를 책임지울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또 소유(疏儒) 박상경(朴尙絅)·강민저(姜敏著)의 정거(停擧)117) 의 처벌을 해제(解除)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모두 허락하였다. 남구만이 또한 한재(旱災) 때문에 우선 남한(南漢)의 별성(別城)을 신축(新築)하는 공사를 중지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가을에 가서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유상운(柳尙運)이 말하기를,
"의논하는 자들이 간혹 ‘별성을 쌓는 일은 원래 잘된 계획이 아니다.’라고 하니, 가을에 가서 다시 잘 살펴보도록 한 뒤에 계획을 정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남구만이 말하기를,
"고(故) 판서(判書) 남용익(南龍翼)은 교문(敎文)가운데, ‘몽란(夢蘭)’이란 두 글자를 쓴 것 때문에 무함을 당하여 귀양가서 죽었습니다. 이제 이미 복관(復官)시키고 사제(賜祭)하였는데, 이 한 가지 사항에 대해서는 아직도 소석(疏釋)하라는 분부가 없으셨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문자(文字)를 들추어 내어 죄안(罪案)을 구성한 것은 스스로 그 죄가 있는 것인데, 어찌 남용익에게 손상될 것이 있겠는가? 남용익의 원통함은 내가 이미 통찰하고 있다."
하였다. 남구만이 또 말하기를,
"지난해에 춘천 부사(春川府使)로 하여금 강원 병사(江原兵使)의 사무를 보도록 하였는데, 본부(本府)의 물력(物力)이 빈약하여 영문(營門)의 모양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도내(道內)의 각 고을을 순회(巡回)하는 데 걸핏하면 몇 달이 걸려 관청 일이 포기 상태에 있으니, 이것도 또한 매우 염려스러운 일입니다. 전례에 따라 방어사(防禦使)를 겸직하도록 하는 것만 못하니, 평상시에는 부사(府使)의 일을 보도록 하고, 전란에 임해서는 영동(嶺東)·영서(嶺西)의 영장(營將)을 총령(總領)하도록 하는 것이 편리할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모두 남구만의 말을 옳다고 하므로,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내 가선 대부(嘉善大夫)의 당상관(堂上官)을 물론하고, 반드시 성망(聲望)이 있는 무신(武臣)으로 차견(差遣)할 것을 명하였다. 윤지선(尹趾善)이 평안도 강변(江邊)의 일곱 고을에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을 교차(交差)시키는 일에 대해 대신에게 순문(詢問)할 것을 청하자, 유상운(柳尙運)이 말하기를,
"교차하는 것은 진실로 좋은 일이나, 다만 일곱 고을을 모두 대관과 시종(侍從)에 출입했던 사람으로 교차시키려 한다면, 아무래도 충원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강변(江邊) 가운데서 한 고을로 정하라."
하니, 유상운이 이산(理山)으로 정할 것을 청하므로,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병조 판서 서문중(徐文重)이 말하기를,
"이세백(李世白)이 진달한 바 있는 평안도 무과(武科)의 거자(擧子)로 입격(入格)하고서도 참여하지 않은 자에 대하여는, 마땅히 대신에게 순문(詢問)하여 처리해야 합니다."
하였다. 남구만이 송(宋)나라 태조(太祖)의 ‘짐(朕)이 준 것은 바로 은택(恩澤)이 되는 것이니, 어찌 전례가 있겠는가?’ 하는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전례를 인용하여 거행할 일이겠습니까? 결코 시행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지경연(知經筵) 박태상(朴泰尙)이 말하기를,
"영희전(永禧殿)118) 의 열성(列聖) 어용(御容)에 표지(表識)가 없으니, 혹시 뜻밖의 변고라도 있는 날이면 어떻게 분간하겠습니까? 표지하는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곁에 잘게 써서 표시하라고 명하였다. 뒤에 예조(禮曹)에서 곁에다 곧바로 쓰는 것이 사체(事體)로 보아 미안하다고 하여, 조그만 쪽지를 만들어서 거기다 표지(表識)하는 글자를 써서 영정(影幀)의 왼쪽에다 붙이고, 쪽지 윗쪽에는 붉은 쪽지를 덧붙일 것을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승지 박세준(朴世𤎱)이 심사명(沈思溟)의 유배지(流配地)가 너무 멀다고 하여 조금 가까운 곳으로 다시 정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유배지를 자주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박세준 등이 만일 심사명이 유배당한 것을 원통하게 여긴다면, 마땅히 신백(伸白)을 하여야 할 것이고, 만일 그 죄가 마땅히 멀리 귀양보내야 한다고 여긴다면 어찌 거리의 멀고 가까운 것을 따질 수가 있으며, 또한 어찌 감히 이러한 말로써 임금의 귀를 자주 더럽힐 수가 있겠는가? 대개 시의(時議)가 명의(名義)에 죄를 얻었거나 선정(先正)을 무함한 것에 관계된 것이면, 반드시 급급하게 서둘러 구호(救護)하려고 하니, 아! 또한 이상한 일이다.".
