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옹 직장 최신이 윤증이 송시열을 헐뜯었음을 상소하다
사옹 직장(司饔直長) 최신(崔愼)이 상소하기를,
"신(臣)의 스승인 봉조하(奉朝賀) 신(臣) 송시열(宋時烈)은 학문이 순정(純正)하고 도덕이 광대(光大)하여 팔방의 선비가 태산 북두처럼 바라보아 왔습니다. 접때 뭇 간사한 자가 침해하여 곤욕받을 때에도 모두 거짓을 밝혀 마지않았습니다. 뭇 흉악한 자가 내쳐지고 죄받았으며 지극히 억울하였던 것이 씻어졌으면 더욱 스스로 존경되고 믿어져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인심이 자못 편벽되고 세도(世道)가 더러워져서 덕을 숭상하는 기풍이 날로 쇠퇴하고 당(黨)을 좋아하는 버릇이 날로 깊어져 송시열의 종적이 날로 더욱 외롭고 위태로와집니까? 신은 오히려 오늘의 인심이 떳떳하지 못한 것이 어찌하여 이토록 지극한가 의심하였습니다마는, 이제야 그러한 까닭을 알았는데, 무슨 까닭이냐 하면 이러합니다. 전 대사헌(大司憲) 윤증(尹拯)은 산림(山林)에 발붙여 선비라 자처하면서 속으로는 바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서, 송시열을 헐뜯는 데에 여력(餘力)을 남기지 않았고, 이조 참판(吏曹參判) 박세채(朴世采)에게 글을 보내어 방자하게 송시열을 욕하였는데 없는 것을 가리켜 있다하고 흰 것을 가리켜 검다 하였는데, 그 글이 온 세상에 가득히 전파되었습니다. 글 가운데에서 말한 것은 모두가 원망하는 뜻인데 ‘목천(木川)의 일206) 이 이러하니, 이것은 반드시 함장(凾丈)의 문하(門下)에서 나왔을 것인데, 함장은 들은 데를 설파(說破)하려 하지 않았다.’ 하고, 또 ‘내가 스스로 허황(許璜)에게 묻게 한 것도 함장의 지시인지 모르겠다.’ 하고, 또 ‘의(義)와 이(利)를 나란히 행하고 왕도(王道)와 패도(霸道)를 아울러 쓰는 것은 《대학(大學)》의 성의(誠意)·정심(正心)의 학문과 같지 않으니, 동춘(同春)이 「모두가 기관(機關)이다」 한 것과 초려(草廬)가 「전혀 권수(權數)만을 쓴다」 한 것이 아마도 함장의 실병(實病)일 듯하다.’ 하고, 또 ‘함장이 선인(先人)에 대하여 갈명(碣銘)207) 을 지어 준 이래로 참으로 한 마디 말이나 한 가지 일뿐이 아니나, 목천의 일에 이르러서는 극진하였는데, 남의 자식된 마음이 어찌 전일처럼 태연하겠는가? 이 때문에 심정이 전과 다르지 않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윤증이 함장에 대하여 참으로 본원(本源)에 의심이 없을 수 없고 언행(言行)에 전일 논한 것과 같은 것이 있는데도 굳이 강질(講質)하지 않았다면, 옛사람이 이른바 스승과 제자라는 것은 참으로 이러한 의리가 없으니, 이 때문에 의리도 전과 같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심정으로나 의리로나 모두 전과 같을 수 없는데도 스스로 그것이 옳은 것이 아닌 줄 모른다면, 마음을 굽혀 죄를 빌려 하더라도 어떻게 말이 되겠습니까? 대개 함장이라 한 것은 송시열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죽은 유신(儒臣) 윤선거(尹宣擧)는 곧 윤증의 아비인데, 전에 송시열과 벗하였고, 윤증은 송시열에게 젊어서부터 배웠으므로 선생이라 칭하며 스승으로 섬긴 것이 수십 년인데, 하루아침에 잃은 것처럼 버리고 더러운 것처럼 꾸짖으니, 아! 험악합니다. 대개 의와 이를 나란히 행하고 왕도와 패도를 아울러 쓴다는 것은 곧 주자(朱子)가 일찍이 진양(陳亮)208) 과 왕복하여 논변(論辨)한 말인데, 이제 윤증은 전에 송시열의 어떤 말과 어떤 행실에 진양과 같은 것이 있는 것을 보았기에 이러한 비길 데 없는 말을 내었습니까? 송시열이 의와 이와 왕도와 패도에 대하여 자세하게 분석한 것은 지극히 정밀하여 그 근엄(謹嚴)을 더욱 다하였는데,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윤증의 말과 비슷한 것이 있겠습니까? 