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강에 나아가 민진후·이여 등과 국정을 논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검토관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구언(求言)하시는 성지(聖旨)에 공경과 태만 및 공(公)과 사(私)를 구분하여 정령(丁寧)하게 반복하셨습니다마는, 요점은 진실로 자주 경연(經筵)에 임어(臨御)하시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가(朝家)에 일이 많아 중단하는 때가 많아 오직 하다 말다 할 뿐만이 아니었으니, 이것은 학문하는 사람들이 가장 크게 꺼리는 것입니다. 무릇 사람의 심정은 오래 중단될수록 점점 게을러지는 법이니, 전하께서는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성현의 법으로 《심경(心經)》이란 책 하나 만한 것이 없습니다.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 이 글을 아주 좋아하셨기에, 승하(昇遐)하셨을 때 선대왕(先大王)께서 이 책을 가져다가 현궁(玄宮)에 넣으시기까지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효종의 자리에 계시면서 효종의 마음을 전해 받으셨으니, 이 책에 더욱 마땅히 언제나 눈을 두시되, 혹시라도 의심스러운 데가 있으면 유현(儒賢)들이 입시(入侍)했을 적에 그들과 강론하시다면 반드시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성지에 언로(言路)가 열리지 않는 것을 우려하셨습니다마는, 지금 성상의 마음에 어긋나거나 거슬리는 것이 있으면, 더러는 무거운 율(律)로 논죄(論罪)하도록 명하시거나 더러는 받아들이지 말도록 명하시니, 이러시면서 언로가 열리기 바라심은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성지에 초야(草野)에 유현(遺賢)이 있게 되는 것을 근심하셨습니다. 전하께서 치의(緇衣)494) 에 대한 정성이 진실로 지극하기는 합니다마는, 더러는 구해놓고도 다 임용(任用)하지 않거나 더러는 현명하지 않은 자를 현명한 것으로 오인(誤認)하시어 폐해가 아울러 크니, 반드시 모름지기 학문을 강론하여 사리에 밝으신 다음에야 현명한 사람인지 아실 것입니다.
성지에 풍속이 사치를 숭상하는 것을 근심하셨습니다. 신하들이 보고서 알고 있는 전하의 검소한 덕은 단지 복어(服御)495) 에 관한 것뿐입니다. 신이 알 수는 없습니다마는, 궁중(宮中) 사령(使令)들의 수가 과연 《대전(大典)》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일체 같습니까? 만약 혹시라도 더 있다면 허비가 참으로 적지 않을 것입니다. 요사이 별군직(別軍職)이 거의 20이나 되니 이는 또한 재물을 손상할 것이고, 경덕궁(慶德宮)을 수리하니 재력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비록 하나의 관원이나 하나의 직책도 절대로 그 수효를 증가하지 마시고, 영작(營作)에 있어서도 절대로 경솔하게 외방 고을에 시키지 마소서. 궤유(饋遺)496) 가 점차로 더욱 과람해지므로, 절선(節扇)의 정해진 자루 수와 세찬(歲饌)의 관유(關由)497) 에 대한 사헌부(司憲府)의 의논이 있게 된 것인데, 이는 세쇄한 것이어서 진실로 거행할 수 없기는 합니다마는, 만일 조신(朝臣)들로 하여금 물리치거나 감하게 한다면 풍습이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서원(書院)과 사당(祠堂) 설립에 있어서는 재력이 미약하여 항상 완성하기 어려운 것을 염려하기 때문에, 수재(守宰)들이 매양 협조해 주어야 하고 사우(士友)들에게 조력하기를 바라 전부터 그래 왔습니다. 요사이는 그만 진신(搢紳)이니 유사(有司)니 재신(宰臣)이니 명사(名士)니 하며 열명(列名)하여 문서를 만들어 두루 팔도(八道)를 찾아디니고 있으니 마땅히 조가(朝家)에서 방지해야 합니다. 이 이외에도 제사(諸司)들이 구청(求請)하고 있는 명목(名目)이 한 가지만이 아니고, 사사 집의 혼인이나 상사에 있어서도 또한 허다히 열명을 하여 협조를 바라니, 이것을 거듭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지(聖旨)에 형옥(刑獄)이 지체되는 경우가 많은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시험삼아 노이익(盧以謚)의 일로 말하더라도 지금 세월이 얼마나 되었습니까마는, 결말이 날 기약이 없으니 마땅히 경계와 신척을 더하도록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칭찬하며 받아들이고, 궤유(饋遺)·구청(求請)·형옥(刑獄) 등의 일에 있어서는 아울러 경계와 신칙을 더하도록 명하였다. 승지 서문유(徐文𥙿)가 아뢰기를,
