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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17권, 숙종 12년 12월 14일 갑자 2번째기사 1686년 청 강희(康熙) 25년

정언 한성우가 궁인 장씨를 숙원으로 삼은 것을 염려하는 상소를 올리다

정언(正言) 한성우(韓聖佑)가 상소하기를,

"삼가 듣건대, 전하께서는 궁인(宮人) 장씨(張氏)숙원으로 삼았다 하니, 군왕의 말이 한 번 떨어지자 듣는 사람들이 놀라고 의심하였습니다. 전날에 이징명(李徵明)이 소를 올렸을 때 전하의 비답(批答) 가운데에, ‘소의 끝에 운운(云云)한 것은 또한 잘못 전해 들은 것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말이 있어 신이 가만히 생각하기에 고명(高明)하신 전하께서는 실로 이런 일이 없을 것이며, 이징명이 논한 바는 과연 허망한 데서 나온 것이리라 여겼습니다. 또 대신들이 진달(陳達)하자 이징명을 문외 출송(門外黜送)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시고 다시 그 관직을 임명하시니, 신은 또 군주의 마음을 돌리시는 덕이 또한 우리 전하 같은 분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전조(銓曹)에서 이징명을 주의(注擬)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도 매번 전하께서 낙점(落點)하기를 인색하게 하시니, 신은 또 생각하기를 전하께서 이미 이징명에게 다른 뜻이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오히려 석연(釋然)하지 못한 뜻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습니다. 오늘에 이르러 장씨에게 도리어 봉작(封爵)을 가하는 은전이 계시니, 전하의 전후 거조(擧措)가 과연 털끝만큼의 사의(私意)도 그 사이에 막힌 것이 없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궁중 안의 일은 금지된 것이므로 외조(外朝)에서는 참여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신하들이 어찌 감히 함부로 논하겠습니까? 일을 논하는 신하를 크게 꺾어버린 후에 반드시 전하께서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면 이것은 고인(古人)이 말한, ‘뇌정(雷霆)의 위엄과 만균(萬勻)의 무게를 가지고 백성의 위에 베푼다면 감히 가까이 할 자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까? 만약 과연 이와 같다면 전하께서 근본을 바로잡아 정치를 하는 도리에 오히려 미진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대저 군주의 일심(一心)의 사(邪)와 정(正)의 징험은 집안 사람에 대한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으니, 집안 사람 사이에서 정제 엄숙(整齊嚴肅)할 수 없으면, 또한 어찌 조정에 이르게 되고 일국에까지 미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왕자(王子)를 많이 두는 도리(道理) 때문에 이미 숙의(淑儀)의 선발이 있었는데, 또 반년이 지나지 않아 장씨(張氏)의 책봉이 있었으니, 삼가 궁중의 사이에 명분(名分)이 분명함을 알지 못하므로, 성색(盛色)340) 을 경계하라는 말이 또한 이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 아닌가 염려됩니다.

