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의 문인인 전 부사 한성보 등이 송시열을 두둔하는 상소하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門人)인 전(前) 부사(府使) 한성보(韓聖輔) 등이 송시열을 위해 상소하여 나양좌(羅良佐)의 상소에 대해서 신변(伸辨)했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송시열은 윤휴(尹鑴)가 선정(先正)을 능가하고 주자(朱子)를 취색(吹索)할 때를 당하여 바로 사문 난적(斯文亂賊)이라고 했었지만, 윤선거(尹宣擧)는 덮어주며 비호(庇護)했었습니다. 송시열처럼 세상을 근심하는 마음으로 어떻게 자신을 잊고 윤휴를 배격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어떻게 먼저 그 당여(黨與)를 다스려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계사년140) 7월에 송시열이 윤선거 등과 황산 서원(黃山書院)에 모였을 적에 윤휴는 이단(異端)임을 극력 말하자, 윤선거가 말하기를, ‘공(公)은 어찌하여 희중(希仲)을 두려워합니까? 스스로 싸움의 단서를 만들어내어 변장자(卞莊子)141) 가 재료로 삼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므로, 송시열이 이에 ‘겉으로는 배제(排擠)하는 체하면서 속으로는 협조한다.’는 말을 인용하여 배척했었습니다. 나양좌(羅良佐) 등이,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배척하고 윤선거를 당여(黨與)로 책망한 일을 예송(禮訟)이 있은 뒤의 일로 하고, 그 전에는 일찍이 윤휴의 죄를 말하여 밝히지 않았다고 한 것은, 속인 것이 아니면 망령된 것입니다. 또 윤선거는 윤휴가 고친 《중용(中庸)》의 주설(註說)을 전사(傳寫)하여 자랑하기까지 했었습니다. 송시열이 일찍이 그의 조카 송기후(宋基厚)의 집에 갔다가 윤휴가 저술한 글이 있는 것을 보고 즉시 땅에 던지며 말하기를, ‘윤휴가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이런 짓을 하고, 너희들도 어찌 감히 이런 짓을 하는 것이냐?’ 했었습니다. 송기후가 말하기를, ‘그런 것이라면 이산(尼山) 윤모(尹某)는 어찌하여 또한 그와 같이 하는 것입니까?’ 하자, 송시열이 말하기를, ‘남이 잘못하고 있는데도 그의 잘못을 본받는다면 너의 불초(不肖)함이 심하다. 네가 고치지 않고서는 다시 나를 보지 말아라.’ 했었습니다. 윤휴가 또 이기설(理氣說)을 지을 적에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이이(李珥)·성혼(成渾)의 견해를 아울러 배격하면서 성혼에 대해서는 더욱 업신여김을 가했었습니다. 송시열의 상소 내용에 ‘문간공(文簡公)142) 은 치지도 않았다.’고 한 것이 이 때문인데, 윤선거는 또한 미워할 줄도 알지 못했으니, 어찌 심하게 미혹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송준길(宋浚吉)도 말하기를 ‘우리 부자(父子)가 희중(希仲)을 존대하지 않는 것 때문에 청의(淸議)에 죄를 얻게 되었다.’고 했었으니, 대개 또한 불평하여 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송시열이 일찍이 통한(痛恨)하기를, ‘윤길보(尹吉甫)와 같은 사람도 윤휴에게 있어 또한 오히려 이러한데, 젊은 사람들이 달려가 따르는 것을 또한 어떻게 금하고 억제할 수 있겠는가?’ 했었습니다. 송시열의 상소 내용에서 말한 바 ‘윤선거가 하는 것을 보고 본받아서 윤휴에게 뛰어들어가는 사람을 이루 셀 수 없다.’고 한 것은 곧 사실에 의거하여 말을 한 것인데, 나양좌(羅良佐) 등이 터무니없고 망령된 것으로 돌렸으니, 어찌 사실을 자세히 알지도 못하고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윤선거가 여러 차례 송시열에게 서함을 보내어 당시의 인물을 논하면서 윤휴를 으뜸으로 삼았었고, 다름 사람에게 보낸 서함에서는 송시열이 윤휴와 덕(德)을 같이하지 못함을 깊이 근심하면서 ‘잠을 편히 잘 수 없다……’고까지 했었습니다. 이 시기에 주고받은 말들이 모두 이수언(李秀彦)의 상소 속에 실려 있습니다. 송시열이 윤휴를 임용(任用)한 것은 애를 쓴 부득이한 것이었습니다. 이러므로 상신(相臣) 이후원(李厚源)이 일찍이 송시열을 책망하기를, ‘언제는 윤휴를 이단(異端)이라 해 놓고 이번에 진선(進善)에 의망(擬望)했으니, 세자(世子)로 하여금 이단을 배우게 하려는 것입니까?’ 하니, 송시열이 답변하기를, ‘공론이 이미 그러하고 또한 주자(朱子)가 일찍이 육씨(陸氏)를 배척하면서도 오히려 그 문인(門人)들로 하여금 육씨의 강론을 듣게 한 일을 생각한 것이니, 내가 윤휴를 주의(注擬)할 것은 또한 주자의 이런 뜻과 같은 것입니다.’ 했었습니다. 이 후원이 또 책망하기를 ‘이미 경박하고 과장된 의논에 흔들려 놓고 주자와 육씨의 일을 끌어대는 것은 무슨 일입니까?’ 하니, 송시열이 웃으면서 과오임을 자복했었습니다. 송시열이 윤휴를 배척한 것은 과연 예송(禮訟) 때문인데, 윤휴를 주의(注擬)한 것이 과연 자기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을사년143) 9월에 송시열이 윤선거 및 이유태(李惟泰)와 동학사(東鶴寺)에서 모였을 때 송시열이 윤선거에게 말하기를, ‘형이 여주(驪州)의 윤(尹)에게 요사이의 소견이 어떻습니까?’ 