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인 장씨가 동평군 이항과 결탁하여 조대비를 아첨하다
지경연사(知經筵事) 김만중(金萬重)을 의금부(義禁府)에 하옥(下獄)했다. 이때 귀인(貴人) 장씨(張氏)가 후궁(後宮) 중에 가장 총애받았었는데,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이 장씨와 결탁하여 때없이 드나들면서 비할 데 없는 은총을 받았고, 장씨와 함께 조대비(趙大妃)를 아첨하여 섬기므로 사정(私情)을 쓰는 길이 크게 열려 외부의 말이 모두 들어가게 되었다. 조사석(趙師錫)은 곧 대비의 재종(再從) 아우이고, 동평군 항과 장씨의 어미는 또한 조사석과 연관이 있었다. 【내용이 모두 위에 나와 있다.】 조사석은 평소에 명성이 그다지 표나게 나타나지 않았었고 총애도 또한 특이하지 않았었는데, 정승을 다섯 차례나 더 선택하도록 하다가 마침내 조사석에게 돌아가고 말아, 은수(恩數)가 갑자기 융숭해짐이 근고(近古)에 없던 일이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후궁의 원조가 있은 것으로 여겨, 길거리에서의 말과 항간(巷間)에서의 평론이 갈수록 더욱 떠들썩하면서도 감히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수항(金壽恒)이 죄를 입게 된 것이 비록 정승을 정할 때의 일 때문이기는 했지만, 혹자는 그의 아들 김창협(金昌協)이 일찍이 한 차례 상소를 올려 후궁(後宮)을 지적하여 배척하면서 말을 매우 절박하게 했었기에, 임금의 마음에 불평스러워 그의 아비에게 화풀이하게 된 것이라면서 또한 몰래 논의하는 자가 많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김만중이 연중(筵中)에서 아뢰기를,
"요사이 전하께서 김수항(金壽恒)과 이단하(李端夏)에 대한 대우가 그전보다 크게 달라지셨는데, 김수항에 대해서는 외부(外部) 사람들 모두의 말이 ‘김창협의 상소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어찌 전하께서 그의 아들이 한 일 때문에 그의 아비에게 화풀이를 하시겠습니까? 이는 김수항의 죄명(罪名)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의심을 가지는 말이 외간(外間)에 마구 퍼지게 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도 신료(臣僚)들에게 마치 의심이 쌓여 풀리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아래에서도 성상께 의심이 없을 수 없게 되는 것은 또한 당연한 일입니다. 대사헌(大司憲) 이익(李翊)의 상소 내용에 이른바 ‘의아스러운 마음이 날로 생겨나고 있습니다.’라고 한 것이나, ‘조사석이 불안해진 것은 민진주(閔鎭周) 때문이 아닙니다.’라고 이수언(李秀彦)의 상소에서 말하게 된 것도 또한 이런 때문입니다. 지난번 한성우(韓聖佑)의 상소는 한 말이 매우 광망(狂妄)하여 진실로 성상의 마음을 개오(開悟)하기에 부족한 것이기는 했습니다마는, 비답(批答)하신 말씀이 매우 엄격하였고 신자(臣子)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씀이 있기도 했기에, 항간(巷間)에서는 더러 송인종(宋仁宗) 때 온성(溫成)의 일과 같은 것이라 하고 있습니다. 유언(流言)은 옛적부터 대내(大內)에서 총애받는 궁녀가 있을 적에 생기는 수가 많았습니다. 만일 관저장(關雎章)236) 같은 시가 생긴 문왕(文王) 때라면 그런 말들이 어디에서 생겨나게 되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성하시면서 더욱 수신(修身)하고 제가(齊家)하는 도리를 닦으소서."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조사석이 불안하게 된 것은 과연 무슨 일 때문이겠는가?"
하니, 김만중이 아뢰기를,
"후궁 장씨(張氏)의 어미가 평소에 조사석의 집과 친밀했었습니다. 대배(大拜)가 이 길에 연줄을 댄 것이라고 온나라 사람들이 모두 말하고 있습니다마는, 유독 전하께서만 듣지 못하신 것입니다. 임금과 신하의 사이는 마땅히 환하게 트이어 조금도 간격이 없어야 하는 것인 데다가 전하께서 물으시는데 신(臣)이 어찌 감히 숨기겠습니까?"
