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국한 대신 이하는 관작 삭탈하여 문외 출송하고, 민암 등을 절도에 안치케 하다
이때 국청(鞫廳)에서 한중혁(韓重爀)을 신문하였으나, 한중혁이 승복하려 하지 않고, 이어서 말하기를,
"이시도(李時棹)가 전에 스스로 말하기를, ‘민암(閔黯)·오시복(吳始復)·이의징(李義徵)·오시대(吳始大)·오상유(吳尙游)·민장도(閔章道)·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오상백(吳尙伯)·장만춘(張萬春)의 집에 드나들며 그 비상(非常)한 것을 살펴서 나와 강만태 (康萬泰)·이담(李譚)·신처화(申處華)에게 전하여 말하였는데, 이제는 도리어 나를 무함합니다. 또 이시도가 일찍이 연의 집에 갔을 때에 의원군(義原君) 이혁(李爀)·오상유·오상백이 자리에 있었는데, 오상유·오상백이 혁을 가리키며 이는 우리들이 의지하는 사람이다 하고, 이어서 인빈(仁嬪)의 봉사(奉祀)에 관한 일을 논의하고서 파하였다 합니다. 내가 이시도에게서 들은 것은 이러합니다."
하였고, 이시도에게 죄다 고하지 못한 것을 물으니, 이시도가 말하기를,
"한구(韓構)가 일찍이 한해(韓楷)·임대(任𡋛)와 함께 앉았을 때에 한구가 말하기를, ‘우리들이 바야흐로 큰 일을 꾀하는데, 노(老)·소(少) 두 당(黨)이 각자 하므로 오히려 성취하지 못한다. 노당(老黨)은 김춘택(金春澤)이 주장하는데 공주(公主) 집과 최호(崔琥)를 인연하여 액정(掖庭)의 관속(官屬)들과 함께 꾀하고, 소당(少黨)은 우리들인데 서얼(庶孽) 이담(李譚)이 환관(宦官)들과 맺고 또 최호의 종매부(從妹夫)인 중관(中官) 강우주(姜遇周)와 서로 친하므로 이담을 시켜 꾀한다. 또 한 계책이 있는데, 송상(宋相) 【송시열(宋時烈)을 가리킴이다.】 의 상(喪)에 우수대(禹壽臺) 【남문(南門) 밖에 있다.】 에서 모여 곡(哭)한 사람이 거의 수천이나 되니, 각각 그 종[奴] 대여섯 명을 내면 쓸 수 있을 것이고, 또 진평(陳平)의 계책처럼 연하(輦下)의 군사들에게 뇌물을 주면 일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의 유모(乳母)의 아들이 액정 별감(掖庭別監)이므로 맡길 수 있다. 구일(具鎰)은 이미 늙었고, 이빈(李穦)이 대장(大將)이 될 만하다.’ 하였습니다. 또, 한중혁의 말을 들으니, ‘서인(西人)이 조정을 담당하고 폐비(廢妃)가 복위(復位)되면 중궁(中宮)은 절로 폐위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서찰(書札) 가운데에 이언순(李彦純)이 이른바 경중(京中)에 두었다는 것은 내가 본디 기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였고, 최격(崔格)·이시회(李時檜)·강만태(康晩泰)도 승복하려 하지 않았다. 국청에서 의논하기를,
"한중혁은 엄하게 신문하지 않을 수 없고, 최격은 본디 스스로 고하였으나, 오히려 말을 다하지 않은 것이 있고, 이시회·강만태는 다 감히 숨기는 것이 있으니, 모두 형신(刑訊)을 시행하고, 또 그 관련된 사람들을 나래(拿來)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원차산(元次山)·이담·이언순·한해는 모두 가두었으나, 한구·임대·신식(申栻)은 미처 나래하지 못하였다. 국청에서 강만태를 형신하였는데, 형장(刑杖)을 제 횟수대로 다 치기 전에 강만태가 말하기를,
"나는 의방(醫方)을 조금 압니다. 한중혁과 서로 친한데, 어느 날 한구가 비인(庇仁)에서 앓는다고 글을 보내어 청하였다 하기에 갔더니, 한구는 본디 병이 없고 나를 임대와 만나게 하였습니다. 한구와 임대가 말하기를, ‘방금 국운(國運)이 끝나 가거니와, 해도(海島)에 정진인(鄭眞人)이라는 자가 있는데 장차 육지로 올라올 것이다. 우리들이 그를 따르려 하는데, 군장(軍裝)·병기(兵器)를 미리 갖추지 않아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바야흐로 뜻을 같이하는 자들과 각각 은화(銀貨)를 내니, 너도 힘을 헤아려 도우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서로 함께 모의하기를, ‘달아나는 노루를 보고 놓아 주고 토기를 잡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드디어 조정의 판국을 바꾸려고 꾀하여 세 가지 길로 뇌물을 썼는데, 이시회는 장희재(張希載)에게 통하고 신식은 동평군에게 통하고 이담은 환시(宦寺)들에게 통하였고, 은화는 나와 함이완(咸以完)·이진명(李震明) 등 여러 사람과 심수(沈涑)·김만령(金萬齡)·구일·이빈이 낸 것이었고, 상변(上變)하여 우상(右相)과 호조(戶曹)·병조(兵曹) 두 판서(判書)를 제거하려 하였습니다. 한중혁이 일찍이 말하기를, ‘밀지(密旨)가 남상(南相) 【남구만(南九萬)을 가리킴이다.】 과 김석연(金錫衍)에게 내려졌다.’ 하고, 또 말하기를, ‘노당은 폐비를 복위시키려 하고, 소당은 폐비를 별궁(別宮)에 옮기려 한다.’ 하였습니다. 나는 본디 이 말을 함께 들었을 뿐입니다."
