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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20권, 숙종 15년 4월 21일 정해 1번째기사 1689년 청 강희(康熙) 28년

대사헌 목창명 등이 송시열의 처벌을 상소하다

대사헌(大司憲) 목창명(睦昌明), 응교(應敎) 이식(李湜), 지평(持平) 정선명(鄭善鳴)·배정휘(裵正徽), 헌납(獻納) 이만원(李萬元), 교리(校理) 강선(姜銑)·이윤수(李允修), 부교리(副校理) 권규(權珪), 정언(正言) 성관(成瓘)·조식(趙湜), 수찬(修撰) 심계량(沈季良)·심벌(沈橃)이 청대(請對)하여, 송시열(宋時烈)의 죄를 논하고 잡아다가 엄히 국문(鞫問)해서 빨리 나라의 형전(刑典)을 바룰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단지 송시열의 일만 그런 것이 아니고 궁위(宮闈) 사이에도 변괴(變愧)가 있으니, 대간(臺諫)이 다 논진(論陳)한 다음 말하겠다."

하니, 목창명(睦昌明) 등이 또 홍치상(洪致祥)을 율(律)에 의거하여 처형할 것을 청하였다. 이만원(李萬元)이 아뢰기를,

"홍치상은 위를 무함하는 부도(不道)를 범하였고, 송시열은 위복(威福)의 권한을 마음대로 휘둘렀습니다. 그런데도 베지 않는다면 조정의 법을 어디다 쓰겠습니까?"

하고, 목창명은 아뢰기를,

"송시열효묘(孝廟)242) 의 죄인이고, 홍치상은 동조(東朝)의 죄인입니다. 결단코 용서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차례로 극력 요청하였다. 이식(李湜)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기미년243) 에 대론(臺論)에 따라 송시열을 죄주었다면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지금처럼 함닉(陷溺)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배정휘(裵正徽)는 아뢰기를,

"한(漢)나라 때 공주의 아들은 사죄(死罪)를 속바치는 은전(恩典)이 있었지만 임금은 오히려 법을 굽히는 것을 어렵게 여겨 결국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대저 교만 방자한 죄에 대해서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였거늘, 더구나 홍치상은 동조(東朝)를 무함하고 사류(士類)를 모해(謀害)했는데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하고, 이만원(李萬元)이 아뢰기를,

"선왕(先王)께서 온천(溫泉)에 행행(行幸)한 것은 부득이해서였던 것인데, 송시열이 해마다 온천에 행행하면서도 한 번도 능침(陵寢)을 배알(拜謁)하지 않았다는 등의 말을 사서(私書)에 기재하여 마치 수죄(數罪)하듯 하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신하로서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하고, 승지(承旨) 이시만(李蓍晩)은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나이 많은 귀주(貴主)를 생각하시어 즉시 홍치상을 베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홍치상은 전하께서 주가(主家)를 대우함에 있어 후박(厚薄)이 있다는 것을 김석연(金錫衍)에게 말하였으니, 이러한 그의 죄는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고, 성관(成瓘)은 아뢰기를,

"송시열홍치상의 죄를 용서한다면 하늘에 계신 선왕(先王)과 선후(先后)의 신령(神靈)을 위로할 수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전하께서도 천하 후세의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심계량(沈季良)은 아뢰기를,