하자, 임금이 크게 화를 내며 이르기를,
"나와 같이 재주도 없고 덕도 박한 사람이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러한 말을 듣게 되니 진실로 군신(群臣)들을 대할 면목이 없다. 김창협이 한 일은 비록 해괴하기는 했지만 어찌 죄를 그의 아비에게 옮길 리가 있겠는가? 이단하(李端夏)는 정승의 직책에 합당하지 못함을 내가 본래 알고 있었거니와, 속담(俗談)에 ‘차례로 하는 대간(臺諫)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또한 어찌 차례로 하는 대신인들 없겠느냐? 조사석을 이미 연줄을 대어 정승이 되었다고 했으니, 광해군(光海君) 때에 값을 바치고 벼슬을 얻게 된 일과 같은 것인데, 금을 받은 것이라 여기느냐, 은을 받은 것이라 여기느냐? 분명히 말의 근거를 대라. 결코 그만두지 않겠다."
하였다. 김만중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이미 신으로 하여금 말을 하도록 해놓고 또한 한 말의 근거를 물으십니다마는, 신이 비록 불초하기는 하지만 어찌 말의 근거를 들어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비록 주륙(誅戮)을 받게 되더라도 신이 진실로 달게 여기겠습니다마는, 이는 전하께서 바로 신(臣)을 형륙(刑戮)에 빠뜨리시려는 것입니다."
하며, 말씨가 흔들리지 않았다. 임금이 더욱 화를 내어 음성과 안색이 모두 엄해지며 다그쳐 묻기를 그만두지 않으니, 김만중이 아뢰기를,
"신이 감히 여기에 있을 수 없습니다. 바로 달려나가 의금부에서 대명(待命)하겠습니다."
하였다. 승지(承旨) 임홍망(任弘望)·교리(校理) 황흠(黃欽)·수찬(修撰) 홍수헌(洪受瀗)·지평(持平) 이정익(李禎翊) 등이 다같이 따져 묻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도록 청하다가 모두들 엄한 꾸지람을 받고 물러갔다. 이날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김만중을 잡아다가 문초하라는 전지(傳旨)를 즉시 써서 입계(入啓)하고, 의금부로 하여금 따져서 물어보고 아뢰게 하라."
하니, 승정원에서는 연중(筵中)에서 대간(臺諫)이 이미 도로 거두도록 논계(論啓)한 것을 들어 전지를 봉입(捧入)할 수 없다는 뜻을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마침내 들어주지 않고서,
"단지 대각(臺閣)이 있는 것만 알고 군부(君父)가 있음은 알지 못한다."
하는 등의 분부를 내리기까지 했다. 승지 신양(申懷)은 세 차례 아뢴 뒤에 말하기를,
"이만했으면 또한 족하게 되었는데, 어찌 다시 논쟁할 수 있겠는가?"
하며, 동료(同僚)들과 연명(聯名)하지 않아 나타나게 책임만 면하려는 뜻이 있었다. 대개 신양은 평소에 조사석과 친후했기 때문에 비록 일의 대체에 따라 당초에는 복역(覆逆)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의 본뜻은 아니었기 때문인 것이다. 임금이 또 비망기(備忘記)를 내리며 지난 겨울의 이인정(李仁徵)의 일을 끌어대어 말하기를,
"군신(群臣)들이 군부(君父) 보기를 일개 시종(侍從)하는 신하만도 못하게 여기었다."
했다. 특별히 승선(承宣) 이인징이 김몽신(金夢臣)을 모함한 것을 추국(推鞫)할 적에 승정원에서 말의 근거를 캐물어 중벌(重罰)에 따라 죄를 과하기를 청하여, 드디어 형벌을 받고 멀리 귀향가게 되었었기 때문이다. 임금이 승정원에서 마침내 전지(傳旨)를 봉입(捧入)하지 않으므로, 탑전(榻前)에서 강박하여 써 오게 하고자 하여, 입직(入直)한 승지들에게 인견(引見)을 명했었다. 이에 옥당(玉堂)과 사헌부(司憲府)에서도 또한 청대(請對)하여 함께 들어가니, 임금이 이르기를,
"승정원에서는 어찌하여 이제까지 전지를 봉입하지 않느냐? 김만중이 비록 그 자신이 지어낸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들은 데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따져서 물어보고 처리하려 하는 것이다. 이를 그대로 둔다면 다만 대신이 불안하게 될 뿐만 아니라, 장차는 반드시 일마다 의심하게 되어 임금이 수족(手足)을 놀릴 데가 없어지고 단지 헛된 자리만 끼고 있게 될 것이다."
