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명과 홍치상을 추국하다
이사명(李師命)과 홍치상(洪致祥)을 추국(推鞫)하였다. 이사명은 처참(處斬)하고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였고, 홍치상은 절도(絶島)에 위리 안치(圍籬安置)시켰으며, 박정영(朴挺英)과 박정영이 끌어들인 정구망(鄭久望)은 절도에 정배(定配)하였다. 박정영과 홍치상이 끌어들인 장희재는 한 번 국문하고 나서 방면하였고, 장희재가 끌어들인 김만직(金萬直)은 먼 변방에 정배(定配)하였다. 당초 국청(鞫廳)에서 박정영의 말에 의거하여 이사명을 국문하니, 이사명이 대답하기를,
"장희재와 동평군(東平君)에 대한 이야기는 박정영에게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장희재는 와서 한 번 만났고, 홍치상은 두세 번 만났을 뿐입니다."
하고, 또 기찰(譏察) 때문에 의심을 받는 데 대한 억울함을 극구 변명하였다. 국청에서 또 박정영의 말에 의거하여 홍치상을 국문하니, 홍치상이 대답하기를,
"박정영은 만나본 적이 없었는데 정묘년158) 겨울 처음으로 와서 이사명의 말을 전하였습니다. 동평군이 짐새[鴆鳥]를 사왔다는 말은 김석연(金錫衍)에게서 들었습니다."
하고, 이어 이사명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극구 변명하였다. 국청에서 아뢰기를,
"모두 면질(面質)하게 하소서."
하였다. 박정영에게 자신이 대답한 내용을 가지고 이사명에게 질문하게 하니, 이사명이 대답하기를,
"이 일은 나로서는 모르는 것이다."
하였다. 박정영이 정구망(鄭久望)을 증인으로 내세우고, 또 자기가 대답한 내용과 정구망이 참여하며 안 정상을 가지고 홍치상에게 질문하니, 홍치상은 이런 일이 없었다고 하지는 않았지만 기찰(譏察)에 대한 일만은 유득 사실이 아니라고 하였다. 국청에서 드디어 정구망을 국문하니, 정구망이 대답하기를,
"이사명이 저를 시켜 박정영을 부르게 하고 또 박정영에게 권고하며 장희재에게 가서 그와 교결(交結)함으로써 장희재에게 국가에 걱정이 있다는 것을 알리게 하였습니다만, 역시 명백하게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수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화(禍)가 미칠까 두려워 끝내 이사명의 집에 가지 않았으며, 장희재와는 서로 만난 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박정영이 대답한 공사(供辭)가 상세하지 못하다고 다시 국문하니, 박정영이 대답하기를,
"제가 장희재에게 말하기를, ‘홍치상이 국가의 흥망이 그대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하더라.’ 하고, 또 말하기를, ‘그대가 동평군과 함께 음흉(陰凶)한 일을 모의한다고 하더라.’ 하니, 장희재가 말하기를, ‘이 말의 출처가 어디인가?’ 하였습니다. 이사명과 홍치상은 단지 단서만 발론(發論)하고서 경솔히 말하지 말라고 경계했기 때문에 일체 그들의 지휘(指揮)에 따라 장희재에게 말한 것입니다. 하루는 장희재와 함께 홍치상의 집에 갔는데, 장희재가 그 말의 출처를 명백히 말해 달라고 하니, 홍치상의 대답도 제가 전한 말과 같았습니다. 장희재가 말하기를, ‘내가 첩(妾)을 내쫓으려 한다.’ 하니, 홍치상이 말하기를, ‘모두를 의심하고 있으니 그대가 첩을 쫓아낸들 누가 석연히 의심을 풀겠는가? 그대는 어째서 대내(大內)에 통하여 밀지(密旨)를 얻어 기찰(譏察)하지 않는가? 경신년159) 에도 상지(上旨)를 품하여 기찰했었으니, 지금도 품하지 않고는 할 수가 없다.’ 하였습니다. 장희재가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감히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고, 나와서 말하기를, ‘홍치상이 강요했지만 나는 할 수가 없었다.’ 