"전하께서 처음 홍치상에게 사형에 처하지 않을 것을 허락하고 그에게 사실대로 고하게 하였는데도 숨겼습니다. 그러다가 이사명(李師命)과 대질(對質)하여 변석(辨釋)할 때에서야 비로소 말이 궁하고 안색이 저상되어 그 사실을 다 진술하였으니, 이는 홍치상이 스스로 전하를 끊은 것이요, 전하께서 실신(失信)한 것이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말세(末世)로 올수록 인심이 점점 나빠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찌 내가 당한 것 같은 일이 있겠는가? 경들에게 발본 색원(拔本塞源)할 뜻이 있으니, 나도 말하고 들은 것이 있다. 궁위(宮闈)에 【중궁(中宮)을 가리킴이다.】 관저(關雎)의 덕풍(德風)244) 은 없고 투기(妬忌)의 습관이 있어서 병인년245) 희빈(禧嬪)이 처음 숙원(淑媛)이 될 때부터 귀인(貴人)에게 당부(黨付)하였으며, 분을 터뜨리고 투기를 일삼은 정상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어느 날 나에게 말하기를, ‘꿈에 선왕과 선후를 만났는데 두 분이 나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내전(內殿)과 귀인(貴人)은 선묘(宣廟) 때처럼 복록(福祿)이 두텁고 자손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숙원(淑媛)은 아들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복도 없으니, 오랫동안 액정(掖庭)에 있게 되면 경신년246) 에 실각(失脚)한 사람들에게 당부(黨付)하게 되어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이다.」 했습니다.’ 하였다. 부인(婦人)의 투기는 옛날에도 있었지만 어찌 선왕·선후의 말을 가탁(假托)하여 공동(恐動)시킬 계책을 세운 것이 이토록 극심한 지경에 이를 수가 있겠는가? 투기가 통하지 않게 되자 이러한 헤아릴 수 없는 말을 만들었는데 삼척 동자인들 어찌 이 말을 믿겠는가? 간교한 정상이 폐부(肺腑)를 들여다보듯 환하다. 이런 사람은 고금(古今)에 다시 없을 것이다. 그리고 숙원에게 아들이 없는 것이 사실이라면 원자(元子)는 어떻게 탄생되었는가? 그 거짓된 작태가 여기에서 더욱 증험되었다."

하였다. 이시만(李蓍晩)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신들을 자식처럼 여기시고 신들은 전하를 아버지처럼 섬기고 있습니다. 여염(閭閻)의 가정으로 말하면, 부모가 불화(不和)한데 자식의 마음이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궁위(宮闈) 사이에 미안(未安)한 일이 있더라도 서서히 진정하시면 될 것인데, 이와같이 드러내어 말하실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자(元子)가 탄생하자 더욱 기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실로 이는 뜻밖이다.’ 하였다. 일찍 국본(國本)247) 을 정한 데에는 뜻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목창명 (睦暢明)이 아뢰기를,

"신들이 내전(內殿)을 어머니처럼 우러르고 있는데 이러한 하교(下敎)를 듣고 어찌 마음이 편할 수가 있겠습니까? 궁인(宮人)들이 이런 말을 했다면 어찌하여 대내에서 처분하지 않으시고 외신(外臣)에게 말씀하시십니까?"

하고, 이시만은 아뢰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어리석지 않고 귀먹지 않으면 가장(家長) 노릇을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범인(凡人)도 이러한데 더구나 군주(君主)야 말할게 무어 있겠습니까? 장공예(張公藝)248) 는 참을 인(忍)자 하나로 9대(代)가 한 집에 동거할 수 있었습니다. 필부(匹夫)가 가정에 살면서도 오히려 용납하려고 힘쓰는데, 군주야 말할 게 무어 있겠습니까? 여염집으로 말하건대 부인이 어떻게 일마다 사리에 합당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내전(內殿)께서도 여염집에서 생장(生長)하셨는데 여염집 부인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오직 용납하고 참음으로써 진정시켜야 합니다."

하고, 이식(李湜)은 아뢰기를,

"이시만의 말은 충심으로 전하를 사랑하는 데서 나온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고, 조식(趙湜)은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신들에게 아버지이시고 내전께서는 신들에게 어머니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교(聖敎)가 이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대답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이 바라는 바는 더욱 정가(正家)에 힘쓰고 화평(和平)에 힘을 다하여 주시라는 것뿐입니다."

하고, 강선(姜銑)은 아뢰기를,

"중궁(中宮)께서 일국의 국모(國母)로 군림하여 온 지가 우금 10년인데, 무슨 실덕(失德)이 있었기에 용납하여 참으려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비단 신료(臣僚)들만 차마 들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후세에 전해지면 실로 성덕(聖德)에 누가 되는 일입니다. 신이 어찌 감히 이 한 몸을 아껴 전하를 저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신의 이 말은 중궁(中宮)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실로 전하를 위한 것입니다."

하고, 이시만은 아뢰기를,

"부인들은 귀천(貴賤)을 가릴 것 없이 으레 편색(褊嗇)한 이가 많습니다. 어찌하여 너그러이 참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성학(聖學)이 고명(高明)하신데 어찌 이를 헤아리지 못하십니까?"