하고, 이어 승지에게 시급히 전지를 쓰도록 명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아뢰기를,
"김만중이 진달한 말은 뜬소문에서 나온 것인데, 어찌 근거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대관(臺官)의 논계(論啓)가 나온 다음에는, 무릇 일을 그대로 거행하지 못하는 것이 본래부터 조종조(祖宗朝)의 옛 준례이므로, 결코 오늘날부터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교리(校理) 남치훈(南致熏)은 아뢰기를,
"요사이는 당론(黨論)이 지극히 해괴하고 놀랍습니다. 김만중의 그 말도 당론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므로, 여러 신하들이 밤이 깊도록 논쟁했었다. 임금이 꾸짖다가 타이르다가 하면서 전지를 봉입하라고 재촉하니, 승지 유명일(兪命一)이 할수 없이 붓을 가져다 장차 쓰려고 할 적에, 가주서(假注書) 최중태(崔重泰)가 유명일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생각하고 있는 바를 다시 전달해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화를 내어 이르기를,
"주서가 어찌 감히 승지를 지휘하느냐? 즉각 파직을 명한다."
하니, 최중태가 추창(趨蹌)하여 나갔다. 유명일이 붓이 없다는 핑계로 말을 하니, 임금이 사관(史官)에게 붓을 주도록 명하자, 사관 송상기(宋相琦)는 아뢰기를,
"사필(史筆)은 줄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사관 윤성준(尹星駿)이 아뢰기를,
"사필은 진실로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성상의 분부가 이러하신데 어찌 감히 주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유명일이 드디어 전지를 써내려가 임금이 구두로 부르는 대로 쓰기를 끝내어, 즉시 김만중을 의금부에 하옥하게 된 것이다.
이때 천위(天威)의 진동이 겹치게 되므로 사람들이 대부분 황송하고 두려워하여 어찌하지를 못하였다. 유명일은 해방(該房) 승지로서 마침내 승순(承順)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고, 윤성준은 사관(史官)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붓을 주어 버렸는데, 물의(物議)가 모두 그들이 직분을 잃은 것을 허물했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임금의 직책은 정승을 논정(論定)하는 것보다 큰 일이 없는 법이다. 만일 임금이 이단하(李端夏)가 합당하지 않음을 알았다면, 비록 아래에서 추천하더라도 오직 마땅히 쓰지 않으면 될 뿐이지 어찌 억지로 제배(除拜)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미 제배한 뒤에는 비록 더러 직무에 알맞지 않더라도 또한 마땅히 예(禮)를 차려 퇴진(退陣)시켜야 할 것인데, 이번에 김만중의 말에 격분하여 모욕하고 업신여기는 말을 하여서 노예(奴隷) 보듯이 하였으니, 어떠하겠는가? ‘번갈아 하는 대관[輪回臺官]’이란 말은 진실로 야비한 상말 중에도 심한 말이다. 임금이 대신에게 대해서 체모가 어떠한 것이라고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한 마디 말이 나라를 잃게 되는 것이다. [一言喪邦]’한 것과 같은 일이라 하겠다. 당론(黨論)의 폐단은 진실로 남치훈의 말과 같은 수가 있기는 했지만, 조사석의 일이 이미 의심스러운 자취가 많았고, 김만중이 논계(論啓)한 말이 반드시 사심(私心)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보면, 어찌 당론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겠는가? 기회를 틈타 발동하여서 모호한 계책을 부리려 한 것이 가릴 수 없게 되어 있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18권 37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108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역사-편사(編史) / 역사-고사(故事)
