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학 최석정이 소를 올려 윤증을 신구하자 답하다
부제학(副提學) 최석정(崔錫鼎)이 소를 올려 윤증(尹拯)을 신구(伸救)하면서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을 침해하여 배척하였다. 그 소에 말하기를,
"신이 엎드려 신엽(申曅)의 소에 대한 비답을 보았습니다. 지난날에 유현(儒賢)이 조정을 떠나갔을 적에 옥당(玉堂)에서 차자를 베풀어 그에게 머물기를 청하지 아니한 것은 대단히 실오(失誤)한 짓이다 하셨으니, 신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전부터 유현(儒賢)이 조정을 떠나가는데는 대개는 정세(情勢)가 불안(不安)함을 인하였거나, 혹은 예우(禮遇)가 조금 쇠하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옥당(玉堂)의 신하들이 차자를 올려 머물기를 청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날에 송시열이 성(城)에 들어왔을 적에는 겨우 대궐의 섬돌에 오르자 곧 돌아갈 길을 찾았기에 비록 소장(疏章)을 베풀어 머물기를 청하고 싶어도 이미 미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주상께서 은례(恩禮)의 융성함이 멀리 상례(常例)와 달랐습니다. 그러한즉 또 한갓 문구(文具)만을 일삼을 필요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러기에 떠나는 말을 잡아매는 문장을 과연 위에 아뢰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어제 경연(經筵)에 있던 대신이 윤증(尹拯)의 서찰(書札)의 일에 대해 논(論)하였고, 이어서 사관(四館)023) 이 유생(儒生)에게 벌을 베풀었던 행동에 미쳤기에 파직(罷職)하라는 명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가(朝家)의 처분(處分)에는 반드시 그 일의 옳고 그른 것을 먼저 논(論)하여 일이 진실로 글렀으면 죄를 주어 물리침은 옳지 아니함이 없겠습니다만 만일 혹 그러하지 않아서 일의 시비(是非)를 논(論)하지 아니하고 먼저 꺾어버려서 진정시키는 방책(方策)으로 삼는 것이라면 신은 곧 시비가 더욱 혼효(混淆)해지고 인심(人心)이 더욱 답답하여져서 마침내 진정하는 효과(效果)가 없어질까 두렵습니다. 지난날 김성대(金盛大) 등이 윤증의 서찰(書札)의 한 구절의 말을 따가지고 선현(先賢)을 무욕(誣辱)하였다고 일러서 죄를 성토(聲討)하는 글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윤증은 곧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의 외손자이고,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는 실로 성혼과는 덕을 이웃하여서 외롭지 아니합니다. 윤증이 두 분의 선현을 높여 사모한지 여러 해가 되었은즉 이제 이이를 모욕(侮辱)하였다는 것이 과연 이치에 가깝겠습니까? 하물며 그의 편지는 선현을 끌어다가 그의 아비의 일을 인증(引證)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 어찌 일분인들 날조한 것에 근사(近似)한 말이 있었겠습니까? 대저 남의 사사로운 편지를 끌어내어 횡(橫)으로 죄안(罪案)을 더하는 것은 이미 성세(聖世)에는 당연히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론(士論)이 어그러지고 막혀서 서로 헐뜯고 알력이 있는 날을 당하여 오래 묵은 서척(書尺)을 주워 모아서 별건(別件)의 죄명(罪名)을 얽어 만들어서 반드시 선현을 무욕(誣辱)하였다는 죄과(罪科)에 빠지게 한다면 이는 또한 불인(不仁)이 심하다 하겠습니다. 이제 만일 윤증으로 하여금 진실로 선현을 무욕한 죄가 있을 것 같으면 이 일은 사문(斯文)024) 에 관계되는 것이니, 사람들이 한가지로 질시(嫉示)하여 많은 선비들이 함께 분하게 여겨 꾀하지 않아도 말이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러하지 않아서 다만 김성대(金盛大) 등 몇 사람의 손에서 나왔을 뿐이니, 그것은 사림(士林)의 공론(公論)이 아니고 함정에 빠뜨리려는 사의(私意)인 것이 또한 분명합니다. 이렇게 선비들의 습관(習慣)이 단정(端正)하지 못하니 이를 규정(糾正)하는 것은 자연히 사관(四館)의 직책(職責)입니다. 들으니 편지를 발송(發送)한 뒤에 삼가 알았다고 써보낸 자가 20여 인에 이르렀다 하니 공의(公議)의 소재를 대개 알아보겠습니다. 이렇게 일을 날조(揑造)하여 남을 무함(誣陷)하여 스스로 부정(不靖)을 만드는 이는 실지로 김성대 등이 한 일인데도 그런데 대신들은 도리어 먼저 부정의 단서(端緖)를 야기한 것을 사관(四館)의 죄로 여기고 있으니, 신은 참으로 그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에 대하여 대각(臺閣)이 같이 들어와서는 한 말이라도 이를 광구(匡救)하는 이가 없었고, 겨우 물러가서야 도로 거두어들이라고 아뢰었다는 것이 초초(草草)하여 말이 되지를 않았으니 신이 속으로 애석(哀惜)하게 여깁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성명(聖明)께서 더욱 환히 살피셔서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다. 임금이 정원(政院)에 전교하기를,
"이 상소(上疏)는 도로 내주어라."