하였다. 국청이 의논하기를,
"이는 곧 주벌(誅罰)하여야 하겠으나, 끌어댄 사람에게는 오히려 미처 묻지 못하였으니,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하니, 판비(判批)하기를,
"그리하라."
하였다. 최격·이시회를 한 차례 형신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으므로 다시 형신하려 하는데 비로소 스스로 승복하여, 최격이 말하기를,
"은화를 모으고 모의한 것은 강만태가 말한 것과 같습니다."
하고, 이시회가 말하기를,
"과연 한중혁의 지휘를 받아 장희재를 꾀고 서인을 끌어들인 뒤에 폐비를 복위시키려 하고, 드디어 인삼(人蔘) 3근(斤)을 장희재에게 바쳤으나, 장희재가 받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최격·이시회가 중궁을 폐위시키려 꾀한 것을 대역(大逆)으로 삼아 주벌하려 하고, 그 죄안(罪案)이 이미 이루어졌으나, 한중혁이 세 차례 형신을 받고도 승복하지 않고, 이언순의 공대(供對)가 이시도의 말과 서로 다르므로, 드디어 면질(面質)하게 하였는데, 이시회가 말하기를,
"내가 회령(會寧)에 귀양갔을 때에 이언순도 귀양가는 길에 그 곳을 지났는데, 김경함(金慶咸) 등이 판국을 바꾸려 하는 계책을 말하고, 이어서 이언순의 글을 내어 보였는데 거기에 ‘이령(李令) 【이빈을 가리킴이다.】 은 귀양갔으므로 다시 바랄 수 없다.’ 하였고, 또 묘리(妙理)로 힘을 다한다는 따위 말이 있었습니다."
하니, 이언순이 스스로 숨기지 못하였고, 이담의 공대가 이시도의 말과 서로 다르므로 또 면질하게 하였는데, 이시도가 말하기를,
"이담과 신식이 혼인을 맺은 것은 한중혁이 중매한 것입니다. 강만태는 이담으로 말미암아 강우주(姜遇周)에게 뇌물을 보냈고, 이담은 강우주로 말미암아 내간(內間)의 말을 들었는데,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담이 또 일찍이 말하기를, ‘김춘택(金春澤)이 밀지를 받았다.’ 하였습니다."
하였으나, 이담이 오히려 승복하지 않고, 또 말하기를,
"이시도가 은화를 많이 모아서 의복이 사치하였고, 일찍이 장상(將相)을 헐뜯었으며, 이어서 땅에 그려서 맹세하기를, ‘정월에 변이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의논하기를,
"이시도를 그대로 가두어 두고 모든 사람이 나래되기를 기다려 한중혁·이언순·이담을 모두 더 형신하겠습니다."
하고, 또 원차산(元次山)이 이시도를 위하여 점친 말을 찾아 올려 구명하려 하였는데, 판비가 내려지기 전에 밤 2고(鼓)에 임금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지난번 빈청(賓廳)의 일차(日次)는 국기(國忌)이었는데도 서둘러 와서 모이기에, 변방의 정상이 아니면 시끄러운 꼬투리를 일으키는 일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더니, 입시(入侍)하였을 때에 우의정(右議政) 민암(閔黯)이 과연 함이완(咸以完)의 일을 아뢰고, 이어서 금부(禁府)를 시켜 가두고서 추핵(推覈)하기를 청하므로 내가 본디 윤허하였으나, 민암이 홀로 함이완을 만나 수작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의심스러워하였다. 겨우 하루가 지나니 금부의 당상(堂上)이 방자하게 청대(請對)하여 옥사(獄事)를 확대하여, 예전에 갇혀서 추고(推考)받던 자가 이제는 도리어 옥사를 국문(鞫問)하게 되고, 예전에 죄를 정하던 자가 이제는 도리어 극형을 받게 되었다. 하루 이틀에 차꼬·칼·용수를 쓴 수인(囚人)이 금오(金吾)095) 에 차게 하고, 서로 고하고 끌어대면 문득 면질을 청하고, 면질이 겨우 끝나면 거의 죄다 처형을 청하니, 이렇게 하여 마지않으면 그 전후에 끌어댄 자도 장차 차례로 죄로 얽어맬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공주(公主)의 집과 한편 사람은 고문과 귀양가는 죄를 면할 자가 드물 것이다. 임금을 우롱하고 진신(搢紳)을 함부로 죽이는 정상이 매우 통탄스러우니, 참국(參鞫)한 대신(大臣) 이하는 모두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여 문외(門外)로 출송(黜送)하고, 민암과 금부 당상은 모두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라."
