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호사 민정중이 칠포 쓰는 것, 강양도의 양전, 경연의 기록에 관해 말하다
총호사(摠護使) 민정중(閔鼎重)이 입대(入對)하여 말하기를,
"《오례의(五禮儀)》에 재궁(梓宮)에는 칠포(漆布)를 쓴다는 글이 있고, 사대부 집에서 예전에는 또한 이것을 쓰는 자가 많았는데, 혹 천장(遷葬)할 때에 보면 그것이 무익(無益)하므로, 갑인년147) 가을 국휼(國恤) 때에 장생전(長生殿)에서 계청(啓請)하여 쓰지 않았고 경신년148) 에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신(臣)은 외조(外朝)의 신하이므로 칠을 할 때에 살피지 못하였으나, 듣자오니 위아래 널빤지를 붙인 곳에 조금 틈이 있다 합니다. 칠포를 쓰는 것은 구례(舊禮)이거니와, 튼튼하게 하는 방도에도 유익할 듯하니, 쓰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칠포는 무익하다 하므로 전에 쓰지 않았으나, 참으로 튼튼하게 하는 방도에 유익하다면 어찌하여 쓰지 않겠는가?"
하였다. 민정중이 말하기를,
"강양도(江襄道)의 양전(量田)은 당초에 북도(北道)를 본떠서 원전(元田)149) ·속전(續田)150) 을 정밀하게 살펴 구별하여 속전은 그대로 각 고을에서 기경(起耕)하는 대로 수세(收稅)하도록 하여 산골 백성의 폐해를 덜게 하였는데, 계묘년151) 이후로는 이제 비로소 개량(改量)하므로 전결(田結)152) 이 휠씬 늘었으나 이따금 수령(守令)들이 민역(民役)이 지나치게 무거울 것을 미리 생각하여 혹 그 척수(尺數)를 사사로이 줄이니, 그 뜻은 백성을 위하려는 데에서 나왔더라도 임금을 속인 죄에 스스로 빠지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본도(本道)에 경계하여 낱낱이 고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민정중이 또 나아가 말하기를,
"경연(經筵)에서 일을 기록한 것에는 참으로 소략한 것이 많아서, 계해년153) 1월 김환(金煥)의 옥사(獄事)에 대하여 판결을 의논할 때의 말을 틀리게 적은 것이 많으니, 그 때의 주서(注書)는 추고(推考)하고 일기(日記)는 고쳐 쓰게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옥(死獄)을 논단(論斷)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이토록 사실에 어그러졌는가? 매우 놀랍다. 주서는 먼저 파면한 뒤에 추고하고 그날 말한 것은 심문(審問)하여 상세히 적게 하라."
하였는데, 뒤에 영부사(領府事) 김수흥(金壽興)·도승지(都承旨) 윤지선(尹趾善)이 입대하여 말하기를,
"일기를 소급하여 고치는 것은 뒷 폐단에 크게 관계되니, 전에 명하신 것을 거두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따랐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주서의 직분은 좌사(左史)·우사(右史)154) 가 붓을 잡고 말을 기록하는 것과 다르더라도, 또한 하나의 사초(史草)인데, 사초를 고칠 수 있다면 다른 일인들 무엇이 하기 어렵겠는가? 사람의 의견은 혹 전후에서 달라지고 시비를 논의하는 것도 따라서 바뀐다. 민정중이 김환의 옥사에 대해서는 의견이 처음부터 전후의 차이가 없었고 일을 기록한 자에게 진실로 허술하고 착오한 잘못이 있다 하였으나, 동시에 입시(入侍)한 사람 중에서 처음에는 죽여야 한다고 논하였다가 뒤에는 죄가 없다고 말한 자도 없지 않으니, 그 사람은 반드시 장차 ‘나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주서가 잘못 적은 것이다.’할 것이다. 뒷날에 권간(權奸)이 반드시 민정중에게 구실을 달아 ‘그 착하지 못한 것을 엄폐하느라 일기를 사실에 어그러지는 것으로 돌려서 모두 다 소급하여 고쳤다.’할 것인데, 그러면 민정중은 여기에 대하여 그 책망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15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684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재정-전세(田稅) / 농업-전제(田制) / 농업-양전(量田) / 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 / 사법-탄핵(彈劾) / 인사-임면(任免)
- [註 147]갑인년 : 1674 숙종 즉위년.
- [註 148]
경신년 : 1680 숙종 6년.- [註 149]
원전(元田) : 양안(量案)을 고칠 때 원장(元帳)에 기록된 논밭을 말함.- [註 150]
속전(續田) : 땅이 나빠서 해마다 계속 농사짓기가 어려운 논밭을 말함.- [註 151]
계묘년 : 1663 현종 4년.- [註 152]
전결(田結) : 전지(田地)의 면적(面積).- [註 153]
계해년 : 1683 숙종 9년.- [註 154]
좌사(左史)·우사(右史) : 옛날 군주(君主)의 좌우에서 섬기던 사관(史官). 좌사는 군주의 말을 기록하고, 우사는 군주의 행동을 기록하였음.○甲申/摠護使閔鼎重入對言: "《五禮儀》有梓宮用漆布之文, 而士夫家舊時亦多用之者。 或於遷葬時, 見其無益, 故甲寅秋國恤時, 長生殿啓請勿用, 庚申亦如之。 今番則臣是外朝之臣, 不得奉審於加漆時, 而伏聞上下板交付處, 微有罅縫云。 漆布旣是舊禮, 亦似有益於堅固之道, 用之何如?" 上曰: "漆布旣曰無益, 故曾不用之。 而誠若有助於堅固之道, 則何爲而不用哉?" 鼎重曰: "江襄道量田, 初令取規於北道元田、續田, 精審區別, 續田則仍許各邑, 隨起隨稅, 以除峽民之弊。 自癸卯八十年後, 今始改量, 故田結倍增, 往往邑宰預慮民役之過重, 乃或私減其尺數, 其意雖出於爲民, 而不知自陷於謾上之罪。 請飭本道, 一一改正。" 上可之。 鼎重又進曰: "筵中記事, 誠多率略, 而癸亥正月金煥獄事議讞時說話, 多有錯記。 其時注書推考, 《日記》宜令改修。" 上曰: "論斷死獄, 何等重事, 而爽實至此, 殊極驚駭。 注書則先罷後推, 當日說話, 使之審問而詳記。" 後, 領府事金壽興、都承旨尹趾善入對言: "追改《日記》, 大關後弊, 宜寢前命。" 上從之。
【史臣曰: "注書之職, 雖異於左右史, 秉筆記言, 亦一史草也。 史草而可改, 則他事又何難焉? 人之意見, 或殊於前後, 而論議是非, 亦隨而變焉。 若鼎重之於煥獄, 則意見初無前後之差, 而記事者誠有疎謬之失矣。 然同時入侍之人, 初論其可殺, 而後言其無罪者, 亦不無其人, 則必將曰: ‘我不爲此言, 而注書之誤記也。’ 他日權奸, 必有藉口於鼎重, 厭然掩其不善, 而歸《日記》於爽實, 一皆追改之, 則鼎重於此, 有不得辭其責者矣。"】
- 【태백산사고본】 16책 15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684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재정-전세(田稅) / 농업-전제(田制) / 농업-양전(量田) / 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 / 사법-탄핵(彈劾) / 인사-임면(任免)
- [註 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