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수에 관한 상소과 교서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절수(折受)의 규정은 옛날의 것이 아니고, 임진란(壬辰亂) 후로 땅은 넓고 백성은 적은데 왕자(王子)와 공주(公主)가 서로 잇따라 출합(出閤)하기 때문에, 고(故) 상신(相臣) 한응인(韓應寅)이 호조 판서(戶曹判書)가 되어 난리 전에 백관(百官)에게 선반(宣飯)할 것과, 왜인(倭人)을 접대(接待)할 것에 어염(魚鹽)·시탄(柴炭)이 나오는 땅으로써 분할(分割)하여 주기를 청한 것인데, 그대로 그릇된 규정을 이루었습니다. 현묘조(顯廟朝)에 이르러 5공주(公主)가 출합(出閤)하자, 절수(折受)가 점차 넓어졌는데, 삼사(三司)에서 논(論)하였으나 성사되지 않았고, 신해년058) 에 8도(道)가 크게 기근(饑饉)이 들자, 조가(朝家)에서 드디어 개정(改正)할 거조(擧措)를 행하였으나, 지나간 것은 그대로 두고 다가오는 것은 금한다고 하여 사목(事目)을 만들었으나, 준수(遵守)되지 못하고 폐단은 전일(前日)과 같았으며, 당저(當宁)059) 경신년060) 에는 묘당(廟堂)에서 금령(禁令)을 펴고 임자년061) 이후에 절수한 것은 모두 혁파(革罷)할 것을 청하였으나, 또 다시 정지되고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현재는 사람이 불어나는 것이 임자년(壬子年)에 비교할 수 없고 절수가 많아진 것이 날로 심하여졌습니다. 요즘 백성의 호소나 대각(臺閣)의 논쟁(論爭)으로 인하여 혹은 환급(還給)한 것이 없지 않으나, 그 형세는 민전(民田)에 침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다음에 종사(螽斯)062) 의 경사가 있고 신궁(新宮)이 많이 나가게 되면, 모르긴 하겠습니다만, 어느 곳에 절수하여 민전(民田)을 침탈(侵奪)하는 근심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신(臣)은 절수를 혁파했으면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갑자기 절수(折受)의 규정(規定)을 혁파(革罷)하게 되면, 신설(新設)된 궁가(宮家)는 반드시 장차 낭패(狼狽)를 보게 될 것이니, 먼저 선처(善處)의 방도(方道)를 강구(講求)한 뒤에 의논하겠다."
하였다. 사간원(司諫院)에서 또 혁파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남구만(南九萬)이 또다시 직전법(職田法)을 행하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이와 같이 하면 신궁(新宮)은 혹 경비(經費)를 이어대기가 어렵다고 염려할 것이나, 그 민전(民田)을 빼앗아 백성의 원망을 초래하여 끝내 토지나 백성이 없어서 나라가 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보다는 이해(利害)가 분명할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이치에 맞다고 여겨 허가하였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명선(明善)·명혜(明惠) 두 공주(公主)가 미처 출합(出閤)도 못하고 서거(逝去)하였으므로, 현종(顯宗)께서 슬퍼하여 4백 결(結)을 더 준 것인데, 궁속(宮屬)이 이를 빙자해 정도에 지나쳐서 절수(折受)가 1천여 결에 이르렀으니, 또한 마땅히 그 직전(職田)으로 정한 법 외의 것은 혁파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선조(先朝)의 슬퍼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고칠 수 없으나, 4백 결 외에는 혁파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헌납(獻納) 조의징(趙儀徵)이 또한 아뢰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21책 19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125면
- 【분류】재정-상공(上供) / 농업-경영형태(經營形態) / 농업-전제(田制) / 역사-전사(前史) / 왕실-국왕(國王) / 정론-간쟁(諫諍)
- [註 058]신해년 : 1671 현종 12년.
- [註 059]
당저(當宁) : 현재의 임금.- [註 060]
경신년 : 1680 숙종 6년.- [註 061]
임자년 : 1672 현종 13년.- [註 062]
종사(螽斯) : 《시경(詩經)》 주남편(周南篇)의 종사장(螽斯章)을 가리킨 것으로, 종사는 여치과에 속하는 곤충으로 한꺼번에 99개의 알을 낳는다 함. 곧 왕실 자손의 번영함을 뜻함.○乙丑/引見大臣、備局諸宰, 領議政南九萬曰: "折受之規, 非古也。 壬辰亂後, 地曠民少, 而王子公主, 相繼出閤, 故故相臣韓應寅爲戶判, 請以亂前, 百官宣飯, 倭人接待魚鹽柴炭所出之地, 割而與之, 仍成謬例。 及至顯廟朝, 五公主出而折受漸廣, 三司論之, 不得。 辛亥八路大飢, 朝家遂行釐正之擧, 往者仍之, 來者禁之, 著爲事目, 而不能遵守, 弊猶前日。 當宁庚申, 廟堂請申禁令, 悉罷壬子以後折受, 而又復格而不行, 目今人物繁殖, 非比壬子, 折受夥多, 日以益甚, 近因民人之呼訴, 臺閣之爭論, 或不無還給者, 而其勢不得不侵及民田。 今後螽斯有慶, 新宮多出, 則未知何處折受, 而得無侵奪民田之患乎? 臣謂折受可罷也。" 上曰: "猝罷折受之規, 則新設宮家, 必將狼狽, 先講善處之道, 然後可議也。" 諫院又請罷, 上不從之。 九萬又請復行《職田法》, 曰: "如是則新宮或以經費難繼爲慮, 與其奪民田招民怨, 終至於無田無民, 不得爲國, 利害不翅較然。" 上然其言, 許之。 九萬曰: "明善、明惠兩公主, 未及出閤而逝。 顯廟悼之, 加給四百結, 而宮屬憑此過濫, 折受至千餘結, 亦宜罷其職田定式外者。" 上曰: "此出於先朝悼念之意, 不可改也。 四百結外則罷之可也。" 獻納趙儀徵亦言之。 上不許。
- 【태백산사고본】 21책 19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125면
- 【분류】재정-상공(上供) / 농업-경영형태(經營形態) / 농업-전제(田制) / 역사-전사(前史) / 왕실-국왕(國王) / 정론-간쟁(諫諍)
- [註 0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