윤증의 말과 같다면 송시열의 학문은 거짓이고 참된 것이 아닐 것인데, 송시열은 효종 때부터 총애로 발탁하여 쓰는 은혜를 매우 받았고 벼슬에 나아가기를 어려워하고 물러가기를 쉬워한 절조와 왕도를 높이고 패도를 물리친 일은 사람들의 이목에 밝게 남아 있으니, 속이려 하더라도 어찌 되겠습니까? 접때 역적 윤휴(尹鑴) 등도 감히 본원이 의심스럽고 기관이요 권수라 하여 배척하지는 못하였으니, 오늘 무함당한 것은 전에도 없던 말입니다. 윤증의 글에 이른바 동춘이란 죽은 유신 송준길(宋浚吉)이고 이른바 초려란 전 참판 이유태(李惟泰)이며, 그 이른바 기관이니 권수니 하는 것은 또한 다 관중(管仲)·상앙(商鞅)·장의(張儀)·소진(蘇秦)의 일인데, 윤증은 송준길과 이유태가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송준길이 과연 송시열을 모두가 기관이라 하였다면 매우 배척한 것인데, 또 어떻게 도의(道義)로 사귀는 사이로 허용하였겠으며, 살아 있을 때에 출처(出處)를 같이하고 죽을 때에 뒷일을 부탁하였겠으며, ‘고산을 우러러본다[高山仰止]’라는 넉자를 남겨서 종신토록 존경한 뜻을 보이기까지 하였겠습니까? 이것으로 보면, 윤증은 송시열을 무함하였을 뿐더러 송준길도 아울러 무함하였습니다. 이유태가 권수라고 한 말로 말하면 신도 듣지 못하였으나, 그러한 말을 하였더라도 이유태의 말을 공변되다고 할 만하겠습니까? 송시열이 이유태에 대하여서는 스승을 같이 섬겨서 벗하였으나, 갑인년209) 이후로 이유태는 의심스런 일이 많이 있었으므로 공론이 허용하지 않았는데, 이유태가 이 때문에 송시열에게 원망을 돌려 언짢아하는 마음이 있었으니, 윤증이 이 말을 끌어대어 증거로 삼은 것은 합세하여 연횡(連衡)210) 하려는 생각에 지나지 않고, 또 유감의 까닭이 있는데 신이 상세히 말하겠습니다. 윤증의 아비 윤선거는 병자 호란 때에 강도(江都)에 들어갔는데, 강도가 함몰(陷沒)되었을 때에 아내 및 벗과 같이 죽기로 약속하여, 그 아내도 죽고 그 벗도 죽었으나 윤선거만이 죽지 않았으니, 그 뒤로 문을 닫고서 학문하고 끝내 벼슬하지 않아서 대개 볼 만한 것이 많기는 하나, 완비하기를 책망한다면 어찌 비평할 만한 것이 없겠습니까? 예전에 역적 윤휴(尹鑴)가 실패하여 탄로나기 전에 사림(士林)을 잘 현혹하여 사림 중에 믿는 사람이 많이 있었으므로 송시열까지도 면하지 못하였으나, 윤휴가 진실을 저버리고 거짓을 자행하며 주자를 깔보는 것을 보고서는 곧 윤휴와 멀어졌었는데, 기해년211) 대상(大喪) 뒤에 예론(禮論)으로 함정을 만들게 되어서는 사람들이 누구인들 몹시 미워하고 매우 끊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윤선거만이 끊지 않았습니다. 어느날 송시열이 송준길·이유태·윤선거와 산사(山寺)에 모여 윤휴·윤선도(尹善道)의 일에 언급하였을 때에 윤선거가 ‘윤선도는 소인이나 윤휴는 군자이다.’ 하였는데, 송시열 등 세 사람이 함께 비난하기를, ‘윤선도의 일은 본디 윤휴에게서 시작되었는데, 그 본디 시작한 자가 군자라면 그 끝이 되는 자만이 어찌 소인이겠는가? 윤휴를 군자라하고 윤선도를 소인이라 한다면 윤선도가 매우 억울할 것이다.’ 하였으므로, 윤선거가 마지못하여 대답하기를, ‘윤휴도 소인이니, 내가 끊겠다.’ 하였으나, 끝내 윤휴를 끊은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죽었을 때에 윤휴가 윤선거를 위하여 제문(祭文)을 지어서 제 아들을 보내어 제사하였는데, 송시열이 듣고서 의아하게 여기고는 윤선거의 연제(練祭) 날에 제문 가운데에서 의심스러운 뜻을 대략 보였습니다. 그 글에 ‘이 강설(江說) 【윤휴(尹鑴)가 여강(驪江)에 살았으므로 강설이라 한 것이다.】 에는 조금 맞지 않는 것이 있거니와, 형이 해(海) 【윤선도(尹善道)가 해남(海南)에 살았으므로 해라 한 것이다.】 에 대해서도 모두 용서한다면 내가 의심되던 것이 몇 마디로 곧 풀린다.’ 하였으니, 송시열이 윤선거에 대하여 그 시원하지 못한 것을 의심한 것이 이러하였습니다. 