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를 출발하여 송도에서 유숙하다
임금이 파주(坡州)를 출발하여 장단(長湍)에서 잠시 머물러 낮 수라(水剌)를 들고, 길을 가다가 송도(松都)의 동현(銅峴) 근처에 이르러 임금이 먼저 만월대(滿月臺)로 나아가도록 명하자, 영부사(領府事) 김덕원(金德遠)과 우의정(右議政) 민암(閔黯)이 길 가운데서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먼저 만월대(滿月臺)로 나아가는 것은 일이 창졸(倉卒) 간에 나온 것이므로 대(臺) 위의 배설(排設)하는 것을 형세로 보아 미처 하지 못했을 터이니, 군주의 거동(擧動)을 이와 같이 갑작스럽게 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약(司鑰)을 잠깐 보내어 그로 하여금 배설(排設)하게 하면 될 터인데 하필이면 중지시켜야겠는가?"
하였다. 대사헌(大司憲) 권해(權瑎), 장령(掌令) 김태일(金兌一), 사간(司諫) 목임중(睦林重), 정언(正言) 유이복(柳以復), 교리(校理) 이윤명(李允明), 부수찬(副修撰) 이준(李浚) 등이 또 청대(請對)하여 그것을 간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들어주지 않고 어가(御駕)가 만월대로 나아갔다. 장전(帳殿)에 나가서 모시고 수종했던 대신들을 인견(引見)하고 송도(松都)에서 시재(試才)할 때 문과 시관(文科試官) 7원(員)과 무과 시관(武科試官) 5원(員)을 차출(差出)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대제학(大提學)을 그날 저녁에 명초(命招)하여 그로 하여금 글 제목을 써서 들이도록 하면서 임금이 여러 신하들과 송도의 형세[地形]가 자못 경성(京城)과 같다고 논하자, 김덕원(金德遠)이 아뢰기를,
"이곳은 황폐한 폐허인데도 주춧돌과 섬돌이 완연(宛然)합니다.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낙양(洛陽)의 궁궐을 보고 수(隋)나라의 사치함을 경계하였습니다. 전하께서도 당연히 이곳을 보시고 앞일을 징계하여 뒷일을 삼가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민암(閔黯)과 이시만(李蓍晩)도 각기 경계하는 말이 있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나온 도로(道路)에는 각별히 은혜를 베풀어야 할 방법이 없을 수 없다."
하자, 민암(閔暗)이 아뢰기를,
"이미 상평청(常平廳)과 선혜청(宣惠廳)의 쌀 1천 석(石)을 나누어 주도록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적당히 헤아려서 보태어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본부(本府)의 유수(留守) 신후재(申厚載)를 명초(命招)하여 본부에 은혜를 베풀 방법을 하문(下問)하니, 신후재가 속오군(束伍軍)이 1년 동안 바쳐야 할 쌀을 덜어 주도록 청하자, 민암(閔黯)이 이것은 한 지역에 두루 미치는 은혜가 아니므로 적곡(糴穀)의 소모된 것을 면제하여 주는 것이 적당하다고 말하니, 임금이 조용히 묘당(廟堂)에 상의(相議)하여 모레 다시 품지(稟旨)하도록 하였다. 그 뒤 얼마 안되어 또 전교를 내리기를,
"남문루(南門樓)가 저자 가운데 있어 알아 듣게 타이르기가 편리하다. 그러니 어가(御駕)를 돌릴 때에 남문루에 전좌(殿坐)하고 부로(父老)들을 모아 불쌍히 여기고 조세를 감해 주는 뜻을 타이르는데 일이 매우 편리하고 적당하니, 대신들은 미리 강구(講究)하고 품정(稟定)하도록 하며 부로들도 일제히 남문루 앞에 모이게 하여 친히 타이르는 곳을 만들도록 하라."
하였다. 양사(兩司)에서 청대(請對)하였는데, 권해(權瑎)가 아뢰기를,
"군주의 동정(動靜)은 모두 법도(法度)가 있습니다. 이번의 거동(擧動)은 달음박질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너무나 수레의 방울을 울리며 곡조를 맑게 하는 뜻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천천히 가면 가교(駕轎)가 편치 못하여 형세가 저절로 빨리 달리게 되는데 이른 것이다."
