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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18권, 숙종 13년 2월 4일 임자 2번째기사 1687년 청 강희(康熙) 26년

봉조하 송시열이 나라를 다스리는 올바른 도리와 경계를 상소하다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현도 봉장(縣道封章)027) 하였는데, 그 상소의 대략에 이르기를,

"신이 일찍이 열성(列聖)께서 뜻하셨던 일을 가지고 한번 전하(殿下)의 앞에 진달하여 계술(繼述)하는 도리를 계달(啓達)하고 싶으면서도, 경복(更僕)028) 하더라도 끝낼 수 없는 일이요, 또한 한편으로는 청문(聽聞)을 번독(煩瀆)하게 되기 때문에 감히 하지 못했었습니다. 마침 듣건대, 전하께서 경연(經筵)에 임(臨)하시어 한탄하시면서 말씀이 만력 황제(萬歷皇帝)029) 의 훌륭한 덕에 미치셨다고 하니, 는 바로 비풍(匪風)과 하천(下泉)030) 이 변풍(變風)의 끝에 있게 되고 어지러움이 극도에 달하면 다스려지기를 생각하게 되는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신같이 미천한 자가 일찍이 효종(孝宗)의 너그럽고 은밀한 부탁을 받았었으니, 어찌 울부짖으며 눈물을 뿌려 위로 성상의 뜻을 만에 하나라도 보답하고 싶지 않겠습니까마는, 늙은 소와 같은 몸이라 채찍질을 한들 어찌하겠습니까? 다만 그날 경연의 신하들이 잠시 동안이라도 고사(故事)를 다 말씀드리지 못했기에, 청컨대 신(臣)이 진달해 보겠습니다.

옛적에 은(殷)나라 태사(太師)031) 가 동쪽으로 오게 되면서 우리 나라 사람들이 황극(皇極)032) 의 도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고려(高麗) 말엽에 와서는 정몽주(鄭夢周)가 나와서 용하변이(用夏變夷)033) 하여 대의(大義)를 밝게 내걸었었고,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는 더욱 존주(尊周)034) 는 대의(大義)를 주창하시어 온화 낙맥(溫禾洛麥)035) 같은 것도 오히려 감히 손대지 않으셨으니, 우리 나라 사람들이 피발 좌임(被髮左衽)을 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래로 본조(本朝)의 역대 임금들께서 대대로 충정(忠貞)을 독실하게 지켰고, 따라서 황상(皇上)의 돌보아줌을 받아 내복(內服)036) 과 같이 돌보아주게 되고 석뢰(錫賚)037) 도 또한 많아졌었습니다. 임진년038) 의 난리를 당해서는 팔도(八道)가 탕진되어 온나라 민생들 모두 어육(魚肉)이 되었었는데, 다행히도 황상이 를 듣고 발끈 화를 내어 온천하의 군사를 출동하고 온천하의 재물을 털어내어, 천위(天威)가 겹겹으로 진동하게 됨을 힘입어 흉악한 추왜(醜倭)들이 패하고 돌아가게 되었었습니다. 정유년039) 에 이르러 흉악한 칼날이 재차 날뛰게 되어서는, 우리 나라의 외롭게 남아 있는 백성으로서 어떻게 적들에게 저항할 수 있었겠습니까? 국가의 멸망이 만에 하나라도 바랄 것이 없게 되었었는데, 다시 황제(皇帝)가 마음 아파하며 불쌍하게 여기고서 재차 천병(天兵)을 출동하여 흉악한 무리들의 칼날을 쓸어내어 줌을 힘입어, 하늘이 맑아지고 땅이 안정되어 종사(宗社)가 편안해지고 민생들이 소생하게 되었었습니다. 무릇 우리 나라는 한 가지 털끝만한 것에서부터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까지도 황제의 덕을 입지 않은 것이 없으므로, 비록 무식한 상놈[常漢]이라 하더라도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죽도록 보답하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물며 우리 선조(宣祖)께서는 은혜를 생각하고 덕에 감사하며 힘을 다해 보답하려고 생각하심이 어떠하셨겠습니까?

그러므로 일찍이 서쪽을 등지고는 앉지도 않으셨고, 또한 ‘재조번방(再造藩邦)’이라는 네 글자를 대자(大字)로 써서 사모하는 성의를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광해조(光海朝)에 이르러 강홍립(姜弘立)김경서(金景瑞)가 심하(深河)에서 오랑캐에게 투항(投降)하였을 때를 당해서는 밀지(密旨)가 있다고 했었으니, 만일 그때에 김응하(金應河)가 전사(戰死)한 일이 없었다면 어떻게 천하에 해명할 수 있었겠습니까? 인목 대비(仁穆大姬)께서 광해군(光海君)의 죄상을 열거하기에 미쳐 밀지에 관한 일이 하나의 큰 제목(題目)이 되었었으니, 인조(仁祖)께서 반정(反正)하신 일은 더욱 천하에 광채가 있게 된 일입니다. 불행히도 정묘년040) 의 변(變) 때에는 일의 형세가 위태하고 급박하게 되어서 드디어 오랑캐와 강화(講和)했었는데, 만일 그때에 윤황(尹煌)·윤형지(尹衡志)같은 여러 신하가 없었더라면 또한 성조(聖朝)에 대해 해명할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강화가 성립된 뒤에 즉시 주문(奏文)을 마련하여 중국 조정[天朝]에 사과하자, 황상(皇上)이 불쌍하게 여기며 도리어 가장(嘉奬)하는 조서를 내렸었습니다. 그러나 즉시 조공(朝貢)하는 길을 해로(海路)로 바꾸게 되고 우대(優待)하던 뜻도 그만 달라지게 되어, 우리 나라 사람들이 이로부터 다시 황화(皇華)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또 불손(不遜)한 말이 광해군의 입에서 나와, 강화를 주장하던 여러 신하들이 스스로 모면하지 못하게 되었었습니다.

