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자문에 임금까지 해가 됨을 사죄하고, 숙의 간택 등을 신하들이 건의하다
임금이 대신과 비변사의 여러 재신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또 청나라 자문이 올 때에 그 욕설이 성궁(聖躬)에까지 미치게 되었다는 것으로 죄를 끌어서 면직을 빌며 아뢰기를,
"국가에 일이 있으면 그 책임은 보필하는 정승에게 있습니다. 신이 불초한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있지 못할 자리에 있으면서 군부(君父)에게 욕이 돌아가게 하고서도 신하로서 죽어야 하는 의리를 다하지 못하였으니, 온 나라 신민(臣民)의 아픔을 위로할 길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위로하여 타이르고 윤허하지 않았다. 이어 김수항이 청나라에 사은사(謝恩使)를 보내고 이내 벌금을 부치되, 사신을 미리 차출하여 두었다가 진주사(陳奏使)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곧장 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김수항이 또 아뢰기를,
"숙의(淑儀)를 간택하는 일은 종묘 사직의 대계를 위한 것인 만큼 덕선(德選)하는 도리를 조금도 소홀히 해서는 아니됩니다. 옛사람의 말에 ‘용모나 말하는 사이에 그 덕기(德器)와 복상(福相)을 알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로써 취사할 즈음에 징험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를 받아들였다. 병조 판서 이숙(李䎘)이 아뢰기를,
"후주(厚州)의 존폐 여부를 원임 대신에게 물으니, 판중추부사 정지화(鄭知和)는, ‘당초의 설치가 이미 온당치 않았으니, 지금에 와서 파한다 하여도 아니될 것이 없다.’고 하고, 판중추부사 이상진(李尙眞)은, ‘이곳이 옥토(沃土)이고 또 병민(兵民)이 많이 모여 있는데 이왕 설치한 것을 도로 파하는 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하는 등 두 대신의 뜻이 같지 않습니다."
하니, 좌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아뢰기를,
"신이 선조(先祖) 때 후주의 설치를 건의하여 세웠던 바, 오늘날에 미쳐서 국가에 일이 생겨 욕이 성궁에게 미치었으니, 죄는 실로 신에게 있습니다. 신으로서는 다시 진달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지만, 예전에 조충국(趙充國)069) 이 오랑캐를 격파할 적에 어떤 이가 두 장군이 출격을 한 공이라고 하자, 조충국이 스스로 둔전(屯田)을 설치한 공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가 스스로 자랑함을 만류하자, 조충국은, ‘변방 일의 이해(利害)는 뒷날의 법이 된다.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 혐의스럽다 하여 명주(明主)를 속여서는 아니된다.’ 하였습니다. 오늘날 신도 또한 어찌 감히 죄를 기다리는 처지라 하여 한 마디 분명한 말을 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삼수(三水)·갑산(甲山)의 진보(鎭堡)는 모두가 강변인지라, 오늘날 월경을 범하는 데는 여러 곳이 똑같고 보면 후주라 하여 유독 산삼 캐는 길이 된다는 이치는 결코 없습니다.
오늘날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법을 어기고 국경(國境)을 넘는 사람이 양식을 모으기가 어려운데, 후주는 땅이 비옥하여 곡물이 많이 쌓여 있기 때문에 다른 곳의 사람들이 다 후주에서 양식을 구해다가 국경을 넘어 산삼을 캐는 밑천을 삼으므로 이를 파하여야 된다.’고 하지만, 변진(邊鎭)의 설치란 산삼 채취를 금지하는 한 가지 일만이 아니라, 위급한 사태에 유용한 것으로서 반드시 그 때가 있는 것입니다. 듣건대, 저 나라에서는 일찍이 공허한 땅이었는데도 지금 애양(靉陽)·관전(寬奠)·노성(老城) 등 여러 곳에 모두 한창 병력을 첨가하며 성을 쌓고 있는데, 우리는 예전 사람처럼 속(粟)070) 을 변방으로 옮기는 일도 못하면서 도리어 변방 땅에 곡식이 나는 것을 우환으로 여겨 이미 설치한 진을 파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진을 파한다 하더라도 땅은 그대로 있는데 변장을 믿을 수 없다 하여 그것을 파한다면 삼수와 강계(江界)에 차정(差定)하여 보낸 파수군은 어떻게 유독 믿을 수 있으며, 반드시 그 법을 어기고 국경을 넘는 것을 금지하리라고 믿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김수항에게 물었다. 김수항이 대답하기를,
"신이 그 곳을 보지 못하여 형세와 이해(利害)는 실상 자세히 모릅니다. 그러나 판중추부사 민정중(閔鼎重)의 말을 들은즉 토지는 비록 좋으나 형세가 고립되어 영문(營文)의 호령이 멀어 서로 미치지 못하므로, 끝내 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민정중은 북방의 일을 잘 알고 있어서 그의 말은 반드시 소견이 있을 것이며, 다른 사람의 말도 파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광주 유수(廣州留守)는 일찍이 그 관찰사를 지냈으니, 소견이 어떠한가?"