하였습니다. 이사명이 패망하고 나서 저와 장희재는 다시 홍치상의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정구망과 함께 이사명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이사명이 말하기를, ‘동평군이 선묘(宣廟)의 어필(御筆)을 위에 바쳐 간행(刊行)하였지만, 실은 어필이 아니었다. 이런 죄는 사형죄(死刑罪)이다.’ 하였습니다. 지난해 여름 정구망이 이사명의 편지를 보여주었는데 언문(諺文)이었습니다. 그 내용의 대략은 ‘홍주부(洪主簿)만 믿고 있으니 기필코 나를 살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 홍치상을 만났는데 홍치상도 이사명의 편지 내용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장희재(張希載)를 잡아다 국문하니, 대답하기를,
"김만직(金萬直)이 이사명을 만나보러 가자고 권하였기 때문에 가서 만나보았습니다. 또 박정영(朴挺英)과 함께 가서 홍치상을 만나 보았는데, 홍치상이 나에게 은밀히 위에 아뢰어 기찰 밀지(譏察密旨)를 얻도록 요청하였습니다만 감히 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홍치상이 또 말하기를, ‘동평군이 짐약(鴆藥)을 사 가지고 왔다더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이말은 박정영의 초사(招辭)와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국청에서 장희재를 방면하자고 아뢰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어 이사명과 홍치상에게 엄형(嚴刑)을 가하여 실정을 알아내라고 명하였다. 이때 국청에서 박정영이 대답한 공사(供辭)에 의거하여 이사명을 국문(鞫問)하면서 전일의 옥안(獄案)을 가져다 아울러 국문하지 않았으므로 승정원(承政院)에서 아뢰기를,
"국문에 참여한 승지(承旨)가 자세히 살피지 못하여, 박정영의 말에만 의거하여 국문하였으니, 이는 매우 불가한 일입니다. 전일의 옥안을 가져다 아울러 국문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국청(鞫廳)에서 드디어 전의 옥안과 박정영이 한 말에 의하여 이사명에게 형신(刑訊)을 가하니, 장(杖)이 수에 차기 전에 이사명이 대답하기를,
"조사석(趙師錫)을 무함하는 비방은 처음 홍치상에게서 나왔는데, 제가 조사석과 본디 혐의가 있었기 때문에 그 말을 듣고 기뻐하여 김만길(金萬吉)·김만중(金萬重)에게 전하였습니다. 김석주(金錫胄)가 말하기를, ‘환관(宦官) 신담(申潭)은 추솔(麤率)하여 일을 시킬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박빈(朴斌)·남두북(南斗北)을 통하여 김현(金鉉)과 교통하고 세시(歲時)에 문안하였습니다. 영전(令箭)과 행진(行陣)에 대한 일은 비록 달리 먹은 마음은 없었으나 법을 어긴 죄는 달게 받겠습니다. 호영(湖營)의 투서(投書)에 대한 일은 이를 다른 사람에게 전시(傳示)한 것이 죄가 된다면 진실로 할 말이 없습니다. 상가(相家)의 투서에 대해서는, 조사석에게 가서 만나본 일이 없을 뿐더러 오랜 뒤에 조사석이 저에게 말하기를, ‘투서에 대해 사람들이 모두 공(公)에게 의심을 두고 있다.’ 하였습니다. 홍치상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였고 그의 아내의 소상(小祥) 때 한 번 가서 만났는데, 홍치상이 말하기를, ‘동평군(東平君)의 일이 우려스럽다.’고 하기에, 답하기를, ‘어째서 종용(從容)히 밀찬(密贊)하여 이런 걱정이 없게 하지 않았는가?’ 하니, 홍치상이 말하기를, ‘나도 그런 의사가 있어서 후궁(後宮)의 집과 교결(交結)하여 동평군과 서로 친밀하게 지내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것도 일조(一助)가 된다.’하였습니다.
