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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21권, 숙종 15년 5월 6일 신축 2번째기사 1689년 청 강희(康熙) 28년

희빈 장씨로 왕비를 삼겠다는 전지

영의정(領議政) 권대운(權大運), 예조 참판(禮曹參判) 유명현(柳命賢), 참의(參議) 유하겸(柳夏謙)이 명을 받들고 빈청(賓廳)에 모였는데, 임금이 중관(中官)을 보내어 전지(傳旨)를 내리기를,

"《주역(周易)》은 건곤(乾坤)을 기본으로 하였고, 《시경(詩經)》은 관저(關雎)를 첫머리로 하였으니, 대저 풍속을 바르게 하고 비필(妃匹)을 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지금 주곤(主壼)325) 을 아직 세우지 못하여 음교(陰敎)가 통달하지 아니하니, 위호(位號)를 정하는 것을 하루라도 늦출 수 있겠는가? 희빈(禧嬪) 장씨(張氏)는 좋은 집에 태어나서 머리를 따올릴 때부터 궁중에 들어와서 인효 공검(人孝恭儉)하여 덕이 후궁(後宮)에 드러나 일국의 모의(母儀)가 될 만하니, 함께 종묘(宗廟)를 받들고 영구히 하늘의 상서로움을 받을 것이다. 이에 올려서 왕비를 삼노니,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일체 예절(禮節)에 따라 즉각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권대운이 받들어 읽기를 마치자, 서로 돌아보며 잠자코 있다가 이어서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시민당(時敏堂)에서 인견(引見)하고, 유명현(柳命賢) 등도 또한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권대운이 말하기를,

"엎드려 전지(傳旨)를 보건대, 곤위(壼位)가 이미 비었고 성상의 하교가 이와 같으시니, 밑에 있는 사람이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는 중대한 일이므로 신과 예관(禮官) 두 사람으로 하여금 초초(草草)하게 의논해 정하도록 하여 관료(官僚)를 제배(除拜)하는 행위와 같이 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사체(事體)가 도리어 가벼워지니, 2품 이상을 부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의 기색이 자못 노기를 띠며 말하기를,

"수의(收議)하려고 하는가?"

하였다. 유명현이 말하기를,

"권대운의 말은 그 일을 중하게 하려고 할 뿐입니다. 순문(詢問)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전대의 역사를 보건대, 단지 승상(丞相)·어사(御史)만 불렀고 아조(我朝) 비빈(妃嬪)을 간택(揀擇)할 때에도 단지 삼공(三公)과 예관(禮官)만 불렀기 때문에 경들을 부른 것이다."

하였다. 유명현이 말하기를,

"비록 고례(古例)는 없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여러 신하로 하여금 모두 알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2품 이상과 삼사(三司)를 즉시 패초(牌招)하라고 명하였다. 선인문(宣仁問)으로부터 와서 시강원(侍講院)에 모였는데, 무릇 시민당(時敏堂)과 가까움을 취하여 시각을 늦추지 아니하려고 한 것이다. 권대운이 말하기를,

"장차 택일(擇日)할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역서(曆書)를 보았는데, 오늘 바로 길일(吉日)이다."

하였다. 권대운이 말하기를,

"일체 예절(禮節)은 해조(該曹)에서 곧 마땅히 거행할 것이나, 전부터 세자빈(世子嬪)이 승위(陞位)할 때의 책례(冊禮)는 3년 후에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또한 마침 국휼(國恤)을 당하였으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세자빈이 승위할 때의 책례는 비록 3년을 기다린다고 하나, 명호(名號)를 정하는 것은 성복(成服) 전에 행하였으니, 지금도 또한 먼저 명호를 정하여 고묘(告廟)와 반교(頒敎)를 하고, 책례는 3년 후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유명현이 말하기를,

"전부터 책례는 비록 3년을 기다릴지라도 진상(進上) 등의 일은 먼저 거행하였고, 고묘와 반교는 전례(前例)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진상은 진실로 마땅히 거행할 것이지만, 고묘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권대운이 말하기를,

"마땅히 예조(禮曹)로 하여금 예(例)를 상고하여 처리하게 할 것입니다."

하고, 권대운이 이어서 전지(傳旨)를 받들어 임금 앞에 나아가서 말하기를,

"이제 만약 교서(敎書)를 반포하면 책례(冊禮) 때의 교서 반포와 중복될 듯하니, 이 전지(傳旨) 가운데, ‘중외(中外)에 포고(布告)한다.’는 뜻을 아래에 보태어 넣어서 팔도(八道)에 유시(諭示)를 내리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인하여 당일 정사를 열어서 왕비의 부모에게 봉작(封爵)·증직(贈職)할 것을 명하니, 권대운이 말하기를,

"예로부터 임금이 큰 일을 정할 적에 위엄과 노여움을 가하지 아니한 예가 드뭅니다. 인조(仁祖)께서 원종(元宗)을 추숭(迫崇)할 때에도 여러 신하가 힘써 다투다가 귀양가고 쫓겨난 경우가 많았는데, 일이 지난 뒤에는 모두 석방되었으니, 이것은 본받을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권열(權說)·이윤수(李允修)·심계량(沈季良)·이만원(李萬元) 등은 모두 그 죄벌(罪罰)을 거두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뒤에 이시만(李蓍晩)에게도 파직의 명을 도로 거두었는데, 연신(筵臣)이 ‘권대운이 잊고 아뢰지 아니하였다.’고 진달하였기 때문이었다. 권대운이 말하기를,