하고, 이만원은 아뢰기를,

"정가(正家)하는 방법은 상하가 모두 같습니다. 부인의 성품이 편색할지라도 반드시 교회(敎誨)를 받게 되어 무사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 하교는 삼가 깊이 생각하지 않으신 것인가 합니다."

하고, 이윤수(李允修)는 아뢰기를,

"고사(古史)를 살펴보더라도 태평한 세상에는 진실로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전하께서 제가(齊家)하는 방법에 힘을 기울이신다면, 이 어찌 신민(臣民)의 복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심벌(沈橃)은 아뢰기를,

"신들은 매양 문왕(文王)주남(周南)의 덕화249) 를 우리 전하께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이런 분부를 받들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하고, 강선(姜銑)은 아뢰기를,

"중궁께서 원자에 대해 곧 자신이 낳으신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사랑하는 마음이 전하와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더욱 노여운 안색으로 말하기를,

"내가 어찌 제가(齊家)하려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투기할 뿐만이 아니라 선왕(先王)과 선후(先后)의 말이라고 속이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외인(外人)으로 말하더라도 구고(舅姑)의 선령(先靈)을 가탁하여 근리(近理)하지 않은 말을 칭도(稱道)한다면, 그 심술(心術)이 어떠하겠는가? 그의 마음이 이러하니 원자를 자기가 낳은 것으로 여긴다는 것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이시만(李蓍晩)이 아뢰기를,

"궁위(宮闈)를 모시고 있는 자들에게 혹 불선(不善)한 점이 있더라도 전하의 성명(聖明)함으로 어찌 포용하여 참을 것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신이 이른바 어리석지 않고 귀먹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 것은 진실로 격언(格言)입니다. 옛사람이 통곡할 만한 것이 있고, 눈물 흘릴 만한 것이 있다250) 고 하였는데, 이는 바로 오늘의 일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외(內外)를 교결(交結)하여 임금의 동정(動靜)을 살핀 것이 김수항(金壽恒)이 죽게 된 이유이다. 이 사람을 그에 비기면 어떠한가?"

하였다. 임금의 의도는 귀인(貴人) 김씨(金氏)를 가리킨 것인데, 척언(斥言)하지는 않았다. 이시만이 아뢰기를,

"이는 김수항의 죄입니다. 그러나 부인(婦人)은 지식(知識)이 없으니 책할 것이 무어 있겠습니까?"

하고 이윤수(李允修)는 아뢰기를,

"이시만(李蓍晩)의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어머니로 섬겨야 할 지위에 계신 분에 대해서는 진실로 극력 간쟁(諫爭)해야 되는 것이요, 그 나머지는 말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윤수의 말은 그 의도가 무엇인가?"

하자, 목창명(睦昌明)이 아뢰기를,

"이시만이 전하의 분부를 모르고 언단(言端)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윤수가 아뢰기를,

"어머니로 섬겨야 할 지위에 계신 분에 대해서는 극력 간쟁해야 되는 것이지만, 그 나머지 궁위(宮闈) 사이의 일은 오직 전하의 처분에 달린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더욱 진노하여 말하기를,

"내간(內間)의 일에 대해서 이시만과 나 사이에 누가 더 상세히 알겠는가?"

하였다. 이시만이 아뢰기를,

"부인에게는 삼종(三從)의 의(義)251) 가 있습니다. 진실로 성덕(盛德)이 있는 분이 아니면 으레 조그만 과실을 저지르는 것을 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부인에게 관계된 일은 비록 미안한 점이 있더라도 깊이 책하지 않는 것입니다. 단지 성상(聖上)께서 화평하게 처분하시기를 바란 것뿐입니다. 어찌 감히 귀인(貴人)을 비호할 계책에서 그랬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홍치상(洪致祥)김수항(金壽恒)이 서로 교통하여 임금의 동정을 살폈다. 속담에 ‘손바닥 하나로는 소리를 낼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홍치상이 혼자서 한 일이겠는가? 하루는 빈청(賓廳)에서 인견(引見)할 때 그 연석(筵席)에서의 이야기를 소지(小紙)에 직접 기록하여 좌석(座席) 곁에다 놓아두었는데 곧바로 잃어버렸다. 귀인(貴人)이 마침 건즐(巾櫛)252) 을 받들면서 소매 속에 숨겨 놓은 것이다. 철저히 수색을 하자 비로소 마지 못하여 환납(還納)하였다. 그 이유를 하문하니, 쓸데없는 휴지(休紙)인 줄 잘못 알았다고 했다. 이것은 한때에 우연히 저지른 일이 아닌 것으로, 유언 비어를 날조한 것은 홍치상 뿐이 아니다. 국가에 대환(大患)이 발생하게 되었으므로 내가 이를 우려하고 있는 것인데, 이시만이 어떻게 감히 구해(救解)하려 한단 말인가? 이윤수(李允修)의 말이 옳다."