그 뒤에 윤증이 그 아비의 묘문(墓文)을 송시열에게 청하였는데, 송시열이 다만 그 가장(家狀)에 따라서 그 언행(言行)을 적고 끝에 박세채(朴世采)가 칭찬한 말을 인용하여 일컬었더니, 윤증이 ‘송시열이 스스로 말을 만들지 않은 것은 반드시 불만한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일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왕복하여 변론하고 두세 번 고쳐 달라고 하였으나, 끝내 죄다 그 말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이때 송시열은 그 사이에 자기 뜻이 없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인데, 윤증이 원한을 품어 오랜 세월 동안 쌓아둔 까닭이 오로지 여기에 있습니다. 또 목천(木川) 사람이 강도(江都)의 포로는 향사(享祀)하기에 마땅하지 않다.’는 말을 하였는데, 대개 윤선거를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송시열이 듣고 놀라서 원장(院長)이 된 전 우윤(右尹) 이상(李翔)을 보고 말하기를, ‘그대는 미촌(美村)을 모욕하는 사람을 감화할 수 있겠지.’ 하였는데, 미촌은 윤선거의 호이며, 이상이 이 때문에 서원(書院)을 시켜 그 사람을 추궁하여 벌주었습니다. 대개 송시열이 이상에게 말한 것은 그 뜻이 아닌게 아니라 윤선거에게 후하였으나, 윤증은 목천 사람이 반복하여 스스로 숨겼다는 말만 깊이 믿고 도리어 그 말이 송시열의 문하에서 만들어져 나온 것으로 의심하여 송시열에게 다그쳐 물었으므로, 송시열이 마지 못하여 함께 들은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이 양성(陽城)의 유생(儒生) 허황(許璜)이었는데, 윤증은 끝내 허황에게 묻지 않고 다만 스스로 원수를 삼아 분노를 더하였으니, 아! 심합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아! 봉조하(奉朝賀)는 석덕 대로(碩德大老)로서 두 조정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았고 사람(士林)의 종장(宗匠)이 되었으니, 내가 존중하고 믿으며 나라 사람이 우러러 보는 것이 어떠한데, 그지없이 헐뜯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세도(世道) 때문에 절로 개탄(慨歎)하게 된다. 누누이 아뢴 것은 말이 매우 통쾌하다. 내가 아름답게 여기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 최신(崔愼)이 상소하려 하니, 사우(士友)들이 다 너무 날카로운 것을 근심하여, 이수실(李秀實)이 좌상(左相) 민정중(閔鼎重)을 만나 말려 달라고 청하였는데, 민정중이 바야흐로 앓아 누워 있다가 조심스레 일어나 앉아 말하기를, ‘아!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이제 우리 형제와 구지(久之) 【김수항(金壽恒)의 자(字).】 ·중우(仲羽) 【이숙(李䎘)의 자.】 의 여러 형제가 죽은 뒤에는 누가 우옹(尤翁) 【송시열의 호가 우재(尤齋)이다.】 이 어진 줄 알아서 존경하고 우러르겠는가? 한 번 분쇄하지 않으면 세상이 장차 우옹을 마치 침을 흘리는 것처럼 추하게 볼 것이다.’ 하였다. 이 때문에 사론(士論)이 막히지 않았으니, 민정중의 힘이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15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688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인물(人物)
- [註 206]목천(木川)의 일 : 윤선거(尹宣擧)를 이산 서원(尼山書院)에 배향(配享)하는 것을 반대하는 내용의 통문(通文)이 있었던 것을 말함. 그 내용 가운데, "강도(江都)의 부로(俘虜)를 어떻게 함께 배향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이 있었음.
