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정사 조사석·부사 윤반 등이 청국에서 돌아오다
하지정사(賀至正使) 조사석(趙師錫)·부사(副使) 윤반(尹攀) 등이 청국(淸國)에서 돌아왔다. 임금이 인견(引見)하여 저들의 사정을 물으니, 조사석이 말하기를,
"정극상(鄭克塽)이 귀순할 때에 남방에 살기를 바라고 북으로 옮겨지기를 바리지 않았으므로 장군(將軍) 시낭(施琅)이 여쭈어서 허락받았는데, 젊은 신하들의 의논은 다 ‘남방 사람은 교활하므로, 남방에 두면 반드시 후환이 될 것이니, 북방으로 옮겨서 화근(禍根)을 끊는 것만 못하다.’하여 과도(科道)가 함께 글을 올렸으나, 위아래가 다 실신(失信)을 염려하여, 군사 3천을 머물러 두어 그 섬을 지키게 하고, 또 예부 시랑(禮部侍郞) 소배(蘇拜)를 보내어 섬 안의 형세를 가서 살피게 하였다 하니, 정극상이 귀순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헛된 소문이 아닙니다. 세초(歲初)에 태평연(太平宴)을 거행하였는데, 제왕(諸王)·대신(大臣) 및 신(臣)들은 영외(楹外)에 앉고 몽고(蒙古)의 사신과 팔고산(八高山) 등은 다 뜰아래 있었습니다. 세 사람이 한 소반을 같이 받았는데, 광록시(廣祿寺)에서 준비하지 못하여 제왕에게 나누어 명하여 음식을 장만하게 하였고, 어공(御供)이라는 것은 궁중에서 나왔습니다. 또 팔고산 소속은 순치(順治)140) 이전에는 호령이 엄명(嚴明)하여 원망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이제는 그 녹봉(祿俸)을 줄였고 출렵(出獵)할 때에는 스스로 양식을 장만하므로 인심이 점점 이반(離反)하여 원성이 자못 시끄럽다 하니, 그 허비가 심한 것을 알 만합니다. 청주(淸主)가 오삼계(吳三桂)를 쳐부수고 미녀(美女) 3백명을 빼앗아 이궁(離宮)에 두고 날마다 음란을 일삼고 문사(文辭)만을 숭상하여 정령(政令)이 많이 어그러지며, 태자(太子)는 나이가 열 셋인데 강퍅(剛愎)하고 사람을 죽이기 좋아하므로, 사람들이 다 반드시 나라를 망칠 것이라 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15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683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외교-야(野)
- [註 140]순치(順治) : 청 세조(淸世祖)의 연호. 1644년∼1661년.
○賀至正使趙師錫、副使尹攀等歸自淸國。 上引見, 問彼中事情。 師錫曰: "鄭克塽受撫時, 願住南方, 不欲北遷, 故將軍施琅稟命而許之。 年少諸議皆以爲: ‘南人狡黠, 若置南方, 必爲後患。 不如移之北方, 絶其禍根。’ 科道交章, 而上下皆以失信爲慮, 留兵三千, 以守其島。 又遣禮部侍郞蘇拜, 往審島中形勢云。 克塽歸順, 誠非虛傳也。 歲初行太平宴, 而諸王、大臣及臣等坐楹外, 蒙古使臣及八高山之屬皆在庭下。 三人共一盤, 而光祿寺不能辦, 分命諸王, 使備酒食, 而所謂御供, 則出自宮中。 且八高山所屬, 順治以前, 號令嚴明, 人無怨言, 而今則減其稍食, 出獵之時自備糇糧, 故人心漸離, 怨聲頗騰云, 可想其虛耗之甚矣。 淸主破吳三桂, 取美女三百, 貯之離宮, 日事荒淫, 徒尙文辭, 政令多舛。 太子年十三, 剛愎喜殺人, 皆謂必亡其國矣。"
- 【태백산사고본】 16책 15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683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