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강에 나가 과거·죽은 김제의 후사·고 대제학 조석윤의 증수에 관해 논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임금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정시(庭試)536) 와 알성시(謁聖試)537) 는 으레 반드시 당일에 출방(出榜)하므로, 급한 즈음에 미처 정밀하게 고사(考査)하지 못하니, 이 뒤로 정시는 전시(殿試)의 예에 의하여 시관(試官)을 대궐 안에 유숙(留宿)하게 해서 조용히 고시(考試)하여 인재를 빠뜨리는 한탄이 없도록 하라."
하였는데, 영부사(領府事) 김수흥(金壽興)이 말하기를,
"시권(試券)을 거두는 시각도 마땅히 조금 늦추어서 그 재주를 다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자, 우의정 남구만(南九萬)이 말하기를,
"만약 시각을 늦추면 받아들인 시권(試券)이 반드시 많아서 비록 며칠이라도 다 고시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가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김수흥이 말하기를,
"대제학(大提學)이 양관(兩館)538) 의 제학(提學) 및 일찍이 제학을 역임했던 사람과 세 곳에 나누어 고시하는 것이 가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에 의하여 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각(臺閣)의 대추 행공(帶推行公)은 대개 자주 체임(遞任)하는 것을 염려해서인데, 변통한 뒤 패초(牌招)해도 나아가지 아니하여 오히려 분운(紛紜)하니, 장령(掌令) 남필성(南弼星)·지평(持平) 이두악(李斗岳)이 어제 패초를 어겼고, 장령 이국화(李國華)가 오늘 또 나오지 아니하였다. 대각의 직임은 규핵(糾劾)하는 데 있는데, 먼저 잘못하는 바가 있으니, 장차 어떻게 다른 사람을 규정(糾正)하겠는가? 아울러 체차(遞差)하도록 하라."
하자, 남구만이 말하기를,
"대저 대각을 대우하는 도리에 있어서 일을 말한 것이면 마땅히 너그럽게 용납할 것이나, 사체(事體)와 유관한 일은 별도로 경책(警責)하지 않을 수 없는데, 체차하는 것은 가벼운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파직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남구만(南九萬)이 말하기를,
"요즈음 성상께서 대각의 논의를 받아들이시는 정성이 자못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뜻을 잃어서 사진(仕進)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하니, 이는 마땅히 스스로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군신(君臣)은 부자(父子)와 같아서 상하(上下)의 마음이 서로 교부(交浮)539) 하는 것이 귀중한데, 어찌 한 마디 말이 합당하지 못하다 하여 문득 소명(召命)을 어긴다는 것인가?"
하였다. 임금이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선(李選)에게 유시(諭示)하기를,
"흉년에는 수령(守令)을 더욱 적당한 사람을 가려야 마땅한데, 종전에 치적(治績)이 드러난 사람을 거론(擧論)하지 아니한 것이 많다. 만약 대신(大臣)이 건백(建白)하였거나 어사(御史)가 포계(褒啓)한 자는 별도로 조용(調用)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남구만이 말하기를,
"식년 문과(式年文科)540) 는 3년마다 33명을 뽑는데, 단지 구송(口誦)만 취하니, 문의(文義)는 전혀 해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외딴 시골의 거친 사람은 혹은 언문(諺文)을 어려서부터 습독(習讀)하다가 과거에 오르게 되면, 서찰(書札)의 수응(酬應)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바야흐로 지금 문관(文官)이 사람의 수는 비록 많다고 하더라도 삼사(三司)의 관직에는 매양 사람이 없음을 근심하고 있으며, 경외(京外)의 시관(試官)도 간혹 구차스럽게 채우니, 경장(更張)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이제 주자(朱子)의 ‘학교 사의(學校私議)’ 가운데 있는 규식(規式)을 모방하여 사서(四書) 외에 《시경(詩經)》·《서경(書經)》·《주역(周易)》·《춘추(春秋)》를 자(子)·오(午)·묘(卯)·유(酉) 네 식년(式年)에 나누어 붙여서 돌려가면서 사서(四書)와 일경(一經)을 강(講)하게 하면, 송독(誦讀)하는 공부가 전보다 크게 줄어서 과거에 응시하는 선비 또한 장차 즐거워하고, 《사서》에 치우치는 근심이 없을 것이며, 글이 능한 선비가 반드시 장차 그 선발에 많이 들어갈 것입니다. 또 제술(製述)로 과거에 응시하는 자는 식년(式年)의 강(講)에 응시하는 것을 어렵게 여겨, 애초에 감히 뜻을 내지 못하며, 인하여 경서(經書) 가운데 마침내 1부(部)도 익히는 바가 없으므로, 명경(明經)과 제술(製述)이 서로 병폐가 되었습니다. 만약 이 법을 쓰면, 사람마다 사경(四經)을 습독(習讀)하여 명경에서 인재를 얻을 뿐만 아니라, 제술에 합격하는 자 가운데서도 반드시 경학(經學)의 선비가 많아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다른 대신에게 물어서 품처(稟處)하도록 명하였다. 남구만이 말하기를,