"그전에 반포(頒布)했던 《심경석의(心經釋疑)》를 일찍이 이미 본원(本院)에 모아 장차 불태우기로 했습니다. 그 당시의 건백(建白)한 내용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마는, 불태워버림은 매우 불가하니 마땅히 도로 반포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 뒤에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이여(李畬)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심경석의》는 본래 이황(李滉)의 문인 이덕홍(李德弘)과 이함형(李咸亨) 두 사람에게서 나온 것으로, 그들이 이황에게 문난(聞難)했던 바를 각자가 기록했다가 합쳐서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 당초에는 《심경질의(心經質疑)》라고 했고, 이어 각기 기록한 것을 가지고 이황에게 나아가 바로 잡았는데, 그때 왕복(往復)한 말들이 이황의 문집에 들어 있습니다. 당초에 옥당(玉堂)에도 등본(謄本)이 있었는데, 신유년498) 에 유신(儒臣)의 상소로 인하여 송시열(宋時烈)로 하여금 잘못된 데를 교감(校勘)하게 하였습니다. 송시열이 이에 영천 서원(榮川書院) 및 이덕홍의 외손의 집에서 별본(別本)을 구했는데, 옥당에 있는 등본과 다른 곳이 없었습니다. 송시열이 성상의 명에 따라 번거로운 것은 삭제하고 소략한 곳은 보충하면서도 원본(元本)의 글자 하나도 변동하지 않아, 선배(先輩)를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뜻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영남(嶺南) 사람 김성유(金聲裕) 등이 상소하여 ‘《심경질의》는 본래 이황의 증정(證訂)을 거치지 않은 것이라.’고 하고, 또한 삭제하고 보충하고 한 것을 죄로 삼으므로, 조정의 의논이 그렇게 여겨 드디어 각판(刻板)을 부수어 버리고 책도 불태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김성유의 상소는 정구(鄭逑)의 말을 인용하여 증거를 삼되, ‘그때 서사원(徐思遠)이란 사람이 이 기록의 사본(寫本)을 만들어 동궁(東宮)에 올리려고 하므로, 정구가 글을 보내 만류했다.’고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대저 정구의 글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심경질의》의 사본을 올림은 매우 훌륭한 뜻이요 매우 훌륭한 일이라.’고 했고, 또한 ‘그 책은 당초에 선생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조금도 미진한 데가 없이 환하게 된 것은 아니지만, 혹시라도 경연(經筵)에서 시강(侍講)하게 될 때에 갖추어 진달하여 진강(進講)한다면 좋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김성유는 위아래를 끊어버리고 그 글뜻을 반대로 하여 자기의 말의 증거로 삼았으니, 이는 오직 송시열만 포함한 것이 아니라 이황 및 정구까지 아울러 모함한 것입니다. 이덕홍의 영남에 살고 있는 자손들이 이덕홍과 이황이 주고받은 글들을 관(官)에 정고(呈告)하기까지 하여 한 고을의 싸움이 되었었으니, 김청유 등이 무망(誣罔)한 실상이 이에서 더욱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심경》은 본래 이황이 표장(表章)해 온 것으로서 그가 평소에 공부하는 터전을 삼았던 것인데, 그가 강론한 것을 오늘날 고찰할 데가 없고, 오직 이 《심경질의》 한 책이 있을 뿐입니다. 대의(大義)에 있어서는 비록 밝혔지만, 더러는 지루하고 산만하여 소루(疏漏)한 데가 있으니, 실지는 기록하는 사람들의 잘잘못 때문입니다. 앞으로 더욱 산정(刪定)하여 본 뜻이 더욱 밝아지게 하는 것이 어찌 이황을 존대하고 숭상하는 도리에 해롭겠습니까? 이번에 여러 신하들에게 은사(恩賜)했던 판본(板本)을 이미 도로 반포하게 되었으니, 마땅히 이 판본을 하나씩 양남(兩南)의 순영(巡營)중 한 곳에 내리어 각판(刻板)하고 인출(印出)하여 올리고 예람(睿覽)하실 수 있게 하도록 할 것이며, 이어 이 글이 다시 세상에 행해지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 【태백산사고본】 29책 27권 58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355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역사-전사(前史)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출판-서책(書冊)
- [註 494]치의(緇衣) : 초야의 선비.