하였다. 권해(權瑎)가 또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덕(德)이 있거나 덕이 없는데 말미암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을 경계로 진달하자, 임금이 후하게 답하였다. 권해가 또 아뢰기를,
"여익제(呂翼齊)가 실수한 것은 군법(軍法)을 범(犯)한 것이 아니니, 곤장(棍杖)을 집행하는 것은 아마도 너무 지나친 듯합니다. 우리 나라는 어질고 후덕(厚德)한 바탕에다 법을 제정했으므로 사대부(士大夫)가 곤장(棍杖)을 당한 것은 드물게 있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대체로 형벌을 적용하는 것은 좌죄(坐罪)된 바의 경중(輕重)에 따르는 것인데, 어찌 하천(下賤)이라고 하여 곤장을 집행할 수 있으며, 사대부(士大夫)라고 하여 곤장을 집행할 수 없는 이치가 있겠는가? 선조(先朝) 때 조가석(趙嘉錫)에게도 곤장을 집행하였는데 무슨 불가함이 있겠는가? 대간(臺諫)이 곤장을 집행하는 것을 지나치다고 하니 일의 체모를 모른다고 말할 만하다."
하였다. 권해(權瑎)가 엄중한 전교 때문에 인혐(引嫌)하고 체임(遞任)하기를 청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헌신(憲臣)을 특별히 체임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을 서로 잇달아 진달하고 아뢰자, 임금이 특별히 체임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도록 명하고, 사직하지 말라는 것으로 비답(批答)을 전하였다. 임금이 또 고려 태조(高麗太祖)의 묘(墓)에 치제(致祭)할 때에 특별히 승지(承旨)를 파견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또 예조(禮曹)에서 계품(啓稟)한 것으로 인하여 제물(祭物)은 특별히 희생(犧牲)과 포(脯)를 쓰도록 하였다. 이날 어가(御駕)가 송도(松都)에 유숙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7책 25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286면
- 【분류】왕실-행행(行幸) / 왕실-사급(賜給)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역(軍役) / 구휼(救恤) / 사법-탄핵(彈劾)
○庚子/上發坡州, 晝停長湍, 行到松都 銅峴近處。 上命先詣滿月臺。 領府事金德遠, 右議政閔黯, 路中請對言: "先詣滿月臺, 事出倉卒, 臺上排設, 勢未及爲之, 人君擧動, 不宜若是急遽。" 上曰: "纔送司鑰, 使之排設, 何必中止乎?" 大司憲權瑎、掌令金兌一、司諫睦林重、正言柳以復、校理李允明、副修撰李浚等, 又請對爭之, 上終不聽。 駕詣滿月臺, 御帳殿, 引見陪從大臣, 命差出松都試才時文試官七員, 武試官五員。 大提學其日夕命招, 使之書題書入。 上與諸臣, 論松都形勢, 頗與京城同。 德遠曰: "此是荒墟, 而礎砌宛然。 唐 太宗見洛陽宮闕, 戒隋之奢侈。 殿下亦宜見此而懲毖矣。" 黯與李蓍晩, 各有陳戒之言。 上曰: "所經道路, 不可無各別施惠之道。" 黯曰: "旣已劃給常平惠廳米一千石矣。" 上命量宜添給, 命招本府留守申厚載, 問本府施惠之道。 厚載請減束伍軍一年所納米。 黯以爲: "此非遍及一境之惠, 宜除糴穀之耗。" 上令從容相議於廟堂, 更稟於再明。 已而, 又下敎曰: "南門樓在闤闠之中, 便於曉諭。 回鑾時, 殿坐南門樓, 聚會父老, 諭以軫恤蠲減之意, 事甚便當。 大臣豫爲講究稟定, 父老亦令一齊聚會於南門樓前, 以爲親諭之地, 兩司請對。" 權瑎曰: "人君動靜, 皆有法度, 今此擧動, 未免馳驟, 甚非鳴和鑾淸節奏之義。" 上曰: "徐行則駕轎不安, 勢自至於疾驅矣。" 瑎又以興亡莫不由於德否德之說, 陳戒, 上優答之。 瑎又曰: "呂翼齊所失, 非犯軍法, 決棍恐太過。 我國仁厚立法, 士大夫之被棍, 所罕有也。" 上曰: "凡用罰, 從所坐之輕重, 豈有下賤可以決棍, 而士夫不得決棍之理乎? 先朝時, 趙嘉錫亦決棍, 有何不可乎? 臺諫以決棍爲過, 可謂不識事體。" 瑎以嚴敎, 引嫌請遞。 上曰依啓。 諸臣皆以憲臣特遞, 爲不當, 相繼陳白。 上命還收特遞之命, 以勿辭傳批。 上又命麗太祖墓致祭時, 特遣承旨, 又因禮曺啓稟, 祭物特用犧牲及脯, 是日駕宿松都。
- 【태백산사고본】 27책 25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286면
- 【분류】왕실-행행(行幸) / 왕실-사급(賜給)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역(軍役) / 구휼(救恤) / 사법-탄핵(彈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