가만히 듣건대, 효종(孝宗)께서 궁인 한 사람을 가까이하여 옹주(翁主)를 낳기에 이르렀으나, 임어(臨御)하는 날에 끝내 봉작을 내리는 한 명(命)을 아끼셨으므로, 성덕(成德)의 일이 지금까지 칭송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성조(聖祖)에게서 본받지 않으시고 이러한 오늘의 거조가 있으십니까? 또한 신이 삼가 깊이 우려하는 것은, 장씨의 일은 전하께서 그 미색(美色) 때문이며, 전하가 장씨를 봉한 것은 그를 총애하기 때문이니, 오늘날 신민(臣民)들의 근심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징명(李徵明)이 진언한 바의, ‘말을 들어 참소를 초래한다.’는 것이 훗날에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어찌 알 수가 있겠습니까? 옛날 송(宋)나라 인종(仁宗)왕소(王素)의 간언을 한 번 듣고는 줄줄 눈물을 흘리면서 덕용(德用)이 바친 여자를 쫓아 내었으니, 신이 비록 변변찮으나 또한 어찌 감히 앞장서서 전하를 송나라 인종의 아래에 처하게 하여 곧바로 그렇게 할 수 없는 분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오직 성명(聖明)께서 밝게 살피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번의 봉작(封爵)은 고례(古例)로서 증명할 수 있는 일이며, 하물며 지난번 이징명(李徵明)의 소에 대한 비답 가운데 ‘잘못된 것’이라는 한 조항은 연석(筵席)에서 나의 뜻을 자세하게 다 말하였는데, 지금 도리어 사실 밖의 일을 더 보태니, 이것이 모두 성의(誠意)가 성실하지 못하고 시태(時態)를 잘 알지 못하여 이러한 감히 할 수 없는 거조를 하게 되어 그대들에게 모욕을 당하는 결과까지 초래한 것이다. 그런데도 소 가운데 임어(臨御)하는 날에 끝내 한 명(命)은 아꼈다고 말한 것은 더욱 사실과 틀리는 일이오, 그 미색(美色)을 좋아하고 총애함 때문이라는 설에 이르러서는 억측이 너무 심하다고 할 수 있으니, 진심으로 개탄할 일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17권 60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86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正言韓聖佑上疏曰:

伏聞殿下以宮人張氏淑媛, 王言一下, 聽聞駭惑, 日者李徵明之陳疏也, 聖批有曰: ‘疏末云云, 亦出於傳聞之謬戾。’ 臣竊以爲聖明, 實無是事, 而徵明所論, 果出於虛妄也。 且因大臣陳達, 還收徵明門黜而復授其職, 臣又以爲人君轉環之德, 亦莫如我殿下也。 厥後銓曺注擬徵明, 非止一再, 而每靳天點, 臣又以爲殿下旣知徵明之無他, 而猶有所未釋之意者, 抑何故也? 及至今日, 乃以張氏反加封爵之典, 未知殿下之前後擧措, 果無一毫私意凝滯於其間耶? 殿下若以爲宮省事禁, 非外朝所可與知, 人臣何敢妄論也? 大加摧折於言事之臣然後, 必遂殿下之所欲, 則此非古人所謂挾其雷霆之威萬勻之重, 以肆於民上而莫之敢攖者耶? 若果如此, 則殿下所以端本出治之道, 猶有所未盡而然也。 夫人主一心邪正之驗, 莫先於家人, 家人之間, 不能整齊嚴肅, 則亦何以達於朝廷而及於一國哉? 今爲其廣嗣之道, 旣有淑儀之選, 而未踰半年, 又有張氏之封, 竊恐宮闈之間, 旣不知名分之截然, 而盛色之戒, 亦由此而生也。 竊聞孝廟, 近一宮人, 至誕翁主, 而臨御之日, 終靳一命, 盛德之事, 至今稱頌, 殿下何不取則於聖祖, 而乃有此今日之擧也? 且臣竊有深憂過慮者, 張氏之事, 殿下以其色也, 殿下之封張氏, 以其寵也, 則今日臣民之憂, 孰有大於此者乎? 徵明所陳聽言來讒之說, 安知不效於他日也? 昔 仁宗, 一聞王素之諫, 至於泫然流涕, 而放出德用所進女口, 則臣雖無狀, 又何敢先處殿下於 之下, 而直謂其不能哉? 惟聖明澄省焉。"

答曰: "今玆封爵, 實有古例之可證, 況頃日徵明疏批中謬戾一款, 備悉予意於筵席矣。 今反加之以情外之說, 此無非誠意未孚, 不諒時態, 敢爲此不敢爲之擧, 取侮爾等之致, 而疏中臨御之日, 終靳一命云者, 尤是爽實之論也, 至於其色其寵之說, 可謂億逆之太甚, 良可慨也。"


  • 【태백산사고본】 19책 17권 60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86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