그러나 인조(仁祖)께서 특지(特旨)로 강화를 배척하던 유생(儒生) 윤명은(尹鳴殷)에게 관직을 제수했었으니, 거룩하신 뜻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때에 난(亂)을 피해 온 사람 모문룡(毛文龍)이 가도(豭島)에 와 있으면서 징색(徵索)을 한없이 하고, 또한 본조(本朝)를 중국 조정에 참소했었는데도, 인조께서 왕인(王人)041) 이라 하여 성의로 대우하기를 시종 변함없이 하셨고, 이 왕인(王人)이 섬 안에서 살해되자 시급하게 군사를 정돈하여 장차 죄를 발표하고서 토벌하려고 중국 조정에 주문(奏聞)했었습니다. 아! 인조께서 중국 조정에 대해 충성을 다하고 순종하기를 지극하게 하셨다 하겠습니다. 이 뒤부터 10년 동안은 오랑캐들의 공갈과 협박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었는데, 인조께서 항상 힘이 약해 떨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여 말씀하시기를, ‘차라리 나라와 죽게 될지언정 의리는 마땅히 죽기를 각오하고 지켜야 한다.’ 하시어, 성지(聖志)의 굳게 정해져 있음이 이러하셨습니다. 또한 불행하게도 병자년042)정축년043) 의 난(亂)에 사리가 궁하고 힘이 꺾이어 만부득이 권의(權宜)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아! 더구나 차마 말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 위태하고 급박한 때를 당하여 죽고 사는 것이 한순간에 달린 판에 인조께서 오히려 군신(羣臣)들을 거느리고 원조(元朝)에 망궐례(望闕禮)를 거행하시고 군신(君臣) 상하가 서로 보며 눈물을 씻었습니다. 강화가 이루어져 도성(都城)으로 돌아올 때를 당해 임금께서 말 위에서 목소리가 막히도록 통곡하시므로,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아뢰기를, ‘는 족히 치욕을 씻고 중흥(中興)하게 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했었습니다.

이로부터는 성절(聖節)044) 이 될 적마다 임금께서 혼자 후원(後苑)에서 아무도 몰래 성의와 예절을 펴고 북쪽을 바라보며 비통해하셨는데, 눈물이 비오듯 했었습니다. 금주(錦州)의 전역(戰役) 때에는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이 상소하여 진달하자, 성상의 마음에 더욱 애통이 절박해져 마치 살고 싶지 않으신 것 같았습니다. 홍익한(洪翼漢)삼학사(三學士)045)권순장(權順長) 등 삼유생(三儒生)의 죽음과 포수(砲手) 이사룡(李士龍)의 죽음에 있어서는 또한 족히 춘추(春秋)의 의리보다 빛이 나게 되었습니다. 그 뒤에는 조정에서 몰래 독보(獨步)를 군문(軍門)에 보냈었고, 개주(盖州)의 전역 때에는 고(故) 상신(相臣) 이완(李浣)임경업(林慶業)과 함께 사람을 시켜 물 속으로 헤엄쳐 가서 중국 장수에게 밀통(密通)하여 중국 조정에 전달(轉達)하게 하였으니, 중국 조정의 사람들이 더욱 본조(本朝)의 심사(心事)를 알게 되었었습니다. 효종 대왕(孝宗大王) 때에 와서는 성상의 마음이 이런 대의(大義)에 있어서 청천 백일(靑天白日)처럼 밝으시어, 임어(臨御)046) 하신 첫머리에 맨먼저 문정공(文正公)을 맞이하여 존숭하여 예우(禮遇)하고, 또한 상신(相臣) 이경여(李敬輿)의 상소에 답하기를, ‘지극한 애통이 마음속에 있는데, 날은 저물어가고 갈길은 멀다.’고 하셨었습니다. 또한 지금의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신(臣) 민정중(閔鼎重)에게 사대(賜對)하여 강개(慷慨)하게 일을 논하시면서 거의 눈물을 흘리시게 되었었으니, 만일 하늘이 성상의 수명을 연장해 주었다면 비록 중국을 청소해내지는 못하셨더라도 관문(關門)을 닫아버리고 조약(條約)을 거절하는 일은 넉넉히 하게 되셨을 것입니다.

