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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18권, 숙종 13년 9월 26일 신축 2번째기사 1687년 청 강희(康熙) 26년

병조 판서 이사명이 환란에 대비해 군사의 강화 방법을 건의하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이사명(李師命)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신이 그끄저께 군병 성지 주함 총수 책자(軍兵城池舟艦總數冊子)의 진어(進御)에 대한 뜻을 가지고 진달하여 윤허받았었습니다. 이어 생각해 보건대, 우리 국조(國朝)의 병제(兵制)는 대략 세 번 변경되었습니다. 고려(高麗) 말기에 가병(家兵)의 화(禍)로 마침내 나라가 망하게 되었었기 때문에, 아조(我朝)는 개국(開國) 초기에 친병(親兵)을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에 소속시키고, 주현(州縣)의 군사를 안렴사(按廉使)·진무사(鎭撫使) 등의 관원에게 소속시켜, 규모는 비록 정해졌었지만 절목(節目)은 상세하게 갖추지 못했었습니다. 태종(太宗)세종(世宗) 양대(兩代)에 미쳐서는 충의위(忠義衛) 등 7위(衛)의 기보병(騎步兵)·보충대(補充隊)·갑병(甲兵)·팽배(彭排)·대졸(隊卒) 등의 군사를 오위(五衛)에 나누어 소속시키고 윤번(輪番)으로 쉬게 하되, 수시로 간열(簡閱)하기를 한(漢)나라남북군(南北軍)245) 의 제도처럼 하였습니다. 이를 가지고 서울을 숙위(宿衛)하고 이를 가지고 한편으로 적국(敵國)에게 위엄을 보여, 2백 년 동안 국가의 정세가 공고(鞏固)하고 남북(南北)이 편안했었습니다. 그때에는 전졸(戰卒)의 수가 10만을 넘다가 불행히도 오래 편안히 지난 나머지 법도가 해이해져, 번상(番上)한 군사가 역역(力役)을 하도록 변경되고, 정번(停番)인 군사에게 포(布)를 내라고 독촉하게 되었고, 임진년246) 무렵에 이르러서는 중외(中外) 각위(各衛)에 이미 전투를 감당할 군사가 없게 되었었습니다. 왜구(倭寇)들이 갑자기 닥치는데도 주현(州縣)에 군사가 없으므로 부득이 속오군(束俉軍)247) 의 제도를 만들어 한때의 위급을 구원했었고, 또한 도감(都監)의 군사를 모집하여 숙위(宿衛)에 쓰도록 하였습니다. 반정(反正)한 초기(初期)에 이르러서는 장수인 신하들이 각기 군사를 모집하자, 어영청(御營廳)·총융청(總戎廳)의 군사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나갔었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또한 금위영(禁衛營)의 군사를 새로 두었습니다마는, 그러나 전투를 감당할 만한 군사는 몇 만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이른바 기보병(騎步兵)은 이미 베를 바치게 하던 양정(良丁)이고, 이른바 속오군(束俉軍)은 곧 훈련받지 않은 시골 민중들이니, 갑자기 위급한 일이 있게 된다면 비록 한신(韓信)248) 이나 백기(白起)249) 로 장수를 삼는다 하더라도 진실로 어떻게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비록 크게 변통을 하여 옛적의 제도대로 복구는 할 수 없을지라도, 만일 그 사이에 짐작하여 가감한다면 훈련된 군사 10만은 그래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래서 신(臣)이 낮이나 밤이나 마음속에 잊지 못했던 것인데, 이번에 군병(軍兵)의 총수(總數)를 진어(進御)하심에 따라 대략 구구하게 생각하고 있는 바를 털어놓았습니다마는, 자세한 절목(節目)에 있어서는 감히 먼저 진달하여 많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게 할 수 없습니다. 지난 선조조(宣祖朝)에 선정신(先正身) 이이(李珥)가 10만의 군사를 양성하여 환란에 대비하기를 청했었는데, 그 때에 의논하는 사람들이 아무 일도 없는데 백성을 동요시킴은 그르다고 했었기 때문에, 이이가 마침내 한 가지 계책도 조치해보지 못하고서 뜻만 가지고 있다가 몰(沒)했었습니다. 그 뒤 임진 왜변(壬辰倭變)의 초두에야 고(故) 상신(相臣) 유성룡(柳成龍)이 뒤쫓아 그의 말을 써주지 않은 것을 한탄하게 되었습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일에 앞서 근심해야 그 근심이 없어지게 될 수 있고, 일이 닥쳐서야 근심하면 그 일에는 소용이 없다.’고 했었으니, 이는 어찌 오늘날 감계(監戒)삼아야 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신이 어제 연중(筵中)에서 삼가 성상의 분부를 받들건대, 저들 서쪽 달자(㺚子)들의 일 때문에 장신(將臣)들에게 계칙(戒飭)하시는 바가 있으셨습니다. 만일 오늘날에 근심거리가 되는 바를 혹시라도 수십년 동안 아무 일이 없게 되도록 한다면, 뒷날에 일을 담당하는 신하들이 오히려 계획을 해가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앞당겨 10여 년 이내에 일이 생기게 된다면, 훈련하지 않은 시골 백성을 가지고 이후의 한없는 사변(事變)에 적용해 가려고 하더라도 어찌 위태롭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는 존망(存亡)에 관한 큰 계책이므로 반드시 성명(聖明)께서 스스로 득실(得失)을 살펴보아 결단코 그렇게 될 이치를 알아차리시고서 굳게 뜻을 세우고 착실하게 일을 해간 다음에야, 약세(弱勢)를 바꾸어 강세(强勢)로 만들어서 공을 세우게도 되고 일을 이루게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차자에 진달한 일은 국가를 위한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므로, 마땅히 묘당(廟堂)과 함께 충분하게 강구하여 변통해 가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18권 43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111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군사(軍事) / 외교(外交)

