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씨를 책봉하여 숙원으로 삼다
장씨(張氏)를 책봉하여 숙원(淑媛)으로 삼았다. 전에 역관(譯官) 장현(張炫)은 국중(國中)의 거부로서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과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枏)의 심복이 되었다가 경신년330) 의 옥사(獄事)에 형을 받고 멀리 유배되었는데, 장씨는 곧 장현의 종질녀(從姪女)이다. 나인(內人)으로 뽑혀 궁중에 들어왔는데 자못 얼굴이 아름다왔다. 경신년 인경 왕후(仁敬王后)가 승하한 후 비로소 은총을 받았다. 명성 왕후(明聖王后)가 곧 명(命)을 내려 그 집으로 쫓아내었는데,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의 아내 신씨(申氏)가 기화(奇貨)331) 로 여겨 자주 그 집에 불러들여 보살펴 주었다. 신유년332) 에 내전(內殿)333) 이 중전(中殿)의 위에 오르자 그 일을 듣고서 조용히 명성 왕후에 아뢰기를,
"임금의 은총을 입은 궁인(宮人)이 오랫동안 민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사체(事體)가 지극히 미안하니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명성 왕후가 말하기를,
"내전(內殿)이 그 사람을 아직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오. 그 사람이 매우 간사하고 악독하고, 주상이 평일에도 희로(喜怒)의 감정이 느닷없이 일어나시는데, 만약 꾐을 받게 되면 국가의 화가 됨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니, 내전은 후일에도 마땅히 나의 말을 생각해야 할 것이오."
하였다. 내전이 말하기를,
"어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헤아려 국가의 사체(事體)를 돌아보지 않으십니까?"
하였으나, 명성 왕후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명성 왕후가 승하한 후에 내전이 다시 임금을 위해 그 일을 말하였고, 자의전(慈懿殿)334) 도 또한 힘써 그 일을 권하니, 임금이 곧 불러들이라고 명하여 총애하였다. 장씨의 교만하고 방자함은 더욱 심해져서 어느 날 임금이 그녀를 희롱하려 하자 장씨가 피해 달아나 내전(內殿)의 앞에 뛰어들어와, ‘제발 나를 살려주십시오.’라고 하였으니, 대개 내전의 기색을 살피고자 함이었다. 내전이 낯빛을 가다듬고 조용히, ‘너는 마땅히 전교(傳敎)를 잘 받들어야만 하는데,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할 수가 있는가?’ 하였다. 이후로 내전이 시키는 모든 일에 대해 교만한 태도를 지으며 공손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불러도 순응하지 않는 일까지 있었다. 어느 날 내전이 명하여 종아리를 때리게 하니 더욱 원한과 독을 품었다. 내전이 다스리기 어려운 것을 근심하여, 임금에게 권하여 따로 후궁을 선발하게 하니, 김창국(金昌國)의 딸이 뽑혀 궁으로 들어왔으나 또한 총애를 받지 못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서 마침내 장씨를 책봉하여 숙원(淑媛)으로 삼았다. 이때 징(澂)의 아내는 상시 자의전(慈懿殿)으로부터 칭찬을 듣고 있었는데, 자의전은 나이가 많은데다 또한 징의 아내를 믿고 있었으므로, 장씨를 치우치게 사랑하고 내전과는 소원하였다. 이때 징의 아내는 안으로는 날로 임금과 자의전에게 차츰차츰 참소(讒訴)하고, 밖으로는 그 아들 항(杭)으로 하여금 장씨의 형 장희재(張希載)와 모의하여 정(楨)·남(枏)의 여당과 결탁해서 밤중에 모여 중전(中殿)을 위태롭게 할 것을 모의하였다.