- [註 207]
갈명(碣銘) : 묘갈명(墓碣銘).- [註 208]
진양(陳亮) : 남송(南宗)의 학자로, 주희(朱熹)의 친구였음.- [註 209]
갑인년 : 1674 숙종 즉위년.- [註 210]
연횡(連衡) : 전국 시대(戰國時代)에 동서 제국(諸國)을 연합하여 진(秦)나라에 복종시키려 한 장의(張儀)의 정책(政策). 연횡(連橫).- [註 211]
기해년 : 1659 현종 즉위년.○甲子/司饔直長崔愼上疏曰:
臣師奉朝賀臣宋時烈學問純正, 道德光大, 八方之士, 望如山斗。 雖如向來群奸侵困之時, 亦莫不辨誣不已。 及乎群凶黜伏, 至冤見伸, 則宜其益自尊信, 而奈何人心頗僻, 世道汚下, 尙德之風日衰, 好黨之習日痼, 時烈蹤跡, 日益孤危? 臣猶疑今日人心之不常, 何至斯極, 今而後, 臣知所以然之故也。 何者, 前大司憲尹拯托跡山林, 自處以儒, 而陰懷醜正之心, 詆斥時烈, 不遺餘力, 移書於吏曹參判朴世采, 肆罵宋時烈, 指無爲有, 指白爲黑, 其書傳播, 盈滿一世。 書中所言, 無非怨懟之意, 而有曰: "木川事如此, 此必出於函丈門下, 而函丈不肯說破所聞之處。" 又曰: "使我自問於許璜者, 亦未曉函丈之指。" 又曰: "義利雙行, 王覇竝用, 與《大學》誠正之學不同。 同春所謂都是機關, 草廬所謂全用權數者, 恐是函丈之實病。" 又曰: "函丈之於先人, 自碣銘以來, 實非一言一事而已, 至於木川事而極矣, 人子之心, 安能晏然如他日? 由是, 情不得不異於前矣。" 拯之於函丈, 實不能無疑於本源言行之間, 有如前日之所論者, 而不敢講質, 古人所謂師生者, 實無如此之義, 由是, 義不得不異於前矣。 以情以義, 俱不得如前, 而不自知其非是, 則雖欲摧謝, 何以成說? 蓋函丈云者, 指時烈而言也。 故儒臣尹宣擧卽拯之父也。 嘗與時烈爲友, 而拯於時烈, 自少受學, 稱以先生, 師事累十年, 而一朝棄之如遺、叱之若浼, 噫嘻! 險矣。 蓋義利雙行, 王覇竝用者, 卽朱子嘗與陳亮往復論辨之辭也。 今拯嘗見時烈, 何言何行, 有似陳亮, 而發出此等無倫之說耶? 時烈之於義利、王覇, 毫分縷析, 至精至密, 益致其謹嚴, 寧有毫釐彷彿於拯之言哉? 如拯之言, 則時烈之學, 僞而非眞也。 時烈自孝廟朝以來, 深蒙寵擢之恩, 難進易退之節, 尊王黜覇之事, 昭在人耳目。 雖欲誣罔, 其可得乎? 向時賊鑴輩亦不敢以爲本源可疑, 機關權數而斥之, 則今日被誣, 前所未有之語也 拯書所謂同春, 卽故儒臣宋浚吉也;所謂草廬, 卽前參判李惟泰也, 其所謂機關、權數, 亦皆管、商、儀、秦之事, 而拯乃以浚吉及惟泰爲有是語。 浚吉若果以時烈爲都是機關, 則斥之深矣。 又何以許以道義之交, 而同其出處於在世之時, 託以後事於臨終之日, 而至遺以高山仰止四字, 示其終身尊敬之意耶? 以此觀之, 則拯非但誣時烈也, 竝與浚吉而誣之矣。 若惟泰權數之言, 臣亦未之聞矣。 設有之, 惟泰之言足以爲公耶? 時烈之於惟泰, 雖嘗同師爲友, 而自甲寅後, 惟泰多有可疑之事, 故公議不許。 