하자, 그때 윤지선(尹趾善)이 막 입시하였다가 나아와 대답하기를,
"국경을 넘어서 산삼을 캐는 걱정은 후주를 파하고 파하지 않는 데에 매인 것이 아니니, 신은 파하지 않는 것이 온당하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날 법을 어기고 국경을 넘어가는 사단이 반드시 후주의 설진(設鎭)으로 연유한 것은 아니나, 민 판중추부사가 일찍이 본도 관찰사를 지냈는데 파하는 것이 좋다고 하고, 바깥의 의논도 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 의견이 많다 하니, 파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김수항이 나아와 아뢰기를,
"계해년071) 간에 김석주(金錫胄)가 조지겸(趙持謙)·오도일(吳道一)·한태동(韓泰東) 등의 일을 논하여, 조지겸과 한태동은 파직이 되었는데 모두 바로 거두어 쓰고, 오도일은 외직으로 내보내어 4년 동안 불러들이지 않았으니, 벌을 주는 도리가 이러하여서는 아니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영원히 버리고자 하는 뜻이 아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17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61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국왕(國王)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군사-관방(關防) / 외교-야(野) / 농업-특용작물(特用作物)
- [註 069]
○丁卯/引見大臣備局諸宰。 領議政金壽恒, 又以淸咨之至辱及聖躬, 引罪乞免曰: "國家有事, 責在輔相。 臣以無似, 忝竊匪據, 歸辱君父, 不能效臣死之義, 無以慰擧國臣民之痛。" 上慰諭不許。 壽恒請遣謝恩使于淸, 仍付罰金, 預差使臣, 以俟陳奏使回還後卽送, 上可之。 壽恒又曰: "揀擇淑儀, 旣爲宗社大計, 德選之道, 不可少忽。 古人云 ‘容貌辭氣之間, 可知其德器與福相。’ 宜以此驗之於取舍之際。" 上納之。 兵曺判書李䎘曰: "厚州罷置問于原任大臣, 則判府事鄭知和以爲。 ‘當初設置, 旣未得當, 到今還罷, 未爲不可。’ 判府事李尙眞以爲。 ‘此是沃土, 兵民多聚, 旣設還罷, 殊甚可惜。’ 兩大臣之意, 各不同矣。" 左議政南九萬曰: "臣於先朝, 建置厚州, 及今生事於國家, 辱及於聖躬, 罪實在臣。 臣不宜更有所陳, 而古者趙充國之破羌也, 或以爲二將軍出擊之功, 而充國自以爲屯田之功。 人或止其自伐, 則充國曰。 ‘邊事利害, 當爲後法。 不可嫌於自伐以欺明主。’ 今臣亦何敢以俟罪之故, 不一明言乎? 三ㆍ甲鎭堡, 皆是江邊, 今之犯越諸處同然, 則厚州必無獨爲蔘路之理。 今之議者以爲, ‘犯越之人, 難於聚糧’, 而厚州土沃, 多積穀物, 故他處之人, 皆覓糧於厚州, 以爲越採之資, 此爲可罷云, 邊鎭之設, 非但禁蔘一事而已, 緩急爲用, 必有其時。 聞彼國則曾所空虛之地, 如靉陽ㆍ寬奠ㆍ老城等處。 皆方添兵築城, 而我旣不能如古人之移粟塞上, 反以邊地之生穀爲患, 革罷旣成之鎭, 其可乎哉? 且雖罷鎭, 地則自如, 以邊將爲不可信而猶罷之, 則三水ㆍ江界所定送之把守軍, 何獨可信, 而必能禁其犯越乎? 上以問壽恒, 壽恒對曰: "臣未見其地, 形勢利害, 實所未詳。 而聞判府事閔鼎重之言, 則土地雖好, 形勢孤絶, 營門號令, 邈不相及, 終不可不罷。 鼎重詳知北方事, 其言必有見矣, 他人之言, 可罷者亦多矣。" 上曰: "廣州留守曾經監司, 所見何如?" 時尹趾善方入侍, 進對曰: "越採之患, 不係於厚州之罷與不罷, 臣以爲不罷便。" 上曰: "今此犯越, 雖未必其專由於厚州之設鎭, 而閔判府事, 曾按本道, 以罷爲可, 外議亦多謂當罷云, 罷之可也。" 壽恒進曰: "癸亥間金錫冑、論趙持謙ㆍ吳道一ㆍ韓泰東等事, 持謙ㆍ泰東罷職, 而竝卽收敍, 道一補外而四年不召, 用罰之道, 不當如是。" 上曰: "此非欲永棄之意也。"
- 【태백산사고본】 19책 17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61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국왕(國王)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군사-관방(關防) / 외교-야(野) / 농업-특용작물(特用作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