선대왕(先大王)에 있어서는 비록 수성(守成)을 위주로 삼으셨으나, 이사룡(李士龍)의 아들을 포장(褒奬)하여 임용하고 강효원(姜孝元)의 자손을 속량(贖良)한 것을 가지고 본다면 성상의 뜻이 있는 바를 또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대개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깊은 어지심과 높은 의리가 와 같이 지극했는데도, 본조(本朝)는 나라가 작고 힘이 약하며 또한 제갈양(諸葛亮)047) ·이강(李綱)048) 과 같이 충성스럽고 지혜로운 신하들이 없어 죽음을 다 해 보답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보답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만 도리어 원망으로 덕을 갚는 짓을 하게 되었으니, 온나라 신민(臣民)이 어떻게 천지 사이에 설 수 있겠습니까? 이 이래로는 가뭄과 홍수, 일식과 지진이 없는 해가 없고,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재변이 달마다 생기게 되었습니다. 대개 천리(天理)가 없어지고 사람의 양심이 없어지고서야 어떻게 천심(天心)을 대접하게 될 수 있겠습니까? 옛적에 오랑캐인 원(元)이 중국에 들어가 주장할 때 누린내나는 살육을 일삼는 종류로서 요순(堯舜)과 문무(文武)의 강토를 더럽히고 어지럽혔으니, 는 진실로 천지의 큰 변이고 고금에 없더 역덕(逆德)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때 하늘이 내리는 재변을 이루 기록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의 추한 오랑캐 갈이(羯洟)의 성질은 호원(胡元)보다도 심한 것인데, 오래 신주(神州)를 차지하고 있으니, 미워하는 하늘의 위엄이 어찌 극도에 달하지 않게 되겠습니까? 듣건대 참혹한 이변(異變)이 호원(胡元) 때보다도 심하다는데, 우리가 그들과 서로 성식(聲息)을 통하게 되었으니, 그 여파가 미치게 될 것은 괴이할 것이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우리는 이처럼 나라가 작고 힘이 약하니, 오직 통분함을 참고 원통함을 품으면서 급박하여 어찌할 수 없다는 마음을 속에 두고서 편하려는 생각을 짐독(鴆毒)처럼 경계하고 근검(勤儉)하는 착실한 덕을 쌓아가되, 한결같이 우리 백성을 보호하는 것과 힘써 선(善)을 행하는 것을 임무로 삼아 우리의 힘을 기르면서 저들의 틈이 생기기를 기다린다면, 하늘이 혹은 우리 소원을 이루어 주게 되지 않겠습니까? 병자년049)정축년050) 에서 지금까지는 이미 50년이 넘었습니다. 그 사이에 생겨난 사람들이 이미 늙어서 죽게 되었고 보면, 황명(皇明)이 있었던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비록 허형(許衡)과 같은 학행(學行)이 있는 사람으로서도 오히려 송(宋)나라 제왕이 정통(正統)임을 알지 못하고 호원(胡元)에게 복종하여 섬겼으니, 하물며 한 쪽에 있는 나라인 우리 동방이겠습니까? 그러나 하늘에서 부여받은 병이 지성(秉彝之性)051) 은 같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이기에, 오늘날의 사람들이 만일 자신의 조상들이 신종 황제(神宗皇帝)의 은덕을 입음으로써 자신들의 몸이 있게 된 것을 생각하게 된다면, 감사하게 여기며 보답하기를 생각하는 마음이 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듯 할 것입니다. 지금 전하(殿下)께서는 하늘이 내려 준 성인(聖人)으로서 힘쓰는 것이 천성(天性)을 다하고 인륜(人倫)을 다하는 일이니, 이번에 그러한 덕음(德音)을 경연(經筵)에서 발하신 것은, 어찌 천리가 밝아지고 사람들의 마음이 바로잡아지게 될 하나의 큰 관건(關鍵)이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그러하나 한갓 마음에만 두고 있고 그만한 일을 해가지 않는다면, 도선(徒善)052) 은 정치(政治)가 될 수 없는 법이어서 헛된 명성에 따르는 실지의 화(禍)가 또한 두려운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선조(宣祖)만수 필동(萬水必東)053) 을 말한 주문(奏文)을 외시고 인조(仁祖)의 북쪽을 향해 공수(拱手)하신 정성을 본받으시면서, 더욱 성상의 뜻을 가다듬고 더욱 성학(聖學)을 힘쓰시며 더욱 인정(仁政)을 닦고 더욱 무비(武備)를 갖추시어, 우리 성조(聖祖)들의 뜻둔 일을 계술(繼述)해 가소서.

