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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20권, 숙종 15년 윤3월 2일 기해 4번째기사 1689년 청 강희(康熙) 28년

의금부에서 박정영을 국문하다

이때 의금부(義禁府)에서 박정영(朴挺英)을 국문(鞫問)하였는데, 박정영이 대답하기를,

"정묘년148) 겨울에 이사명이 나를 불러다가 묻기를, ‘네가 장희재(張希載)를 아느냐? 장희재숭선군(崇善君)의 계집종을 첩(妾)으로 삼았기 때문에 숭선군의 아들 동평군(東平君)과 서로 친밀하다. 동평군이 궁액(宮掖)을 인연하여 대궐을 무상 출입하면서 속으로 음흉한 계책을 품고 있으니, 너는 가서 홍치상(洪致祥)을 만나라. 홍치상이 하는 말이 있을 것이다.’ 하였으므로 제가 즉시 홍치상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홍치상이 말하기를, ‘지금 국본(國本)이 정해지지 않아서 온 조정이 다같이 걱정하고 있는데, 동평군장희재와 함께 궁액(宮掖)을 인연하여 그 총애를 믿고 교만 방자하니, 화기(禍機)가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 너는 마땅히 이를 장희재에게 말하여 주라.’ 하였습니다. 제가 이사명이 있는 곳으로 가서 홍치상이 한 말을 전하면서, ‘이 말은 그 근본을 알아야만 장희재에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하니, 이사명이 말하기를, ‘아직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곧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제가 장희재를 만나 그 말을 하였더니, 장희재가 깜짝 놀라면서 ‘이 말은 어디서 나온 말인가?’ 하였습니다. 제가 또 장희재의 이 말을 홍치상에게 전하니, 홍치상이 ‘장희재동평군의 모의(謀議)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어째서 동평군으로 하여금 무상 출입하지 못하게 하지 않았는가? 또 어째서 병판(兵判)에게 위임(委任)하여 기찰(譏察)하게 하지 않았는가?" 하면서, 장희재와 함께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말대로 장희재와 함께 갔더니 홍치상이 ‘듣건대 동평군이 북경(北京)에서 짐새[鴆鳥]149) 를 사가지고 왔다고 하니 화(禍)를 예측할 수가 없다. 그대가 동평군이 오기 전에 계책을 세워 병판(兵判)을 시켜 기찰하게 한다면 그대가 동평군의 당여(黨與)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이 저절로 밝혀질 것이다.’ 하였습니다. 장희재가 말하기를, ‘그러한 형적(形跡)이 없는데도 문서(文書)에 기재했다가 만일 힐문당하게 되면 누구를 핑계대겠는가?’ 하니, 홍치상이 말하기를, ‘나를 증인(證人)으로 채택하면 내가 대답할 것이니, 그대는 지나친 걱정을 말라.’ 하였습니다만, 장희재가 말하기를, ‘이 일은 결단코 할 수가 없다. 내가 다시 생각하여 조처하겠다.’ 하였습니다. 그 뒤 이사명(李師命)이 찬출(竄出)당하였으므로 다시 왕래하지 않았습니다. 지난달 장희재를 만났는데, 장희재이사명홍치상의 일에 대해 분연히 말하기를, ‘홍치상은 실로 무례(無禮)한 자이다. 그때 나에게 말하기를 「동평군구일(具鎰) 등과 함께 흉계(凶計)를 도모했다.」하였고, 또 말하기를, 「조상(趙相)150)동평군과 친한 사이이다.」 하였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모골(毛骨)이 송연하다.’ 하였습니다."

하니, 의금부(義禁府)에서 의논하기를,

"이사명(李師命)홍치상(洪致祥)은 기찰(譏察)을 가탁(假托)하여 남을 역적(逆賊)으로 무함하였으니, 흉악하고 교사스러움이 극도에 달했습니다. 청컨대 다시 철저히 국문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승지(承旨)들을 불러 놓고 중관(中官)151) 을 시켜 의금부의 옥안(獄案)을 승지들에게 주어 읽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분부하기를,

"박정영(朴挺英)이 공대(供對)한 내용을 보건대 이사명홍치상이 동모(同謀)하여 남을 무함한 형적이 어떠한가?"

