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 산성의 배속·희빈 장씨 예우 등을 논의하다. 어영 대장 신여철의 파직에 대한 사론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이때 문수산(文殊山)에 성 쌓는 일이 이미 끝났다.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총융사(摠戎使)에 전속(專屬)시키고, 통진(通津)을 총융사의 관할 밑에 두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통진 관원들을 성 안으로 옮기려고 하였다. 병조 판서 윤지선(尹趾善)이 아뢰기를,
"좁아서 용신하기 어렵습니다."
하고, 남구만이 아뢰기를,
"일찍이 듣건대 이 산은 물이 없어서 걱정이라고 했는데, 성을 이미 쌓고 나서 천맥(泉脈)이 자못 많아지기는 했지만 땅은 진실로 협착합니다. 그러나 단지 관원이 있을 곳만 설치하는 것도 또한 하나의 방법이니, 총융사를 보내어 가서 보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 그뒤에 총융사 이기하(李基夏)가 명을 받고 가서 보고 돌아와 아뢰기를,
"성 안에 단지 두 군데의 골[洞]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매우 작아 관거(官居)는 옮길 수 없을 듯합니다. 할 수 없다면 먼저 창고(倉庫)를 옮기고 이어 객사(客舍)를 【군현(郡縣)에서 사명(使命)을 띠고 온 사신을 접대하는 곳이다.】 설치하여 앞날의 주필(駐蹕)에 대비하도록 하고, 민가(民家)는 성 밖 북편에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윤지선이 아뢰기를,
"진실로 관거를 옮겨 놓으려고 한다면 어찌 용납할 수 없겠습니까? 성의 밖은 지세(地勢)가 평탄하여 또한 백성들을 거주하게 할 만했습니다."
하고, 남구만이 아뢰기를,
"고(故) 상신(相臣) 조사석(趙師錫)이 이 성을 쌓으려고 했고, 윤지완(尹趾完)이 어영 대장(御營大將)이 되었을 적에 또한 구획(區劃)한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윤지선은 관거(官居)를 옮겨 놓을 수 있다고 하는데 이기하는 옮길 수 없다고 하니, 누구의 말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성을 쌓은 본 뜻은 단지 적인(敵人)들이 점거하여 내려다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니, 땅을 넓게 차지하여 한갓 인력(人力)을 허비할 것이 없습니다. 진실로 굳게 지키려고 한다면 관거는 의당 옮겨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옳다. 올해는 비록 옮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조용히 해 가야 할 것이다."
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당초에는 이를 총융사에게 전속시키려고 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미 강화(江華)를 보호하고자 하였으니, 마땅히 강화에 전속시켜야 한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강화에서 구관(句管)하도록 윤허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통진(通津)은 이 산성(山城)의 주인이니, 마땅히 고을 명칭을 승격(陞格)시켜 중요시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현(縣)을 올려 부(府)로 만들고, 무신(武臣) 중에 품계(品階)가 통정 대부(通政大夫)인 사람을 가려 보내는 것을 일정한 규례로 삼으라."
하였다. 비국에서 이 일을 강화 유수(江華留守) 민진주(閔鎭周)에게 물으니, 민진주가 아뢰기를,
"강화는 구관하는 데가 너무 많아 다시 이 성까지 총관(摠管)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남구만이 주청(奏請)하기를,
"군문(軍門)에서는 기계(器械)를 관장하고 강화에서는 양향(量餉)429) 을 주관하게 하며, 통진 부사(通津府使)가 그 지휘를 받도록 하는 것이 하나의 조치하는 방법이 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 뒤에 의논이 결정되지 않아 빈 성만 우뚝하고, 마침내 한 사람의 백성도 살지 않고 하나의 물건을 저장하지도 않았으므로, 식견있는 사람들이 한탄했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일전에 박만정(朴萬鼎)이 상소하여, 희빈(禧嬪)을 특이한 예(禮)로 대우하고 또한 따로 궁호(宮號)를 내걸기 청하였는데, 그의 한 말이 지극히 미안한 것이었습니다. 신이 처음 조정에 나왔을 때 우상(右相)이 신에게 글발을 보냈는데 박만정의 말과 비슷하였습니다. 그 뜻이 대개 조가(朝家)에서 새로 폐치(廢置)는 했지만 군하(群下)들의 마음에는 의아스러워하는 생각이 없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전대의 역사에 있는 것처럼 딴 궁(宮)에 폐치(廢置)했다면 법대로 공봉(供奉)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지만, 지금 희빈은 일찍이 홀로 있었던 일이 없고 함께 한 궁 안에 있으면서 왕후(王后)보다는 1등을 내렸을 뿐이니, 다시 특이한 예모를 차린다면 왕후와 함께 존숭함이 똑같아질 염려가 있을 것이니, 또한 어찌 따로 궁 이름을 내걸 것 있겠는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의논을 만약 통렬하게 끊어버리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마음이 위태롭고 의심스럽게 되고 국가의 체모가 손상될 것이니, 마땅히 군하(群下)들로 하여금 감히 다시는 이 일을 말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우상의 사서(私書)가 어떤 내용인지는 알지 못하겠지만, 박만정은 처분이 이미 결정된 뒤에 그런 말을 하였으니, 자못 매우 옳지 못하다. 다시 그러한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중률(重律)로 논죄(論罪)할 것이니, 유시(諭示)를 반포하라."