하였다. 이어서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말하기를,
"이제 부제학(副提學) 최석정(崔錫鼎)의 소본(疏本)을 보았다. 저쪽을 억누르고 이쪽을 드날려서 치우치게 사당(私黨)을 옹호(擁護)하는 태도가 드러나서 이를 덮기 어려웠으니 진실로 경악(驚愕)함을 이길 수가 없다. 지금 조정[朝著]이 부정(不靖)함을 보고 사습(士習)이 예같지 아니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마는 자기들 가운데의 논의(論議)를 능히 다 밝히지 못하였기에 처분이 합당치 못하였었다. 그런데 대신(大臣)이 경연(經筵)에서 논렬(論列)한 것은 시비(是非)를 바로잡고 호오(好惡)를 밝히려는 뜻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러니 어찌 먼저 들어온 것을 위주로 하여 나온 땀을 도로 들어가게 할 수 있겠느냐? 최석정이 도리어 이로써 지나친 처치(處置)라고 하였음은 진실로 알지 못하겠다. 더구나 대신을 흔들려는 계획은 차마 바로 볼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임금과 정승을 멸시(蔑視)하여 기탄없이 방자하기가 한결같이 이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몹시 마음아프고 또한 놀랄 일이다. 최석정은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라. 그리고 이 뒤에는 이와같은 장소(章疏)는 받아들이지 말라."
하였다. 이에 응교(應敎) 신엽(申曅)과 부교리(副校理) 윤덕준(尹德駿)과 수찬(修撰) 신계화(申啓華) 등이 청대(請對)하여 최석정을 파직시킨 명을 도로 거두어들이기를 청하고 교대로 알현하며 다시 간(諫)하여, 신엽이 ‘김창협(金昌協)은 옥천(沃川)의 유생(儒生)을 【즉 김엽(金曄)인데, 그 소는 갑자년(甲子年) 7월에 보인다.】 무상(無狀)하다고 여기었으니 아버지와 아들의 논의(論議)가 반드시 다르고 같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신의 뜻도 또한 김성대(金盛大) 등을 옳다고 여기지는 않을 것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까지 하였다. 대개 김창협은 사론(士論)이 어긋나는 것을 민망하게 여겨서 진정(鎭定)하려는 말을 낸 것이니, 오늘의 시비(是非)와는 아무런 관계도 있지 아니하다. 그런데도 신엽이 이를 끌어다가 주합(湊合)하여 한편으로는 김수항(金壽恒)을 협지(脅持)하고 한편으로는 김창협을 조절(操切)하였으니, 공의(公議)가 이를 매우 해괴하게 여겼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날 대신이 윤증(尹拯)에게 크게 망발(妄發)이라고 한 것은, 대개 사당(邪黨)에서 이를 인하여 핑계되므로써 선현(先賢)을 침욕(侵辱)할까 염려한 것이었다. 이 말이 매우 옳은데도 그러나 최석정은 윤증을 전연 과실(過失)이 없는 곳에 두고자 하였다. 이것이 사사롭게 비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또 대신이 윤증에게 선현(先賢)을 무함(誣陷)하였다고 이르지 않았고, 다만 망발이라고만 말하였다. 그런데 최석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신구(伸救)하였다. 그가 말한 ‘남의 사사 편지를 끌어내어 함부로 죄안(罪案)을 만들었다.’ 한 것은, 이는 이진안을 배척한 말이었으며, 그리고 ‘사론(士論)이 어그러지고 막힘을 당하여서는 불인(不仁)에 이름이 심하다.’ 한 것은 현저(顯著)하게 대신을 침노하여 헐뜯는 뜻이 있다. 그가 어찌 감히 이와 같은 짓을 하느냐?"
하였다. 신엽 등이 또한 사관(四館)에서 배우는 유생(儒生)에게 벌을 준 것은 과실(過失)이 없다고 여기었으며, 그리고 파직한 것은 합당하지 못하게 여기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관(史官)이 몸을 바쳐서 마땅히 간섭하지 않아야 할 일을 담당하여 위로 조정에까지 미치게 되었으니 그를 어찌 죄주지 않겠느냐? 너희들의 말은 구차(苟且)스러움을 면하지 못하겠다. 최석정이 파직당하는 데에 거듭 격동되고 사관(史官)이 파직된 벌을 도로 거두어들이기를 청한 데 이르러서는 더욱 미안(未安)하다."