- 【태백산사고본】 30책 28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372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사법-재판(裁判) / 외교-야(野) / 군사-관방(關防) / 재정-역(役) / 역사-고사(故事) / 왕실-종사(宗社) / 역사-사학(史學)
○引見大臣、備局諸宰。 領議政南九萬曰: "使行當以五月發程, 而聞彼地饑荒, 許多人馬, 必難接濟。 且當霖潦, 不但行路甚難, 方物亦必有傷汚之患。 宜退定於七月。" 上從之。 九萬以吏曹正郞金鎭圭不爲行公, 前佐郞沈權又在被罪中, 請依前例, 令堂上相議, 差出郞官, 上從之。 吏曹判書尹趾善曰: "郞官無見存者, 則堂上或可相議差出, 而今則旣有郞官, 堂上豈可破格備望乎?" 上命鎭圭改差。 時當路者, 欲汲引其私黨拜銓郞, 故乘前望人有故, 爲此請。 蓋前望中李健命外補, 閔鎭厚又以相避見礙, 鎭圭旣不行公, 權又坐罷, 法當請敍, 或請竝擬相避, 而乃爲破格之請, 至以李廷謙備擬。 且健命在銓時, 薦鄭澔, 而托以未及入擬, 公然不擧。 廷謙庸鈍蹇劣, 甚非人望, 而只以迎合時議, 遽通淸選, 物議駭之。 九萬又以慶尙監司李寅煥, 頗有聲績, 而移除諫長, 請仍任責成。 又請解疏儒朴尙絅、姜敏著停擧之罰, 上竝許之。 九萬又以旱災, 請姑寢南漢別城新築之役, 上命待秋擧行。 左議政柳尙運曰: "議者或言別城之築, 元非得計云, 秋後更使看審後定計似好。" 上從之。 九萬曰: "故判書南龍翼, 以敎文中用夢蘭二字, 被誣謫死。 今旣復官賜祭, 而此一款尙無昭釋之敎矣。" 上曰: "抉摘文字, 構成罪案者, 自有其罪, 何傷於龍翼乎? 龍翼之冤, 予已洞察矣。" 九萬又曰: "頃年使春川府使, 行江原兵使事, 而本府物力殘薄, 無以成營門貌樣。 且其巡歷, 動經數月, 官事抛棄, 亦甚可慮。 不如依前兼防禦使, 平時則行府使事, 臨亂則摠領嶺東西營將, 似合便宜。" 上問于諸臣, 皆以九萬言爲是, 上許之。 仍命勿論嘉善、堂上, 必以有聲望武臣差遣。 趾善以平安道江邊七邑文武交差事, 請詢于大臣, 尙運曰: "交差固好, 而但七邑, 皆欲以出入臺侍者交差, 則恐難充差矣。" 上曰: "然則以江邊中一邑爲定。" 尙運請定以理山, 上從之。 兵曹判書徐文重曰: "李世白所達平安道武科擧子入格未參者, 宜詢大臣處之。" 九萬引宋 太祖朕所與, 卽爲恩澤, 豈有例耶之言曰: "此豈援例擧行之事耶? 決不可施矣。" 上可之。 知經筵朴泰尙言: "永禧殿列聖御容, 無表識之事, 脫有意外之變, 何以辨之? 不可無表識之擧矣。" 上命細書其傍以表之。 後禮曹以直書于傍, 事體未安, 請作小籤, 書表識之字, 付於幀子之左, 籤上加付紅籤, 上允之。 承旨朴世𤎱, 以沈思溟配所太遠, 請改定於稍近之地, 上曰: "不可頻數改易也。"
【史臣曰: "世𤎱等如以思溟之被配爲冤, 則當爲之伸白, 如以爲其罪當遠配, 則何可論道里之遠近, 而亦何敢以此等說, 煩浼天聽乎? 蓋時議如係得罪名義及醜誣先正者, 則必欲汲汲救護, 吁亦異矣!"】
- 【태백산사고본】 30책 28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372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사법-재판(裁判) / 외교-야(野) / 군사-관방(關防) / 재정-역(役) / 역사-고사(故事) / 왕실-종사(宗社)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