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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22권, 숙종 16년 1월 3일 을미 1번째기사 1690년 청 강희(康熙) 29년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여 조정의 안정, 인재 등용 등을 논의하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001) 의 재신(宰臣)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두표(斗杓)002) 가 돌아 봄이 되어 물건들이 새로워지므로, 사람의 일도 이것을 몸받아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좇아야 하는데, 임금의 한 마음은 만물이 화육(化育)되는 근원이니, 위에 있는 사람으로서 위에서 건극(建極)003) 하여 모범이 되어 뭇 신하를 이끌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내가 염려하여야 할 것이나, 위아래가 서로 덕을 닦는 도리도 신하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는데, 지난번에 비망기(備忘記)를 내린 뜻은 우연한 것이 아니니, 반드시 이 뜻을 몸받아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하면, 유위(有爲)할 수 있을 것이다.

조정(朝廷)은 사방의 표준이므로, 조정이 바르고서야 백관(百官)이 바르고 백관이 바르고서야 사방이 바른 것인데, 지난번 조정의 논의가 삼분 오열(三分五裂)하여 사당(私黨)을 심는 데에만 힘써서 나라의 일이 날로 그릇되었으니, 이것은 참으로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또 《서경(書經)》에,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굳어야 나라가 편안하다.’하고, 또 ‘여름에 덥고 비가 오면 소민(小民)이 원망하고 한탄하며, 겨울에 몹시 추워도 원망하고 한탄한다.’ 하였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로 말하면 어찌 소민을 회유하고 보전하는 일을 소홀히 하겠는가? 이 양기(陽氣)를 나타내는 때에 풀과 나무가 모두 살아 나서 모두 기쁜 뜻이 있는데, 가엾은 우리 소민만이 혜택을 입지 못하니, 백성을 보전하는 방책이 더욱 오늘날의 급한 일이고 마땅히 강구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는데, 신하들이 각각 궁금(宮禁)을 엄하게 하고, 사경(私逕)004) 을 막고, 인재를 구하고, 수령(守令)을 가려 써야 한다는 등의 말로 대답하니, 임금이 다 받아 들였다. 병조 참판(兵曹參判) 이집(李鏶)이 말하기를,

"한 번 만과(萬科)005) 를 설행(設行)한 뒤로부터 사대부(士大夫)의 자손은 다 무업(武業)을 일삼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니, 이 때문에 무사(武士)에는 인재가 모자랍니다. 전에 유혁연(柳赫然)이 건백(建白)하여 사대부의 자제를 위하여 청(廳)을 설치하여 무업을 권하였는데, 근래의 무사 가운데에서 이름이 있는 자는 다 그때 권무 군관(勸武軍官) 가운데에 있던 사람이니, 이제 다시 청을 설치하여 각별히 무업을 권하는 곳으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신하가 충성을 다하는 데에는 문무(文武)가 다를 것이 없는데, 근래의 무과 방목(武科榜目) 가운데에는 사대부의 자손으로서 참여된 자가 아주 없으니, 사족(士族)이 무업(武業)을 일삼지 않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청을 두어 무업을 권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권대운(權大運)이 말하기를,

"낙안(樂安)의 사인(士人) 이두광(李斗光)효종(孝宗)·현종(顯宗)·명성 왕후(明聖王后)006) ·인경 왕후(仁敬王后)007) 의 행장(行狀)·지문(誌文)을 고쳐 지어야 한다고 상소(上疏)하여, 비국(備局)에 계하(啓下)하셨는데, 송시열(宋時烈)·김석주(金錫胄)무필(誣筆)008) 은 그대로 둘 수 없으며, 외의(外議)도 모두 고쳐야 한다고 합니다."

하고, 좌의정(左議政) 목내선(睦來善)도 이어서 고쳐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유명천(柳命天)은 말하기를,

"행장은 진실로 고쳐야 마땅하나, 지문은 이미 능소(陵所)에 매안(埋安)하였으므로 경솔히 의논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하고, 이조 참판(吏曹參判) 권유(權愈)는 말하기를,

"그 지문을 보면 여느 지문의 체재와 크게 다르니, 그때 지은 자가 반드시 그 흉억(胸臆)을 풀려고 한 것입니다. 역적을 토벌한 일까지 실었는데, 이것이 어찌 지문에 실릴 수 있겠습니까? 그대로 둘 수가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행장은 이미 무필이므로 결코 그대로 둘 수 없으나, 지문은 능소에 매안하였으니, 어떻게 하면 마땅하겠는가?"