하니, 윤선거가 대답하기를, ‘그는 곧 음침하고 마음이 검은 사람입니다.’ 하였습니다. 송시열이 ‘그렇다면 형과의 교분(交分)은 어떻습니까?’ 하니, 윤선거가 소리를 높여 답변하기를, ‘어찌 음침하고 마음이 검다고 해놓고서 끊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므로, 송시열이 말하기를, ‘형이 이제부터는 시원하겠습니다.’ 했었습니다. 윤선거가 간 다음에 이유태가 말하기를, ‘윤길보(尹吉甫)가 겉은 비록 엄격하지만 속은 실제로 허약하고 정이 많아 믿을 수 없습니다.’ 하므로, 송시열이 책망하기를, ‘어찌 그러한 윤길보이겠습니까? 형이 잘못입니다.’ 했었습니다. 그 이듬해에 윤선거가 또 그의 말을 바꾸어 송시열에게 서함을 보내기를, ‘동학사(東鶴寺)에서 모여 말한 백흑(白黑)은 단지 논의(論議)상으로 말한 것이고, 인품(人品)의 감식(鑑識)은 또한 별개입니다.’ 하므로, 송시열이 그제야 이유태의 밝은 소견에 깊이 탄복했었습니다. 윤선거가 죽은 뒤에 그의 아들 윤증(尹拯)이 또한 유찰(遺札)을 전사(傳寫)하여 송시열에게 드렸었는데, 송시열이 이에 있어서 윤선거가 윤휴를 두둔한 마음과 그의 아들이 이를 준수하려 하고 있음을 굳게 의심하면서 정론(定論)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송시열이 윤선거에게 대하여 말은 끊었다고 하면서 실지는 끊지 않았다고 의심한 것을 잘못이라고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유태가 또한 일찍이 송시열에게 말하기를, ‘윤길보(尹吉甫)가 공(公)이 윤휴와 끊지 않는다고 책망한 것 때문에 윤휴에게 조금 흔적을 보였었는데, 윤휴가 크게 화를 내어 강도(江都)에서의 일을 들먹인 것을, 윤길보가 그의 매서(妹婿)144) 권준(權儁)에게서 듣고는 크게 겁을 내어 다시 그와 서로 두텁게 지내기를 전일보다도 더하게 되었으니, 윤길보가 윤휴와 두터워진 것은 진실로 본의가 아닐 것입니다.’ 하니, 송시열이 이 말을 듣고서는 안타깝게 여기기를, ‘주자(朱子)의 이른바 「사군자(士君子)가 한 번 입신(立身)에 실패하고 나면 만사가 와해되는 것이다.」 한 것을 지금 윤길보에게서 더욱 증험하겠다.’고 했었습니다.
지금 나양좌(羅良佐) 등이 전연 이러한 곡절을 모르고서 이에 윤선거가 윤휴를 두둔한 것은 성심으로 세상을 근심한 일로 돌리고, 송시열이 윤휴를 배척한 것은 충격을 주어 혼란시킨 것이라 하였으며, 또한 송시열이 윤선거를 배척한 것을 가지고 규계(規戒)를 싫어하여 뒤쫓아서 보복(報復)하기 위해 한 것처럼 해 놓았으니, 이 또한 가소로운 일입니다. 나양좌 등이 또한 말하기를, ‘송시열이 부질없이 윤증(尹拯)과 주고받은 서함에 충격받아, 위로 그의 아비까지 추하게 들추어 헐뜯었다.’고 했는데, 이는 소인(小人)의 생각으로 망령되게 현자(賢者)의 마음을 추측한 것입니다. 윤선거는 윤휴를 구원한 것 때문에 스스로 송시열에게서 떨어지게 되고, 윤증은 또한 송시열이 그의 아비를 불만스럽게 여김을 원망하여 드디어 모함하고 욕하게 된 것입니다. 대개 윤증이 송시열을 비난하게 된 것은 요사이 두어 해 사이의 일이고, 송시열이 윤선거를 윤휴의 당으로 책망한 것은 당초부터 그러했었습니다. 또 송시열이 일찍이 송상민(宋尙敏)에게 보낸 서함에 이르기를, ‘내가 윤길보에게 먼저 당여(黨與)를 다스려야 되겠다고 배척하고 있는데, 어떤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송상민이 말하기를, ‘내가 윤장(尹丈)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는지 오래인데, 그의 가법(家法)이나 행동하는 것을 보면 지금 세상에 견줄 사람이 드문데 오직 의논하는 말은 항상 이해(利害)쪽에 있으니, 이는 알 수 없습니다.’ 했었습니다. 대개 먼저 당여를 다스려야 한다는 말을 비록 김극형(金克亨)에게는 한 번만 말했었지만, 윤선거에게는 항상 이를 가지고 책망하기를 그만두지 않았었습니다. 이래서 송시열이 앞서 올린 상소에 ‘정도에 지나치게 한 것을 스스로 허물합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또 윤휴가 윤선거를 치제(致祭)한 글을 가지고 윤선거가 윤휴를 끓은 증거로 삼고 있지만, 그 제문에 이르기를, ‘당신이 나더러 망령된 짓을 하여 세상의 화(禍)에 걸리게 되었다고 한 것은 선조(先朝)가 윤휴를 버리고 송시열이 윤휴를 배척한 것을 가지고 세상의 화로 여긴 것입니다.’ 하고, 또 이르기를, ‘내가 당신더러 스스로 수립(樹立)되지 못했다고 한 것은, 윤선거의 마음은 이미 보았지만 송시열에게 몰리어 스스로 수립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했습니다. 이는 모두가 서로 애호하고 서로 아끼느라 한 말인 데다가, 그의 아들이 이미 윤휴의 제전(祭奠)을 받아들였고 또한 그 제문(祭文)을 읽도록 했으니, 그들이 말하는 ‘끊기를 기하지 않아도 자연히 끊어지게 된 것이다.’라고 한 것이 과연 말이 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윤선거가 윤휴에게 이미 그의 화심(禍心)을 공격한 일도 없었고, 송시열에게는 긴 서함을 써 놓고도 보내지 않았으니, ‘이모저모로 규계(規戒)하고 책망하며 논쟁을 그만두고 혼란이 바로잡아지게 되기를 바랐다.’는 것을 신(臣)은 감히 믿을 수 없습니다.