"전에는 별시(別試)541) 에서도 강경(講經)이 있었는데, 이 법을 오랫동안 폐지한 일은 지극히 의미가 없습니다. 이 뒤로는 삼백시(三百試)·육백시(六百試)를 막론하고 모두 강경을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남구만이 말하기를,
"순흥부(順興府)는 고을 사람의 진소(陳疏)로 인하여 다시 설치하도록 허락하였는데, 듣건대, 소민(小民)들은 원망과 고통이 자못 심하다고 합니다. 또 봉화(奉化)·풍기(豐基)를 분할하여 붙이는 것도 또한 지극히 불편합니다. 만일 도로 파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시면, 풍기·순흥을 한 큰 고을로 만들어 죽령(竹嶺) 밑에 두어 관방(關防)을 만들 만합니다. 죽령 위에 어류 산성(御留山城)의 유지(遺址)가 있는데, 고(故) 상신(相臣) 이경여(李敬輿)가 일찍이 이 성(城)을 수축할 것을 청하였으니, 또한 반드시 의견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먼저 적당한지 여부(與否)를 본도(本道)의 감사(監司)에게 물은 뒤에 품처(稟處)하도록 하였다. 남구만이 말하기를,
"명종조(明宗朝)의 직신(直臣) 김저(金䃴)는 김세필(金世弼)의 아들입니다. 김세필은 자호(自號)가 십청(十請)인데, 또한 기묘 명현(己卯名賢)542) 입니다. 김제가 대간(臺諫)이 되어 정순붕(鄭順朋)·이기(李芑)와 맞지 아니하여 절새(絶塞)에 귀양갔다가, 죽음에 임하여 일곱 글자의 시(詩)를 그 형에게 부쳤는데, 대개 스스로 혈윤(血胤)543) 이 없으므로 형의 아들로 후사(後嗣)를 삼도록 부탁한 것으로서, 그 말이 매우 처완(悽惋)하였습니다. 그 형이 그 신주(神主)를 그 아들에게 부탁하였는데, 법에 의하여 후사를 세우지 못하고, 방친(傍親)을 반부(班祔)544) 한 것과 같이 하였습니다. 지금은 세대(世代)가 이미 멀어져서 비록 후사를 세운다 하더라도 제사는 일대(一代)에 그치는 데 불과합니다. 그러나 김제는 곧은 절의로써 원통하게 죽었으니, 그 후사(後嗣)가 끊어지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하자, 검토관(檢討官) 윤덕준(尹德駿)이 청하기를,
"이미 죽은 자로써 그 뒤를 이어서 후대(後代)를 잇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듣고 나니 측연(惻然)하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전례(前例)에 상고하여 후사를 세우도록 하라."
하였는데, 해조에서 전례가 없다고 하여 시행하지 말 것을 청하였으나, 특별히 명하여 후사를 세우게 하였다. 이선이 말하기를,
"고(故) 대제학(大提學) 조석윤(趙錫胤)은 인조(仁祖)·효종(孝宗) 두 조정의 명신(名臣)입니다. 청직(淸直)함이 한 세상의 으뜸이었으나, 미쳐 크게 쓰이지 못하였습니다. 사림(士林)에서 지금까지 몹시 애석해 하는데, 아직 증전(贈典)이 없으니, 진실로 서운합니다."
하자, 김수흥이 말하기를,
"조석윤은 집안에서는 효유(孝友)545) 하였고, 입조(立朝)하여서는 청직(淸直)하였습니다. 기축년546) 사이에 신의 조부 신(臣) 김상헌(金尙憲)이 단지 조석윤 한 사람만을 대제학(大提學)으로 추천하였는데, 효묘(孝廟)께서 독천(獨薦)한 까닭을 물으시자, 신의 조부가 ‘조신(朝臣)에서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였으니, 품질(品秩)을 바꾸어 증직(贈職)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기고 좌찬성(左贊成)을 추증(追贈)하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7책 15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10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가족-가족(家族) / 풍속-예속(禮俗)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관방(關防) / 인물(人物)
- [註 536]정시(庭試) :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대궐 안 마당에서 보이던 과거.