"김덕원(金德遠)은 죄가 없습니다. 신과 목내선(睦來善)이 모두 늙었으니, 위임할 만한 사람은 김덕원이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비로소 서용(敍用)하라고 명하였다. 권대운이 다시 말하니, 드디어 앞의 전지(傳旨)를 정지하고, 이어서 사관(史官)을 보내어 힘써 나오게 하였다. 권대운이 말하기를,

"이상진(李尙眞)은 말이 비록 어긋날지라도 삼조(三朝)의 옛신하입니다. 너그럽게 용서를 내리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자, 임금이 어렵게 여겼는데, 권대운이 다시 말하니 이에 그 도내(道內)에서 가까운 땅으로 이배(移配)하라고 명하였다. 권대운 등이 물러가서 시강원(侍講院)에 나아갔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민암(閔黯), 좌참찬(左參贊) 이관징(李觀徵), 우참찬 유명천(柳命天), 이조 판서 심재(沈梓), 호조 판서 오시복(吳始復), 공조 판서 유하익(兪夏益), 판윤(判尹) 윤이제(尹以濟), 병조 참판(兵曹參判) 이집(李鏶), 부호군(副護軍) 정후량(鄭後亮), 행 사직(行司直) 이간(李旰), 사간(司諫) 이태귀(李泰龜), 교리(校理) 이윤수(李允修), 부교리 권흠(權歆), 수찬(修撰) 심벌(沈橃)·심계량(沈季良)이 함께 모였다. 임금이 처음 내린 비지(批旨) 가운데 ‘역령정원포고중외(亦令政院布告中外)’의 여덟 글자를 덧붙여 써서 내리니, 여러 신하가 명을 받들고 물러갔다.


  • 【태백산사고본】 23책 21권 5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187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비빈(妃嬪) / 인사-임면(任免) / 사법-행형(行刑) / 역사-전사(前史)

○領議政權大運、禮曹參判柳命賢、參議兪夏謙, 承命會于賓廳。 上命中官, 下傳旨曰: "《易》基乾坤, 《詩》首關雎, 蓋所以正風俗而重妃匹也。 目今主壼未建, 陰敎未暢, 位號之定, 其可一日少緩乎? 禧嬪張氏, 毓充慶令家, 歸自結髮, 仁孝恭儉, 德著後宮, 可以母儀一國。 共奉宗廟, 永承天休。 玆乃進陞爲王妃, 其令禮官, 一應禮節, 卽速擧行。" 大運奉讀訖。 相顧默然, 仍請對。 上引見于時敏堂, 命賢等亦入侍。 大運曰: "伏見傳旨, 壼位旣虛, 聖敎如此。 在下之人, 豈有他意? 但此重事也。 不可令臣及禮官二人, 草草議定。 有若除拜官僚之爲也, 如此則事體反輕, 宜召二品以上。" 上色頗厲曰: "欲收議乎?" 命賢曰: "大運之言, 欲重其事而已, 非欲詢問也。" 上曰: "予觀前史, 只詔丞相御史。 我朝妃嬪揀擇時, 亦只召三公禮官, 故召卿等耳。" 命賢曰: "雖無古例, 宜令諸臣, 皆得以知之也。 上命二品以上及三司, 卽爲牌招, 自宣仁門來會于侍講院。 蓋取近於時敏堂, 不欲晷刻之淹也。" 大運曰: "其將擇日乎?" 上曰: "已見曆書, 今日卽吉耳。" 大運曰: "一應禮節, 該曹卽當擧行。 而自前以世子嬪陞位時冊禮, 行於三年之後。 今亦適値國恤, 何以爲之。" 上曰: "自世子嬪陞位時冊禮, 雖待三年, 定號則於成服前行之。 今亦先爲定號, 告廟、頒敎, 而冊禮則待三年後可也。" 命賢曰: "自前冊禮, 雖待三年, 進上等事, 先爲擧行。 而告廟、頒敎, 未有前例矣。" 上曰: "進上固當擧行, 而告廟何以爲之?" 大運曰: "當使禮曹考例而處之也。" 大運仍奉傳旨, 進上前曰: "今若頒敎, 則與冊禮時頒敎, 似涉重疊, 此傳旨中, 以布告中外之意, 添入于下, 下諭八道何如?" 上從之。 仍命當日開政, 封贈王妃父母。 大運曰: "自古人主之定大事也, 不加威怒者鮮。 仁祖追崇元宗時, 群臣力爭, 多竄逐。 事過, 竝放釋。 此非可法者乎? 權說李允修沈季良李萬元等, 竝宜收其罪罰。" 上從之。 後李蓍晩亦還收罷職之命, 筵臣陳大運忘不白故也。 大運曰: "金德遠無罪, 臣與睦來善皆老。 可以委任者, 非德遠而誰?" 上始命敍用。 大運復言之, 遂寢前旨, 仍遣史官勉出。 大運曰: "李尙眞言雖乖謬, 三朝舊臣也。 宜賜寬假。" 上難之。 大運復言, 乃命從其道內, 移配近地。 大運等退詣侍講院。 兵曹判書閔黯、左參贊李觀徵、右參贊柳命天、吏曹判書沈梓、戶曹判書吳始復、工曹判書兪夏益, 判尹尹以濟、兵曹參判李鏶、副護軍鄭后亮、行司直李旰、司諫李泰龜、校理李允修、副校理權歆、修撰沈橃沈季良。 俱會。 上就初下批旨中, 附書亦令政院布告中外八字而下之, 諸臣承命而退。


  • 【태백산사고본】 23책 21권 5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187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비빈(妃嬪) / 인사-임면(任免) / 사법-행형(行刑) / 역사-전사(前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