또한 요사이 윤증(尹拯)의 일로 조정의 공론이 분열되고 있는 때, 실지는 허물이 신(臣)에게 있는 것이므로 간단하게 대략을 진달하겠습니다. 신이 젊었을 적에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스승으로 섬겼었는데, 일찍이 말하기를, ‘맹자(孟子)이 진실로 우(禹)의 아래에 있지 않고, 주자(朱子)은 또한 더러 더하기도 한다.’ 했었습니다. 대개 주자가 아니었다면 요순(堯舜)·주공(周公)·공자(孔子)의 도(道)가 천하 후세에 밝아지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는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로부터 주자(朱子)의 학문을 존신(尊信)했었고,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유현(儒賢)이 배출(輩出)되어 존경하며 행하고 익히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에 이르러서는 또한 더 뛰어나게 되었습니다. 불행히도 윤휴(尹鑴)란 사람이 당초부터 이황·이이의 말을 배척하고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은 들어서 말하지 않았으며, 성설(成說)054) 을 저술하여 신(臣)에게 보냈기에 신이 깜짝 놀라며 책망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웃으며 신더러 무엇을 알겠느냐고 했었습니다. 이미 주자의 주설(註說)을 옳지 않다 하여 반드시 자기의 소견대로 바꾸어 놓았고, 《중용(中庸)》에 대해서는 장구(章句)를 없애버리고 자신이 새로 주(註)를 만들어 그의 무리들에게 주었습니다.

또 그가 종말에는 자신의 말을 저술하여 자신을 공자(孔子)에게 비하고 염구(冉求)055) 를 주자로 쳐놓아, 그가 시종 패류(悖謬)한 짓 하기를 에 이르도록 했으니, 세상의 도의(道義)에 해가 됨이 심하였습니다. 한때의 소위 고명하다는 사람들이 그에게 중독(中毒)되었고, 윤증의 아비 윤선거(尹宣擧)가 더욱 심한 사람입니다. 윤선거는 곧 문간공(文簡公)의 외손(外孫)이어서 그 학문이 반드시 올바를 것인데도 지금 이러하므로, 그를 본받아 윤휴에게 투합하는 사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으니, 바로 고영(顧榮)하순(賀循)이 진(晋)나라로 돌아가자 강동(江東) 사람들이 마음을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된 것056) 과 같은 일입니다. 신(臣)이 처음에는 자신을 망각하고 윤휴를 배척하다가 이제 와서는 또한 윤휴를 놓아 두고 윤선거를 배척했습니다. 성내에 다투는 신(臣)의 성질로 그 말이 맞지 않으면 어찌 과격하게만 되었을 뿐이겠습니까? ‘윤휴는 곧 사문 난적(斯文亂賊)이고, 공(公)은 곧 당여(黨與)로서 주자를 배반한 사람이다. 춘추(春秋)의 법에 난신 적자(亂臣賊子)를 다스리려면 반드시 먼저 당여부터 다스렸으니, 왕자(王者)가 나오게 된다면 마땅히 윤휴보다 먼저 법에 걸리게 될 것이다.’ 했었습니다. 그의 아들인 사람이 어찌 통분하고 박절하게 여기지 않았겠습니까? 윤증이 신(臣)에게 보낸 편지에 말한 바 ‘통각(通刻)하다.’고 한 것이 곧 그의 진심(眞心)일 것입니다. 또 윤증이 사람들에게 신(臣)을 흉본 것은 모두가 사실을 고찰하여 한 것이고 모함한 것이 아니니, 바로 성인(聖人)이 말한 바인 ‘원망은 정직으로 갚는 것이다.’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가 신(臣)을 흉본 글에는 또한 ‘왕도(王道)의 왕(王)자와 의리(義理)의 의(義)자를 말하기 좋아한다’ 했습니다. 는 신 자신에게 있어서 어찌 조금이라도 비슷한 것이 있겠습니까? 윤증이 신을 지나치게 칭찬한 것이라고 해야 할 일이고 신이 감히 감당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 뒤에 신에게 보낸 편지에는 오히려 ‘선생(先生)’이라고 했고 자신은 ‘문인(門人)’이라고 했으니, 그렇다면 어찌 신을 배반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일전에 부제학(副提學) 이여(李畬)가 바로 스승을 배반한 것으로 말을 했습니다마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의리를 어찌 다른 사람이 억눌러 강제로 이름붙일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지금 사헌부(司憲府)의 신하가 전조(銓曹)의 관원을 탁핵하면서도 또한 그런 말을 쓰고 있으니, 신이 진실로 부끄럽고 송구스럽습니다. 지금 신(臣)을 허물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일찍이 윤선거(尹宣擧)와 동문(同門)의 친구이었으므로 의리와 교분(交分)이 얕지 않을 터인데, 너무도 심하게 배척함은 무슨 일이냐?’고 했습니다. 신이 답변하기를, ‘단지 동문의 의리만이 아니라, 병자년057) 여름에 못된 오랑캐가 참람하게 칭호(稱號)를 자칭할 때를 당해 윤선거가 강개(慷慨)하게 기운을 내어 많은 선비들의 주창이 되어서 오랑캐의 사자(使者)를 베도록 청하여 오랑캐의 사자가 무서워서 도망가게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대사간(大司諫) 윤황(尹煌)은 지난 정묘년058) 부터 존주(尊周)하는 의리를 극력 주장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온나라 정기(正氣)가 그 가문에 모였다.’