정묘년160) 겨울 박정영(朴挺英)을 불러 홍치상을 만나게 하였는데, 그 뒤 정구망(鄭久望)과 박정영이 과연 와서 말하기를, ‘장희재(張希載)와 은밀히 사귀어 일을 진행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동평군의 어필(御筆)에 대한 일도 과연 박정영에게서 전설(傳說)된 것이 있습니다. 홍치상을 만나던 날 그가 묻기를, ‘근일 동평군을 기찰(譏察)한다는 말이 성행(盛行)하고 있는데 사실인가? ’하기에, 답하기를, ‘기찰은 밀지(密旨)를 받지 않고서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임금의 명이 있으면 절로 봉행(奉行)하게 될 것이다.’ 하였더니, 홍치상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사실이다.’ 하였습니다. 그 뒤 정구망(鄭久望)이 와서 말하기를, ‘장희재를 시켜 기찰 밀지(譏察密旨)를 얻으려 도모하고 있다.’ 하였고, 10일이 지나서 박정영 등이 또 와서 말하기를, ‘장희재가 따르려 하지 않는다.’ 하기에, 제가 말하기를, ‘이 뒤로도 다시 그와 친하게 지내면서 경솔히 끊는 일이 없도록 하라.’하였습니다. 김만직(金萬直)을 시켜 장희재를 불러서 만난 것은 사실입니다. 제가 동평군의 교만 방자한 형적(形迹)을 보고 중신(重臣)이 된 몸으로서 성상(聖上)께 바로 진달하였다면 남구만(南九萬)·여성제(呂聖齊)의 경우에 불과했을 것인데, 혼미하고 못난 탓으로 곡경(曲逕)을 통하여 밀지(密旨)를 얻어내서 사찰(司察)하려 했던 계책에 호응한 결과 스스로 헤아릴 수 없는 죄에 빠져 들었으니, 만 번 죽어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이에 의거해서 결안(結案)하여 무고율(誣告律)을 적용,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이사명(李師命)은 고(故) 재상 이경여(李敬輿)의 손자이다. 젊어서 장옥(場屋)에 노닐면서 시(詩)에 능하다는 명성을 얻었고, 또 치변(治辨)의 재주가 있는데다가 공신(功臣)이라는 것으로 본병(本兵)을 주관하기에 이른 것이다. 장씨(張氏)161) 가 임금의 총행(寵幸)을 받게 되자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과 장희재 (張禧載)가 민암(閔黯)·민종도(閔宗道)·이의징(李義徵) 등 제적(諸賊)과 교결하여 당인(黨人)이 다시 진출할 형세가 조성되고 있었다. 이때 임금이 주가(主家)들에 대해 노여움을 품고 있었는데, 이사명이 홍치상과 결합하여 은밀히 장희재를 패퇴(敗退)시키려 모의했기 때문에 임금이 매우 증오하여 드디어 복주(伏誅)하기에 이른 것이다. 장희재를 통하여 기찰하고자 무고(誣告)한 것 때문에 사형(死刑)에 처하는 것은 정당한 율(律)이 아니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이사명이 홍치상의 말을 듣고 기뻐하여 김만길(金萬吉)·김만중(金萬重)에게 전하였다고 하는데, 김만중은 이흥조(李興朝)에게 미루면서 끝내 고하려 하지 않은 채 죽기를 한하고 기망(欺罔)하고 있으니, 엄히 국문하여 따져 물으라."
하였다. 장(杖)을 치려 하자, 김만중이 아뢰기를,
"전일 엄한 하문(下問)이 있을 적에 이흥조(李興朝)가 한 말로만 대답한 것은 들은 것이 상세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사명에게서 전해 들은 것은 이미 이흥조보다 뒤졌고 또 명백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지적하여 진달(陳達)하지 못했었는데, 이제 비로소 고합니다."