강도(江都)에서의 일에 있어서는, 윤선거가 병자년145) 봄을 당해 많은 선비의 주창(主唱)이 되어 오랑캐의 사자(使者)를 목베자고 청하면서 말하기를, ‘차라리 장차 의리를 지키다가 죽을지언정 의롭지 못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강도(江都)로 들어가서는 또한 분사(分司)에 글을 올려 당장만 편하려고 하는 것을 책망했고, 또한 강을 건너서 전진(前進)하여 근왕(勤王)146) 하는 일을 하도록 청했으나 분사에서 살피지 않자, 드디어 모든 사우(士友)들과 같이 죽기로 언약하고 대오(隊伍)를 짜기를 청했었습니다. 오랑캐들의 군사가 강을 건너오게 되자, 김익겸(金益兼)·권순장(權順長)은 김상용(金相容)과 함께 불타 죽고 이돈오(李惇五)는 또한 목매어 죽었는데, 윤선거는 홀로 노예(奴隷)가 되어 구차하게 죽음 면하고서, 그가 평소에 자부하던 늠름한 기상은 도무지 모두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난리 뒤에는 김집(金集)의 문하(門下)에 귀의(歸依)하여 독실한 뜻으로 학문을 하고 세상 일에는 뜻을 끊으므로, 송시열이 그전의 잘못을 염두에 두지 않고 더불어 벗이 되었었습니다. 전일에 올린 상소에 ‘강도에서의 일로 말하면 권순장과 상반되었지만, 난리 뒤의 일로 말하면 글을 읽으며 뜻을 지키고 행동하는 기품(氣稟)이 신(臣)은 비교도 되지 않기에 일찍이 두려운 벗으로 여겨 왔는데, 불행히도 윤휴에게 중독(中毒)되어 그만 다른 사람이 되어 세도(世道)에 해로운 사람이 되어 버렸다.’고 한 것은 이미 그의 단점도 숨기지 않고 또한 그의 선(善)도 엄폐하지 않은 것으로서, 모두가 지극히 공정하여 사정(私情)이 없는 마음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런데 의외에도 나양좌 등이 더욱 한과 노기(怒氣)를 품고서 송시열의 말을 일체 모함과 비방으로 돌리고, 심지어 ‘남이 자기를 그르게 여기는 것에 성내어 도리어 그 사람의 부모를 헐뜯는 것은 항간(巷間)의 어린아이들도 부끄럽게 여기는 바로서, 사대부(士大夫)들 사이에 일찍이 이런 풍습이 있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무리들이 비록 자기 스승의 과오를 염폐하여 두둔하고자 한다 하더라도 차마 이렇게 두서없이 헐뜯고 욕하는 말을 하여 대로(大老)에게 가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말하기를, ‘윤선거는 받은 직사(職事)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병란(兵亂)을 피하려고 들어갔다가 군사가 닥치자 떠난 것으로서, 이는 곧 선비의 정해진 분수이고 진실로 죽어야만 할 의리가 없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죽지 않은 것을 억지로 의리를 만들고 송시열의 ‘상반(相反)되었다.’는 말을 배척하고자 한 것인데, 이는 단지 송시열을 모함한 것뿐만 아니라 또한 윤선거도 모함하게 된 일입니다. 윤선거는 이름은 비록 선비이지만 자처(自處)함이 보통 직사(職事) 있는 사람보다도 더했었는데, 성첩(城堞)을 지키며 대오(隊伍)를 짠 뒤에, 어찌 군사가 닥치므로 떠났다고 스스로 핑계하여 구차하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윤선거가 올린 소장(疏章) 및 사람들에게 보낸 서찰(書札)을 보면, 그가 강도(江都)에서의 일 때문에 죄를 인책하며 자신을 후회하는 뜻이 말의 표면에 넘치고 있습니다. 또 강도의 난리 뒤에는 이미 윤선거가 그의 아내를 죽도록 몰아세웠다는 비방이 있었습니다. 대개 강도에서 절개를 지켜 죽은 부녀(婦女)들을 즉시 모두 정문(旌門)했었지만 유독 운선거의 아내는 못하다가, 40, 50년 뒤에서야 비로소 정문하도록 허락했었습니다. 당초에 윤선거 역시 그의 아내가 자진해서 절개를 지켜 죽어간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지만 세상의 공론이 믿지 않다가, 윤선거가 자신을 30여년이나 지켜 종신토록 나서지 않게 된 다음에야 비로소 세상이 그의 말을 믿음직하다고 여겨, 이렇게 추후의 특전(特典)이 있게 된 것입니다. 정축년147) 이후에 윤선거를 욕하고 비방하게 된 것은 이를 미루어보아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송시열이 만들어낸 비방이겠습니까? 또 송시열이 지은 《삼학사전(三學士傳)》의 발어(跋語) 및 윤선거에게 치제(致祭)한 글의 내용에서 두어 구절의 말을 인용하여 송시열의 전후의 말이 서로 어그러진다고 증거대고 있는데, 이는 더욱 그렇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윤선거의 강도에서의 일이 비록 권순장(權順長) 등과는 상반되지만, 그 난리 이후에 자정(自靖)하며 죽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했음은 그의 마음이 또한 진실로 절의(節義)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송시열이 그 발문에 있어서 먼저 강도에서 절사(節死)한 사람들에 대하여 서술하고, 또한 한 구절의 반전(反轉)하는 말을 하기를, ‘윤선거가 한 일은 비록 같지 않지만 일치(一致)한 것으로 귀결된다.’고 한 것입니다. 이미 같지 않다고 했으니 곧 상반된 것이나, 또한 일치한다고 했으니 곧 그가 난리 이후에 의리 지킨 것을 허여(許輿)한 것입니다. 제문(祭文)의 내용에 ‘지주(砥柱)’이니, ‘일성(一星)’이니 하는 말들도 난리 이후에 한 일을 가리킨 것이고, 제문에 또한 ‘중간에 큰 난리를 만났을 적에 와전(瓦全)148) 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어구가 있습니다. ‘와전’은 이미 옥쇄(玉碎)149) 와 같지 않은 것이니, 이 제문에서도 포폄(褒貶)한 것을 또한 자연히 볼 수 있는데, 어찌 전후의 말이 서로 어그러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그들의 소위 ‘남한 산성(南漢山城)에서나 강도(江都)에서나 똑같았다.’는 말도 반드시 가리켜서 배척한 데가 있는 말이고, 또한 김상헌(金尙憲)·정온(鄭蘊)의 일을 들면서 윤선거와 더불어 다같이 백대(百代)토록 할 말이 있을 것이라고 했으니, 사사(邪辭)와 둔사(遁辭)가 심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체로 남한 산성의 그때 일은 진실로 천하의 큰 변이었습니다. 