고 여겼었는데, 뜻밖에도 강화(江華)의 변(變) 때에는 그 처신이 권순장(權順長)·김익겸(金益兼)·이돈오(李惇五)와 서로 반대되자, 그가 또한 부끄럽고 분하게 여기면서 스스로 포기하여 다시는 과거도 보지 않고 세로(世路)에는 뜻을 끊고서 유현(儒賢)들을 따라 섬기며 글을 읽고 뜻을 지켜 갔습니다. 그러므로 김집(金集)이 그의 새로워짐을 허여(許與)하고 그의 과거는 생각하지 않았고, 신(臣) 또한 ‘두려운 벗으로 여겨 서로 신임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불행히도 윤후(尹鑴)에게 중독(中毒)되어 그만 딴 사람이 됨으로써 세도(世道)에 방해가 된 것이기에, 신(臣)이 시운(時運) 소관이고 인력(人力)으로 어찌할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또 윤증(尹拯)이 강화(江華)에서의 일 때문에 매우 심각하게 신을 허물하였으므로, 신이 웃으면서 받지 못하고 다소의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는 신이 천박한 장부(丈夫)이어서이니, 지금 논하는 사람들이 로써 신을 죄준다면 신이 진실로 달게 받겠습니다마는, 만일 ‘그가 누구이기에 감히 윤선거를 공격하는 것이냐?’라고 한다면, 신은 또한 할 말이 있습니다. 주자(朱子)의 말에 ‘올바른 것을 해치는 사설(邪說)은 누구라도 공격해야 된다.’고 했으니 신(臣)의 소위는 또한 근거한 바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주자가 배척했던 사람은 육씨(陸氏)059) 였는데, 그가 마음을 다스리는 실제의 학문은 속여서 말할 수 없는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자가 비록 총령(葱嶺)060) 에서 데려 온 진짜 호(胡)의 종자(種子)라는 등의 말을 했으면서도 사귀는 의리는 변함이 없어, 일찍이 자리에 올라 앉도록 하고서 문인(文人)들로 하여금 강론을 듣게 하였고, 부고(訃告)를 듣고 나서는 ‘죽었구나, 고자(告子)가!’ 하고서 또한 문인들을 거느리고 곡을 했습니다. 대개 그의 피음(詖淫)061) 은 배척하고 고구(故舊)에 대해서는 돈독함이 두 가지 다 행해지면서 서로 어긋나지 않은 일입니다. 주자는 일찍이 문인들이 육씨의 문인들과 서로 좋아하지 않자 ‘비록 진짜 원수라 하더라도 어찌 그러할 수 있는가?’ 했습니다.

신이 윤선거에 대해서 비록 소견은 배치되지만 사귀는 의리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어, 그가 죽은 뒤에 있어서도 오히려 생전에 다하지 못한 말을 들어 제문(祭文)에다 질문했으니, 죽은 사람이지만 알게 된다면 반드시 신(臣)의 마음을 이해할 것입니다. 뜻밖에도 이 일을 조정으로 밀고 올라가, 천재(天災)와 시변(時變) 및 국가의 근심거리와 백성의 병폐는 도외시하고 있으니, 사슴만 쫓아가고 앞에 태산(泰山)이 있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이 진실로 도승의 도리를 못했으니, 윤증이 신을 배척함은 또한 그의 도리가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윤증을 처음처럼 대우하신다면 이러니저러니하는 사람들이 없어지고 조정에 화평한 복(福)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상소 내용에 과인(寡人)을 권면하고 경계한 말들은 은근하고 간절한 뜻이 말 표면에 넘치고 있으니 띠[帶]에 써놓고 패복(佩服)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윤증이 좌죄(坐罪)된 일에 있어서는 한때의 재변과 같은 것이 아니고, 진실로 사문(斯文)에 죄를 얻은 것으로서 관계되는 바가 작은 일이 아닌데, 어찌 의논이 시끄러운 것 때문에 처음과 같이 대우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18권 4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92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정론-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과학-천기(天氣)

  • [註 027]
    현도 봉장(縣道封章) : 향리(鄕里)에 물러가 있는 재상(宰相)이 고을이나 도를 통하여 상소하는 것.
  • [註 028]
    경복(更僕) : 시중드는 사람을 교대하는 것. 곧 할 말이 많아서 시중드는 사람을 교대해가면서 말을 하더라도 말을 다하지 못한다는 뜻.
  • [註 029]
    만력 황제(萬歷皇帝) : 신종 황제.
  • [註 030]
    비풍(匪風)과 하천(下泉) : 비풍은 《시경(詩經)》 회풍(檜風)의 한 편명으로서, 나라는 작고 정치가 어지러우므로 화란이 닥칠 것을 근심하며 주(周)나라 문왕(文王)·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의 정령(政令)을 사모하여 지은 것. 하천은 《시경(詩經)》 조풍(曹風)의 한 편명으로서, 임금이 포악하여 백성을 해롭게 하므로 현명한 임금을 사모하여 지은 것. 이러한 시가 있기 때문에 이 두 국풍(國風)이 13국풍의 맨 끝에 수록된 것임.
  • [註 031]
    은(殷)나라 태사(太師) : 기자(箕子).
  • [註 032]
    황극(皇極) : 제왕이 만백성의 준칙(準則)이 되는 지공 지정(至公至正)한 도리. 곧 요순(堯舜) 이래로 전해오는 대법(大法).