하니, 국청(鞫廳)에서 논하기를,
"김만중이 이미 자복(自服)했으니 의금부(義禁府)로 하여금 감죄(勘罪)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국청에서 박정영(朴挺英) 등이 한 말에 의거하여 홍치상에게 1차 형신(刑訊)을 가하였으나 홍치상이 자복하지 않았다. 다시 형신을 가하자 이에 말하기를,
"이사명과는 본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김만년(金萬年)이 늘상 찾아와서는 둘 사이를 화해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정묘년(丁卯年) 겨울 이사명과 서로 만났고, 그 자리에서 동평군이 교만 방자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뒤 진신(縉紳)들 사이에 크게 전파되었습니다. 구일(具鎰)·윤계(尹堦) 등이 동평군의 집에 출입하며, 조사석(趙師錫)과도 서로 친밀하다는 【동평군과 서로 친밀하다는 뜻임.】 말과, 연경(燕京)의 사행(使行)에서 짐약(鴆藥)을 사가지고 왔다는 말도 정구망(鄭久望)이 전한 것입니다. 이 말이 이미 이사명의 집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장희재와 교결하여 곡경(曲逕)을 인연, 밀지를 얻어내어 이사명으로 기찰(譏察)하게 하려 한 것은 진실로 이사명과 장희재가 대답한 공사(供辭)와 같습니다."
하였다. 국청에서 율(律)에 의거하여 처치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판비(判批)하기를,
"홍치상이 유언 비어를 날조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미혹시킨 것은 동조(東朝)께서 해괴하게 여기시는 바이고, 과인(寡人)이 통한해 마지않는 바이다. 매일 한밤중에 천장을 우러러 ‘지친(至親)이 적(敵)으로 변하였으니 세상 일이 진실로 애통한다.’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오늘에 이르러 홍치상의 죄가 여지없이 다 드러남으로 인하여 생각건대, 지난날 대신(臺臣)들이 김수항(金壽恒)의 죄상(罪狀)을 나열할 적에, 족척(族戚)이 궁액(宮掖)과 연통(連通)하여 위의 동정(動靜)을 살핀다고 한 그 귀절이 매우 명백한 논설이었다. 동평군과 장희재 등은 본디 저들처럼 귀가(貴家)에 아첨하여 위의 동정을 살피려는 작태를 본받지 않았기 때문에 홍치상의 무리가 마침내 혐의를 품고 원수처럼 미워한 것이다. 이미 ‘인연하여 정승에 제배(除拜)되었다.’고 하였고, 또 ‘불궤(不軌)를 도모한다.’고 하였고, 또 ‘장희재가 동평군의 당여(黨與)에 들어갔다.’고 하는 등 백방으로 날조하여 무함하여 기필코 장살(戕殺)한 다음에야 그만두려 하였다. 그리고 지난 겨울 나라에 큰 경사(慶事)가 있었는데도 지친(至親) 사이에 기뻐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고 도리어 불만스러운 기색을 보였으니, 송시열(宋時烈)의 무장(無將)의 상소(上疏) 같은 것은 오히려 그 다음 일인 것이다. 홍치상이 이미 자복(自服)하였으니, 만 번 죽여도 죄가 남는다. 그러나 이미 죽음을 용서하는 전교를 내렸으므로 이제 갑자기 실신(失信)하는 것은 차마 못할 일이다. 특별히 사죄(死罪)를 감하여 안치(安置)시키고 엄히 천극(栫棘)을 가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에 대해 의논하라."
하였다. 국청에서 아뢰기를,
"홍치상은 주가(主家)의 자제로 훈귀(勳貴)와 교결하여 유언 비어를 날조, 이미 성상(聖上)을 무함하였고, 또 동조(東朝)를 무함하여 위협하고 공동(恐動)시켰으니, 밀지(密旨)를 얻어내 사람을 악역죄(惡逆罪)에 얽어 넣으려 한 것은 오히려 작은 일인 것입니다. 이러한 죄명(罪名)을 지고 형장(刑章)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은 법리상(法理上) 전혀 있을 수 없는 것인데, 성상께서는 귀주(貴主)가 연로(年老)하고 과거(寡居)하는데다가 독자(獨子)라는 것을 이유로 차마 주벌(誅罰)을 가하시지 못하고, 처음 명하신 대로 사죄(死罪)를 용서하라 하셨습니다. 이제 평의(平議)함에 있어 누군들 친친(親親)의 의리를 우러르지 않겠습니다만, 죄는 매우 중하고 법은 지극히 엄한 것이어서 군하(群下)의 입장에서는 법대로 집행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율(律)대로 처리하소서."