이에 앞서 계해년335) 3월 13일은 인조 반정(仁朝反正)의 회갑(回甲)이 되는 날이었다. 정명 공주(貞明公主)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어 조정 대신 이하의 관원이 모두 공주의 집에 모였는데, 기녀를 많이 모아 그들로 하여금 술을 따르고 가무(歌舞)를 하게 하였다. 그 중에 숙정(淑正)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노래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다. 술을 마신 후 손님 가운데 어떤 사람이 숙정과 더불어 희롱하려 하였는데, 숙정의 남편이 곧 장희재였다. 장희재는 이때 포도 부장(捕盜部將)으로서 대궐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몰래 숙정을 불러내어 달아나 버리니 어떤 사람이 여러 대신들에게 그 일을 고하였다.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이, ‘조정의 큰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술을 따르는 기녀가 먼저 달아났으니 사체(事體)가 놀랄 만하다.’ 하고, 비국(備局)의 낭관(郞官)으로 하여금 기녀를 불러내어 데리고 간 그 남편을 곤장으로 엄하게 다스리게 했다. 장희재는 이 일로써 독을 품은 것이 뼈에 사무쳤는데, 혹자는 ‘이 일이 또한 화의 빌미가 되었다.’고 하였다. 가을에 부교리(副校理) 이징명(李徵明)이 소를 올려 논하기를,
"종사(宗社)의 존망이 반드시 여기에 매여 있지 않다고 기필할 수 없으니, 방출(放出)할 것을 간곡히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잘못 전해진 말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그 후 대사성(大司成) 김창협(金昌協)이 재앙을 만나 경계할 일을 늘 아뢰었는데, 궁중에서 집을 새로 건축하는 일을 논하여 아뢰기를,
"어제 사헌부(司憲府)의 계(啓)에 대해 전하께서는 전해 들은 말이 사실과 어긋난다고 하셨는데, 근래에 진실로 이러한 일이 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대목(大木)을 구하는 공사(工師)가 자못 민간에 출입하니 대간의 아뢴, ‘장인(匠人)을 불러 모으고 재목을 운반하는 데 반드시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에 한다.’는 것이 과연 거짓말이 아닙니다. 【흑자는 말하기를, "임금이 장씨를 위하여 별당(別堂)을 지으면서 외부 사람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했다." 하였다.】 지금 전하께서 스스로의 잘못이라고 하교하시고는 안으로는 급하지 않은 역사(役事)를 일으키고, 밖으로는 신하의 말을 막아 버리는 변명을 하시니, 이것은 스스로를 속이고 또 남을 속이는 일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징명(李徵明)의 소가 전하의 노여움을 거듭 범하자, 그 때의 성교(聖敎)는 전적으로 ‘척리(戚里)’ 한 조항으로써 죄를 삼으셨고, 아래의 한 가지 일은 잘못 전해들은 것으로 핑계대셨지마는, 전하는 얘기들이 끝이 없이 모두 궁중(宮中)에 실지로 그 사람이 있다고 하니, 전하께서 이징명에게 노한 것은 실로 이 일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억측이 너무 심하다."
하였다. 임금이 전후의 소에 대해 꺼리는 비답(批答)을 내린 것은 그 사람이 선후(先后) 때에 내침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갑자기 이러한 명이 있은 것은 어찌 치란(治亂)이 운수(運數)가 있으므로 사람의 힘을 용납하기가 어렵고, 화의 기틀이 장차 다가오니 그렇게 하지 않으려해도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후 민암(閔黯)·민종도(閔宗道)·이의징(李義徵)의 무리들이 장희재의 힘에 의지하여 끝내 기사(己巳)의 변(變)을 이루어 어진이를 죽이고 나라를 해쳐 종실(宗室)의 제사를 거의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고, 끝내는 내전(內殿)을 사제(私第)로 물러나게 하였으며, 장씨(張氏)가 대신 곤위(壼位)에 올랐으니, 아! 명성 모후(明聖母后)의 원려(遠慮)와 밝은 예견은 실로 역사상 없던 일이다. 그리고 우리 성상(聖上)의 영명(英明)하고 강의(剛毅)한 자질로서도 오히려 이같이 전에 없던 비상한 거조(擧措)가 있었으니, 심하도다. 여자를 총애함이 마음을 고혹(蠱惑)시키고 덕을 해침이여, 아! 어찌 크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19책 17권 57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85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사법-탄핵(彈劾) / 신분-중인(中人) / 역사-전사(前史)
- [註 330]경신년 : 1680 숙종 6년.
