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 김수항이 고 판서 이식의 공적을 치하하며 시호를 내리기를 청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고(故) 판서(判書) 이식(李植)은 무사(誣史)를 간정(刊正)한 공이 있는데도 죄를 입고 죽었으므로, 베풀어야 할 애도의 법전도 베풀지 못하고, 폄장(貶葬)하라는 유명까지 있어서 자손 또한 감히 시호를 청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사를 바로잡은 공으로 보아 특별히 증직과 시호를 내리고 이어 치제(致祭)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따라서 드디어 영의정을 증직하고 문정(文靖)의 시호를 내렸다. 김수항이 또 이단하(李端夏)를 명하여 부를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수찬 신계화(申啓華)가 효종 계사년204) 과 현종 갑진년205) 의 선례에 의거하여 북도(北道)에 별도의 과거를 보일 것을 청하니, 임금이 중신을 보내어 과거를 보이되, 날씨가 춥기 전에 진작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신계화가 또 북도 사람 이진영(李震英)을 거두어 쓸 것을 청하니, 이진영은 곧 임진 왜란 때 북도 병마 평사(北道兵馬評事) 정문부(鄭文孚)와 같이 순절할 사람 이붕수(李鵬壽)의 손자이다. 교리 서문유(徐文𥙿)가 정언 윤지익(尹之翊)이 김환(金煥)의 이배(移配)한 일로 해서 인피(引避)하는 말 속에 자기의 주견을 세우지 못하고 여론에 흔들림을 받았다고 논하자 체직시켰다. 신계화·서문유가 또 사헌부의 관원 이국화(李國華)·이태룡(李台龍)·한성우(韓聖佑) 등이 이단석(李端錫)의 일로 해서 인피를 할 때 사연이 분명하지 못하였던 잘못을 논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김몽신(金夢臣)은 이단석(李端錫)이 강종(强宗)을 찾아 간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논핵(論覈)하며, 옥후(玉候)가 편찮으시던 날에 찾아갔다는 것으로 말을 만들기까지 하여 죄를 성립시켰으니, 이는 곧 난역(亂逆)입니다. 어찌 사판(仕版)의 삭제에만 그치겠습니까? 거기에 가담한 여러 신하의 인피한 사연 중에도 시비가 전혀 분간이 없으니, 대각(臺閣)의 논의가 이래서는 아니됩니다. 모두 체차(遞差)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고 그름을 막론하고 상례에 따라 인피하는 것은 극히 모호한 행위이다. 장령이 태룡·지평 한성우를 함께 체차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17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72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역사-편사(編史) / 역사-전사(前史)
○御晝講, 領相金壽恒言: "故判書李植, 有刊正誣史之功, 而被罪而死, 不得擧應行愍典, 以有貶葬遺命, 子孫亦不敢請諡, 以修史功特贈爵諡, 仍令致祭爲好。" 上從之。 遂贈領議政諡文靖 壽恒, 又請召致李端夏從之。 修撰申啓華, 請依孝廟癸巳先朝甲辰例, 別設科于北道。 上令遣重臣, 趁未寒設科。 啓華又請收敍北關人李震英, 震英卽壬辰倭亂時, 與北評事鄭文孚同事殉節者鵬壽孫也。 校理徐文𥙿, 論: "正言尹之翊, 以金煥移配事, 避辭中不立已見, 爲物議所撓之失, 遞之。" 啓華、文𥙿, 又論: "憲臣李國華、李台龍、韓聖佑等, 以李端錫事引避而措語不明之失。" 壽恒曰: "金夢臣以李端錫往見强宗一款論劾, 而至以玉候違豫之日爲言, 以此成罪, 便是將心, 何可削版而止哉? 隨參諸臣避辭中, 全沒是非, 臺閣論議, 不當如是, 竝爲遞差宜矣。" 上曰: "不論是非, 循例引避, 極涉糢糊, 掌令李台龍、持平韓聖佑, 竝遞差。"
- 【태백산사고본】 19책 17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72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역사-편사(編史) / 역사-전사(前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