- [註 236]관저장(關雎章) : 《시경》의 맨첫장의 시로서, 부부의 도가 잘 행해져 가정이 평화로움을 뜻함.
○下知經筵金萬重于禁府。 時, 貴人張氏, 寵冠後宮, 而東平君杭, 締結張氏, 出入非時, 恩幸無比, 與張氏謟事趙大妃, 私竇大開, 外言皆入。 趙師錫卽大妃之再從弟, 而杭與張母, 又與師錫連, 【皆見上。】 師錫常時聲望, 無甚表著, 寵眷亦不殊異, 而五次加卜, 竟歸於師錫而後已。 恩數猝隆, 近古未有, 以此人皆疑有奧援, 街談巷議, 久益喧藉, 而無敢發之者, 且領敦寧金壽恒之被罪, 雖由於枚卜時事, 而或以爲其子昌恊, 嘗陳一疏, 指斥後宮, 語甚切逼。 上心不平, 移怒於其父, 亦多有竊議者。 至是, 萬重白於筵中曰: "近日殿下之所以待金壽恒、李端夏, 大異於前, 而壽恒則外人皆云, 由於昌恊之疏。 殿下豈以其子之事, 移怒於其父乎? 此莫非壽恒罪名不明, 故此等疑阻之說, 肆行於外間, 今殿下之於臣僚, 若有蓄疑不釋者, 然則下之不能無疑於上, 亦固也。 大司憲李翊疏中所謂: ‘疑阻日生, 師錫之不安, 不由於閔鎭周、李秀彦之疏云者,’ 亦以此也。 頃者韓聖佑之疏, 語甚狂妄, 固不足開悟上心, 而批辭太嚴, 至有臣子不忍聞者。 閭巷之間, 或謂有如宋 仁宗時溫成之事矣。 自古流言, 多出於內有女寵, 若文王 《關雎》之時, 則此等言, 何自而起乎? 惟殿下自反而益勉修齊之道焉。" 上曰: "師錫之不安, 果何事耶?" 萬重曰: "後宮張氏之母, 素密於師錫家, 大拜之夤緣此路, 國人皆言, 獨殿下未之聞耳。 君臣之間, 所當洞然開釋, 無少間隔, 而殿下有問, 臣何敢隱?" 上大怒曰: "如予才疎德薄者, 忝居君位, 至聞如此之言, 誠無顔面對群臣也。 金昌恊事, 雖可駭, 豈有移其罪於其父之理乎? 李端夏之不合相職, 予固知之, 而諺有輪回臺諫, 亦豈無輪回大臣乎? 趙師錫旣曰: ‘夤緣卜相。’ 則有同光海朝納價得官之事, 以爲受金乎受銀乎? 明告言根, 決不可已也。" 萬重曰: "殿下旣令臣言之, 又問其言根, 臣雖無似, 何可引告言根乎? 雖被誅戮, 臣固甘心, 而此殿下便是陷臣於刑戮也," 辭氣不撓。 上愈怒, 聲色俱厲, 迫問不已。 萬重曰: "臣不敢在此, 卽趨出待命于禁府。" 承旨任弘望、校理黃欽、修撰洪受瀗、持平李禎翊等, 竝請還寢究問之命, 皆被嚴責而退。 是日, 傳于政院曰: "金萬重拿問傳旨, 卽爲書入, 令禁府究問以啓。" 政院以筵中臺諫, 已發還收之論, 傳旨不得捧入之意, 累啓爭之。 而終不從, 至有徒知有臺閣而不知有君父等敎。 承旨申懹三啓之後, 乃曰: "此亦足矣, 何可復爭? 不與同僚聯名, 顯有塞責之意。" 蓋懹則素厚於師錫, 故雖以事體, 初不得不覆逆, 而非其本情故也。 上又下備忘, 至引前冬李仁徵事。 言群臣之視君父, 不如一侍從臣, 特推承宣仁徵, 以誣揘金夢臣。 政院請鉤問言根, 從重科罪。 遂至於受刑遠配故也。 上以政院終不捧入傳旨, 欲於榻前, 迫令書入, 乃命入直承旨引見。 於是玉堂、憲府, 亦請對同入。 上曰: "政院何至今不捧傳旨乎? 萬重雖非渠之做出, 必有所聞, 故予欲究問而處之矣。 此而置之, 非特大臣之不安而已, 必將事事而疑之, 人主無所措手足, 徒擁虛位矣。 仍命承旨速書傳旨。" 諸臣皆曰: "萬重所達, 出於流言, 豈有根本之可尋? 況臺啓發後, 凡事不得擧行, 自是祖宗朝古例, 決不可自今日壞了矣。" 校理南致熏則曰: "近來黨論, 極可駭愕, 萬重此言, 亦出於黨論矣。" 諸臣爭執至夜深。 上且責且諭, 促捧傳旨。 承旨兪命一, 不得已援筆將書之際, 假注書崔重泰, 顧語命一曰: "所懷更達可也。" 上怒曰: "注書何敢指揮承旨? 卽命罷職。" 重泰趨出, 命一以無筆爲辭。 上命史官給筆, 史官宋相琦曰: "史筆不可授也。" 史官尹星駿曰: "史筆固重, 而上敎如此, 何敢不授?" 命一遂書傳旨。 上口號書畢, 卽下萬重于禁府。 時天威震疊, 人多惶懼失措。 命一以該房, 終未免承順。 星駿以史官, 授他人以筆, 物議皆咎其失職。 謹按人主之職, 莫大於論相, 自上若知李端夏之不合, 則下雖擧薦, 只當勿用而已。 何必强爲之除拜哉? 旣拜之後, 則雖或不稱職, 亦當退之以禮可也, 而今乃激惱於萬重之言, 僇辱慢罵, 如視奴隷何哉? 輪回臺官之說, 固是鄙諺之甚者, 人主之於大臣, 體貌何如, 而可以爲此言哉? 眞可謂一言喪邦者矣。 黨論之弊, 固有如致熏之言, 而師錫之事, 旣多可疑之跡。 萬重所論, 未必出於私心, 則烏可歸之於黨論乎? 其乘機激動, 欲售傾陷之計, 有不可掩矣。
- 【태백산사고본】 20책 18권 37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108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역사-편사(編史)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