그러나 대가(大駕)가 성에서 내려올 때 약간의 신하만 뽑아 따르게 했었기에, 대가가 환도(還都)한 뒤 뒤에 떨어져 있던 여러 신하들이 더러는 조정으로 돌아오고 더러는 시골로 갔었습니다. 이는 강도에 오랑캐의 기병(騎兵)이 마구 들어와 살육(殺戮)하고 사로잡고 한 때와는 일의 형세가 현저하게 달랐기 때문에, 강도에서는 사절(死節)하는 사람이 진실로 많았었지만 남한 산성에서는 없었습니다. 김·정(金鄭) 두 신하에 있어서는 강화(講和)를 서두르는 날을 당해 분하고 원통함을 견디지 못하여 더러는 단식(斷食)하고 더러는 칼을 꽂았었지만, 마침내 죽어버리지 않은 것은 몸을 더럽힌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찌 창졸간에 사로잡혀 노예가 됨으로서 구차하게 면한 사람과 동등하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인용한 미복(微服) 등의 말에 있어서는 한 차례의 웃음거리도 못됩니다. 어찌 감히 노예가 되기 위한 미복을 공자(孔子)가 송(宋)나라를 지날 적의 미복과 비할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목천(木川)에서의 일이라는 것도 곡절이 있습니다. 윤선거가 죽은 뒤에 이산(尼山)의 사자(士子)들이 장차 사우(祠宇)를 세우려고 통문(通文)을 내보내어 이웃 고을들에 알리는데, 목천 사람 중에 ‘강도(江都)에서 포로되었던 사람을 어찌 향사(享祀)할 수 있느냐?’고 그 통문에다 쓴 사람이 있었습니다. 송시열이 이런 말을 듣고서 이상(李翔)에게 이르기를, ‘자네가 지금 원장(院長)인데 장차 어떻게 밝혀내어 바로잡겠는가?’ 하니, 이상이 원유(院儒)들을 시켜 적발(摘發)하도록 하고 이산(尼山)에 글을 보내어 그 통문을 다시 달라고 하였는데, 이산의 유림(儒林)들이 대답하기를, ‘당초의 통문이 이미 돌아오지도 않았고, 오래 된 일이므로 시끄러운 단서를 일으킬 필요가 없다.’고 했었습니다. 목천의 유림들이 재차 통고하기에 미쳐서도 또한 대답하기를, ‘통문에 원래 그런 것을 기록한 일이 없었다.’고 하여, 전후에 답한 말이 서로 맞지 않았었는데, 윤증(尹拯)이 이에 서함으로 여러 차례 이런 말의 근거를 송시열에게 힐문하다가 마침내는 송시열이 조작한 것으로 돌렸었습니다. 아! 말을 조작하여 남을 욕되게 하는 짓은 향당(鄕黨)의 자호자(自好者)150) 도 하지 않는 것인데, 이를 가지고 송시열을 의심하고 있으니, 다른 것이야 또한 어찌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또 ‘송시열이 목천 사람들은 호향(互鄕)으로 배척하면서도 이경화(李景華) 등의 통문과 상소의 말은 배척하지 않았다.’고 하여, ‘자기의 문도(門徒)는 모두 호향인데도 태연하게 서로 용납하고 있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대개 목천 사람이 운운(云云)한 말은 진실로 윤선거가 정축년151) 에 비방받았던 말인데, 그 뒤에 수립(樹立)해가는 바에 따라 세상에서 현자(賢者)라고 칭찬하게 되었으니, 현자를 위해서는 은휘(隱諱)해야 하는 도리로 보아 어찌 감히 방자하게 그와 같이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로써 송시열이 호향에 비하게 된 것인데, 그 뒤에 윤증(尹拯)이 망령되게 그의 아비를 높여,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는 참으로 입산(入山)152) 했던 잘못이 있었지만 그의 아비는 당초부터 죽어야 할 의리가 없었다고 하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중외(中外)의 사림(士林)들이 일제히 분개하여 선정을 위해서 변명하려 하고, 이어 윤선거의 강도(江都)에서의 일을 배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중에는 비록 더러 망령되고 경솔하여 맞지 않는 말이 있기도 했지만, 또한 윤증 스스로가 초래한 것이었습니다.
송시열이 윤선거에 대하여 생존했을 적에는 책선(責善)하는 도리를 다한 것이고, 그가 죽은 뒤에 한 바는 또한 주자(朱子)가 여조겸(呂祖謙)에게 하듯이 한 것인데, 이것이 과연 생전과 사후(死後)에 있어 차이가 있습니까? ‘윤휴에게 중독(中毒)되어 그만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한 것에 있어서는, 윤선거가 항시 윤휴를 두둔하는 뜻이 있어 인품(人品)을 들어 논의하면서 두 가지로 나누어 보기까지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윤선거가 죽은 뒤에 윤휴의 화(禍)가 과연 어떠했습니까? 그런데도 그의 아들이 오히려 송시열의 선견(先見)에 복종하지 않고서 기필코 그의 아비가 말하던 보합(保合)만 옳게 어겼으니, 과연 세도(世道)에 해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말하기를, ‘윤선거는 산림(山林)에서 일생을 마치며 이해(利害)나 득실(得失)과 경탈(傾奪)153) 하고 당비(黨比)하는 사욕(私欲)을 마음속에 두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언론(言論)과 지취(志趣)가 송시열과 차이나는 것이 많았습니다.’ 하여, 마치 송시열은 이해·득실·경탈·당비에 끌리는 사람처럼 해 놓았는데, 이는 바로 윤선거의 병폐를 송시열에게 옮겨 놓은 것입니다. 진실로 송시열이 이해(利害)를 헤아리는 마음이 있었다면 당초 무엇 때문에 윤휴를 배척하다가 당화(黨禍)에 거의 죽게 되고, 경탈(傾奪)하고 당비(黨比)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또한 무엇 때문에 윤선거를 배척하다가 참소하는 자들에게 곤욕을 받게 되었겠습니까? 또 ‘윤선거가 평생에 준수(遵守)한 바는 그의 외조부(外祖父) 성혼(成渾)의 학문이고, 찾아가 바로잡아간 자는 김집(金集)이었는데, 그의 아버지 김장생(金長生)을 끌고 올라가 이이(李珥)의 적통(嫡統)을 삼은 사람입니다.’ 하고, 또 ‘가정을 놓아 두고 사부(師傅)를 받들되 궁극(窮極)을 주자(朱子)의 법문(法門)에다 대어 놓았으니, 연원(淵源)의 유원(悠遠)함과 문로(門路)의 바름은 모든 사람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했으니, 이는 대개 학문의 정맥(正脈)을 윤선거에게 돌리고 송시열을 사문(斯文)의 밖으로 배척한 것입니다. 