  • [註 033]
    용하변이(用夏變夷) : 중국 삼대(三代) 시절의 예의(禮義)를 가지고 사방의 미개 인류들을 변화시키는 것.
  • [註 034]
    존주(尊周) : 주(周)나라 왕실(王室)을 존숭(尊崇)하는 것. 곧 왕실을 높이고 이적(夷狄)을 물리치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명(明)나라를 존숭하고 원(元)나라를 배척한 것을 말함.
  • [註 035]
    온화 낙맥(溫禾洛麥) : 춘추 시대에 주나라 왕실이 미약해져 제후(諸侯)인 정(鄭)나라와의 사이에 갈등이 생겼을 때, 정나라가 군사를 출동하여 온(溫) 지방의 보리를 짓밟아 버리고 가을에는 낙양(洛陽)의 벼를 짓밟아버린 고사(故事). 《좌전(左傳)》 은공(隱公) 3년 4월조에는 온맥 낙화(溫麥洛禾)로 되어 있음.
  • [註 036]
    내복(內服) : 내지(內地).
  • [註 037]
    석뢰(錫賚) : 하사(下賜).
  • [註 038]
    임진년 : 1592 선조 25년.
  • [註 039]
    정유년 : 1597 선조 30년.
  • [註 040]
    정묘년 : 1627 인조 5년.
  • [註 041]
    왕인(王人) : 명나라 사람.
  • [註 042]
    병자년 : 1636 인조 14년.
  • [註 043]
    정축년 : 1637 인조 15년.
  • [註 044]
    성절(聖節) : 중국 황제의 탄일.
  • [註 045]
    삼학사(三學士) : 병자 호란 때에 청국(淸國)에 항복함을 반대하고,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한 세 사람의 학사. 곧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로서 척화신(斥和臣)으로 청나라에 붙잡혀가서 끝끝내 굴하지 않고 마침내 참혹하게 죽었음.
  • [註 046]
    임어(臨御) : 즉위.
  • [註 047]
    제갈양(諸葛亮) : 삼국 시대 촉(蜀)나라의 재상.
  • [註 048]
    이강(李綱) : 송(宋)나라 고종(高宗) 때의 재상.
  • [註 049]
    병자년 : 1636 인조 14년.
  • [註 050]
    정축년 : 1637 인조 15년.
  • [註 051]
    병이 지성(秉彝之性) : 천성.
  • [註 052]
    도선(徒善) : 한갓 착하기만 하여 주변이 없음.
  • [註 053]
    만수 필동(萬水必東) : 황하(黃河)는 아무리 굴곡(屈曲)이 많아도 필경에는 동쪽으로 흐른다는 뜻으로, 충신의 절의는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
  • [註 054]
    성설(成說) : 자기의 정설.
  • [註 055]
    염구(冉求) : 공문 십철(孔門十哲)의 한 사람.
  • [註 056]
    고영(顧榮)과 하순(賀循)이 진(晋)나라로 돌아가자 강동(江東) 사람들이 마음을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된 것 : 동진(東晉)의 임금 사마예(司馬睿)가 본래 명망이 모자라 강동 사람들이 따르지 않았었는데, 왕도(王導)가 말하기를, "고영(顧榮)·하순(賀循)은 이 고장의 망사(望士)들입니다."하여 고영과 하순이 모두 호응하게 하도록 하자, 강동이 따르게 된 고사.
  • [註 057]
    병자년 : 1636 인조 14년.
  • [註 058]
    정묘년 : 1627 인조 5년.
  • [註 059]
    육씨(陸氏) : 남송(南宋)의 학자 육구연(陸九淵).
  • [註 060]
    총령(葱嶺) : 파미르 고원.
  • [註 061]
    피음(詖淫) : 피사(詖辭)와 음사(淫辭)로서, 피사는 편파적인 말이고 음사는 실속이 없는 방탕한 말임. 《맹자(孟子)》 공손추 상에, "피사에 있어서는 그의 가려진 데를 알아차리고, 음사에 있어서는 그가 빠져 있는 데를 알아차려야 한다." 하였음.