하였다. 윤지선과 남구만이 아뢰기를,
"제도(諸道)에서 무예(武藝)를 몰기(沒技)430) 로 계문(啓聞)하고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게 한 것은 모두 허위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 법을 혁파하도록 명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신이 바야흐로 훈련 도감(訓鍊都監)을 거느리고 있는데, 군사 중에 글씨 잘쓰는 사람이 하나 있기에 신이 서자(書字)의 【이례(吏隸)의 명칭이다.】 소임으로 차출(差出)했더니, 대장 신여철(申汝哲)이 ‘그 사람이 사사로이 그 소임을 도모한 것이다.’고 하며, 즉시 그를 강등(降等)시켜 보인(保人)으로 삼았습니다. 신여철이 진실로 옳지 않게 여겼다면 신에게 말을 해야 옳을 것인데, 어찌 이런 일을 한단 말입니까? 정승의 직책은 백관(百官)을 진압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미 심하게 모욕을 받았으니, 신이 감히 사직합니다."
하니, 임금이 힘써 위로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 신여철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도록 명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신이 진실로 신여철의 죄를 청하고 싶었지만 자책하기에 겨를이 없었기에 감히 하지 못했습니다. 비록 성상께서 신의 몸을 배척하여 물리치신다 할지라도 신여철을 또한 그대로 대장으로 두어서는 안됩니다. 대저 군문(軍門)에 도제거(都制擧)를 둔 것은 곧 불어지권(不御之權)431) 을 맡기기 위한 것인데, 대장이 도제거를 이처럼 능멸했으니 아마도 체통이 설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드디어 신여철을 파직시켰다.
삼가 살펴보건대 상신(相臣)이 모든 군문을 거느림은 진실로 불어지권(不御之權)을 맡기기 위한 것으로서, 남구만이 말한 바와 같은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어찌 일찍이 졸오(卒伍)에게 사정을 두며 대장을 위협하여 반드시 말을 듣게 하도록 한 것이겠는가? 마침내는 또한 자신의 말이 먹혀들지 않는 데 화를 내어 그만 대장의 파직을 청하고도 도리어 기강(紀綱)을 핑계로 삼았으니, 대체(大體)를 알지 못한 것이라 하겠다.
어영 대장(御營大將) 이세선(李世選)이 아뢰기를,
"어영(御營)의 재력이 성 쌓기에 고갈되었으니, 청컨대, 돈을 주조(鑄造)하여 보충시켜 주소서."
하니, 남구만이 아뢰기를,
"호조와 상평청(常平廳)에서 주조하는 돈도 또한 외람된 일이 많아 걱정이므로 다시 군문(軍門)에도 허락하기는 진실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재력이 고갈된 것도 염려스러우니 여섯 달을 한도로 주조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29책 27권 43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348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 / 인사-선발(選拔) / 사법-탄핵(彈劾)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정(軍政) / 군사-병참(兵站) / 군사-병법(兵法) / 금융-화폐(貨幣)
- [註 429]양향(量餉) : 군량.
