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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20권, 숙종 15년 4월 24일 경인 3번째기사 1689년 청 강희(康熙) 28년

영의정 권대운 등이 빈청에서 재차 전의 내용을 아뢰니 인견하다

영의정(領議政) 권대운(權大運)·병조 판서 민암(閔黯)·이조 판서(吏曹判書) 심재(沈梓)·좌참찬(左參贊) 이관징(李觀徵)·형조 판서(刑曹判書) 이우정(李宇鼎)·우참찬(右參贊) 유명천(柳命天)·좌윤(左尹) 윤이제(尹以濟)·이조 참판(吏曹參判) 유하익(兪夏益)·우윤(右尹) 권열(權說)·훈련 도정(訓鍊都正) 노정(盧錠)·행사직(行司直) 정후량(鄭后亮)·공조 참판(工曹參判) 신후재(申厚載)·공조 참의(工曹參議) 박정설(朴廷薛)·예조 참의(禮曹參議) 유하겸(兪夏謙)·호조 참의(戶曹參議) 이의징(李義徵)이 빈청(貧廳)에 모여 전에 아뢴 내용을 다시 아뢰었으나, 임금이 답하지 않고 인견(引見)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대사헌(大司憲) 목창명(睦昌明), 장령(掌令) 이원령(李元齡), 지평(持平) 배정휘(裵正徽), 헌납(獻納) 이만원(李萬元), 교리(校理) 강선(姜銑)·권규(權珪), 수찬(修撰) 심벌(沈橃)·심계량(沈季良)도 함께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함께 들어오게 하였다. 또 하교(下敎)하기를,

"어제 인견할 적에 병조 판서 민암이 눈물을 흘리면서 진달하였기 때문에 내보내게 하였다. 그런데 오늘 빈청의 계(啓)에 감히 연명(聯名)할 수가 있는가? 나오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권대운 등에게 말하기를,

"경(卿)들이 어제 정녕(丁寧)한 분부를 들었는데, 어찌하여 또 이렇게 어기는 것인가?"

하니, 권대운이 아뢰기를,

"신들이 비록 변변치 못하기는 합니다만, 어찌 성상(聖上)의 의중(意中)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그래도 화평하게 진정시키기를 바라서 감히 갑자기 받들어 따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어제 비답(批答)하신 분부는 더욱 신하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이어서 신들은 황공스러워 움츠린 채 어찌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홍치상(洪致祥)의 죄악에 대해 심장(心膓)을 가진 사람이라면 통분해 하겠는가, 않겠는가?"

하니, 권대운이 아뢰기를,

"홍치상의 일에 대해서는 누군들 통분해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이제 모두 말하겠다. 그가 선왕(先王)과 선후(先后)의 분부를 가탁(假托)하여 한 말은 실로 총애를 독점하기 위한 데서 나온 것인데, 원자(元子)가 탄생하자 그 말이 모두 거짓임이 드러나고 말았다. 국모(國母)가 된 몸으로 간특한 것이 이와 같은데도 경들은 매양 ‘한때의 조그만 잘못이니 끝내는 반드시 감화될 것이다.’ 하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저번 삼사(三司)가 청대(請對)하였을 때 홍치상(洪致祥)송시열(宋時烈) 등을 율(律)에 의해 다스릴 것을 청하는 아룀을 따르면서 은미하게 그 단서를 발론(發論)했었고, 또 어제도 문안(問安)을 받지 말라고 하였다. 그렇게 했으면 당연히 송구스러워 불안해 하는 마음가짐으로 징계받는 태도가 있어야 하는데, 끝내 스스로 반성하지 않은 채 문득 성난 말로 ‘진실로 나의 죄이다. 어찌 할 것인가? 폐출(廢黜)시키려거든 폐출시키라.’ 하였다. 그의 마음이 이러한데 어떻게 감화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옥당(玉堂)에서는 성명(成命)을 환수(還收)한 것을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의 다행이라고 하니, 참으로 너무도 통분스러운 일이다."

하니, 강선(姜銑)이 아뢰기를,

"중궁(中宮)께서 일국의 국모로 군림해 오신 지 이제 10년이 다 되었습니다만, 실덕(失德)한 일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갑자기 이렇게 차마 들을 수 없는 분부를 내리십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름이 국모였지 실제로는 그런 덕이 없는데도 국모로 대우할 수가 있겠는가? 홍치상(洪致祥)은 왕실(王室)의 지친(至親)으로 군상(君上)을 무함한 정상(情狀)이 드러났는데도 오히려 말하기를, ‘홍 주부(洪主簿), 홍 주부’하면서 그가 죄를 받은 것을 매우 애석히 여기는 듯이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심정인가? 김씨(金氏)를 폐출할 적에 그로 하여금 전교(傳敎)에 따라 내보내게 하고서는 이어 사람을 시켜 살펴보았더니 마음이 태연 자약하였고 그의 가인(家人)을 재촉해 불러 도보(徒步)로 나가게 하면서 딱하게 여기는 빛이 있었다. 이런 사람을 오장 육부(五臟六腑)가 있는 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정궁(正宮)에 거하여 부도(不道)한 사람을 말할 적에도 반드시 그 관명(官名)을 일컬으면서 전혀 두려워하는 바가 없었다. 이런 잡류(雜類)들이 궁중에 모여 있으니, 앞으로 어떻게 감당할 수가 있겠는가?"