하니, 임금이 판부(判付)하기를,
"이미 사죄는 용서한다고 명하였으니 차마 실신(失信)할 수는 없다. 전의 하비(下批)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임금이 국청의 제신(諸臣)을 인견(引見)하니, 제신이 모두 함께 참형(斬刑)에 처하지 않을 수 없다고 아뢰었다. 민암(閔黯)이 아뢰기를,
"궁인(宮人)과 교결하여 조정(朝廷)의 논의에 참예한 그것만으로도 사죄인 것입니다. 지금 법을 굽혀 은혜를 베푼다면 뒷사람을 징계시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고, 권대운(權大運)은 아뢰기를,
"민암의 말은 원려(遠慮)에서 나온 것이니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홍치상은 본디 별다른 사람이었다. 원자(元子)가 처음 탄생했을 적에 원근(遠近) 친척이 모두 칭하(稱賀)하는데도 홍치상은 도리어 불만스런 기색이 있었으니, 그 마음의 소재(所在)를 알 수 없었다."
하였다. 민암이 아뢰기를,
"전하(殿下)께서 춘추 30에 비로소 원자(元子)가 탄생하였으므로 원근의 신민(臣民)이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홍치상은 척속(戚屬)으로서 당인(黨人)에게 빌붙기에 급급하여 장살(戕殺)할 계책만 품고 조금도 국가를 위한 성심(誠心)이 없었으니, 홍치상을 죽이지 않으면 이 무리의 음흉한 행위를 막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고, 권대운(權大運)이 아뢰기를,
"원자께서 탄생했을 적에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이것이 역적(逆賊)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홍치상의 죄는 만 번 죽여도 진실로 애석할 것이 없다. 사죄(死罪)를 용서하려는 것은 사은(私恩)이고 경들의 말은 공법(公法)이다. 그러나 당초 용서하려 하였기 때문에 차마 참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대사간(大司諫) 이현기(李玄紀)·장령(掌令) 성진(成瑨)이 함께 발계(發啓)162) 하여 율에 따라 처치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말하기를,
"내가 차마 홍치상을 참하지 못하지만 양사(兩司)의 안법론(按法論)은 옳다."
하였다. 박정영(朴挺英)·정구망(鄭久望)·김만직(金萬直)은 이사명(李師命)과 서로 친하다는 이유로 아울러 정배(定配)할 것을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2책 20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166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정론-간쟁(諫諍) / 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 변란-민란(民亂)
- [註 158]정묘년 : 1687 숙종 13년.
- [註 159]
경신년 : 1680 숙종 6년.- [註 160]
정묘년 : 1687 숙종 13년.- [註 161]
장씨(張氏) : 장 희빈(張禧嬪).- [註 162]