하니, 승지(承旨) 목창명(睦昌明)·이담명(李聃命)·권환(權瑍)·목임유(睦林儒)·박진규(朴鎭圭)가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엄히 국문(鞫問)하지 않을 수 없다고 극력 말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홍치상의 일에 대해 내가 다 말하겠다. 조종조(祖宗朝) 때부터 궁인(宮人)이 주가(主家)152) 와 교통함에 있어 금제(禁制)가 있어 왔는데, 근래 간혹 이를 범하는 자가 있기 때문에 거듭 경계하는 분부를 내리면서 이를 범하는 경우에는 효시(梟示)로 그 죄를 다스리겠다고 하였다. 나는 정말로 벼르고 한 것이 아닌데 저들은 도리어 의심을 내었고 공주(公主)153) 도 불평하는 안색을 드러내었다. 이항(李杭)154)홍치상(洪致祥)은 다같은 동조(東朝)155) 의 자손이므로 동조께서도 차이를 두지 않고 대우하였다. 그런데 한 번 동조를 무함하는 말을 듣고부터는 두 왕자(王子)가 스스로 불안을 느껴 출입(出入)할 때 반드시 동조의 하명(下命)을 기다려서 하였으므로 동조께서도 늘 통한해 마지않으셨다. 박세채(朴世采)의 차자(箚子)에 ‘무상 출입했다.’는 말과 남구만(南九萬)의 ‘전석(前席)’이라는 말이 비록 저들이 창출(創出)해 낸 말은 아닐지라도 엄히 방비하지 않으면 왕자의 가정이 보전될 수가 없었기에 남구만을 견척(譴斥)한 것이다. 그 뒤 궁녀(宮女) 가을헌(假乙憲)과 귀례(貴禮)가 감히 주가(主家)와 교통하여 동조(東朝)의 말씀을 가탁(假托), 동평군(東平君)을 해치려고 하였기 때문에 귀양보낸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소위(所爲)에 대해 힐문(詰問)하니, 말하기를, ‘동조의 병환이 오래되어 사수(邪祟)가 끼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신 것입니다.’ 하며 목청을 높이고 노기(怒氣)까지 드러내었으니, 어찌 통분한 일이 아니겠는가? 동조께서는 병환이 위태로와지셨는데도 오히려 나를 극진히 타이르기를, ‘홍치상이 반드시 두 왕자를 장살(杖殺)한 뒤에야 그만둘 것이다.’하셨다. 그리고 숙안 공주(淑安公主)156) 도 늘 나를 보는 눈길이 좋지 않았다. 공주(公主)가 진실로 존속(尊屬)이기는 하지만 군신(君臣)의 분의(分義)가 있는데 어떻게 감히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구례(舊禮)에 대궐에서 먹[墨]을 만들 적에 주가(主家)도 이 일에 참여하여 왔다는 것을 이유로 지금 홍치상이 수금(囚禁)되어 있는데도 오히려 사람을 보냈으니, 조심스럽게 죄를 기다린다는 의의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동평군을 무함한 것은 결국 장살(杖殺)하기 위한 계책이었고, 조사석(趙師錫)이 연줄을 통하여 정승에 제배(除拜)되었다는 설도 홍치상이 스스로 창출(創出)해 낸 것이다. 후궁(後宮)이 잉태(孕胎)하자 동조(東朝)께서는 국가를 위하여 매우 기뻐하셨는데 공주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고, 원자(元子)가 탄생하였는데도 홍치상의 집에서는 끝내 경하(慶賀)하지 않았다. 이에 비로소 내가 그들의 뜻을 알았는데, 송시열(宋時烈)의 상소(上疏)내용도 이와 서로 부합되고 있다."

하였다. 목창명(睦昌明) 등이 다시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엄히 국문(鞫問)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다시 말하기를,

"조속히 나라의 형전(刑典)을 바로 하지 않으면 신인(神人)의 분노를 씻을 수가 없다. 이사명(李師命)을 국청을 설치하여 엄히 국문하라."

하였다. 목창명이 아뢰기를,

"홍치상도 그와 죄악이 같으니 아울러 국문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권환(權瑍)이 아뢰기를,

"당인(黨人)들이 국가의 권병(權柄)을 70여 년간 장악하고 있으면서 기탄없이 방종한 짓을 자행하여 왔습니다. 궁녀(宮女)의 발악과 공주(公主)의 좋지 않게 보는 눈빛은 모두가 군부(君父)를 경멸한 데서 연유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양사(兩司)에서 김석주(金錫胄)를 소급하여 죄주자는 것은 그 말이 매우 정대(正大)하다. 경신 옥사(庚申獄事)가 일어나면서부터 사람들을 죄에 얽어넣기 위해 못하는 짓이 없었다. 조지겸(趙持謙)이 아니었더라면 모두 일망 타진(一網打盡)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사명김석주가 천거(薦擧)하였는데, 김석주가 전석(前席)에서 매양 이사명을 칭찬 하였으니, 매우 통분스러운 일이었다."

하였는데, 목창명(睦昌明)이 아뢰기를,

"김석주이사명을 천거한 것은 그와 함께 흉모(兇謀)를 꾀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성상께서 그 정상(情狀)을 통촉시키고 그의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천고(千古)에 통쾌한 일이었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2책 20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165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 왕실-종친(宗親) / 변란-정변(政變)

  • [註 148]
    정묘년 : 1687 숙종 13년.
  • [註 149]
    짐새[鴆鳥] : 중국 광동성(廣東省)에서 나는 독조(毒鳥)인데 그 새 깃을 담근 술을 마시면 사람이 죽는다고 함.
  • [註 150]
    조상(趙相) : 조사석(趙師錫).
  • [註 151]
    중관(中官) : 내시부(內侍府)의 벼슬아치들을 가리키는데 바로 환시(宦侍)의 뜻.
  • [註 152]
    주가(主家) : 공주(公主)의 집.
  • [註 153]
    공주(公主) : 숙안 공주(淑安公主).
  • [註 154]
    이항(李杭) : 동평군의 이름임.
  • [註 155]
    동조(東朝) : 인선 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
  • [註 156]
    숙안 공주(淑安公主) : 홍치상(洪致祥)의 어머니이다.