하였는데, 권대운이 옛 지문을 그대로 두고 새 지문을 또 묻기를 청하고, 유명천은 말하기를,

"사체(事體)가 매우 중대하여 갑자기 처치할 수 없으니, 유신(儒臣)에게 물어 널리 고례(古例)를 살펴서 처치하소서."

하니, 임금이 행장은 고쳐 짓고 지문의 일은 유신에게 묻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또 말하기를,

"노이익(盧以益)이 상소한 일은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

하였는데, 권대운이 말하기를,

"사체가 중대하니, 2품(品) 이상과 삼사(三司)의 신하들로 하여금 모여서 의논하여 처치하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하고, 목내선은 말하기를,

"지난번에 조정에서 윤하제(尹夏濟)에게 물었더니, 또한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이 거짓말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이 말을 끝내 명확하게 분변(分辨)하지 않고 사책(史冊)에 그대로 둔다면, 신하의 통박(痛迫)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과연 있다면 고치지 않을 수 없으나, 사체가 매우 중대하니, 2품 이상과 삼사 및 외방(外方)에 있는 원임 대신(原任大臣)에게 모두 물으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2품 이상과 삼사의 신하들을 패초(牌招)009) 하여 수의(收議)하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외방에 있는 원임 대신에게 물어서 처치하라."

하였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윤이제(尹以濟)유두임(柳斗任)의 옥사(獄事)를 품의(稟議)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문안(文案)을 보면 이상(李翔)처럼 지극히 흉악한 자가 없다. 그 용의(用意)가 불측한데 이상이 살게 된다면, 실형(失刑)이 클 것이다. 유두임이 승복하지 않더라도 이상은 살릴 만한 도리가 아주 없다."

하였는데, 권대운이 말하기를,

"이상이 살게 되면 호서(湖西)의 인심을 잃게 될 것이니, 죽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유두임을 금부(禁府)로 옮겨 보내어 삼성(三省)010) 에서 설국(設鞫)하도록 명하였다. 신하들이 물러가려 할 때에 임금이 머물게 하고 이어서 이르기를,

"옛사람의 말에 ‘대비가 있으면 근심이 없다.’ 하고, ‘안락할 때에 위태함을 생각한다.’ 한 것이 있는데, 이것은 다 격언(格言)이다. 요즈음 듣건대, 태극 달자(太極㺚子)는 병세(兵勢)가 매우 크므로 몇 해 못가서 중국이 크게 어지러워질 것이라 한다. 저들이 만약 쫓긴다면 반드시 영고탑(寧古塔)으로 돌아갈 것인데, 영고탑으로 돌아가고 나면 함관(咸關) 이북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니, 어찌 크게 근심할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한가한 때에 음우(陰雨)의 대비를 익히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는데, 권대운·목내선 등이 갑자기 상교(上敎)를 받고 망연하여 대답할 바를 몰라서, 다만 말하기를,

"성상께서 음우(陰雨)의 대비를 염려하시니, 이는 참으로 끝없는 복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평시에 군사를 훈련하는 것은 나라의 급무이니, 대신들에게 반드시 생각하는 바가 있을 것이므로, 비로소 물었다. 오늘도 생각하고 내일도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조금도 잊고 소홀히 하지 않으면, 나라를 보전하는 도리에 마땅할 것이다."

하였는데, 병조 판서(兵曹判書) 민암(閔黯)이 말하기를,

"군자(軍資)에 드는 것으로는 재물과 곡식이 큰 것이니, 미리 저축하면 갑작스러울 때의 쓰임에 대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태극 달자가 조만간에 말썽을 일으킬 걱정이 있는데, 혹 불행한 일이 있으면 어느 곳으로 가야 하겠는가?"