하였다. 신엽이 또 간원(諫院)의 계사(啓辭)는 말을 이루지 못하였음을 진달하였고, 이어서 정원(政院)에서는 최석정이 죄를 입은 데 대하여 한 말도 없었음을 배척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최석정은 이미 그러한 죄가 있기에 승지(承旨)가 왕명(王命)을 출납하지 않았던 것이니, 그에게 과실(過失)이 있음을 내가 알지 못한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16권 6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2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臣伏見申曄疏批。 以向日儒賢去國, 玉堂不爲陳箚請留, 爲大段失誤之擧, 臣不勝瞿然。 自前儒賢去國, 多因情勢不安, 或以禮遇少衰, 故玉堂之臣, 有陳箚請留之時。 頃日宋時烈之入城也, 纔登天陛, 旋尋歸路, 雖欲陳章請留, 已無及矣, 自上恩禮之隆, 逈異常例。 則又不必徒事文具。 故縶駒之章, 不果上聞矣。 日昨筵席大臣, 論尹拯書札事, 仍及四館施罰儒生之擧, 至有罷職之命。 凡朝家處分, 必須先論其事是非, 事苟非也, 罪斥無所不可, 如或不然, 不論事之是非, 先加摧折, 以爲鎭靜之策, 則臣恐是非益淸, 人心益鬱, 終無鎭定之效也。 頃日金盛大等, 抉摘尹拯書札一句語, 謂之誣辱先賢, 聲罪發文。 拯卽文簡公 成渾之外孫, 文成公 李珥, 實與渾隣德不孤。 拯之尊慕兩賢, 積有年所, 則今謂辱珥者, 果近於理乎? 況其書不過援引先賢, 以證其父之事, 有何一分近似於構捏者之言哉? 夫發人私書, 橫加罪案, 已非聖世之所宜有。 而當此士論乖阻, 互相詆軋之日, 捃摭久遠書尺, 構成別件罪名, 必欲擠之於誣賢之科, 其亦不仁甚矣。 今使尹拯, 誠有誣賢之罪, 則事關斯文, 人所同嫉, 宜其多士齊憤, 不謀同辭。 而今乃不然, 只出於盛大等若干人之手, 其非士論之公, 而爲傾陷之私者, 亦較然矣。 士習之不端如此, 則糾正自是四館之責耳。 聞其發簡之後, 書送謹悉者, 至於二十餘人, 則公議所在, 槪可見矣。 構捏陷人, 自作不靖, 實是盛大等事, 而大臣反以先惹不靖之端, 爲四館之罪, 臣實未曉其意。 臺閣同入, 無一言匡救, 退爲還收之啓, 而草草不成說話, 臣竊惜之。 伏願聖明, 更加澄省, 收回成命。
上傳于政院曰: "此上疏還出給。" 仍下備忘曰: "今觀副提學崔錫鼎疏本, 抑揚彼此, 偏護私黨之態, 透露難掩, 誠不勝驚愕。 目今朝著之不靖, 士習之不古, 予豈不知? 而自中論議, 不能盡燭, 處分未免失當。 大臣之前席論列, 無非正是非明好惡之意。 則何可以先入爲主不爲反汗乎? 錫鼎之反以此爲過擧, 實所未曉。 況其敲撼大臣之計, 有不忍正視者。 蔑視君相, 縱恣無忌, 一至於此, 誠可痛而亦可駭也。 崔錫鼎罷職不敍。 今後如此章疏, 勿爲捧入。" 於是, 應敎申曄、副校理尹德駿、修撰申啓華等請對, 請還收錫鼎罷職之命, 交謁更諫, 曄至言: ‘金昌協, 以沃川儒生 【卽金曄疏見甲子七月。】 爲無狀, 父子論議, 必無異同。 可知大臣之意, 亦不以盛大等爲是。’ 蓋昌協閔士論之乖張, 發鎭定之言, 非有干於今日是非。 而曄拘引溱合, 一以脅持壽恒, 一以操切昌協, 公議甚以爲駭。 上曰: "頃日大臣, 以尹拯爲大妄發者, 蓋慮邪黨, 因此藉口, 侵辱先賢。 此言極是, 而錫鼎欲置拯於全然無過之地, 此非私護而何? 且大臣非謂拯誣賢, 只言妄發, 而錫鼎終始伸救。 其所謂發人私書, 橫加罪案者。 乃是斥震顔之語, 而自當士論乖阻, 至不仁甚矣云者。 顯有侵詆大臣之意, 渠豈敢若是? 曄等又以四館之施罰學儒, 爲無失, 而以罷職爲過當。 上曰: "史官挺身擔當於不當干涉之事, 以至上及朝廷, 何可不罪? 爾等之言, 未免苟且, 層激於錫鼎之見罷, 至請還收史官罷職之罰, 尤極未安。" 曄又陳諫院啓辭之不成說話, 仍斥政院之無一言於錫鼎之被罪。 上曰: "錫鼎旣有其罪, 承旨之不覆逆, 予未知其有失也。"
- 【태백산사고본】 18책 16권 6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2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