惟泰因此歸怨於時烈, 嘗有不悅之心, 則拯之引此爲證者, 不過合勢連衡之計, 而亦有積憾之由也。 臣請悉之。 拯之父宣擧, 當丙子之難, 入於江都, 及其陷沒也, 與妻及友, 約以同死。 其妻死之, 其友死之, 而惟宣擧不死。 厥後杜門爲學, 終身不仕, 蓋多可觀, 而責備而言, 豈無可議者乎? 昔年賊鑴之未及敗露也, 能眩惑士林, 士林多有信之者, 故雖時烈亦不能免焉。 然自見鑴之背眞售僞, 慢侮朱子, 便與鑴疎。 及至己亥大喪後, 禮以爲阱, 則人孰不深嫉痛絶, 而惟宣擧獨不絶。 一日, 時烈與浚吉、惟泰、宣擧會于山寺, 語及鑴、善道事, 宣擧以爲: "善道則小人, 鑴則君子。" 時烈等三人相與難之曰: "善道之事, 本自鑴發, 爲其源始者爲君子, 則爲其末流者, 何獨爲小人?" 以鑴爲君子, 而以善道爲小人, 則爲善道之至冤, 故宣擧不得已應之曰: "鑴亦小人, 吾當絶之。" 云。 而竟無絶鑴之事, 故及其沒也, 鑴爲宣擧作祭文, 使其子奠酹。 時烈聞以爲訝, 乃於宣擧練祭之日, 略示可疑之意於祭文中, 其文曰: "惟是江說, 【鑴在驪江故曰江說。】 少有未契。 兄若於海, 【善道居海南故云海。】 竝加原貸, 我之疑晦, 片言卽解。" 時烈之於宣擧, 疑其未快者, 有如是矣。 其後, 拯謁其父墓文於時烈, 時烈只因其家狀而敍其言行, 末引朴世采褒揚之辭而稱道之。 拯以爲: "時烈不自爲辭, 必有未滿之心而然。" 往復論辨, 請改再三, 竟不得盡如其言。 此時烈所以不能無微意於其間而然也。 拯銜怨挾憾, 積之歲月者, 專在於此。 且木川之人有江都俘虜不合享祀之說, 蓋指宣擧也。 時烈聞而駭之, 及見前右尹李翔之爲院長, 而謂之曰: "君何能感化侮辱美村之人耶?" 美村卽宣擧之號也。 翔因令書院, 覈其人而罰之, 蓋時烈之言於翔者, 其意未嘗不厚於宣擧, 而拯乃深信木川人反覆自隱之說, 而反疑其言, 做出於時烈之門下, 迫問於時烈。 時烈不得已指言其所共聞之人, 卽陽城儒生許璜也。 拯竟不問於璜, 只自作仇, 而益其忿怒, 噫嘻! 甚矣。
答曰: "噫! 奉朝賀以碩德大老, 荷兩朝之殊遇, 爲士林之宗匠, 寡昧之尊信, 國人之景仰爲如何, 而誣詆罔極, 乃至於此? 爲世道不覺慨歎。 縷縷所陳, 言甚痛快。 予用嘉尙, 可不採納焉?" 時, 愼將上疏, 士友咸憂其太銳, 李秀實謁左相閔鼎重而請止之, 鼎重方被疾臥, 蹙然起坐曰: "惡! 是何言也? 今吾兄弟, 與久之、 【金壽恒字】 仲羽、 【李䎘字】 諸昆季死後, 誰有知尤翁之賢, 而尊仰之者? 【時烈號尤齋。】 不有一番劈破, 世將視尤翁如涕唾矣。" 由是, 士論遂不沮, 鼎重之力也。
- 【태백산사고본】 16책 15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688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인물(人物)
- [註 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