하니, 목창명(睦昌明)·권대운(權大運) 등이 또 간략히 아뢰었다.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저 사람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홍치상은 자기 남편을 무함한 자인데도 오히려 애석히 여기면서 대의(大義)를 볼아보지 않으니, 그래도 감화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니, 이우정(李宇鼎)이 아뢰기를,

"어제는 차마 듣지 못할 전교를 받들었습니다. 지금은 전하께서 노여움을 돌려 화평하기를 바랐었는데 성교(聖敎)가 또 이와 같습니다.…’

하여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부터 이우정민암이 같은 말로 극력 말하면서 절의(節義)를 세우려는 자 같이 하고 있다. 이우정을 파직(罷職)하라."

하였다. 이우정이 추주(趨走)해 나가니, 권열(權說)이 아뢰기를,

"신은 늙고 병든데다가 귀까지 먹어서 입으로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만, 오늘의 일은 결단코 불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고, 이어 소매 속에서 소지(小紙) 한 장을 꺼내려 하였는데, 이는 소회(所懷)를 써서 올리려 한 것이었다. 임금이 급히 말하기를,

"권열이 이미 비망기(備忘記)의 내용을 보고서도 오히려 결단코 불가하다고 하였으니, 잡아다가 추문하라."

하니, 권열이 또 나갔다. 이만원(李萬元)이 고개를 들고 우러러 아뢰기를,

"진언(進言)한 신하가 잇따라 죄를 받았으니, 신이 어찌 감히 죄가 두려워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옛사람 가운데 가려서 신하로 삼으려 하신다면 공도보(孔道輔)여이간(呂夷間)258) 가운데 누구를 택하시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만원(李萬元)의 말이 무례하기 그지없다. 창읍왕(昌邑王)259) 은 임금인데도 오히려 폐출되었다."

하였다. 이만원이 임금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이에 아뢰기를,

"신이 아뢴 것은 바로 송(宋)나라 때의 신하인 공도보를 말한 것이요, 창읍왕 때 사람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하면서, 이만원의 어성(語聲)이 조금 높아지자, 임금이 더욱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어찌 공도보의 일을 모르겠는가? 창읍왕은 임금인데도 오히려 종묘 사직을 위하여 폐출하였는데, 하물며 후비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였다. 강선(姜銑)이만원에게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아뢰려고 발언하려 하자마자 임금이 앞에 있는 궤안(几案)을 밀치면서 성난 목소리로 꾸짖기를,

"내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그대들이 어떻게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이만원강선을 모두 파직하라."

하고, 이어 하교(下敎)하기를,

"이만원은 분의(分義)를 돌아보지 않고 기필코 절의를 세우려 하니, 어찌 이렇게 무례한 대간(臺諫)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극변(極邊)에 원찬(遠竄)하라."

하였다. 목창명이만원을 구원하기 위해 아뢰었는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금이 갑자기 분부하기를,

"내가 종묘 사직의 원대한 앞날을 위하여 걱정한다는 것을 반복해서 하유(下諭)했는데도, 경들은 나의 뜻을 모르고 기필코 부인(婦人)을 위하여 절의를 세우려고 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다시 나를 아버지처럼 섬기지 말라."

하고 또 말하기를,

"제신(諸臣)들은 나를 향하여 북면(北面)하지 말고 속히 나가라."

하니, 제신(諸臣)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권대운 등이 궐문 밖으로 나가서 연명(聯名)으로 상소를 올려 진달하고 대죄(待罪)하니, 임금이 안심하고 대죄하지 말라고 유시(諭示)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2책 20권 51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176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 [註 258]
    공도보(孔道輔)와 여이간(呂夷間) : 송 진종(宋眞宗)과 송 인종(宋仁宗) 때의 재상들로, 공도보는 어사 중승(御史中丞)을 지냈는데 당시 곽후(郭后)의 폐위를 강직하게 반대하다가 귀양간 일이 있으며, 여이간은 동중서 문하 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를 지냈고, 곽후의 폐위에 동조하여 결국 폐위시킨 일이 있음.
  • [註 259]
    창읍왕(昌邑王) : 한 무제(漢武帝)의 손자인 유하(劉賀)임. 한 소제(漢昭帝)가 붕(崩)하자 곽광의 손에 의해 황제의 위에 올랐다. 즉위한 뒤 음탕하고 광망(狂妄)한 짓을 하다가 27일 만에 쫓겨나서 창읍(昌邑)으로 돌아갔음.