○奉朝賀宋時烈縣道封章, 略曰: "臣嘗欲以列聖志事, 一陳於殿下之前, 以啓繼述之道, 而此非更僕可了, 且又以聽聞之煩而不敢也。 適聞殿下臨筵歎息, 語及萬曆皇帝盛德, 此正匪風下泉, 居變風之末, 而有亂極思治之道乎? 如賤臣者, 曾蒙孝廟宥密之托, 豈不欲飮泣沬血, 以仰酬聖志之萬一, 而其奈老牛之鞭, 何哉? 第當日筵臣, 須臾之間, 未能說盡故事, 臣請得以陳焉。 粤自殷師東至, 東人得聞皇極之道, 及至末, 鄭夢周出而用, 大義昭揭, 至我太祖大王, 益倡尊之義, 溫禾洛麥, 猶不敢近, 而東人得免被髮左袵矣。 自是以來, 本朝列聖, 世篤忠貞, 隨被皇上之眷顧, 視同內服, 錫齎便蕃。 至于壬辰之亂, 八路蕩殘, 一國生靈, 皆爲魚肉矣。 幸賴皇上爰赫斯怒, 動天下之兵, 竭天下之財, 天威震疊, 凶醜敗還, 逮于丁酉, 凶鋒再逞, 以我國孑遺之民, 寧有抵敵之理? 國家之亡, 萬無一幸矣。 復蒙 皇帝盡然傷愍, 再出天兵, 迅掃兇鋒, 乾淸坤夷, 宗社奠安, 生民甦息。 凡我東一毫一髮, 一草一木, 無非帝德攸霑, 雖無知常漢, 皆思感泣死報, 況我宣廟所以銜恩感德, 思所報效者, 如何哉? 是故未嘗背西而坐, 又大書再造藩邦四大字, 以寓慕用之誠矣。 及至光海朝, 弘立景瑞, 於深河投虜之時, 稱有密旨, 其時若無金應河之戰死, 則何以自明於天下乎? 洎乎仁穆大妃數光海之罪也, 密旨之事, 爲一大題目, 則仁廟反正之擧, 益有光於天下矣。 不幸丁卯之變, 事勢危急, 遂與虜和, 當時若無尹煌尹衡志諸臣, 則亦無以自解於聖朝矣。 和成後, 卽具奏文, 以謝天朝, 則皇上矜諒, 反下嘉奬之詔, 然卽改朝貢海路, 而眷待之意頓異, 東人從此不復見皇華之美, 又不遜之語, 出於光海之口, 則主和諸臣, 不能自脫矣。 然而仁廟以特旨, 除職斥和儒生尹鳴殷, 則聖意可知也。 其時避亂人毛文龍, 來據椵島, 徵索無厭, 且譖本朝於朝廷, 而仁廟以爲王人也。 待之以誠, 終始不替, 及王人見殺於島中, 則亟整師旅, 將聲罪致討, 而奏聞天朝, 嗚呼! 仁廟之於天朝, 效忠貢順, 可謂至矣。 自後十年之間, 虜之恐脅嚇喝, 去去愈甚, 則仁廟常歎力弱不振, 而曰: ‘寧以國斃, 義當死守!’ 聖志之堅定如是矣。 又不幸而丙丁之亂, 理窮力屈, 萬不得已, 而出於權宜之道, 嗚呼尙忍言哉! 當其危急之際, 死生在於呼吸之頃, 而仁廟猶率群臣, 行望闕禮於元朝, 君臣上下, 抆血相視, 逮至媾成還都也。 上於馬上痛哭失聲, 東陽尉 申翊聖曰: ‘此足以雪恥中興也。’ 自是每値聖節, 上私於後苑, 密伸誠禮, 北望悲哀, 涕淚如雨, 錦州之役, 文正公 金尙憲上疏以陳, 而聖心尤增痛迫, 如不欲生。 至如洪翼漢等三學士, 權順長等三儒生之死, 砲手李士龍之死, 亦足以有光於春秋之義矣。 其後朝廷潛遣獨步於軍門, 盖州之役, 故相臣李浣林慶業, 使人沈水, 密通天將, 俾得轉達朝廷, 則中朝之人, 益知本朝心事矣。 及至孝宗大王, 則聖心於此大義, 皎然如靑天白日, 臨御之初, 首延文正公尊禮之, 又答相臣李敬輿之疏曰: ‘至痛在心, 日暮途遠。’ 又賜對今判府事臣閔鼎重, 慷慨論事, 幾於涕下。 若天假聖壽, 則雖未能掃淸中原, 而閉關絶約, 則優爲之矣。 至先大王, 雖以守成爲主, 而以褒錄李士龍之子, 贖良姜孝元之子孫者見之, 則聖志所在, 亦可知也。 夫神宗皇帝之深仁高義, 如此其至, 而本朝國小力弱, 臣下又無諸葛亮李綱之忠智, 不能致死以報, 非惟不能以報, 乃反有以怨報德之擧, 一國臣民, 何以立於天地之間哉? 自是以來, 旱乾水溢, 日食地震, 無歲無之, 虹貫之變, 式月斯生, 蓋天理亡而民彝滅, 則安得以克享天心哉? 昔胡入主中國, 以腥羶殺戮之種, 穢亂 之境土, 此誠天地之大變, 古今之逆德, 以故其時天降之災, 不可殫記。 今此醜虜羯羠之性, 甚於胡, 而久據神州, 天之疾威, 安得以不極哉? 聞其變異之慘, 甚於胡, 而我乃與之聲息相通, 則其餘波之及, 無足怪也, 然則如之何可也? 我之國小力弱如此, 惟以忍痛含冤, 迫不得已之心, 存之於內, 戒宴安之鴆毒, 致勤儉之實德, 一以保吾民, 强爲善爲務, 蓄吾之力, 以待被衅, 則天其或者遂吾願乎? 自丙丁至今, 已踰五十年矣。 生乎其間者, 已至老死, 則不知有皇朝者多矣。 雖以許衡之學行, 猶不知帝之爲正統, 而服事胡, 況我東表之偏邦乎? 