하였다. 【그래서, 영의정(領議政) 권대운(權大運), 좌의정(左議政) 목내선(睦來善), 영중추(領中樞) 김덕원(金德遠), 대사헌(大司憲) 이봉징(李鳳徵), 승지(承旨) 배정휘(裵正徽), 사간(司諫) 김태일(金兌一), 장령(掌令) 이정(李槇), 정언(正言) 채성윤(蔡成胤)·심득원(沈得元), 문사랑(問事郞) 민흥도(閔興道)·홍중하(洪重夏)·정시윤(丁時潤)·오상문(吳尙文) 등은 모두 관작을 삭탈하여 문외로 출송하고, 우의정(右議政) 민암(閔黯), 판의금(判義禁) 유명현(柳命賢), 지의금(知義禁) 이의징(李義徵)·정유악(鄭維岳), 동의금(同義禁) 목임일(睦林一) 등은 모두 절도에 안치하였다. 수인(囚人)의 공초(供招) 가운데에 익평(益平)·청평(靑平)·인평(寅平) 세 공주를 죽인 뒤에야 남인(南人)이 무사할 것이라는 말이 있었으므로, 공주의 집 운운하는 분부가 있었다.】 정원(政院)에서 장차 복역(覆逆)하는 계(啓)를 하려고 초안은 이미 갖추었으나, 아직 올리지 않았을 때에, 또 비망기를 내려,
"비망기가 본원(本院)에 내려진 지 이미 오래 되어 경고(更鼓)가 반이나 지났는데, 전지(傳旨)가 아직도 들어오지 않으니, 그 머리를 모으고 상의하여 반드시 구제하려는 정상이 참으로 매우 통분하고 놀랍다. 입직(入直)한 승지(承旨)와 옥당(玉堂)을 모두 파직(罷職)하라. 이번 복역(覆逆)의 논의는 집에 있는 승지·삼사(三司)도 반드시 모를 리가 없으니, 마찬가지로 파직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8책 26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296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 [註 095]금오(金吾) : 의금부(義禁府)의 별칭.
○時鞫廳更問韓重爀。 重爀不肯服, 仍曰: "李時棹嘗自謂出入于閔黯、吳始復、李義徵、吳始大、吳尙游、閔章道、福平君㮒、吳尙伯、張萬春家, 察其非常, 傳道於俺及康晩泰、李譚、申處華, 而今反構俺, 且時棹, 嘗往㮒家, 義原君 爀、吳尙游、尙伯在座, 尙游 尙伯指爀曰: ‘是吾輩所倚之人耳。’ 仍論仁嬪奉祀事而罷。 俺之所聞於時棹者, 如此矣。" 問時棹以未盡告者。 時棹言: "韓構嘗與韓楷ㆍ任𡋛同坐, 構曰: ‘吾輩方謀大事, 而老少二黨, 各自爲之, 故尙不成。 老黨則金春澤爲其主, 因公主家及崔琥, 與掖庭諸屬而圖之。 少黨則吾輩是也。’ 庶孽李譚, 與諸宦寺締交, 且與崔琥從妹夫中官姜遇周相好, 故使譚圖之。 且有一策, 宋相 【指時烈。】 之喪, 禹壽臺 【在南門外。】 會哭人, 殆過數千, 各發其奴五六丁, 可以用之。 且賂遺輦下諸軍, 如陳平之計, 可以濟事。 且東平君 杭, 乳母之子, 爲掖庭別監, 可以任之。 具鎰已老, 李䎙可爲大將。 又聞重爀之言曰: ‘西人當朝, 廢妃復位, 中宮自當廢也。’ 書札中李彦純所謂京中所置者, 俺固不能記也。" 崔格、時檜、晩泰, 亦不肯服。 鞫廳議曰: "重爀不可不嚴訊, 格固自告而猶有未盡言者。 時檜、晩泰, 俱敢有諱, 請竝施刑。 又拿其所干連諸人, 元次山、譚、彦純楷竝囚。 構ㆍ𡋛ㆍ栻未及拿。" 