공사(公私)·소장(消長)·시비(是非)·호오(好惡)를 가려야 함을 들어 전하(殿下)께 권면하기까지 하고, 또한 인현(人賢)이니 사직(社稷)이니 경위(傾危)니 백육(百六)의 액운(厄運)이니 하는 등의 말을 들어 죄를 송시열에게 돌렸습니다. 어찌 세도(世道)가 이지경이 되어 이런 망극(罔極)한 말이 있을 줄 알았겠습니까? 윤선거가 강도(江都)에서의 일을 겪으면서는 김집(金集)에게 귀의하여 정학(正學)에 종사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전의 습관이 아직도 남아 있고 새로 즐기는 것은 달가와하지 않았습니다. 이래서 송시열이 ‘세상 물정에는 익숙하지만 의리에 있어서는 생소하다.’고 했던 것입니다. 윤선거가 김집(金集)에게 있어 그가 받은 은혜가 더없이 컸기 때문에, 그가 죽은 뒤에 안장(安葬)하기 전까지는 빈소(殯所) 곁에 와 있으면서 날마다 제전(祭奠)에 참석했었고, 매번 김집의 기일(忌日)이 되면 또한 반드시 와서 방문하였었습니다. 그런데 윤선거의 묘표(墓表)에는 김신재(金愼齋)154) 와 제공(諸公)들에게 종유(從遊)한 것으로 말을 하여 ‘종유’라고 했으니, 이는 또한 김집을 순수한 스승으로 삼지 않은 것입니다. 요사이 혹자가 전하기를, ‘윤증(尹拯)의 집안이 조광조(趙光祖)의 도맥(道脈)을 성수침(成守琛) 및 성혼(成渾) 부자(父子)에게로 돌리어 윤선거에게 바로 대고, 이황(李滉)·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 등은 별개의 파(派)로 돌리어 송시열을 배척하려는 계책을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나양좌(羅良佐) 등의 상소에 비록 이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윤선거의 묘문(墓文)으로 본다면 김집(金集)을 순수한 스승으로 삼지 않은 것은 대개 또한 별개의 파로 돌리려는 뜻입니다. 하물며 윤선거가 문원공(文元公)에게 있어서 ‘끌고 올라갔다.’는 말은 더욱 사실이 아닐 것입니다. 윤선거가 일찍이 사우(士友)들과 서당(書堂)에 모였을 적에 갑자기 문원공에 대해 불손(不遜)한 말을 했었는데, 이어서 어떤 한 사람이 문간공(文簡公)에 대해 역시 불손한 말을 하자, 윤선거가 분을 견디지 못하여 그만 그의 빰을 쳤었으니, 그가 문간공을 존숭하는 까닭에 그 사람에게 화를 낸 것은 또한 윤휴(尹鑴)가 문간공을 업신여기면서도 화내지 않은 것과는 차이가 있는 일입니다. 이런데도 집을 놓아 두고 사부(師傅)를 받들어 위로 문원공의 연원(淵源)에 소급(斥及)했다는 것은 신(臣)들이 감히 알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윤증이 송시열의 문생(門生)으로서 유감을 품고 원망을 쌓다가 필찰(筆札)에다 헐뜯고 욕하게 된 뒤에는 뭇사람의 감정이 이와 합세(合勢)하여 안팎으로 서로 호응하여 사당(私黨)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지난날에 송시열을 위해 사법(師法)을 들어 원통함을 호소하던 부류들이 또한 허다하게 관망(觀望)하며 이해만 따져 개두 환면(改頭換面)하고 있습니다. 또 한편에서는 폐척(廢斥)되었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서로 호응하여 칭찬하지 않음이 없고,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사람이 적은 것을 업신여기면서 더욱 기세를 부리고 있으니, 나양좌(羅良佐) 등의 오늘날의 일은 또한 어찌 믿는 데가 있어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윤휴가 일찍이 뜻을 얻게 된 지 6, 7년이었지만 윤씨(尹氏)에게 대우하기를 어떻게 했었고, 윤씨가 윤휴의 당(黨)이 된 것이 과연 어떤 일이었습니까?’ 했습니다.
아! 사문난적인 윤휴가 뜻을 얻게 된 뒤에 송시열의 문인들이 모두 참혹한 화를 입었었고, 윤증(尹拯)이 문인(門人)이자 아들과 같다고 불리우는 사람으로서 아헌(亞憲)을 제배(除拜)하게 되었었지만, 이미 송시열의 원통함을 한 마디도 아뢰지 않았고 또한 윤휴의 죄악을 배척하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었으니, 그들이 서로 어울렸었던 것을 대개는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윤휴의 화심(禍心)을 윤선거가 종시 알아차리지 못하여 오히려 비호(庇護)하는 것이 남에게 뒤질까 걱정했고, 죽음에 임박했던 해에는 보내려고 한 듯한 서함을 만들어 건사(巾笥)155) 속에 간수해 두었었습니다. 윤증은 또한 그의 가장(家狀)을 지으면서 그 출처(出處)를 서술할 적에 보내려고 한 듯한 서함을 하나의 큰 의논거리로 삼기를, 마치 범충선(范忠宣)156) 이 신주(新州)를 구원했을 적에 소자문(邵子文)157) 이 범충선을 명도(明道)158) 에게 견주었던 의도처럼 하려고 했으니, 그의 마음의 소재를 진실로 이미 알 수 없습니다. 또한 하물며 강도(江都)에서의 일을 윤선거 자신이 구차하게 살려고만 했던 실상을 은휘(隱諱)하지 않았으니, 뒷사람들의 도리는 다만 마땅히 그 이후에 수립(樹立)해간 것을 밝혀야 할 일이지, 어찌 그가 죽지 않은 것을 당연한 의리로까지 여기고, 도리어 입근(立慬)한 사람들을 마치 지나치게 용기를 부린 것처럼 할 수 있겠습니까? 또 효종(孝宗)과 현종(顯宗) 이성(二聖)께서 윤선거를 불러내신 것은 곧 성인(聖人)들이 흠 있는 데만 버리고 옥돌을 취한 것과 같은 훌륭하신 덕입니다. 지금 이를 빙자하여 그의 잘못까지 치워 놓고 한 시대의 유종(儒宗)으로 추앙하려 하니, 그들의 생각이 너무나 허술하기도 하고 또한 가소로운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들이 스승을 위해 상세하게 신변(伸辨)한 말들은 지극히 명백하고 통쾌하게 되어 있다. 국가의 일을 근심하고 현자(賢者)를 존중하는 성의를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18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99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윤리-강상(綱常) / 풍속-예속(禮俗) / 사상-유학(儒學)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어문학-문학(文學)
- [註 140]계사년 : 1653 효종 4년.
