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교 이이명 등이 현재의 폐단 7개 조항에 대해 차자를 올리다
응교(應敎) 이이명(李頤命)과 교리(校理) 조상우(趙相愚)·김창집(金昌集)·서문유(徐文𥙿)와 수찬(修撰) 김성적(金盛迪)이 응지(應旨)하여 차자를 올렸는데, 첫머리에서 천명(天命)을 기원하고 소민(小民)을 화합시키는 도리를 말하고, 다음에 현재의 폐단 7개 조항을 말하고, 끝에서는 선왕(先王)이 재해를 만나 경비를 줄여서 나라를 살려내고 백성을 소생시킨 사실을 인용하여 오늘의 수성(修省)할 법으로 삼도록 하였는데, 그 7개 조항을 말하기를,
"1. 성상(聖上)의 학문이 그 근본에 힘쓰지 아니하여 뜻을 세움이 오랫동안 견디는 실상이 없고, 도(道)를 구함에 있어 분발(憤發)하는 성의가 없는 점.
2. 수포(收布)를 아무렇게나 매기는 폐단.
3. 충의위(忠義衛)의 대수(代數)를 한정(限定)하는 폐단.
4. 직첩(職帖)을 판 값으로 백성에게 진휼(賑恤)해 준 쌀을 가을에 다시 받아들이는 폐단.
5. 곡식을 바치고 직첩(職帖)을 받은 자들을 충장위(忠壯衛)에 충정(充定)시키는 폐단.
6. 궁궐의 단속이 엄하지 못한 점.
7. 은전을 베푸는 정도가 너무 지나치십니다.
하니, 무릇 수천 마디 말이었다. 비답하기를,
"재변이 매우 심하여 근심과 두려움이 바야흐로 간절하였었는데, 그대들의 경계하여 가르치는 차자(箚子)는 실로 나라를 근심하고 나를 사랑하는 성심에서 우러난 것으로서 지극히 간절한 논의(論議)가 아님이 없으므로,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 마땅히 마음에 두고 잊지 않을 것이다. 차자 끝에 언급한 일도 【전 교리(校理) 이징명(李徵明)이 간언(諫言)으로 인하여 죄를 받았으므로 도로 거두기를 청한 것이다.】 마땅히 적절하게 조처하겠으며 그 밖에 변통할 수 있는 일들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겠다."
하였다. 나중에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옥당(玉堂)의 차자를 가지고 【옥당의 차자는 비국(備局)에 회부시키라고 하였으므로, 이때 면대하여 품의한 것이다.】 나와서 아뢰기를,
"차자 중에 충의위(忠義衛)에 관한 일은 조처하시겠다는 하교를 받았으나, 그 중 직첩(職帖)의 값으로 받은 쌀은 매우 곡절이 있는 것입니다. 대체로 백성에게 진휼하는 물품을 만약에 죽을 쑤어 주기로 한다면 원 회계부(元會計簿)에 수록된 곡물이더라도 마땅히 탕감해 주어야 할 것인데, 더구나 직첩의 값으로 받은 쌀이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이미 건량(乾糧)233) 으로 나누어 주었으므로 처음에 조정의 사목(事目)에서 되[升]와 말[斗] 정도의 곡식을 아껴서가 아니라, 다만 각 고을에서 허실(虛實)을 서로 속이는 폐단을 염려하였기 때문에 그 수량을 알고자 하여 반드시 도로 바치게 한 것입니다. 또 연달아 흉년을 만나다 보니, 앞으로 진구(賑救)해야 할 물자도 계속 잇대기 어려운 염려가 있으므로 갑자기 탕감할 것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금년에는 흉년이 매우 심하니, 탕감하게 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기도 합니다. 오로지 성상께서 재량하여 조처하실 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처음에 탕감해 주는 것을 어렵게 여긴 것은 그 다소를 헤아려서 아꼈던 것이 아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여러 도의 흉년이 이렇게 심하여 비록 원 회계부(元會計簿)에 수록된 곡물이라고 하더라도 다 바치기가 어려운 형편인데, 더구나 이렇게 사소한 칙첩 값의 쌀이겠는가? 탕감해 주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김수항이 또 아뢰기를,