하자, 권대운이 말하기를,

"강도(江都)011) 만한 곳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병자년012)남한(南漢)으로 들어간 것은 바라는 바가 아니었으나, 적기(賊騎)가 갑자기 닥쳐서 형세가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강도가 지척에 있어도 미처 들어가지 못하였는데, 그때 군급(窘急)했던 것을 상상할 수 있으니, 이제 와서 생각하면 절로 한심하여진다."

하였다. 형조 판서 윤이제가 말하기를,

"병자년에 강도로 들어가지 못한 것은 대개 배가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니, 이제 배를 미리 만들되 어선(御船)을 먼저 만들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선 이외에 또 다섯 척을 만들어야 마땅하다. 또 군량(軍粮)이 없으면 금성 탕지(金城湯池)라도 이로운 바가 없을 것이니, 병자년에 군량이 없었던 것이 또한 오늘날의 감계(鑑戒)가 될 만하다."

하였다. 목내선이 남방의 저치미(儲置米) 절반을 강도로 날라 들여가서 양향(粮餉)을 채우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4책 22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212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비빈(妃嬪) / 정론-정론(政論) / 사법-행형(行刑)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 외교-야(野) / 군사-병법(兵法) / 군사-병참(兵站) / 교통-수운(水運) / 역사-전사(前史) / 어문학-문학(文學)

  • [註 001]
    비국(備局) : 비변사(備邊司)의 별칭.
  • [註 002]
    두표(斗杓) : 북두 칠성의 제5성에서 제7성까지를 말함.
  • [註 003]
    건극(建極) : 임금이 나라의 근본 법칙을 세워 다스림.
  • [註 004]
    사경(私逕) : 사사롭게 청탁하는 길.
  • [註 005]
    만과(萬科) : 많은 수효의 인원(人員)을 시험하여 뽑는 과거. 주로 무과에서 이 제도를 채용하므로, 무과를 가리키는 말로 인식됨.
  • [註 006]
    명성 왕후(明聖王后) : 현종의 비(妃) 김씨(金氏).
  • [註 007]
    인경 왕후(仁敬王后) : 숙종의 비 김씨.
  • [註 008]
    무필(誣筆) : 거짓으로 지은 글.
  • [註 009]
    패초(牌招) : 승지(承旨)가 왕명을 받아 신하를 부르는 것. ‘명(命)’ 자를 쓴 주색(朱色) 패의 한 면에 부름을 받은 신하의 성명을 기입하여 승정원의 하례(下隷)를 시켜 송달함.
  • [註 010]
    삼성(三省) : 강상 죄인(綱常罪人)을 추국(推鞫)하는 세 아문. 곧 의정부(議政府)·사헌부(司憲府)·의금부(義禁府)를 통틀어 일컫는 말.
  • [註 011]
    강도(江都) : 강화부(江華府)의 별칭.
  • [註 012]
    병자년 : 1636 인조 14년.