○領議政權大運、兵曹判書閔黯、吏曹判書沈梓、左參贊李觀徵、刑曹判書李宇鼎、右參贊柳命天、左尹尹以濟、吏曹參判兪夏益、右尹權說、訓鍊都正盧錠、行司直鄭后亮、工曹參判申厚載、工曹參議朴廷薛、禮曹參議兪夏謙、戶曹參議李義徵, 會賓廳申前啓, 上不答。 命引見時, 大司憲睦昌明、掌令李元齡、持平裵正徽、獻納李萬元、校理姜銑權珪、修撰沈橃沈季良, 竝請對。 上使之同入, 又下敎曰: "昨日引見兵曹判書閔黯, 涕泣陳之, 故使出去。 今日賓廳之啓, 敢爲聯名乎? 其勿進見。" 上謂大運等曰: "卿等聞昨日丁寧之敎, 而何又違拒也?" 大運曰: "臣等雖無狀, 豈不知上意所在? 然惟望和平鎭定, 而不敢造次承順, 昨日批敎, 尤臣子所不忍聞, 臣等惶縮, 不知所爲。" 上曰: "致祥罪惡, 凡有心腸者, 當憤乎否乎?" 大運曰: "致祥事, 孰不憤之?" 上曰: "予今盡言之, 其所以托先王先后之敎者, 實出專寵之計, 元良誕降, 則其言皆爲誣, 身爲國母, 奸慝若是, 而卿等每稱一時微過, 終必感化, 此何言也? 日者三司請對時, 旣從時烈致祥等按律之請, 而仍微發其端, 又於昨日, 勿受問安, 則固當悚蹙不安, 有所懲艾而終不自反, 輒發慍語曰: ‘固是吾罪, 奈何奈何?" 欲黜則黜之, 其心若此。 豈望感化耶? 玉堂以還收成命, 爲宗社臣民之幸, 誠極痛惋也。" 曰: "中宮爲一國之母, 今將十年, 未聞有失德。 殿下何遽下此不忍聞之敎耶?" 上曰: "名爲國母, 而實無其德, 尙可以國母待之乎? 致祥以王室至親, 誣逼君上, 及其情狀彰著, 尙語之曰: ‘主簿主簿。’ 有若深惜其被罪者然。 是何心腸耶? 金女廢黜時, 使之聽傳敎出去, 仍使人見之, 則意思自若, 趣召其家人, 徒步出去, 有自矜之色, 此可謂有五臟耶? 居正宮而言不道之人, 必稱官名, 恬然無所畏, 如此雜類, 聚在宮中, 將何以堪之耶?" 昌明大運等, 又略有所言。 上怒曰: "自彼言之, 致祥是構誣其夫之人, 而猶顧惜之, 不恤大義, 尙可望感化乎?" 宇鼎曰: "昨承不忍聞之敎, 今又只望殿下轉怒爲和, 而聖敎又如此, 語未旣。" 上曰: "自昨日李宇鼎閔黯, 同聲力言之, 有若立節者然。 宇鼎罷職, 宇鼎趨出, 說曰: ‘臣老病且聾, 不能口對, 而今日之事, 旣知其決不可。’ 仍欲出袖中一小紙, 蓋書所懷將進之也。" 上遽曰: "權說旣見備忘辭旨, 而猶曰: ‘決不可。’ 其拿問之。" 又出。 萬元仰首而言曰: "進言之臣, 相繼被罪, 臣何敢畏罪而不言乎? 殿下欲於古人中, 擇而臣之, 則孔道輔呂夷簡, 孰爲可?" 上曰: "李萬元之言, 無狀無狀, 昌邑王, 人君也, 猶且廢之矣。" 萬元未達上旨, 乃曰: "臣所白者, 乃孔道輔, 非昌邑王時人也。" 萬元語聲稍高。 上愈怒曰: "予豈不知孔道輔事乎? 昌邑王, 乃是人君, 而尙且爲宗社廢之, 況於后妃乎?" 欲白萬元無他意, 纔發言。 上手推前案, 厲聲責之曰: "予言未畢, 爾輩何敢復言?" 李萬元姜銑, 竝罷職。 仍下敎曰: "李萬元不顧分義, 必欲立節, 豈有如此無狀臺諫乎? 極邊遠竄。" 昌明欲救萬元, 語未竟。 上遽敎曰: "予爲宗社, 深遠慮, 反復下諭, 而卿等不諒予意, 必欲立節於婦人, 自今以後, 更勿父事寡躬也。" 又曰: "諸臣其勿北面於我, 速爲出去。" 諸臣不敢復言而退。 大運等出闕門外, 聯名陳疏待罪。 上諭以安心勿待罪。


  • 【태백산사고본】 22책 20권 51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176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