鞫廳刑訊康晩泰, 杖未準數, 晩泰乃曰: "俺粗解醫方, 與重爀相善, 一日構在庇仁言病, 以書邀至, 則構固無恙。 使俺見任𡋛, 構與𡋛仍言曰: ‘方今國運垂訖, 海島有鄭直人者, 將升陸矣。’ 吾等欲從之, 而不可不豫具軍裝兵器, 以故方與諸同志者, 各出銀貨, 若亦量力以助之, 旣又相與謀曰: ‘見走獐釋執兎, 非計也。’ 遂圖換朝局, 行賄有三岐, 李時檜通于張希載、申栻通于東平君, 李譚通于宦寺輩, 銀是俺以完ㆍ震明等諸人及沈涑ㆍ金萬齡ㆍ具鎰ㆍ李䎙之所出耳。 欲上變告右相戶。 兵兩判書而除之。 重爀嘗曰: ‘密旨下于南相 【指九萬。】 及金錫衍。’ 又曰: ‘老黨則欲復廢妃, 少黨則欲移廢妃于別宮。’ 俺固與聞此言耳。" 鞫廳議曰: "是當卽誅之, 而所援之人, 尙不及問, 宜有待也。" 判批曰可。 刑訊崔格ㆍ李時檜一次不服, 將更訊, 始自服, 格言: "聚銀貨謀議, 如晩泰所言。" 時檜言: "果聽重爀指揮, 欲誘張希載, 引入西人然後, 仍復廢妃, 遂納人蔘三斤于希載, 希載不納矣。" 鞫廳以格ㆍ時檜謀廢中宮爲大逆, 將誅之, 其案已成, 而重爀受刑訊三次, 猶不服。 彦純供對, 與時棹言互異, 遂使面質。 時檜言: "俺謫會寧時, 彦純亦以謫行過此地。 言金慶咸等換局之計, 仍出彦純書, 有曰: ‘李令 【指䎙。】 竄, 無復可望, 又有妙理宣力等說。’ 彦純不能自諱。" 李譚供對, 與時棹言互異, 又使面質, 時棹曰: "譚與申栻結姻, 是重爀爲之媒也。 晩泰因譚賂遇周, 譚因遇周閒內間言, 有不忍言者。 譚又嘗言, 春澤受密旨矣。" 譚猶抵賴, 且曰: "時棹多聚銀貨衣服奢美, 嘗詆辱將相, 仍畫地以誓曰: ‘正月當有變也。’" 鞫廳議曰: "仍囚時棹, 以待諸人拿至, 請重爀、彦純、譚, 竝加刑訊, 又搜元次山, 爲時棹占卜之辭, 以上欲究之。" 判批未下, 夜二鼓, 上下備忘記曰: "頃日賓廳日次, 是國忌, 而汲汲來會, 意謂若非邊情, 必惹鬧端, 及其入侍也, 右議政閔黯, 果以咸以完事陳達, 而仍請令禁府, 囚禁推覈, 予固允可。 而竊訝黯之獨見以完, 有所酬酢矣。 纔過一日, 禁府堂上, 肆然請對, 張大獄情, 昔之囚推者, 今反爲鞫獄; 昔之定罪者, 今反爲極刑, 一日二日, 使三木囊頭之囚, 充滿金吾, 轉相告引, 輒請面質, 面質纔了, 幾盡請刑, 若此不已, 其所前後援引者, 亦將次第羅織。 然則主家及一邊之人, 其得免於拷掠竄殛之科者, 鮮矣。 其愚弄君父, 魚肉搢紳之狀, 極可痛惋, 參鞫大臣以下, 竝削奪官爵門外黜送, 閔黯及禁府堂上, 竝絶島安置。"【於是, 領議政權大運、左議政睦來善、領中樞金德遠、大司憲李鳳徵、承旨裵正微、司諫金兌一、掌令李禎、正 〔言〕 蔡成胤、沈得元、問事郞閔興道、洪重夏、丁時潤、吳尙文等, 竝削黜。 右議政閔黯、判義禁柳命賢、知義禁李義徵、鄭維岳、同義禁睦林一等, 竝絶島安置。 因供中: "有必殺益平ㆍ靑平ㆍ寅平三公主然後, 南人無事之語。" 故有主家云云之敎。】 政院將爲覆逆之啓, 草旣具未上, 又下備忘記曰: "備忘記之下本院已久, 而更鼓過半, 傳旨尙不入, 其聚首相議, 必欲營救之狀, 誠極痛駭, 入直承旨及玉堂竝罷職。 今此覆逆之論, 在家承旨三司, 必無不知之理, 一體罷職。"
- 【태백산사고본】 28책 26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296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