- [註 141]
변장자(卞莊子) : 춘추(春秋) 시대 노(魯)나라 변읍(卞邑)의 대부. 용력(勇力)이 있으므로, 제(齊)나라가 노나라를 치고 싶으면서도 감히 하지 못했음. 소를 잡아먹던 범 두 마리가 서로 많이 먹으려고 싸우다 하나가 지치게 되자, 칼로 찔러 한꺼번에 범 두 마리를 잡았었음.- [註 142]
문간공(文簡公) : 성혼의 시호.- [註 143]
을사년 : 1665 현종 6년.- [註 144]
매서(妹婿) : 매제(妹弟).- [註 145]
병자년 : 1636 인조 14년.- [註 146]
근왕(勤王) : 충성을 다함.- [註 147]
정축년 : 1637 인조 15년.- [註 148]
와전(瓦全) : 아무 하는 것 없이 겨우 신명(身命)만 보전함. 옥쇄(玉碎)의 반대.- [註 149]
옥쇄(玉碎) : 공을 세우고 죽거나 충성을 다하고 깨끗이 죽음.- [註 150]
자호자(自好者) : 좋은 명성이 붙기를 좋아하는 사람.- [註 151]
정축년 : 1637 인조 15년.- [註 152]
입산(入山) : 출가하여 중이 되는 것.- [註 153]
경탈(傾奪) : 서로 다투고 빼앗음.- [註 154]
김신재(金愼齋) : 신재는 김집의 호.- [註 155]
건사(巾笥) : 명주로 바른 상자.- [註 156]
범충선(范忠宣) : 이름은 순인(純仁) 충선은 시호.- [註 157]
소자문(邵子文) : 이름은 백온(伯溫).- [註 158]
명도(明道) : 북송(北宋) 시대의 학자 정호(程顯)의 호.○辛酉/宋時烈門人前府使韓聖輔等, 爲時烈上疏, 伸辨羅良佐之疏, 略曰: "時烈當鑴之凌駕先正, 吹索朱子, 便以爲斯文之賊, 而宣擧則遮護, 以時烈憂世之心, 安得無忘身斥鑴之事, 安得無先治黨與之說乎? 癸巳七月, 時烈與宣擧等, 會于黃山書院, 極言鑴之爲異端, 則宣擧曰: ‘公可畏希仲, 不須自作爭端, 以爲卞莊子之資。’ 時烈乃引陽擠陰助之語以斥之。 良佐等, 以時烈之亂賊斥鑴, 黨助責宣擧之事, 爲在禮訟之後, 而其前未嘗有聲鑴之罪云者, 非誣則妄也。 且宣擧, 至以鑴所改《中庸註說》, 傳謄誇耀。 時烈嘗至其侄基厚家, 見鑴所著書, 而卽投於地曰: ‘何物尹鑴乃敢如此? 汝等又何敢如此?’ 基厚曰: ‘如此則尼山 尹某, 何以亦如此耶?’ 時烈曰: ‘以人之誤而效其尤, 則汝之不肖甚矣。 汝不悛改, 則勿復見我也。’ 鑴又作《理氣說》, 竝斥先正臣李滉、李珥、成渾之見解, 而於渾則尤加凌侮, 時烈疏中文簡公不數者以此。 而宣擧亦不知惡, 豈非惑之甚者也? 非但時烈疑宣擧。 浚吉亦曰: ‘吾父子以不尊希, 得罪於淸議云者? 蓋亦不平之言也。 故時烈嘗痛恨曰: ‘如吉甫者, 於鑴尙且如此, 則少輩之奔趨, 又何以禁抑乎?’ 時烈疏中所謂: ‘視效宣擧, 投入於鑴, 不勝其多云者。’ 乃是據實而言者, 而良佐等歸之虛妄, 豈未詳其實而然耶? 宣擧屢書於時烈, 論當代人物, 以鑴爲首, 而至於與人書, 深憂時烈之不能與鑴同德, 至曰: ‘寢不得安云云。’ 此時往復說話, 皆載於李秀彦疏中。 時烈之用鑴, 出於黽勉不得已也。 故相臣李厚源, 嘗責時烈曰: ‘以鑴嘗謂異端, 而今擬進善, 欲使世子學異端耶?’ 時烈答曰: ‘物議旣如此, 且念朱子嘗斥陸氏, 而猶使其門人聽講於陸, 吾之注擬鑴, 亦朱子此意也。’ 厚源又責曰: ‘旣撓於浮誇之論, 乃引朱 陸事, 何也?’ 時烈笑而服其過。 時烈之斥鑴, 果由禮訟, 而其所注擬, 果出於己心乎? 乙巳九月, 時烈與宣擧及李惟泰, 會于東鶴寺, 時烈謂宣擧曰: ‘兄於驪尹, 近日所見何如?’ 宣擧答曰: ‘彼便是陰也黑也。’ 時烈曰: ‘然則兄交道何如。’ 宣擧厲聲答曰: ‘豈有謂陰與黑而不絶之理乎?’ 時烈曰: ‘兄從此灑然矣。’ 宣擧去後。 惟泰曰: ‘吉甫外雖莊嚴, 內實虛㤼, 未可信也。’ 時烈責之曰: ‘寧有如許吉甫乎? 兄誤矣。’ 翌年, 宣擧又變其說, 與書時烈曰: ‘東鶴會所謂白黑, 只就論議上而言。 人品之鑑, 又是別也。’ 時烈於是深服惟泰之明見, 及宣擧沒後, 其子拯, 又以遺札, 寫呈時烈。 時烈於此, 固疑宣擧右鑴之心, 其子欲遵守而爲定論也。 然則時烈之於宣擧, 疑其言絶而實不絶者, 不可謂過也。 惟泰又嘗語時烈曰: ‘吉甫以公之責不絶鑴, 稍存形迹於鑴, 則鑴大怒而擧江都事。 吉甫因其妹壻權儁聞之, 大生惶㤼, 復與相厚, 過於前日吉甫之厚, 鑴誠非本意云。’ 