발계(發啓) : 의금부(義禁府)에서 처결한 죄인에 대해 미심한 점이 있을 적에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이를 다시 조사하여 아뢰는 것.○甲辰/鞫李師命、洪致祥, 師命斬, 籍其家産。 致祥絶島圍籬安置。 朴挺英及挺英所引鄭久望, 絶島定配。 挺英、致祥所引張希載, 一問而放之。 希載所引金萬直, 邊遠定配。 初, 鞫廳以挺英言, 問師命。 師命對曰: "張希載, 東平君之說, 曾不說及於挺英, 而張希載一來見洪致祥, 只二三見, 又極言以譏察見擬之冤。" 鞫廳又以挺英言, 問致祥。 致祥對曰: "挺英曾不相見, 丁卯冬, 始來傳李師命之言。 東平買鴆之說, 聞於金錫衍, 仍極口言與師命有隙之狀。" 鞫廳啓, 請竝使面質。 挺英以其對辭, 質之師命, 師命答曰: "此非余所知, 挺英以鄭久望爲證。" 又以其對辭及久望預知之狀, 質之致祥。 致祥不以爲無是事, 而於譏察一事, 獨曰: "不然。" 鞫廳遂問于久望, 久望對曰: "師命嘗使俺招挺英, 且要勸挺英, 往結希載, 使希載得知國有可憂, 而亦不肯明言。 俺知其殊常, 恐其禍及, 遂不往師命家, 而希載曾不與之相見矣。" 鞫廳以挺英對辭猶不詳, 更問之, 挺英對曰: "俺謂希載曰: ‘致祥言國家興亡在汝手, 又謂汝與東平, 共爲陰凶之事。’" 希載曰: "此言何從而出耶?" 蓋師命、致祥, 只發其端, 且戒以毋輕發說, 故一聽其指揮, 而言于希載, 一日與希載往致祥家, 希載願明言其言之所由出, 致祥所答, 又如俺所傳言。 希載曰: "吾欲黜吾妾。" 致祥曰: "衆皆疑之, 汝雖黜妾, 誰肯釋然? 汝何不通于大內, 得密旨而譏察耶? 庚申亦稟上旨而爲譏察, 今不稟則不可爲也。" 希載辭曰: "吾何敢爲此?" 出語曰: "洪雖强之, 余不可爲此也。 及師命之敗, 俺與希載, 更不往致祥家, 俺嘗與鄭久望, 同見師命, 師命曰: ‘東平曾以宣廟御筆上獻而刊之, 然實非御筆, 此罪可死。 前年夏, 鄭久望示師命書, 諺文也。 其略曰: ‘只恃洪主簿, 必活我。’ 其後見致祥, 致祥亦知有師命書意矣。" 鞫廳拿希載問之, 對以金萬直, 要往見師命, 故果爲往見。 而又與朴挺英, 往見致祥, 則要使密告, 得譏察密旨, 而辭以不敢爲。 致祥又言, 東平買鴆藥而來之說, 與挺英招辭無異。 鞫廳請放希載, 上從之。 仍命師命、致祥, 嚴刑得情。 時, 鞫廳以朴挺英對辭, 鞫問師命, 而不擧前日獄案, 竝問之。 政院啓言, 參鞫承旨不能致詳, 只以挺英言爲問, 甚不可, 請以前案竝問之。 上曰, 可。 鞫廳遂以前案及朴挺英所言, 刑訊師命, 杖未準數, 師命對曰: "趙師錫誣謗, 初出於致祥, 而俺與師錫素有嫌, 樂聞其言, 傳於金萬吉、金萬重矣。 金錫冑言宦官申潭則麤率不可使, 故因朴斌、南斗北, 交通金鉉, 歲時存問, 而令箭及行陣事, 心雖無他, 違法之罪, 亦所甘心。 湖營投書事, 若以傳示於他人爲罪, 則固所不辭。 相家投書事, 曾不往見趙師錫, 而久後, 師錫言於俺曰: ‘投書一事, 人皆致疑於公云。’ 洪致祥久不相見, 其妻小祥, 一往見之。 致祥言: ‘東平事可慮’, 答曰: ‘何不從容密贊, 俾無此患?’ 致祥曰: ‘吾亦有此意, 而交結後宮之家, 令東平不得相親, 是一助也。’ 丁卯冬, 招挺英使見致祥, 其後久望、挺英, 果來言希載交密行事, 而東平御筆事, 亦果傳說於挺英矣。 致祥相見之日, 問曰: ‘近日譏察東平之說盛行, 果有之否?’ 答曰: ‘譏察非受密旨, 不得爲之。 若有上命, 則自當奉行矣。’ 致祥曰: ‘君言誠然。’ 其後久望來言: ‘欲令希載圖得譏察密旨。’ 過十日, 挺英等又來言曰: ‘希載不肯聽。’ 俺曰: ‘此後更與之相親, 毋輕絶可也。’ 果使金萬直招見張希載, 俺若見東平驕恣之迹, 而身爲重臣, 直陳于 上, 則不過爲南九萬、呂聖齊, 而昏迷無狀, 欲以曲逕, 圖得密旨, 以售其伺察之計, 自陷罔測, 萬死無惜。" 