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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18권, 숙종 13년 1월 7일 병술 3번째기사 1687년 청 강희(康熙) 26년

대사헌 이선이 박순에게 시호를 내리자 거두기를 청하다

대사헌(大司憲) 이선(李選)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성조(聖祖)004) 께서 태종(太宗)신사년005) 봄에 풍악(楓岳)에서 안변(安邊)으로 행행(幸行)하실 때 태종께서 성석린(成石璘)기복(起復)006) 하여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 기거(起居)하게 했었는데, 성석린이 잘 아뢰어 즉시 성조께서 환궁(還宮)하시게 되었습니다. 이듬해 중동(仲冬)에 성조께서 또한 증파도(澄波渡)로 해서 북관(北關)으로 가시며 금성현(金城縣)에 머물렀을 때 먼저 시종(侍從)하는 신하 함승복(咸承復)배상충(裵尙忠) 등을 앞으로의 길에 보냈었는데, 안변 부사(安邊府使) 조사의(趙思義)와 영흥판관(永興判官) 김견(金譴) 등이 군사를 출동시키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이때 상호군(上護軍) 박순(朴淳)이 실지로 명을 받고 서울에서 함주(咸州)로 나아가, 감사(監司) 및 수령(守令)들에게 교유(敎諭)하기를, ‘조사의 등을 따르지 말라.’고 하다가 드디어 군중(軍中)에서 살해되었고, 호군(護軍) 송유(宋琉)함주에 왔다가 그 다음에 잇달아 죽었습니다. 이때를 당해 서울은 계엄(戒嚴)하게 되고, 조사의 등의 군사가 관서(關西)로 방향을 돌리게 되어 성조(聖祖)께서 조사의의 군중에 머무르셨는데, 수신(帥臣) 이천우(李天佑)가 서울에서 내려와 고맹주(古孟州)에 있다가 조사의의 군사와 서로 만나게 되어 겨우 몸만 빠져 나왔습니다. 성조께서 안주(安州)로 나와 머무르시자 조사의의 군사가 밤에 놀라서 흩어지게 되니, 조사의가 기병(騎兵) 수십과 안변(安邊)으로 도망해 갔다가 마침내 관군(官軍)에 잡히게 되었습니다. 이에 수신(帥臣) 이천우(李天佑)·이빈(李彬)·최운해(崔雲海) 등이 성조를 호위하고 평양(平壤)을 경유해서 송도(松都)에 돌아오시므로, 태종께서 금교역(金郊驛)에 나가 맞이하셨습니다. 이천우 등은 거가(車駕)를 호위한 공으로 말[馬]을 내려 주는 은전(恩典)을 받았고, 조사의 및 여타의 시종하던 신하 10여 명은 모두 엄한 처형을 받았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박순(朴淳)에게 무슨 회천(回天)007) 한 공이 있겠습니까? 그의 후손들의 이른바 ‘성조께서 박순의 말에 따라 남쪽으로 돌아오시기로 뜻을 결단하셨다.’는 말은 본래 그 당시의 사실이 아닙니다. 대체로 박순 등은 명을 받고 북쪽에 들어갔다가 마침내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으므로 직책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으니, 태종께서 거듭 가엾게 여겨 애도해 주시고 두루 돌보는 특전(特典)을 내리신 것이 당연하고, 조사의 등이 군사를 출동시켜 서울을 진동하게 한 짓은 차례차례 법대로 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진정되게 한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성조(聖祖)로 말하자면, 그 당시에 모시고 따르던 여러 신하들이 거의 무거운 죄에 빠졌으니, 가엾게 여기는 애도와 상심되는 한탄이 또한 어찌 태종께서 박순에 대한 것과 다르겠습니까마는, 지금까지 마침내 단서(丹書)008) 에 있는 이름을 지우지 못했고 보면, 박순이 성조(聖祖)에게 죽은 것을 어찌 유독 추후로 포장(褒奬)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대체는 살펴보지 않고서 한갓 후손들의 청원에만 따라 아름다운 명칭을 내려 주는 것은 의리(義理)에 크게 어그러지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이어 시호(諡號)를 내리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말이 이러하니, 마땅히 차자에 의해 시행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18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90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역사-전사(前史)

  • [註 004]
    성조(聖祖) : 태조(太祖).
  • [註 005]
    신사년 : 1401 태종 원년.
  • [註 006]
    기복(起復) : 상제의 몸으로 벼슬자리에 나아오게 하는 일.
  • [註 007]
    회천(回天) : 어지러운 시국을 만회시킴.
  • [註 008]
    단서(丹書) : 죄인 문서.

○大司憲李選上箚曰:

恭惟我聖祖。 於太宗辛巳春, 自楓岳安邊, 太宗起復成石璘, 詣行在起居, 石璘善爲開陳, 卽蒙聖祖回鑾。 明年仲冬, 聖祖又自澄波渡, 駕向北關, 次金城縣, 先遣從臣咸承復裵尙忠等於前路, 致有安邊府使趙思義永興判官金繾等, 發兵之事, 時上護軍朴淳, 實受命, 自京師咸州, 敎諭監司及守令, 以勿從思義等, 遂被害於軍中, 而護軍宋琉, 亦到咸州, 踵死其後。 當是時, 京師戒嚴, 思義等兵, 轉向關西, 而聖祖駐思義軍中, 帥臣李天佑, 自京師來住古孟州, 與思義兵相遌, 僅以身免, 及聖祖出次安州, 思義兵夜驚潰散, 思義以數十騎, 走還安邊, 終見獲於官軍。 於是帥臣李天佑李彬崔雲海等, 陪衛聖祖, 由平壤松都太宗出迎于金郊驛, 天佑等, 以扈駕功, 受賜馬之典, 而趙思義及他從臣十餘人, 皆伏嚴誅, 以此見之, 則朴淳有何回天之功, 其後孫所謂聖祖因言決意南還云者? 本非其時事實也。 大槪朴淳等受命入北, 竟不生還, 則可謂無負職責, 太宗宜其重加悼憐, 備擧恤典。 思義等之動兵震京師, 宜其次第用法, 以鎭人心, 而然自聖祖而言, 則其時陪從諸臣, 擧陷重辟, 其悼憐傷歎, 又何異太宗之於朴淳? 而至今終不得滌名丹書, 則朴淳之死於聖祖者, 其何可獨加追奬? 而今乃不察大體, 徒循後孫之願, 錫以美稱, 豈不大乖義理乎? 仍請收還贈謚之命。"

答曰: "箚辭如此, 當令依箚施行。"


  • 【태백산사고본】 20책 18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90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역사-전사(前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