○乙未/引見大臣備局諸宰。 上語諸臣曰: "斗杓回春, 品物維新。 人事亦當體此, 去舊從新。 而人主一心, 萬化之原, 在上之人, 所宜建極于上, 表率群下, 此則予當惕念, 而上下交修之道, 亦有望於臣隣。 頃日備忘, 意非偶然, 須體此意, 終始如一, 則庶可以有爲矣。 朝廷者, 四方之表準。 朝廷正而百官正, 百官正而四方正。 曩時朝論, 三分五裂, 務樹私黨, 以致國事日非, 此誠可戒者也。 且曰: ‘民惟邦本, 本固邦寧。’ 又曰: ‘夏暑雨, 小民惟曰怨咨。 冬祈寒, 亦惟曰怨咨。’ 爲國之道, 豈外於懷保小民哉? 當此發陽之辰, 草木群生, 擧有欣欣之意, 而哀我小民, 獨未蒙惠澤, 則保民之策, 尤今日之急務, 而所當講求者也。 諸臣各以嚴宮禁、杜私逕、得人才、擇守令之說, 仰對。" 上皆納之。 兵曺參判李鏶曰: "一自萬科之後, 士夫子孫, 皆以業武爲恥。 以此武士乏人, 在前柳赫然建白。 士夫子弟, 設廳勸武, 近來武士中, 有名稱者, 皆是其時勸武中人也。 今亦復爲設廳, 以爲各別勸武之地, 似好。" 上曰: "人臣効忠, 文武無異, 而近來武科榜目中, 絶無士夫子孫得參者, 士族之不事武業, 於此可知, 設廳勸武宜矣。" 領議政權大運曰: "樂安士人李斗光, 以孝廟顯廟明聖王后ㆍ仁敬王后行狀誌文改撰事上疏。 啓下備局, 而宋時烈金錫冑之誣筆不可仍存, 外議皆以爲宜改矣。" 左議政睦來善繼言其宜改。 吏曺判書柳命天曰: "行狀則固宜改之。 而誌文則旣巳埋安陵所, 似難輕議。" 吏曺參判權愈曰: "觀其誌文, 與常時誌文之體大異, 其時撰出者, 必欲售其胸臆, 至載討逆之事, 此豈可載於誌文? 不當仍存矣。" 上曰: "行狀旣是誣筆, 決不可仍存。 而誌文則埋安陵所, 何以則合宜耶?" 大運請: "仍存舊誌, 又埋新誌。" 命天曰: "事體至重, 不可倉卒處之。 宜問于儒臣, 博考古例而處之。" 上命行狀則改撰。 而誌文事, 問于儒臣。 上又曰: "盧以益陳疏之事, 何以處之。" 大運曰: "事體重大, 宜令二品以上及三司諸臣, 會議處之。" 來善曰: "頃者朝家招問尹夏濟, 則亦以爲聞之。 其言之不虛可知。 此言終不明辨, 仍存史冊, 則臣子痛迫, 庸有極乎? 若果有之, 不可不改。 而事體甚重, 二品以上三司及在外大臣處, 竝宜詢問。" 上曰: "二品以上三司諸臣牌招收議。 而遣史官, 詢問于在外原任大臣而處之。" 刑曺判書尹以濟斗任獄事。 上曰: "以文案觀之, 窮凶極惡, 無如李翔, 其用意叵測。 若得生, 失刑大矣。 斗任雖不服, 萬無可生之理矣。" 大運曰: "若得生, 必失湖西人心, 不可不殺。" 上命以斗任移送禁府。 三省設鞫, 諸臣將退。 上留之, 仍諭曰: "古人有言: ‘有備無患, 居安思危。’ 此皆挌語也。 近聞太極 㺚子, 兵勢甚盛, 不出數年, 中原必大亂云。 彼若見逐, 則必歸寧古塔。 旣歸寧古塔, 則咸關以北, 非我所有。 豈非大可憂乎? 迨此閑暇, 陰雨之備, 不可不熟講矣。" 大運來善等, 猝承上敎, 茫然不知所對。 但曰: "自上軫念陰雨之備, 此誠無彊之福也。" 上曰: "平時之訓士鍊兵, 乃有國之急務。 意者, 大臣必有所思, 故始發問矣。 苟能今日而思, 明日而思, 思之又思, 毋少忘忽, 則其於保邦之道, 庶乎得矣。" 兵曺判書閔黯曰: "軍資所需, 財穀爲大, 預爲儲畜, 則可以備倉卒之用矣。" 上曰: "太極㺚子, 早晩必有作梗之患, 脫有不幸, 當向何處耶?" 大運曰: "莫若江都。" 上曰: "丙子之入南漢, 非所欲也。 賊騎猝迫, 勢不得已也。 咫尺江都, 且不及入, 可想其時之窘急。 思之至今, 不覺寒心。" 刑曺判書尹以濟曰: "丙子之未入江都者, 蓋以船隻不備故也。 今宜預造船隻, 而當先造御船矣。" 上曰: "御船之外, 又造五隻宜矣。 且若無軍糧, 雖金湯無益。 丙子糧匱, 亦足爲今日之鑑矣。" 來善請以南方儲置米, 折半輸入江都, 以充糧餉。" 上可之。


  • 【태백산사고본】 24책 22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212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비빈(妃嬪) / 정론-정론(政論) / 사법-행형(行刑)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 외교-야(野) / 군사-병법(兵法) / 군사-병참(兵站) / 교통-수운(水運) / 역사-전사(前史) / 어문학-문학(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