- [註 495]
복어(服御) : 임금이 쓰는 의복·거마(車馬) 따위.- [註 496]
○壬子/御晝講, 檢討官閔鎭厚曰: "聖旨求言, 於敬怠公私之分, 丁寧反覆, 其要實在於頻御經筵。 然朝家多事, 間斷時多, 不惟作輟, 最是學者大忌, 凡人之情, 久則漸怠, 願殿下念之。 聖賢之法, 莫如《心經》一書。 孝宗大王酷好此書, 賓天之日, 先大王至取此書, 納之玄宮。 今殿下, 居孝廟之位, 傳孝廟之心, 其於此書, 尤宜常目在之。 或有疑晦處, 儒賢入侍, 與之講論, 必有補益, 聖旨以言路不開爲憂, 今有違忤聖心者, 或命論以重律, 或命勿爲捧入, 如此而欲望言路之開, 不亦難哉? 聖旨以野有遺賢爲憂, 殿下緇衣之誠, 固至矣。 而如或得之而不盡其用, 不賢者而誤認爲賢, 則其害俱大, 必須講學明理然後, 可以知人之賢, 聖旨以俗尙侈靡爲憂, 殿下儉德, 臣下之所見知者, 只是服御之具而已。 臣未知宮中使令之數, 果能一如《大典》所載耶? 苟或有加, 靡費誠不少, 近日別軍職, 幾至二十, 此亦可以傷財。 慶德宮修理, 財力不可殫記, 望殿下, 雖一官一職, 切勿加其數, 至於營作, 切勿輕擧外官, 饋遺漸益過濫, 有節扇定柄數歲饌關由憲府之議, 而此涉細瑣, 固不可行。 若使朝臣, 或却或減, 則風習可變。 至於院祠之設, 財力綿薄, 常患難成, 故守宰每助之, 士友求其助, 自前而然。 今乃稱以搢紳有司宰臣名士, 列名作書, 遍求八道, 自朝家宜防之。 此外諸司求請, 名目非一, 至於私家昏喪, 亦多列名求助, 此不可不申戒之也。 聖旨以刑獄多滯爲憂, 試以盧以益事言之, 今幾日月, 結末無期, 宜加警飭。" 上奬納之, 如饋遺求請刑獄等事, 命竝加戒飭。 承旨徐文𥙿言: "舊頒《心經釋疑》, 曾已聚于本院, 將火之。 當時所建白, 未知其如何, 而燒燼甚不可, 宜還頒。" 上從之。 後同經筵李畬白上曰: "《心經》本出於李滉門人李德弘、李咸亨兩人, 而以其所問難於滉者, 各自記之, 合爲一冊。 初名《心經質疑》, 仍以其所記, 就正於滉, 其往復之語, 在於滉集中。 始玉堂有謄本, 辛酉因儒臣上疏, 令宋時烈勘校其訛誤。 時烈乃求他本於榮川書院及李德弘外孫家, 則與玉堂謄本, 無所異同。 時烈遵上命刪煩補略, 而元本不動一字, 以存尊畏先輩之意矣。" 嶺人金聲裕等上疏以爲: "《質疑》, 本不經李滉證訂, 而且以刪補爲罪, 朝議同然。 遂至毁板焚冊, 聲裕疏引鄭逑之言爲證, 而至曰: ‘其時有徐思遠者, 欲以是錄, 寫進東宮, 鄭逑以書止之云。’ 夫逑書具存, 其書曰: ‘《質疑》之寫進。’ 甚盛意也, 甚盛擧也。" 又曰: "此書初非先生之自爲, 未必塋然無一毫未盡, 其或筵中侍講之時, 具達而進之可矣。 聲裕則截去上下, 反其書意, 以證其言, 是則不惟誣時烈, 竝與滉ㆍ逑而誣之矣。 李德弘子孫在嶺南者, 以德弘與滉往復書, 以至於呈官, 作一鄕戰, 聲裕等誣罔之狀, 於此益著。 《心經》本是滉所表章, 爲一生用功之根基, 而其於所講論, 今無可考, 惟此《質疑》一書在焉。 大義雖明, 其或有支蔓踈漏之處, 實由於記者之得失, 就加刪定, 使本旨益明, 寧有所傷於尊尙滉之道哉? 今諸臣恩賜之本, 旣爲還頒, 宜以此一本, 下于兩南巡營中一處, 使之鏤板印進, 以備睿覽, 仍使其書復行於世。" 上可之。
- 【태백산사고본】 29책 27권 58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355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역사-전사(前史)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출판-서책(書冊)
- [註 4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