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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27권, 숙종 20년 7월 23일 기축 2번째기사 1694년 청 강희(康熙) 33년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고 문수 산성·청백리·사관 등을 논하다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했다.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문수산(文殊山)에 성을 쌓는 역사를 장차 시작하려고 하니, 다시 의논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당초에 일을 주관했던 사람들이 이미 모두 죄를 입었고, 새로 군문(軍門)에 들어온 여러 대장(大將)들은 모두 미처 보지 못했으니, 마땅히 한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금위영 대장(禁衛營大將) 윤지선(尹趾善)을 보내라고 명했다. 이때 여러 사관(史官) 가운데 부모의 상사를 당한 사람이 있었고, 그 나머지는 혹은 논박받은 사람이고 혹은 잘못 추천된 사람이었으며, 혹은 이현일(李玄逸)의 상소에 연명(聯名)한 것 때문에 모두 인혐(引嫌)하여 직에 나오지 않았다. 임금이 좌사(左史)·우사(右史)가 갖추어지지 않은 것을 하문(下問)하자, 남구만이 주청(奏請)하기를,

"모두 고신(告身)을 빼앗고, 이조에 명하여 별겸 춘추(別兼春秋)를 차임(差任)하도록 하고, 이어 의논하여 추천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옳다.’고 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요사이 탐오(貪汚)하는 풍습이 더욱 심해져 중외(中外)의 관아(官衙) 저축이 모두 고갈되었으니, 마땅히 어사(御史)를 보낼 적에 체대(遞代)할 때의 문부(文簿)를 가져다 고찰하도록 명하시고, 그 중 더욱 탕진한 사람은 그 사람을 죄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했다. 박세채(朴世采)가 청하기를,

"청백리(淸白吏)를 선정(選定)하여 권면과 징계를 엄격하게 하소서."

하고, 남구만이 아뢰기를,

"조종조(祖宗朝)에서 청백리를 선정할 적에는 단지 생존한 사람만 뽑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말하는 청백리는 죽은 사람 중에 더러 있고 생존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제 마땅히 죽은 사람과 생존한 사람을 통틀어 선정하되, 죽은 사람은 ‘청백리’라 하고 생존한 사람은 ‘염근리(廉謹吏)’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두 가지 이름을 사용할 수는 없으니, 지금은 단지 염근리라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박세채가 또 아뢰기를,

"신이 무진년382) 에 건의(建議)했던 책자(冊子)가 지금도 궁중(宮中)에 있다면 성상께서 가져다 하람(下覽)하시고, 혹시라도 쓸 만한 것이 있다면 비국(備局)에 내려 의논해 보도록 하소서. 지나간 해에 이유태(李惟泰)가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는데, 당시 대신 원두표(元斗杓)는 시행할 만한 것이라고 했으나, 정태화(鄭太和)가 ‘시기와 사세에 맞지 않는 것이어서 시행할 수 없다.’고 하므로, 이유태가 서울 집에 두어 달이나 머무르다가 드디어 물러갔습니다. 신의 오늘의 사정은 진실로 이유태와는 다릅니다마는, 혹시라도 말이 시행되고 안되고에 따라 거취(去就)를 하게 된다면 그와 서로 같게 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했다. 그 뒤에 박세채가 진대(進對)할 때에 임금이 책자를 내어 승지에게 내리어 비국에 계하(啓下)하도록 했다. 박세채가 또 아뢰기를,

"《대전(大典)》에 금제(禁制)는 사대부(士大夫) 및 서민(庶民)이 행할 수 없는 것을 정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교화(敎化) 한 가지 일에 있어서는 법전(法典)에 실려 있지 않습니다. 그전에 이이(李珥)도헌(都憲)383) 이 되었을 적에 풍속을 교화시킬 의범(儀範) 30조항을 만들어 가르쳤고, 조헌(趙憲)의 상소에는 ‘중국에서는 새 법령이 있으면 집집마다 장벽(墻壁)에 게시하므로 비록 부녀자나 어린이들도 또한 아는데, 우리 나라의 법령은 관원인 사람도 한 번 보고 지나갈 뿐이니, 민간의 풍속이 무너지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향약(鄕約) 가운데서 큰 사항의 것은 ‘교령(敎令)’이라 이름하고, 금제(禁制) 가운데서 시행해야 할 것은 ‘금령(禁令)’이라고 이름하여, 각각의 해당 주무(主務) 관사(官司)에 돌린다면 거의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서문중(徐文重) 및 여러 승지(承旨)는 비록 한때 다급하여 잘못한 것이 있지만, 이미 딴 사정이 없이 한 일이고, 또한 공론이 이미 신설(伸雪)해 주었으니, 청컨대 수습하여 서용(敍用)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했다.


  • 【태백산사고본】 29책 27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340면
  •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군사-관방(關防) / 역사-전사(前史)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

○引見大臣備局諸臣, 南九萬曰: "文殊築城之役, 將始之矣。 無容更議, 然始初主事者, 皆已被罪, 諸大將新入軍門, 皆未及見, 宜遣一人審之。" 上命遣禁衛大將尹趾善, 時史官諸人, 有丁憂者, 其餘或被論或誤薦, 或以聯名李玄逸疏, 皆引嫌不就職, 上以左右史不具爲問, 九萬請竝奪告身。 命吏曹差別兼春秋, 仍使議薦。 上曰可。 九萬言; "近者貪風彌甚, 中外官儲俱匱, 宜於遣御史時, 命取遞代時文簿而考之, 就其尤蕩敗者, 罪其人。" 上許之。 朴世采請: "選淸白吏, 以嚴勸懲。" 九萬言: "祖宗朝淸白之選, 只取生者, 然世所謂淸白吏, 死者或有之, 而生者絶罕, 今宜通死生而選之, 死者名淸白, 生者名廉謹, 然不宜用二名。 今只稱廉謹可也。" 從之。 世采又曰: "臣戊辰所建冊子, 今尙宮中, 則自上取覽, 如有可用者, 則下備局, 俾有以議之。 昔年李惟泰上萬言疏, 其時大臣元斗杓, 謂可行。 鄭太和謂不合時勢, 不可行。 惟泰留邸數月, 遂退歸。 臣之今日事, 固異於惟泰, 若以其言之行不行爲去就, 則有相類矣。" 上許之。 後世采進對。 上出冊子, 賜承旨, 下于備局。 世采又曰: "大典禁制, 定以士夫及庶民不可行者。 至於敎化一事, 不載法典, 昔李珥爲都憲, 作化俗儀三十條以敎之。 趙憲疏有曰: ‘中原有新令, 家家揭諸墻壁, 雖媍孺, 亦知之。 我國法令, 爲官員者, 一遭看過而已, 民俗之敗, 職由於此。’ 今就鄕約中, 大者名以敎令, 禁制中可行者, 名以禁令, 付之於各該主管之司, 則庶有裨益。" 又曰: "徐文重及諸承旨, 雖有一時倉卒之失, 旣出於無情, 且公議已伸, 請加收敍。" 上竝許之。


  • 【태백산사고본】 29책 27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340면
  •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군사-관방(關防) / 역사-전사(前史)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