時烈聞其言, 愍然曰: ‘朱子所謂士君子, 立身一敗, 萬事瓦裂, 今於吉甫益驗矣。’ 今良佐等, 全昧此曲折, 乃以宣擧之右鑴, 歸之於赤心憂世, 以時烈之斥鑴, 爲激之使亂, 又以時烈之斥宣擧, 爲出於惡規戒而追爲報復者然, 此又可笑。 良佐等又曰: ‘時烈徒激於尹拯往復之書, 詆訾之醜, 上及其父, 此以小人之腹, 妄揣賢者之心也。 宣擧以救鑴之故, 自異於時烈, 而拯又怨時烈之不滿其父, 遂至於誣辱, 夫拯之非時烈, 近在數年之間, 而時烈之責宣擧以黨鑴者, 自初而然矣。’ 又時烈嘗與宋尙敏書曰: ‘吾於吉甫, 有先治黨與之斥, 未知如何?’ 尙敏曰: ‘吾於尹丈, 承敎久矣。 見其家法制行, 則今世罕比, 惟議論常在利害上, 此未可知也。’ 蓋先治黨與之說, 雖一言於金克亨, 而於宣擧, 則常以此責之不已, 此時烈前疏所以過當自咎者也。 且以鑴祭宣擧文, 爲宣擧絶鑴之證, 而其曰: ‘子謂我妄攖世禍者,’ 以先朝之廢鑴。 時烈之斥鑴, 爲世禍也。 其曰: ‘我謂子不能自樹者。’ 以宣擧心是已見, 而逼於時烈, 不自樹立也。 此皆相愛相惜之言, 而其子旣受鑴奠, 又令讀其文, 則其所謂不期絶而自絶者, 果能成說乎? 宣擧於鑴, 旣無攻其禍心之事, 於時烈, 作長書而不與, 謂之左右戒責, 冀以息爭救亂者, 臣不敢信也。 至於江都事, 宣擧當丙子春, 倡多士, 請斬虜使曰: ‘寧將守義而斃, 不可以不義而存。’ 及入江都, 又上書分司, 責其偸安, 又請渡江前進爲勤王之擧, 而分司不省, 則遂與諸士友約同死, 請列行伍。 及虜兵渡江, 金益兼、權順長。 與金尙容同焚死。 李惇五亦縊死, 宣擧獨爲奴苟免, 其平日自許澟澟氣象, 都消盡矣。 然於亂後, 歸依金集之門, 篤志爲學, 絶意世路, 時烈不念舊愆, 與之爲友, 頃日之疏, 言其江都事則曰: ‘與權順長相反。’ 言其亂後事則曰: ‘讀書求志。’ 氣質行義, 非臣之比。 嘗以爲畏友矣。 不幸爲鑴毒所中, 便成別人, 以爲世道之害者, 旣不諱其短, 又不掩其善, 皆出於至公無私之心, 而不料良佐等, 益懷恨怒, 以時烈之言, 一歸之於誣謗, 至謂怒人非己。 反詈人父母者, 閭巷童孺之所恥, 未聞士夫間, 曾有此風。 渠輩雖欲掩護其師之過, 忍爲此無倫詬辱之言, 加於大老耶? 其言以爲宣擧非有所受職事也。 避兵而入, 兵至而去, 乃是士之常分, 固無可死之義, 欲以其不死, 曲成義理, 而斥時烈相反之言, 此則不但誣時烈, 亦所以誣宣擧也。 宣擧名雖爲士, 自處有加於尋常受職者, 而守堞爲行伍之後, 則何可以兵至而去, 自托而苟免也? 今觀宣擧疏章及與人書札, 其以江都事, 引罪自悔之意, 溢於辭表。 且江都亂後, 宣擧已有逼殺其妻之謗, 蓋江都死節婦女, 卽皆旌門。 而獨宣擧妻未也。 四五十年後, 始許旌門, 當初宣擧, 亦非不言其妻自辦死節, 而世議不之信, 及宣擧自守三十餘年, 終身不出, 而後世始以其言爲可信, 有此追典, 丁丑後, 宣擧詬謗, 推此可想。 此亦時烈之做謗耶? 又引時烈三學士傳跋語及祭宣擧文中數句語, 以證時烈前後言辭之相戾, 此尤有不然者。 宣擧江都事, 雖與順長等相反, 其亂後自靖, 恥其不死則其心亦固在於節義, 故時烈於其跋文, 先敍江都節死之人, 又下一轉語, 以宣擧爲事雖不同, 歸於一致, 旣曰不同, 則便是相反。 又曰一致, 則便許其亂後守義也。 祭文中砥柱一星等語, 亦指其亂後事, 而其文又有中罹大難, 匪欲瓦全之語, 瓦全旣不如玉碎, 則卽此祭文褒貶, 亦自可見, 何可謂前後之言相戾也? 且其所謂南漢江都一也之說, 亦必有所指斥, 而又引金尙憲、鄭蘊事, 以爲與宣擧, 竝有辭於百世, 可見其邪遁之甚也。 夫南漢當時之事, 誠天下之大變矣。 然大駕下城時, 抄取若干臣僚以從, 則大駕還都之後, 落後諸臣, 或還朝或還鄕, 此與江都虜騎亂入殺戮俘繫之日, 其勢懸殊, 故江都死節, 固多其人, 南漢則無之。 如金、鄭二臣, 當其爭媾之日, 不勝憤惋, 或絶粒或剚刃, 而終不死者, 以其身無汚故也。 豈與倉卒被俘爲奴苟免者, 同日道哉? 至其所引微服等語, 不滿一哂, 何敢以爲奴之服, 擬之於過宋之服哉? 所謂木川事, 亦有曲折, 宣擧沒後, 尼山士子, 將立祠宇, 發文以告, 傍郡木川人, 有以江都俘奴, 豈合享祀, 書於其通文者? 時烈聞此說, 謂李翔曰: ‘子方爲院長, 將何以紏正乎?’ 翔乃使院儒摘發, 通文尼山, 還索其文。 尼儒答以: ‘當初通文, 旣不還到, 久遠之事, 不必起鬨。’ 及木儒之再通。 又答以: ‘通文元無懸錄之事。’ 