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관에 간직한 《실록》을 상고하도록 명했으나 반대에 부딪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장원 별검(掌院別檢) 윤하제(尹夏濟)를 불러, 노이익(盧以益)이 상소한 일을 물으니, 하제가 대답하기를,
"신의 형 윤의제(尹義濟)가 사관(史官)이 되어 《실록》을 포쇄(曝曬)하고 돌아와서 가정에서 사사로이 말하는 즈음에 사책(史冊)560) 가운데 무상(誣上)한 말이 있음을 대개 말하였으나, 그것이 엄중한 비밀이므로 일찍이 상세히는 언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비록 부자 형제 사이라 하더라도 감히 묻지 않았고, 또한 감히 말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문자(文字)의 설화(說話)가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으기 보건대 신의 형(兄)의 뜻이 일찍이 분개(憤慨)하여 한 번 진달하려고 하였으나 망설이고 머뭇거리며 시일을 끌다가 문득 참화(慘禍)를 입어 적중(謫中)에서 죽었으니, 신이 만약 밝게 들은 바가 있다면 성상의 물으심 아래에서 어찌 감히 진달하지 아니하겠습니까? 탕화여생(湯火餘生)561) 이 시식(視息)562) 은 비록 남아 있으나 정신과 넋을 모두 잃었고 세월도 오래 되었으니, 신의 기억하는 바는 신의 형이 분개하던 말 뿐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윤하제(尹夏濟)의 말한 것을 보면, 《실록》 가운데 무상(誣上)한 말이 명백하여 의심이 없으니, 놀라고 통탄스러운 일로서 이보다 큰 것이 없다. 사관(史館)에 간직한 《실록》을 상고하여 계달하라."
하니, 이튿날 검열(檢閱) 심중량(沈仲良)이 상소하기를,
"부자(父子)의 지극히 친한 사이라도 국사(國史)의 일은 전하여 말하지 못하는 것은 국법이 그러한 것입니다. 전에 윤의제(尹義濟)가 비록 본 바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조정에 알리지 아니하였으니, 사사로이 서로 수작(酬酢)함이 없어야 마땅한데, 노이익(盧以益)과 윤하제의 말이 이와 같으니 또한 이상합니다. 이제 만약 적실하지 못한 말로써 전에 없는 일을 처음 거행하여 《실록》을 상고해 내는 데 이르면, 뒷날 사람들이 이를 빙자하고 구실로 삼아 일마다 올려 아뢰어 장차 그 어지러움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신은 직책이 사국(史局)에 있으므로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대답하기를,
"타국(他國)의 무사(誣史)563) 도 오히려 사신을 보내어 힘써 변명하거늘 하물며 《실록》의 무상(誣上)한 말을 어찌 차마 분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영의정 권대운(權大運)과 우의정 김덕원(金德遠)이 연명(聯名)하여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윤의제(尹義濟)가 본 무상(誣上)한 말이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국사(國史)는 엄중한 비밀이므로 부자(父子)도 서로 말을 전하지 못하는데, 어찌 죽은 지 10년 뒤에 선포(宣布)하겠습니까? 성상께서 슬퍼하고 놀라시어 《실록》을 상고하여 이를 분변하려고 하시나, 이 일은 지극히 중하여, 전고(前古)에 없는 일을 거행하면 후일에 무궁한 폐단을 열 것입니다. 더욱이 상고하여 본 뒤에 이러한 일이 없다면 국체(國體)가 더욱 손상될 것이니, 원컨대 성명(成命)을 정지하시어 잘 헤아리고 널리 물어서 처리하소서."
하니, 임금이 비로소 마지 못해 허락하였다. 좌의정 목내선(睦來善)이 차자를 올리기를,
"비사(祕史)564) 에 실린 무상(誣上)한 말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겠으나 《실록》을 고열(考閱)하여, 전한 자의 말이 없으면 모든 의심은 풀어질 것이며, 과연 있다면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국사로써 죄를 논하는 것은 전사(前史)에 경계하는 바인데, 이는 성명(聖明)의 세대에 염려할 바가 아니기 때문에 신이 이에 진실로 국체(國體)를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상(僚相)들이 연명한 차자에, ‘뒤의 폐단을 열까 두렵다.’고 한 것은 진실로 바로 본 바가 있는 것이니, 바라건대 삼사(三司)와 1품 이상에게 물어서 처리하소서."
하니, 대답하기를,
"경의 차자는 신중한 뜻에서 나왔으니, 내가 마땅히 헤아려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3책 21권 39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204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 역사-편사(編史)
- [註 560]사책(史冊) : 《실록》.
- [註 561]
탕화여생(湯火餘生) : 참화를 당한 남은 생명.- [註 562]
○政院招掌苑別檢尹夏濟, 以盧以益疏問之。 夏濟對曰: "臣兄義濟爲史官曝曬實錄而歸。 家庭燕語之際, 槪言史冊中, 有誣上之說, 而以其嚴秘, 曾不致詳。 雖以父子兄弟之親, 旣不敢問, 亦不敢言。 實未知文字說話之如何。 然竊觀臣兄, 意嘗憤慨, 欲一陳之, 而趑趄囁嚅, 淹延時日, 旋遭慘禍, 死於謫中。 臣若明有所聞, 則聖問之下, 豈敢不陳? 而湯火餘生, 視息雖存, 精魂都喪, 歲月且久, 臣所記得者, 臣兄憤慨之言而已。" 上曰。 以夏濟言觀之, 實錄中誣上之語, 明白無疑, 事之驚痛, 莫此爲大。 考史館所藏實錄以啓。" 翌日, 檢閱沈仲良上疏曰: "父子至親, 不得傳說史事, 國法然也。 向使義濟, 雖有所見, 旣不聞之于朝, 宜無私相酬酢者。 而以益、夏濟之言如此。 吁! 亦異矣。 今若因不的之說, 創無前之擧, 至於考出實錄, 則恐後人藉此爲口實, 逐事登聞, 將不勝其紛紜也。 臣職忝史局, 不敢不言。" 答曰: "他國誣史, 尙且專价力辨。 況此實錄誣上之語, 豈忍不辨乎?" 領議政權大運、右議政金德遠, 聯名上箚曰: "尹義濟所見誣上之語, 雖未知如何, 而國史嚴秘, 父子亦不相傳, 則何以宣布於身故十年之後歟? 聖明衋然而驚, 欲考實錄以辨之, 但玆事至重, 爲前古所無之擧, 啓後日無窮之弊。 況旣考而無是事。 則國體益復損傷, 願寢成命, 熟量博訪而處之。" 上始勉許。 左議政睦來善上箚曰: "秘史所載誣上之說, 未知何如, 而考閱實錄, 無傳者之言, 則群疑可釋。 果有之, 不可仍置。 至如以史論罪, 前史所戒。 此則非所敢慮於聖明之世。 故臣於是, 固不暇顧國體矣。 僚相聯箚, 恐啓後弊。 此誠有所見, 乞詢三司及二品以上而處之。" 答曰: "卿箚出於愼重之意, 予當量處。"
- 【태백산사고본】 23책 21권 39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204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 역사-편사(編史)
- [註 5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