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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22권, 숙종 16년 10월 27일 갑신 2번째기사 1690년 청 강희(康熙) 29년

국경을 넘은 죄인의 처리와 전쟁 대비 등을 신하들과 논하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재신(宰臣)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이때 북로(北路)에서 국경을 범하여 넘어갔던 사람이 이미 잡혔는데, 임금이 대신에게 묻기를,

"죄인이 잡혔으니, 재자관(齎咨官)을 다시 보내야 할 것인가?"

하매, 영의정(領議政) 권대운(權大運)이 전에 간 재자관이 돌아오거든 저들의 소식을 상세히 듣고 또 그 죄인을 나래(拿來)하여 추문(推問)하여 실정을 붙게 한 뒤에 다시 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따랐다. 권대운이 말하기를,

"사신(使臣)의 장계(狀啓)는 길에서 들은 것일지라도, 황제의 생사는 분명하지 않으나 달자(㺚子)와 전쟁이 계속되어 저들이 이미 패망할 조짐이 있으므로, 우리 나라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때에 전쟁의 대비를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되겠습니다. 강도(江都)에서 성을 쌓는 것은 대개 또한 이 뜻인데, 무변(武弁)의 사람이 모자라는 것이 지금과 같은 때가 없습니다. 장재(將才)를 미리 길러 내외(內外)에서 두루 시험하여 그 재능을 본 뒤에야 위임할 수 있을 것이니, 묘당(廟堂)의 신하들과 상의하여 초록(抄錄)하여 아뢰고 또 윤대(輪對) 때에 차례로 입시(入侍)하게 하여 위에서 그 사람됨을 보아 쓰고 버리는 것을 정하셔야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모여서 의논하여 초록(抄錄)하여 아뢰라고 명하였다. 권대운(權大運)이 말하기를,

"음관(蔭官) 중에서는 주목(州牧)도 얻기 어려운 걱정이 있으니, 그 사람이 과연 주목에 맞으면 신진(新進)이라도 직품(職品)에 얽매이지 말고 해조(該曹)에서 곧바로 비의(備擬)하게 하여도 안될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고, 이조 판서(吏曹判書) 유명천(柳命天)이 말하기를,

"이것은 뒷폐단에 관계가 있으므로 신(臣)이 전에 감히 곧바로 주의(注擬)하지 못하였습니다. 5, 6품(品) 중에서 주목에 맞을 만한 자는 묘당을 시켜 따로 천거하게 하여 가려서 주의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우의정(右議政) 김덕원(金德遠)이 말하기를,

"장재(將才)를 미리 기르는 것은 수상(首相)이 아뢴 것이 옳습니다. 윤대 때에 성상께서 친히 분별하시면, 그 사람의 현부(賢否)는 성감(聖鑑)에서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체념(體念)하겠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건원릉(健元陵)의 신도비(神道碑)는 자획(字畫)이 다 흐려졌는데, 이것은 난후(亂後)에 비각(碑閣)을 아직 세우지 못하였으므로 비·바람에 씻겨서 점점 이렇게 되었을 것이다. 비각을 해조(該曹)에서 빨리 중건(重建)하게 하고, 헌릉(獻陵)의 비각도 예조(禮曹)의 낭관(郞官)을 보내어 터를 살펴보게 한 뒤에 다시 품처(稟處)하라."

하고, 임금이 또 말하기를,

"태조 대왕(太祖大王)의 영정(影幀)은 다섯 곳에 모셨고 다 전호(殿號)가 있었으나, 지금은 두 곳이 있을 뿐인데 경기전(慶基殿)·준원전(濬源殿)이 그것이다. 열성(烈聖)의 영정은 남별전(南別殿)에 모셨으나, 전부터 전호가 없어서 남별전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전호가 있는지 없는지를 예관(禮官)을 시켜 살펴 내어 아뢰게 하라."

하였다. 이 뒤에 대신이 관각(館閣)과 예조(禮曹)의 당상(堂上)과 함께 모여서 의논하여 영희전(永禧殿)이라 이름지어 바쳤다. 임금이 또 권대운의 말에 따라, 경기의 연해읍(沿海邑)에서 아직 거두지 못한 증미(拯米)192) 6천여 석을 특별히 탕감(蕩減)하라고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4책 22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232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인사-관리(管理) / 사법-치안(治安) / 사법-행형(行刑) / 외교-야(野) / 군사-관방(關防) / 농업-특용작물(特用作物) / 재정-전세(田稅) / 구휼(救恤)

  • [註 192]
    증미(拯米) : 파선(破船)으로 물에 잠겼던 쌀을 건져내어 쪄서 말린 쌀을 말함.

○引見大臣備局諸宰。 時北路犯越人, 巳就捕。 上問大臣曰: "罪人已捕得, 當更送賫咨官乎?" 領議政權大運請: "待前去賫咨官之還, 詳聞彼中消息。 且拿來其罪人, 推問輸情後更送。" 上從之。 大運曰: "使臣狀啓, 雖是塗聽, 皇帝之死生未分。 而與㺚子兵連禍結, 彼已有敗亡之漸, 我國亦不能無慮, 此時陰雨之備, 不可不慮, 江都築城, 蓋亦此意。 而武弁之乏人, 莫此時若也。 宜儲養將才, 歷試內外, 觀其才能然後, 可以委寄。 請與廟堂諸臣, 相議抄啓, 而亦當於輪對時, 循次入侍。 自上觀其爲人, 定其用舍似宜。" 上命會議抄啓。 大運曰: "蔭官中州牧, 亦患難得。 若其人果合州牧, 則雖是新進, 勿拘職品, 令該曺直爲備擬, 似無不可。" 吏曺判書柳命天曰: "此則有關後弊, 臣曺不敢直擬。 五六品中可合州牧者, 令廟堂別薦而擇擬宜矣。" 上可之。 右議政金德遠曰: "儲養將才, 首相之所達是矣。 輪對時, 聖上親自辨別, 則其人之賢否, 莫逃於聖鑑矣。" 上曰: "子當體念。" 上曰: "健元陵神道碑, 字畫皆漫漶, 此必亂後碑閣未建, 故風磨雨洗, 漸至如此。 碑閣令該曺斯速重建, 而獻陵碑閣, 亦送禮曺郞官, 看審基址後, 更爲稟處。" 上又曰: "太祖大王影幀, 五處奉安, 而皆有殿號矣。 卽今只有二處, 乃慶基濬源殿是也。 列聖影幀, 奉安於南別殿, 而自前無殿號, 稱以南別殿, 此未可知也。 殿號有無, 令禮官考出以啓。" 是後大臣與館閣禮曺堂上會議, 稱永禧殿以進。 上又因大運言, 命京畿沿海邑拯米未收者六千餘石, 特爲蕩減。


  • 【태백산사고본】 24책 22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232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인사-관리(管理) / 사법-치안(治安) / 사법-행형(行刑) / 외교-야(野) / 군사-관방(關防) / 농업-특용작물(特用作物) / 재정-전세(田稅) / 구휼(救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