- [註 430]
몰기(沒技) : 무과(武科)의 시취(試取)에 있어서 유엽전(柳葉箭)·편전(片箭)·기추(騎蒭) 등 정한 화살의 수를 다 맞히는 것을 말함. 이 말이 전화(轉化)되어 한 기술에 대해서 만점(滿點)을 얻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음.- [註 431]
불어지권(不御之權) : 직접 통어(統御)하지 않는 권한.○引見大臣備局諸臣, 時文殊山築城已畢。 南九萬言: "專屬于摠戎使, 而使通津爲摠戎管下, 似可。" 上欲移通津官, 居于城中。 兵曹判書尹趾善言: "其狹隘難容。" 九萬曰: "曾聞此山, 患無水, 旣築城, 泉脈頗多, 地固隘矣, 然只設官居, 亦一道, 宜遣摠戎使往視。" 上曰然。 是後摠戎使李基夏, 承命往視還言: "城中, 只有二洞, 其一又甚小, 恐不可移官居, 無已則先移倉庫, 仍設客舍, 【郡縣所以待使命之所。】 以備他日駐蹕, 置民戶於城外北偏可也。" 趾善曰: "苟欲移官居, 則何至不可容哉? 城外地勢平易, 亦可使民住之。" 九萬曰: "故相趙師錫, 欲築此城, 尹趾完之爲御營大將也, 亦有區畫, 今趾善以爲可移官居, 基夏以爲不可移, 未知誰言爲得, 而築城本意, 只爲防敵人之壓臨, 則不必廣占地形, 徒費事力也。 苟欲堅守, 則官居固宜移之。" 上曰: "可, 今年雖未及移, 可從容爲之。" 九萬曰: "初欲以此屬摠戎使, 或言旣爲護江華, 則宜屬江華。" 上許江都句管。 九萬曰: "通津爲山城主人, 宜陞其邑號以重之。" 上許陞縣爲府, 擇武臣階通政者遣之, 以爲常式。 備局以此事, 問于江華留守閔鎭周, 鎭周言: "江華句管甚多, 不可復摠此城。" 九萬請: "軍門掌器械, 江華主糧餉, 而使通津府使, 聽其指揮, 爲措置之術。" 上從之。 其後議論不決, 空城兀然, 終無一民之居, 一物之貯, 識者歎之。 九萬曰: "日者朴萬鼎上疏, 請待禧嬪以異禮, 且別揭宮號, 其言極未安。 臣造朝之初, 右相貽書於臣, 與萬鼎言相近, 而其意蓋謂朝家新有廢置, 群下之心, 不能無疑慮耳。 然臣謂若如前史, 廢處別宮, 則或有供奉如法之事, 而今禧嬪未嘗獨居, 同在一宮之中, 下王后一等, 又加異禮則有竝后匹尊之嫌, 又何可別揭宮號乎? 如此議論, 若不痛絶, 則人心危疑, 國體損傷, 宜使群下, 不敢復言玆事。" 上曰: "右相私書, 未知如何, 而萬鼎言之於處分已定之後, 殊甚不可。 復有如此者, 當論以重律, 其布諭之。" 趾善ㆍ九萬言: "諸道武藝, 以沒技聞, 而直赴殿試, 皆爲詐。" 上命罷此法。 九萬言: "臣方領訓局, 軍中有一人能善書, 臣使差書字 【吏隷之號。】 之任。 大將申汝哲, 謂其人私圖此任, 卽降爲保人, 汝哲苟以爲不可則言之于臣, 可也, 而何爲此擧耶? 相職彈壓百僚, 而受侮已甚, 臣敢辭之。" 上慰勉不許, 仍命汝哲從重推考。 九萬曰: "臣固欲請汝哲之罪, 而自咎不暇, 有所不敢。 自上雖斥退臣身, 汝哲亦不可仍爲大將, 夫設軍門都提擧者, 乃所以托不御之權也。 大將淩蔑都提擧如此, 恐無以立體統耳。" 上遂罷汝哲。 謹按以相臣領諸軍門, 固所以托不御之權, 有如九萬所言者, 然何嘗使之私於卒伍, 脅大將必聽哉? 終又怒其言之不售, 輒請譴罷大將, 反以紀綱爲諉, 可謂不識大體也。 御營大將李世選言: "御營財力, 竭於築城, 請鑄錢以益之。" 九萬曰: "戶曹常平廳鑄錢, 亦患多濫, 更許軍門實難, 然財竭可念, 限六朔鑄之, 爲可。" 上從之。
- 【태백산사고본】 29책 27권 43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348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 / 인사-선발(選拔) / 사법-탄핵(彈劾)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정(軍政) / 군사-병참(兵站) / 군사-병법(兵法) / 금융-화폐(貨幣)
- [註 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