  • [註 245]
    남북군(南北軍) : 금위(禁衛)의 군대.
  • [註 246]
    임진년 : 1592 선조 25년.
  • [註 247]
    속오군(束俉軍) : 선조 27년(1594년) 역(役)을 지지 않은 양인(良人)과 천민(賤民) 중에서 조련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편성된 군대. 이들은 평상시에는 군포(軍布)를 바치고 유사시에만 소집되었음. 숙종 이후로 폐지되었음.
  • [註 248]
    한신(韓信) :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공신(功臣).
  • [註 249]
    백기(白起) : 전국 시대 진(秦)나라의 명장(名將).

○兵曹判書李師命上箚曰: "臣於三昨, 以軍兵、城池、舟艦摠數冊子進御之意, 陳達蒙允矣。 仍伏念國朝兵制, 大略三變, 末家兵之禍, 終至亡國, 故我朝開國之初, 以親兵, 屬之於義興三軍, 州縣之兵, 屬之於按廉鎭撫等官, 而規模雖定, 節目未詳矣。 逮至太宗世宗兩朝, 以忠義等七衛騎步兵、補充隊、甲兵、彭排、隊卒等兵, 分屬五衛, 輪番迭休, 以時簡閱, 如漢南北軍之制, 以之宿衛京師, 以之旁讋敵國, 二百年間, 國勢鞏固, 南北晏然。 其時戰卒之數, 過於十萬, 不幸久安之餘, 法制廢弛, 番上之卒, 變爲力役停番之兵, 督令收布, 及至壬辰年間, 中外各衛, 已無堪戰之卒矣。 寇猝至, 州縣無兵, 不得已創出束伍之制, 以救一時之急。 又募都監之卒, 以備宿衛之用, 而及至反正之初, 將帥之臣, 各募其軍, 御營、摠戎之軍, 紛然雜出。 至於今日, 又創禁衛之兵, 然而堪戰之卒, 不過數萬而止矣。 所謂騎步兵, 已爲收布之良丁, 所謂束伍軍, 便是未鍊之村民, 猝有緩急, 雖使韓白爲將, 實無所措手足矣。 雖不能大加變通, 恢復舊制, 若於其間, 斟酌損益, 十萬鍊卒, 猶可辦得, 此臣之所以夙夜耿耿於中者。 今因軍兵摠數之進御, 略布區區之忱, 如其節目之詳, 不敢先陳, 以資多口。 昔在宣廟朝, 先正臣李珥, 請預養十萬兵, 以備患亂。 其時議者, 以無事撓民爲非, 故李珥終不能措施一策, 齎志而沒, 其後壬辰變之初, 故相臣柳成龍, 追恨其言之不用也。 古語曰: ‘憂先於事, 可以無憂, 事至而憂, 無及於事。’ 此豈非今日所可監戒處也? 臣昨於筵中, 伏承聖敎, 以彼中西㺚之事, 有所戒飭於將臣者, 若使今日所以爲憂者, 或可以數十年無事, 則後日當事之臣, 猶可爲計, 不然而近出於十餘年之內, 則欲以未鍊村民, 以擬日後無窮之事變, 豈不殆哉? 然而此是存亡大計, 必須聖明自審其得失, 決知其必然之理, 堅固立志, 着實做事然後, 可以變弱爲强, 立功立事矣。" 上答以箚陳之事, 出於爲國深慮, 當與廟堂, 熟講變通。


  • 【태백산사고본】 20책 18권 43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111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군사(軍事) / 외교(外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