- [註 537]
알성시(謁聖試) : 임금이 성균관에 거둥하여 알성(謁聖:성균관 문묘(文廟)의 공자 신위에 참배함)하고 나서 보이던 과거.- [註 538]
양관(兩館) : 홍문관과 예문관.- [註 539]
교부(交浮) : 서로 마음이 맞아서 의심이 없음.- [註 540]
식년 문과(式年文科) : 조선조 때 식년(式年)에 보이던 문과 고시(文科考試). 식년은 태세(太歲)가 자(子)·오(午)·묘(卯)·유(酉)가 드는 해임.- [註 541]
별시(別試) : 나라에 경사(慶事)가 있을 때나 병년(丙年)마다 특별히 보이던 문무(文武)의 과거.- [註 542]
기묘 명현(己卯名賢) : 조선 중종(中宗) 14년(1519)에 수구파(守舊派)에 의해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파(新進派)들이 몰리어 죽거나 귀양간 기묘 사화(己卯士禍) 때 아울러 화를 입은 조신(朝臣)들을 말함.- [註 543]
혈윤(血胤) : 혈통(血統).- [註 544]
○甲戌/御晝講。 上謂筵臣曰: "庭試謁聖, 例必卽日出榜, 急遽之際, 未及精考, 今後庭試, 依殿試例, 使試官留宿闕內, 從容考試, 無令有遺才之歎。" 領府事金壽興曰: "收券時刻, 亦宜差緩, 使盡其才也。" 右議政南九萬曰: "若退時刻, 納卷必多, 雖數日, 有難盡考, 未知何以則可也?" 壽興曰: "大提學與兩館提學及曾經提學, 分考三處可矣。" 上令依此爲之。 上曰: "臺閣之帶推行公, 蓋慮數遞, 而變通之後, 牌不進尙紛紜, 掌令南弼星, 持平李斗岳, 昨日違牌, 掌令李國華, 今日亦不進。 臺閣職在糾劾, 而先有所失, 將何以紏正他人乎? 竝遞差。" 南九萬曰: "凡待臺閣之道, 言事則當優容, 而事體間事, 不可不別樣警責, 遞差似輕矣。" 上曰: "罷職可也。" 九萬曰: "近者上於臺閣之論, 殊欠聽納之誠, 故人皆意沮, 不樂仕進, 此宜自反處也。" 上曰: "君臣猶父子, 上下情志, 貴相交孚, 豈可以一言不合, 輒違召命乎?" 上諭吏曹參判李選曰: "凶歲守令, 尤宜擇人, 而從前治續表著之人, 多不擧論。 如大臣建白, 御史褒啓者, 宜別樣調用矣。" 九萬曰: "式年文科, 每三年取三十三人, 而只取口誦, 專不解文義。 遐鄕鹵莾之人, 或以諺文, 自幼習讀, 及登科, 不能爲書札酬應, 故方今文官, 人數雖多, 三司等職, 每患乏人, 京外試官, 亦或苟充, 不可無更張。 今倣朱子學校私議中規式, 四書外詩、書、易、春秋, 分屬於子、午、卯、酉四式年, 輪回爲四書一經之講, 則誦讀之工, 大省於前, 應科之士, 亦將樂爲, 而四書無偏廢之患, 能文之士, 必將多入其選矣。 且製述應擧者, 以式年應講爲難, 初不敢生意, 因於經書中, 終無一部所習, 明經與製述, 交相爲病。 若行此規, 則人人習讀四經, 不但於明經得人, 凡於製述決科之中, 必多經學之士。" 上命問于他大臣稟處。 九萬曰: "在前別試, 有講經, 而此規久廢, 事極無謂。 今後勿論三百試, 六百試宜皆講經。" 上可之。 九萬曰: "順興府因邑人陳疏, 許其復設, 而聞小民則怨苦頗甚。 且奉化、豐基之割屬, 亦極難便。 如以還罷爲難, 則合豐基、順興爲一大邑, 處於竹嶺之下, 可作關防。 竹嶺上, 有御留山城遺址, 故相臣李敬輿, 曾請修築此城, 亦必有意見矣。" 上令先問便否於本道監司後稟處。 九萬曰: "明宗朝直臣金䃴, 世弼之子也, 世弼自號十淸, 亦己卯名賢也。 䃴爲臺諫, 崖異於鄭順朋、李芑, 竄絶塞, 臨死以七字詩, 寄其兄, 蓋身無血胤, 囑以兄之子爲後, 語甚悽惋。 其兄以其神主, 付其子, 而未得依法立後, 有若旁親之班祔者然。 今世代已遠, 雖立後, 祭不過一代而止矣。 然䃴以直節冤死, 不宜絶其嗣矣。" 檢討官尹德駿, 請以已死者, 繼其後, 以接後代。 上曰: "聞來惻然, 令該曹考例立後, 該曹謂無前例, 請勿施, 特命立後。 李選曰: "故大提學趙錫胤, 仁、孝兩朝名臣也。 淸直冠一世, 未及大用。 士林至今痛惜, 尙無贈典, 誠爲缺然矣。" 壽興曰: "錫胤居家立朝, 孝友淸白, 己丑年間, 臣祖父臣尙憲, 只以錫胤一人, 薦大提學, 孝廟下詢獨薦之由, 臣祖對以朝臣無出其右, 不幸早世, 人皆惜之, 似宜變品贈職。" 上可之。 追贈左贊成。
- 【태백산사고본】 17책 15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39책 10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가족-가족(家族) / 풍속-예속(禮俗)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관방(關防) / 인물(人物)
- [註 5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