前後所答, 自相牴牾, 而拯乃以書屢詰其言根於時烈, 卒乃歸之於時烈之做作, 噫! 造言辱人, 鄕黨自好者, 亦不爲之, 以此疑時烈, 則他又何說? 又以時烈, 斥木川人以互鄕, 而不斥李景華等通文與疏語, 至謂己之門徒, 盡互鄕也。 恬而相容, 夫木川人所云云。 固是宣擧丁丑所被之謗, 而厥後所樹立, 世稱爲賢者, 則其在爲賢者諱之道, 何敢肆然如此也? 此時烈所以至擬於互鄕, 而其後尹拯, 妄尊其父, 至謂先正臣李珥, 眞有入山之失, 而其父初無可死之義, 於是中外士林齊憤, 欲爲先正發明, 而仍斥宣擧江都事, 其中雖或有妄率不中之語, 亦拯之所自取也。 時烈之於宣擧, 生盡責善之道, 死後所處, 又若朱子之於呂祖謙, 則此果爲有間於死生耶? 至於爲鑴毒所中, 便成別人云者, 宣擧常有右鑴之意, 至以人品論議, 分而二之, 宣擧死後, 鑴之禍, 果如何? 而其子猶不服時烈之先見, 必以其父保合之論爲是, 其果不爲世道之害乎? 又曰: ‘宣擧終身山林, 利害得喪, 傾奪黨比之私, 不入於胸中。’ 由是言論志趣, 多與時烈逕庭, 有若時烈爲牽於利害得喪傾奪黨比之事者然。 此正宣擧之病, 而移之於時烈者也。 苟使時烈, 有計較利害之心, 則初何以斥鑴而幾死於黨禍? 有傾奪黨比之心, 則又何以斥宣擧取困於讒賊哉? 又謂宣擧之平生所遵守者, 其外祖成渾之學也, 所就正者金集, 而泝其父金長生, 爲李珥世嫡者也。 又曰: ‘推家承師傅, 會其極於朱子法門, 淵源之遠, 門路之正, 有非諸人所能及。’ 此蓋以正脈歸之於宣擧, 而排斥時烈於斯文之外, 至以公私消長, 是非好惡之辨, 勉之於殿下, 而又以仁賢社稷, 傾危百六之厄等語, 歸罪於時烈, 豈意世道至此, 而有此罔極之言耶? 宣擧及經江都事, 歸依金集, 從事正學, 而然舊習猶存, 新嗜未甘, 此時烈所謂熟於世情而生於義理者也。 宣擧於集, 其恩莫大, 故及其卒後葬前, 來在殯側, 日參祭奠, 每値集忌祀, 又必來問。 而宣擧墓表, 乃以從遊於金愼齋諸公間爲言, 謂之從遊, 則是又不以集爲純師也。 近來或傳, 拯家欲以趙光祖道脈, 歸之於成守琛及渾父子, 直接於宣擧, 而如李滉、李珥、金長生等, 則欲歸於別派。 以爲斥時烈之計云矣。 今良佐等疏, 雖不敢及此, 以宣擧墓文觀之, 其不以金集爲純師者, 蓋亦歸之於別派之意也。 況宣擧之於文元公謂之泝, 則尤非其實, 宣擧嘗與士友會書堂, 忽於文元公, 發不遜語。 繼有一人, ? 啡文簡公, 亦發不遜語, 則宣擧不勝其憤, 便批其頰, 其所以尊文簡公, 怒於人者, 亦與鑴之侮文簡而不怒者有異, 以此而謂之, 推家承師傅, 上泝文元公之淵源, 則非臣等所敢知也。 拯以時烈門生, 蓄憾積怨, 乃至詬辱於筆札而後, 群憾與之合勢, 內外相應, 釀成私黨, 至於曩日, 爲時烈訟冤師法之類, 亦多觀望計較, 改換頭面, 且一邊廢斥之人, 同聲相應, 無不稱贊, 恃衆侮寡, 益肆其氣, 良佐等今日之擧, 亦豈無所恃而發也? 又以爲鑴嘗得志六七年, 其所以待尹氏者如何? 而尹氏之所以黨鑴者, 果何事也? 噫! 鑴賊得志之後, 時烈門人, 俱被酷禍。 而拯以門生號稱若子之人, 得拜亞憲, 旣不以一言白時烈之冤, 又不以一言斥鑴之惡, 其所以相與者, 蓋可見矣。 鑴之禍心, 宣擧終始罔覺, 扶護猶恐後人, 臨死之年, 作擬贈之書, 以爲巾笥之藏。 而拯又述其家狀, 敍其出處, 以其擬贈書爲一大議論, 有若范忠宣之救新州。 邵子文之以忠宣擬明道之意者然。 其心所在, 固已不可知矣。 又況江都之事, 宣擧自不諱其偸生之實狀, 則在後人之道, 只當明其後來樹立, 何可竝與其不死爲當然之義, 而反以立慬之人, 有若傷勇者然哉? 且孝顯二聖之招徠宣擧, 是聖人棄瑕取瑜之盛德。 今欲以此藉重, 洗滌其累, 而推爲一代之儒宗, 可見其計之甚踈而亦可笑也。" 答曰: "爾等爲師縷縷伸辦之說, 極其明白痛快, 其憂國尊賢之誠, 予甚嘉尙。"
- 【태백산사고본】 20책 18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99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윤리-강상(綱常) / 풍속-예속(禮俗) / 사상-유학(儒學)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어문학-문학(文學)
- [註 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