하였다. 제신(諸臣)들이 이시만을 위하여 구해(救解)하는 이가 많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시만은 무례(無禮)하기 그지 없다. 통곡할 만하고 눈물 흘릴 만하다는 말까지 하여 마치 절의(節義)를 세우려는 자처럼 하였으니, 참으로 놀랍다. 파직(罷職)하라."

하였다. 목창명이 아뢰기를,

"이시만이 결단코 다른 뜻을 품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대신(大臣)들이 입시(入侍)하지 않았는데 이런 분부가 계시니, 신들은 실로 대답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궁위(宮闈) 사이의 일은 중대한 데에 관계되므로 반드시 대신들과 상세히 의논하여 조처하셔야 합니다."

하고, 심계량(沈季良)은 아뢰기를,

"신들은 전하를 아버지처럼 우러르고 중궁을 어머니처럼 우러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과실(過失)을 자식에게 말하였을 경우 그 자식이 어떻게 감히 시비(是非)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1년 2년 하다가 이미 난감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말하겠는가? 속담에 부인은 교화(敎化)시키기 어렵다고 하던데, 이 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였다. 제신들이 이시만(李蓍晩)을 파직시키라는 명을 환수(還收)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파직도 가볍다."

하였다. 이만원(李萬元)이 환수할 것을 계청(啓請)하였으나 역시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다른 승지(承旨)를 부르니 승지 김해일(金海一)이 입시하였다. 임금이 드디어 합사(合司)로 논계(論啓)한 의논을 따랐다. 임금이 이어 말하기를,

"재차 하교했는데도 【귀인(貴人)의 일을 가리키는 것 같다.】 삼사(三司)가 한마디도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목창명(睦昌明)이 아뢰기를,

"어머니로 섬기는 지위에 계신 분에 대해서 신들은 죽음이 있을 뿐 감히 다른 것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어찌 일을 처리해 갈 방도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경솔히 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하교가 이미 상세하였는데 경솔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인하여 해조(該曹)에 명하여 전례(前例)를 고찰해서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드디어 전지(傳旨)를 내리기를,

"귀인(貴人) 김씨(金氏)김수항(金壽恒)과 내외에서 교통하여 임금의 동정을 살폈으므로 궁위(宮闈)의 일이 누설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주가(主家)와 교결하여 유언 비어를 날조하고 못하는 짓이 없었으니, 처치(處置)할 방도가 없을 수 없다."

하였다. 임금이 또 목창명 등의 아룀을 따라 가을헌(加乙憲)을 정형(正刑)에 처하도록 하였다. 이만원이 아뢰기를,

"조정(朝廷)에서는 오로지 당론(黨論)에만 뜻을 두고 있을 뿐 백성들의 일은 돌보지 않고 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고질적인 병폐(病弊)입니다."

하였는데, 말이 채 끝기 전에 임금이 말하기를,

"인심이 나쁜 데로 빠져들어 당여(黨與)를 비호하는 것이 풍조를 이루고 있다. 김만중(金萬重)이 자기 사위를 비호하기 위해 아들에게 형(刑)을 받게 하였고, 저 자신도 누차 엄한 형신(刑訊)을 받고도 끝내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사명(李師命)이 자복(自服)함에 이르러서야 모든 것이 다 드러난 것이다. 내간(內間)에서도 당여를 비호한 일이 있으니, 세도(世道)가 너무도 괴이하다."