- [註 331]
기화(奇貨) : 진기한 물건. 좋은 기회.- [註 332]
신유년 : 1681 숙종 7년.- [註 333]
○命封張氏爲淑媛, 初譯官張炫, 以國中巨富, 爲楨 柟心腹, 庚申之獄, 受刑遠配, 張氏卽炫之從姪女也。 被抄於內人, 入宮中, 頗有容色, 庚申仁敬王后昇遐之後, 始得承恩, 明聖王后, 卽命黜送其家, 崇善君 澂妻申氏, 視爲奇貨, 頻頻邀致其家畜養之。 辛酉, 內殿正位坤極, 聞其事, 嘗從容稟白於明聖曰: "承恩之宮人, 久在閭閻, 事體極未安, 宜復召入。" 明聖曰: "內殿未見其人矣, 其人甚奸毒, 主上平日, 喜怒暴急, 若見寵幸, 則國家之禍, 有不可言, 內殿後當思吾言矣。" 內殿曰: "何可預慮未然之事, 不顧國家事體耶?" 明聖終不許。 明聖昇遐之後, 內殿復爲上言之, 慈懿殿亦力勸之, 上卽命召入而幸之, 張氏驕恣, 益甚一日, 上欲戲之, 張避走跳入於內殿前曰: "願活我。" 蓋欲觀內殿之氣色也。 內殿整容徐曰: "汝當奉承傳敎, 何敢如是?" 自後, 內殿凡有使令, 偃蹇不恭, 至或呼之而不應。 一日, 內殿命撻之, 益懷怨毒, 內殿憂其難制, 勸上別選後宮金昌國之女, 被選入宮, 而亦無寵, 未幾, 遂封張氏爲淑媛, 於是, 澂妻常贊譽於慈懿殿, 慈懿殿春秋倦勤, 甚信澂妻, 故偏愛張氏而疎內殿, 是時澂妻, 內則日浸潤於上及慈懿殿, 外則使其子杭, 與張氏兄希載合謀, 締結楨 柟餘黨, 昏夜聚會, 謀危坤極, 先是, 癸亥三月十三日, 卽仁廟反正回甲之日也。 貞明公主家設宴, 朝廷大臣以下, 皆會主家, 多聚娼女, 使之行酒歌舞, 其中淑正爲名者, 以善歌名, 酒後坐客, 或與淑正戲狎, 淑正之夫, 卽希載也。 希載時以捕盜部將, 待候門外, 密招淑正而逃去, 人有告於諸大臣, 左議政閔鼎重曰: "朝廷大宴未罷, 而行酒之娼女先逃, 事體駭然, 令備局郞, 重杖其夫之招去者。" 希載以此銜毒次骨, 或言此事, 亦爲禍祟云。 秋間副校理李徵明疏論, 乃曰: "宗社存亡, 未必不係於此, 至請放出。" 上答以出於傳說之謬戾。 其後大司成金昌協, 遇災陳戒, 其論禁中營繕事曰: "日昨憲府之啓, 殿下謂其傳聞爽實, 近聞實有是事, 工師之求大木者, 頗亦出入閭巷, 臺啓所謂召匠輸材, 必趁早暮者, 果非虛語云。 【或云上爲張氏營建別堂, 而不欲煩外人聽聞云。】 今殿下下敎罪已, 而內與不急之役, 外爲遮障之辭, 以自欺而歎人。" 又曰: "李徵明之疏, 重觸天怒, 其時聖敎, 專以戚里一款爲罪, 而下一事。 【卽放出張女事。】 諉之於傳聞之謬, 而傳說漫漫, 皆以爲宮中實有其人, 而殿下之怒徵明, 實在此事云云。" 上答以: "億逆太甚。" 上之諱之於前後疏批者, 以其人見黜於先后時故也, 而今遽有是命, 無乃治亂有數, 難容人力, 禍機將迫, 莫之爲而然耶? 厥後黯、宗道、義徵輩, 籍希載, 終成己巳之變, 戕賢禍國, 幾危宗祊, 卒至內殿退處私第, 張氏代陞壼位, 猗歟明聖母后之長慮明見, 實是史牒之所未有, 而以我聖上英明剛毅, 猶有此無前非常之擧, 甚矣女寵之蠱心喪德也。 嗚呼! 豈不大可懼哉?
- 【태백산사고본】 19책 17권 57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85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사법-탄핵(彈劾) / 신분-중인(中人) / 역사-전사(前史)
- [註 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