"곡식을 바치고 직첩을 받은 무리들을 충장위(忠壯衛)에 충정(充定)시키는 일에 대해서는 신이 남쪽 지방에 있을 적에도 그 원망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대체로 충장위의 역사(役事)는 본래 힘이 들지 않기 때문에 그 전부터 다만 전사한 사람의 자손들만을 입적(入籍)시키도록 하였으니, 나라에서 그들을 대우한 도리는 상당히 차이를 두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곡식을 바치고 직첩을 받은 무리들을 충장위에 충정시키는 것은 병진년234) 부터 비롯된 것으로서 고(故) 청성 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의 건의에 의하여 그 규정이 정해진 것입니다. 대개 그 뜻은 곡식을 바친 무리들을 비록 천역(賤役)에 충정시키는 것은 불가하나 전연 역사(役事)를 시키지 않을 수도 없으므로, 충장위에 예속(隸屬)시키게 한 것입니다. 그 본래의 뜻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나 백성들의 원통함을 일컫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변통하는 방법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도 면제시키라."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오늘날 성상께서 어공(御供)의 모든 물품과 모든 관아의 경비를 줄이지 아니한 것이 없으므로 다시 더 절약하여 줄일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아랫사람들의 희망하는 것은 오늘날의 용도를 마치 전쟁 중에 있을 때와 같이 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궁가(宮家)에 내려 주는 물품을 일체 감손시킨 뒤에야 이것을 미루어 백성을 구제하는 데에 베풀 수가 있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평상시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절도있게 써야만 백성을 보전할 수가 있는 것인데, 더구나 이렇게 큰 흉년을 만나서 어찌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수가 있겠는가. 대신들의 의견이 이와 같으니, 내가 마땅히 유념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17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75면
- 【분류】왕실(王室) /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군사-중앙군(中央軍) / 재정-역(役) / 재정-잡세(雜稅) / 구휼(救恤)
○應敎李頤命、校理趙相愚、金昌集、徐文𥙿、修撰金盛迪應旨上箚, 首言祈天命諴小民之道, 次言時弊七條, 末引先朝遇災省費, 活國蘇民之實, 以爲今日修省之法。 其七條, 一曰, 聖學不務其本, 立志無持久之實, 求道無憤悱之誠。 二曰, 冒屬收布之弊。 三曰, 忠義限代之弊。 四曰, 帖價賑民之米, 待秋還徵之弊。 五曰。 納粟受帖之類, 充定忠壯之弊。 六曰。 宮禁不嚴。 七曰, 恩數太濫。 凡數千餘言。 答曰: "災異孔棘, 憂懼方切, 爾等誡誨之箚, 實出於憂愛之誠, 而無非切至之論, 予用嘉尙, 當留心體念, 而箚末事。" 【前校理李徵明以言事, 被罪請還收。】 亦宜量處, 他餘可以變通事, 令廟堂稟處焉。 後領議政金壽恒, 持玉堂箚 【玉堂箚子命下備局。 故至是回稟。】 進曰: "箚中忠義事, 纔蒙區處之敎, 而其中帖價米事, 頗有曲折, 大抵賑民之物, 若以設粥賑之, 則雖元會之穀, 亦當蕩滌, 何況帖價米乎? 此則旣以乾糧分賑, 故當初朝家事目, 非惜升斗之穀, 只慮各邑虛實相蒙之弊, 欲其知數, 必令還捧, 且連値凶荒, 將來賑救之資, 亦有難繼之憂, 未遽許其蕩減矣。 今年凶荒特甚, 許令蕩減, 亦或一道, 惟在自上裁處。" 上曰: "當初或以蕩滌爲難者, 非較其多少而有所惜也。 到今諸道, 凶荒此甚, 雖元會之穀, 亦難盡捧, 況此些少帖價之米乎? 蕩滌可也。" 壽恒又曰: "納粟受帖之類, 充定忠壯衛事, 臣在南中, 亦聞其有怨, 蓋忠壯衛之役素歇, 故自前惟戰亡人子孫, 許令入籍, 則朝家待之之道, 亦頗有間矣。 今此納粟受帖之類, 充定於忠壯者, 始自丙辰, 故淸城府院君 金錫冑所建白而定式者也。 蓋其意, 以納粟之類, 雖不可充定賤役, 亦不可全然無役, 故使之隷屬於忠壯, 其所主意, 不爲無據, 而民之稱冤, 一至於此, 似當有變通之道。" 上曰: "此亦減除。" 壽恒曰: "今日自上御供諸物及百司經費, 無不裁省, 更無又加節省之道, 而大抵群下所望, 欲使今日用度, 如在干戈泥露之中, 至如諸宮家賜給之物, 一切裁損而後, 可以推施濟民矣。" 上曰: "雖在平常之時, 必須節用而後, 可以保民, 況値此大無, 寧可少忽? 大臣所達如此, 予當留念矣。"
- 【태백산사고본】 19책 17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75면
- 【분류】왕실(王室) /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군사-중앙군(中央軍) / 재정-역(役) / 재정-잡세(雜稅) / 구휼(救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