하였다. 이만원이 아뢰기를,

"을묘년253) 에 제도(諸道)에 명을 내려 양민(良民)을 조사하게 하였다가 곧이어 정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충홍도(忠洪道)만은 이미 조사하였기 때문에 양민을 양여정(良餘丁)이라 하고, 서얼(庶孽)을 유음여정(有蔭餘丁)이라 하여 해마다 군포(軍布)를 거두어 들이므로 이들의 원망이 극심하니, 마땅히 그 법을 혁파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왕(大王)의 6대손(代孫) 이하를 군정(軍丁)에 충정(充定)하였기 때문에 이름은 선보(璿譜)에 있지만 몸은 천례(賤隸)에 편입되어 있으니, 이는 있을 수 없는 일로 당연히 고쳐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아울러 묘당(廟堂)에서 의논하도록 명하여 혁파하였다. 임금이 신하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분부를 내렸으면 마땅히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극력 간쟁(諫爭)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 제신(諸臣)들이 진달(進達)한 것이 거개가 범연하여 체면치레로 마지 못하여 한 것이라는 것이 언사(言辭)에 저절로 드러났다. 심지어 이만원(李萬元)목창명(睦昌明)은 또 널리 한만(閑漫)한 일에까지 언급하였으니 그 마음에 조금도 경동(驚動)함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죄가 하늘에까지 사무쳤다고 할 수 있겠다.


  • 【태백산사고본】 22책 20권 47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174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비빈(妃嬪)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 군사-군역(軍役) / 역사-전사(前史) / 재정-역(役)

  • [註 242]
    효묘(孝廟) : 효종(孝宗).
  • [註 243]
    기미년 : 1679 숙종 5년.
  • [註 244]
    관저(關雎)의 덕풍(德風) : 태사(太姒)의 덕풍을 말함. 주 문왕(周文王)의 아내인 태사에게 유한(幽閑)하고 정정(貞靜)한 덕이 있음을 찬미하여 지은 시가(詩歌)의 이름이 관저임.
  • [註 245]
    병인년 : 1686 숙종 12년.
  • [註 246]
    경신년 : 1680 숙종 6년.
  • [註 247]
    국본(國本) : 세자(世子).
  • [註 248]
    장공예(張公藝) : 당(唐)나라 때 사람으로 9대가 동거(同居)한 것으로 유명함. 고종(高宗)이 그의 집에 가서 그 비결을 하문하니, 장공예는 참을 인(忍)자 1백 개를 써서 올렸다고 함.
  • [註 249]
    주남(周南)의 덕화 : 주 문왕(周文王)의 덕화를 말함. 주남은 국풍(國風)의 하나로, 문왕의 덕화에 대해 읊은 시가(詩歌)를 모아놓은 것임.
  • [註 250]
    통곡할 만한 것이 있고, 눈물 흘릴 만한 것이 있다 : 한 문제(漢文帝) 때의 문신(文臣)인 가의(賈誼)가 올린 상소 내용 가운데 "통곡할 만한 일이 하나요, 눈물 흘릴 만한 일이 둘이요, 장탄식할 만한 일이 여섯입니다.…" 한 데서 온 말임.
  • [註 251]
    삼종(三從)의 의(義) : 여자가 지켜야 할 세 가지 도덕으로, 어렸을 적에는 어버이를, 시집가서는 남편을, 남편을 여읜 뒤에는 아들의 뒤를 따르는 것을 말함.
  • [註 252]
    건즐(巾櫛) : 수건과 빗을 말하는데 머리 빗고 낯 씻는 것을 뜻함.
  • [註 253]
    을묘년 : 1675 숙종 원년.