○時, 禁府問朴挺英, 挺英對曰: "丁卯冬, 李師命邀問曰: ‘汝知張希載乎? 希載以其妾卽崇善君婢子之故, 與崇善東平君相親, 東平因緣宮掖, 無常出入, 內懷陰兇之計, 汝其往見洪致祥, 致祥必有言矣。’ 俺卽往致祥所, 致祥曰: ‘方今未有國本, 擧朝同憂, 而東平希載, 因緣宮掖, 恃寵驕恣, 不知禍機發於何時, 汝宜以此言于希載。’ 俺至師命所, 傳致祥之言。 且曰: ‘此言須知其根本, 方可言于希載。’ 師命曰: ‘姑不顯著, 從可知矣。’ 俺見希載而言之, 希載大驚曰: ‘此言何從而出耶?’ 俺又傳希載之言於致祥, 致祥曰: ‘希載若不預東平之謀, 則何不令東平君不得非時出入, 而又何不委兵判以譏察乎? 仍令與希載偕來。’ 如其言, 與希載偕往, 則致祥曰: ‘聞東平, 自北京買鴆鳥而來, 禍將不測。 汝若及其未來而圖之, 使兵判爲譏察, 則汝當自明其不入於東平之黨矣。’ 希載曰: ‘無形迹而載之書, 若或有問將諉何處?’ 致祥曰: ‘須擧吾爲證, 吾當爲對, 汝勿過慮。’ 希載曰: ‘此事決不可爲, 吾當更思而處之。’ 厥後師命被竄, 更不往來。 前月遇希載, 希載師命致祥事, 忿然曰: ‘致祥實無狀。’ 其時言于我曰: ‘東平具鎰之類, 同爲兇計。’ 又曰: ‘相亦與東平相親。’ 今而思之, 毛骨俱竦。" 禁府議曰: "師命致祥托以譏察, 誣人逆節, 極其兇狡, 請更加究問。" 上召見諸承旨, 使中官, 授禁府獄案於承旨, 命讀之, 敎曰: "觀挺英對辭, 師命致祥同謀誣人之迹, 何如?" 承旨睦昌明李聃命權瑍睦林儒朴鎭圭, 力言其不可不設鞫嚴問。 上曰: "致祥事, 予欲盡言之。 自祖宗朝, 宮人與主家交通, 有禁制, 近或有犯者, 故曾下申戒之敎, 仍以梟示擬其罪, 予固無心, 而彼反生疑, 公主色不平, 致祥, 同爲東朝子孫, 東朝之視遇無間, 而一聞誣東朝之言, 兩王子俱不自安, 出入必待東朝之命, 東朝常痛惋不已。 朴世采箚中出入非常之說及九萬前席之言, 雖非渠之所創出, 而若不嚴防, 則王子家, 將不得保全, 故譴斥九萬矣。 爾後宮女加乙憲貴禮, 敢與主家交通, 假托東朝之言, 欲害東平, 故謫配之, 而詰問其所爲則曰: ‘東朝病久有邪祟, 故有此言。’ 仍至聲高而色恚, 豈不痛甚乎? 東朝疾惟幾, 猶諄諄謂予曰: ‘致祥必戕殺兩王子而後已, 且淑安公主, 【致祥之母】 嘗睨而視予, 公主固尊屬, 而有君臣分義, 安敢如是乎? 舊例闕中造墨主家, 亦預其事, 故今致祥方在囚, 而尙遣人, 惡在其縮伏俟罪也? 構陷東平, 乃戕殺之計, 而趙師錫寅緣拜相之說, 亦致祥所自創出耳。 自後宮有孕, 東朝爲國家喜甚, 而公主不一言及。 元子誕生, 而致祥家終不賀, 予於是始知其意。 而宋時烈之疏, 亦與此相符矣。" 昌明等復請設鞫嚴問。 上曰: "若不亟正邦刑, 則不可洩神人之憤。" 李師命設鞫嚴問。 昌明曰: "致祥又與同惡, 宜竝鞫。 上可之。 曰: "黨人秉國七十餘年, 放縱無忌憚, 宮女之發恚, 公主之睨視, 皆由於輕蔑君父矣。" 上曰: "兩司之追罪金錫冑, 言甚正大。 自庚申獄起, 羅織無不至, 若非趙持謙, 則打盡一網矣。 況師命, 是錫冑所薦? 而錫冑於前席, 每稱師命, 殊可痛心。" 昌明曰: "錫冑之薦師命, 欲與同其兇謀, 而自上洞燭情狀, 追奪其爵, 誠千古之快事也。"


  • 【태백산사고본】 22책 20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165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 왕실-종친(宗親) / 변란-정변(政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