然秉彝之天, 無所不同, 今日之人, 若思其祖先之得蒙神皇之恩, 而得有其身, 則含感思報之心, 油然而生矣。 今殿下, 以天縱之聖, 所務者盡性盡倫, 則今玆德音之發於筵中者, 豈非天理明、人心正之一大關捩也? 雖然, 徒存諸心而不爲其事, 則徒善不足以爲政, 虛名實禍, 亦可懼也。 伏願誦宣廟必東之奏, 欽仁廟拱北之誠, 益勵聖志, 益懋聖學, 益修仁政, 益繕武備, 以繼述我聖祖之志事焉。 且近以尹拯事, 朝論潰裂, 咎實由臣, 略陳其槪焉。 臣少師文元公 金長生, 嘗以爲孟子之功, 誠不在下, 朱子之功, 又或過之, 蓋非朱子 之道, 不明於天下後世也。 我東則自文忠公 鄭夢周尊信朱子之學, 以至我朝, 儒賢輩出, 無不欽崇服習, 而至於文純公 李滉文成公 李珥, 則又異焉。 不幸有尹鑴者, 初斥之說, 而文簡公 成渾則不數也。 著爲成說, 以送於臣, 臣駭然而責之, 則仰天而笑, 謂臣何知。 旣以朱子註說爲不是, 必以己見易之, 至於《中庸》, 則掃去章句而自爲新註, 以授其徒, 又其未終, 則著說自擬於孔子。 而以冉求朱子, 其始終悖謬, 至於如此, 其爲世道之害甚矣。 一時所謂高明者, 尤中其毒, 而尹拯之父宣擧, 其尤者也。 宣擧文簡公之外孫, 其學必正, 而今乃如是, 其視效而投入於者, 不勝其多, 正如顧榮賀循, 而江東莫不歸心也。 臣始則忘身而斥, 至是又捨而斥宣擧, 以臣忿戾之質, 其言語之不中, 奚翅過激哉? 至曰: ‘是斯文之亂賊, 而公乃黨助而背朱子, 春秋之法, 治亂賊, 必先治黨與, 有王者作, 則公當先而伏法矣。’ 爲其子者, 安得不痛迫哉? 之與臣書所謂痛刻云者, 此其眞心也。 且所以詆臣於人者, 皆考實而非誣, 正聖人所謂以直而報者, 其所詆之書, 亦有好語夫王道之王字、義理之義字, 其在臣身, 寧有一毫近似哉? 此則之於臣, 可謂過許, 而臣不敢當者也。 其後與臣書, 猶稱以先生, 而自稱以門人。 然則何可謂之背臣哉? 日者, 副學李會, 直以背師爲言, 師弟之義, 豈他人所可抑勒而强名也? 今憲臣, 因彈銓官, 亦用其語, 臣實慙悚, 今之咎臣者曰: ‘曾與尹宣擧爲同門友, 義分不淺, 而斥之已甚何也?’ 答謂非但同門之義, 當丙子夏, 孽虜僭號, 宣擧慨然出氣, 倡多士請斬虜使, 使虜使懼而逃去, 其父大司諫, 則粤自丁卯, 力主尊之義, 故人以爲一國正氣, 萃於其家矣。 不料江都之變, 其所處與權順長金益兼李惇五相反, 渠亦慙憤自廢, 不復赴擧, 絶意世路, 而從事儒賢, 讀書求志, 則金集與其新而不念其舊, 臣亦以爲畏友而相任焉。 不幸爲毒所中, 便成別人, 以爲世道害, 臣以爲時運所關, 而非人力所與也。 又以其江都事, 咎臣甚深, 臣不能笑而受之, 乃有多少說話, 是臣淺之爲丈夫也。 今之論者, 以此罪臣, 則臣實甘之, 若曰: ‘渠是何人而敢攻宣擧云爾?’ 則臣亦有說, 朱子曰: ‘邪說害正, 人得以攻之。’ 臣之所爲, 亦不爲無所據矣。 朱子所排觝者陸氏, 而其治心之實學, 有不可誣者, 故朱子雖有葱嶺帶來眞胡種子等說, 而交義不替, 嘗使之升座, 而使門人聽講, 至聞其訃, 則曰: ‘死了告子, 而又率門人哭之。’ 蓋斥其詖淫。 篤於故舊, 竝行而不相悖也。 朱子嘗以門人與陸門不相悅, 以爲雖眞仇讎, 何至如此? 臣於宣擧所見, 雖背馳, 而交義則未嘗贊。 至其死後, 猶以生前未盡之說, 質之於祭文, 死者有知, 必諒臣心矣。 不料此事, 推上朝廷, 天災時變, 國憂民病, 置之度外, 可謂逐鹿而不見泰山也。 然臣實無師道, 而之斥臣, 亦其道理然矣。 殿下待如初, 則紛紛者消息, 而朝廷有和平之福矣。" 答曰: "疏中勉戒寡躬之說, 懃懃懇懇, 溢於言表, 可不書紳而服膺焉? 至於尹拯所坐, 非一時眚災之比, 實是得罪斯文, 關係非細, 豈可以論議之紛紜而待之如初乎?"


  • 【태백산사고본】 20책 18권 4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92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정론-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과학-천기(天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