遂以此結案, 用誣告之律而斬之。 師命故相敬輿之孫也。 少游場屋, 以能詩名, 且有治辦才, 以功臣進, 至主本兵。 及張氏寵幸, 希載與杭, 締結閔黯ㆍ宗道、李義徵諸賊, 而黨人有復進之勢。 時, 上方怒諸主家, 而師命與致祥合, 陰欲敗希載之謀, 上由是深惡之, 遂及於誅, 欲譏察希載, 而以誣告死, 非其律也。 上敎曰: "師命樂聞致祥之言, 傳于金萬吉、金萬重, 則萬重推諉於李興朝而終不肯告。 抵死欺罔, 嚴刑鉤問。" 將杖, 萬重乃曰: "頃日嚴問之下, 只以興朝言爲對者, 蓋爲所聞之詳, 而師命所傳, 旣後於興朝, 且不明白, 故不敢指陳而今始告之耳。" 鞫廳議曰: "金萬重旣已自服, 請使禁府勘罪。" 上可之。 鞫廳以挺英等所言, 訊問致祥一次。 致祥不肯服, 及再訊, 乃曰: "與師命本不相能。 金萬年常常來見, 調劑兩間。 丁卯冬, 與師命相見, 而得聞東平驕濫之說, 其後大播於搢紳間, 具鎰、尹堦等, 出入東平家, 趙師錫亦與相親 【謂與東平相親。】 之, 言及燕行買鴆之說, 亦久望所傳, 旣知其出於師命家, 故果欲交結希載, 夤緣曲逕, 圖得密旨, 使師命譏察者, 誠如希載、師命之對辭矣。" 鞫廳請以律處之。 上判批曰: "致祥飛言造謗, 惑亂聽聞, 此東朝之所駭歎, 寡昧之所痛恨, 而每於中夜, 未嘗不仰屋太息曰: ‘至親化爲敵。’ 世事誠可哀痛, 及至今日, 致祥之罪, 彰露無餘, 仍念頃日臺臣臚列金壽恒罪狀中, 戚連宮掖, 伺上動靜一句語, 最是明白之論也。 蓋東平及希載等, 本不效彼輩阿好貴家, 伺上動靜之態, 故致祥輩, 以此含嫌, 嫉如仇讎。 旣曰: ‘夤緣拜相。’ 又曰: ‘謀爲不軌。’ 又曰: ‘希載同入東平之黨, 百般構誣, 必欲戕殺而後已。’ 且前冬國有大慶, 而至親之間, 曾無欣喜之色, 反示不滿之意, 如時烈無將之疏, 特其次第事耳。 致祥旣自承款, 萬戮猶輕, 而第旣下貸死之敎, 今遽失信, 有所不忍, 特減死安置, 嚴加栫棘, 未知何如? 其議之。" 鞫廳言: "致祥以主家子弟, 締結勳貴, 飛語造謗, 旣誣上躬。 又誣東朝, 誘脅恐動, 圖受密旨, 欲陷人於惡逆之科, 特其小事耳。 負此罪名, 得逭刑章, 法理之所必無, 而聖上以貴主, 年衰寡居, 獨有一子, 不忍加誅, 初命貸死, 今許平議, 孰不仰親親之義? 但罪極重、法至嚴, 在群下, 惟當執法而已。 請以律處之。" 上判曰: "旣命貸死, 不忍失信, 其用前下判批施行。" 上命引見鞫廳諸臣, 諸臣共言其不可不誅。 閔黯曰: "締結宮人, 參預朝論, 此亦可死也。 今若屈法伸恩, 難以懲後。" 權大運曰: "閔黯之言, 出於遠慮, 最宜惕念。" 上曰: "致祥自是別樣人也。 元子初生, 遠近親戚皆稱賀, 而致祥反有不滿之色, 其心所在, 有不可知也。" 黯曰: "殿下三十, 始生元子, 遠近臣民, 莫不懽欣, 而致祥以戚屬, 急於附黨, 徒懷戕殺之計, 少無爲國之誠, 不殺致祥, 則此革陰凶之節, 難以防遏矣。" 大運曰: "元子誕生之初, 無喜色, 此非逆而何?" 上曰: "致祥罪合萬死, 固無所惜。 貸死者, 私恩也。 卿等之言, 公法也。 但初欲貸死, 故不忍誅之矣。" 大司諫李玄紀、掌令成瑨, 俱發啓請以律處之。 上不從, 且曰: "予不忍誅致祥, 而兩司按法之論, 則是矣。 挺英、久望、萬直則以其與師命相親, 竝命定配。"
- 【태백산사고본】 22책 20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166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정론-간쟁(諫諍) / 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 변란-민란(民亂)
- [註 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