○丁亥/大司憲睦昌明、應敎李湜、持平鄭善鳴裵正徽、獻納李萬元、校理姜銑李允修、副校理權珪、正言成瓘趙湜、修撰沈季良沈橃請對: "論宋時烈之罪, 請拿鞫嚴問, 亟正邦刑。" 上曰: "不但時烈事爲然, 宮闈之間, 亦有變怪, 當待臺論, 畢陳後言之。" 昌明等又請洪致祥按律處之。 萬元曰: "致祥誣上不道, 時烈專擅威福, 此而不誅, 朝廷之法, 將安用耶?" 昌明曰: "時烈, 孝廟之罪人也。 致祥, 東朝之罪人也, 決不可貸。" 諸臣次第力請。 李湜曰: "殿下於己未年間, 從臺論罪時烈, 則人心世道, 必不至如今日之陷溺矣。" 正徽曰: "有公主子贖其死, 而其君猶以屈法爲難, 終不饒之。 夫以驕橫之罪猶如此, 況致祥誣及東朝, 謀害士類者乎?" 萬元曰: "先王幸溫泉, 蓋不獲已, 而時烈至以逐歲幸溫泉, 一不謁陵等說, 載之私書, 有若數罪者然, 此豈臣子所忍爲者哉?" 承旨李蓍晩曰: "殿下以高年貴主爲念, 不卽誅致祥, 而但致祥以自上遇主家有厚薄, 言于金錫衍, 此其罪難赦也。" 曰: "若貸時烈致祥, 則先王先后在天之靈, 不可慰悅, 而殿下亦難免天下後世之譏議矣。" 季良曰: "殿下初許致祥以不死, 使之直告而猶諱之, 及與師命對辨, 始乃言竊而色沮, 悉陳其實, 是致祥自絶于殿下, 非殿下失信也。" 上曰: "世降俗末, 人心漸惡, 然豈有如予所遭乎? 卿等旣有拔本塞源之意, 予亦有所欲言者。 宮闈之間, 【指中宮也。】《關雎》之風, 有妬忌之習。 丙寅年間, 自禧嬪初爲淑媛之後, 黨於貴人, 憤恚妬嫉之狀, 不可勝言。 一日謂予曰: ‘夢見先王先后, 指我言曰, 內殿與貴人, 福祿厚子孫多。’ 當如宣廟時, 而淑媛非但無子, 且無福, 若久在掖庭, 則黨於庚申失志人, 不利於國, 婦人妬忌, 古或有之, 豈有假托先王先后之言, 次爲恐動之計, 至此之甚耶? 蓋妬忌之心未得售, 則爲此不可思度之說, 雖三尺童子, 豈信之乎? 奸巧回邪, 如見肺肝, 如此之人, 古今所無也。 且果謂淑媛無子, 則元子何得誕生乎? 其矯誣之態, 於此尤驗。" 蓍晩曰: "殿下視臣等如子, 臣等之事 殿下如父, 以閭家言之, 父母不和則子能安心乎? 宮闈之間, 設有未安之事, 惟當徐徐鎭定, 何必宣露如是耶?" 上曰: "元子旣生, 滋益不悅曰: ‘實是意外, 日者早定國本。’ 意有在耳。" 昌明曰: "臣等仰內殿如母, 聞此下敎, 豈能安於心乎? 若宮人輩有如此之言, 則何不自內處分而言之于外臣耶?" 蓍晩曰: "古人云: ‘不癡不聾, 無以作家長。’ 凡人尙如此, 況君上乎? 以一箇忍字, 能致九世同居, 匹夫居家, 猶務容忍, 況君上乎? 以閭家言之, 婦人何能事事合理? 內殿生長閭家, 與閭家婦人何異? 惟當容忍鎭定而已。" 李湜曰: "蓍晩之言, 可謂忠愛殿下矣。" 趙湜曰: "殿下於臣等, 父也。 內殿於臣等, 母也。 而今日聖敎至此, 誠不知所以爲對。 臣之所願, 在於益勉正家之方, 務盡和平之道而已。" 曰: "中宮母臨一國, 十年于玆, 不知有何失德, 而不思容忍之道耶? 非但臣僚所不忍聞, 傳之後世, 實爲聖德之累, 臣豈敢愛一身而負殿下? 臣之此言, 非敢爲中宮, 實爲殿下也。" 著晩曰: "婦人無貴賤, 例多褊嗇, 何不思含忍之道乎? 聖學高明, 豈不量此?" 萬元曰: "正家之道, 無上下一也。 婦人性雖褊嗇, 必須敎誨, 以至無事, 今此下敎, 竊恐未之深思也。" 允修曰: "雖以古史觀之, 太平之世, 固無此事。 殿下克盡齊家之道, 則豈非臣民之福乎?" 曰: "臣等每以文王 《周南》之化, 期於我殿下, 不意今日遽承此敎也。" 曰: "中宮於元子, 卽同己出, 慈愛之心, 必與殿下無異矣。" 上色愈厲曰: "予豈不欲齊家, 而非但爲妬忌, 矯誣先王先后之言, 至於如此, 予尙何爲? 雖以外人言之, 假托舅姑先靈, 稱說不近理之言, 心術何如耶? 其心如此, 則於元子, 視同己出, 予未可知也。" 蓍晩曰: "侍在宮闈者, 雖或有不善, 以殿下之明聖, 何不思含忍乎? 臣所謂不癡不聾者, 誠格語也。 古人謂: ‘可爲痛哭流涕。’ 此正指今日事也。" 上曰: "締結內外, 伺上動靜, 壽恒之所以死也, 此又何如哉?" 上意蓋指貴人金氏而不斥言。 蓍晩曰: "此壽恒之罪也。 婦人無所知識, 何足責乎?" 允修曰: "蓍晩之言非矣。 若於母事之地, 則固當力爭, 而其餘, 非所可言也。" 上曰: "允修之言, 其意謂何?" 昌明曰: "蓍晩不知上敎, 更端而言之矣。" 允修以爲: "若於母事之地, 則力爭可也, 其餘宮闈間事, 惟在殿下處分。" 上益怒曰: "內間事, 蓍晩與予, 孰爲詳知乎?" 蓍晩曰: "婦人有三從之義, 苟非有盛德者, 例不能免小過, 故凡係婦人之事, 雖有未安者, 不必深責, 只望聖上和平而處之。 豈敢爲庇護貴人之計也?" 上曰: "致祥壽恒, 相與交通, 伺上動靜, 諺云: ‘孤掌不鳴。’ 此豈致祥所獨爲之事乎? 一日賓廳引見時, 親錄筵中說話於小紙, 置之座側, 俄失之, 蓋貴人適奉巾櫛, 藏在袖中, 窮搜之後, 始乃不得已還納, 問其故則曰: ‘錯認爲閑漫休紙。’ 此非一時偶然之事。 飛語造謗, 蓋不止於致祥也。 國家將生大患, 此予所憂, 蓍晩何敢混爲救解乎? 李允修之言是也。" 諸臣多爲蓍晩救解之。 上曰: "蓍晩無狀, 至以痛哭流涕爲言, 有若立節者然, 誠極駭然, 罷職。" 昌明曰: "蓍晩斷無他意, 且今日大臣不入侍, 而有此敎, 臣等實不知所對, 宮闈間事, 事係重大, 必宜與大臣詳議處之。" 季良曰: "臣等仰殿下如父, 仰中宮如母, 父言其母之過於其子, 則其子安敢爲是非乎?" 上曰: "一年二年, 已至難堪之域, 不然則何爲發口也? 俗言難化者婦人, 此言謂何耶?" 諸臣請收李蓍晩罷職之命。 上曰: "罷職亦輕矣。" 萬元啓請還寢, 亦不從。 上召他承旨, 承旨金海一入侍。 上遂從合司之論, 上仍曰: "再次下敎, 【似指貴人事。】 而三司默無一言, 何也?" 昌明曰: "母事之地, 臣等有死而已。 固不敢言其他, 則誠有如此之事, 豈無處變之道? 但不可輕易爲之。" 上曰: "下敎旣詳, 猶曰輕易耶?" 仍命該曹考例稟處。 遂下傳旨曰: "貴人金氏, 與壽恒內外交通, 伺上動靜, 宮闈之事, 無不宣洩, 且締結主家, 飛語造謗, 無所不至, 不可無處置之道。" 上又從。 昌明等之啓, 命加乙憲正刑。 萬元曰: "朝廷之上, 專意黨論, 不恤民事, 此今日之痼弊也。" 語未卒。 上曰: "人心陷溺, 護黨成風, 金萬重爲護其壻, 使子受刑, 渠亦屢經嚴訊, 終不實對, 及師命自服, 始盡透露, 內間亦有護黨之事, 世道極可異也。" 萬元言: "乙卯年間, 命諸道査覈良民, 未幾停之。 然忠洪道獨已覈, 故良民稱良餘丁, 庶孽稱有蔭餘丁, 歲歲收布, 此屬皆怨之, 宜罷其法。 且大王六代孫以下, 充定軍丁, 名在璿譜, 身編賤隷, 極不可, 宜改之。 上命竝議于廟堂, 罷之。 上下臣子不忍聞之敎, 則當碎首力爭之不暇, 而諸人所陳。 類皆泛忽, 其出於外面强作者, 自然彰露於言辭之間, 至於萬元昌明, 又旁及閑漫事, 其心之恬然不動可知, 可謂罪通於天矣。"


  • 【태백산사고본】 22책 20권 47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174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비빈(妃嬪)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 군사-군역(軍役) / 역사-전사(前史) / 재정-역(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