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하가 사창에 관한 절목을 바치다. 민정중이 이선의 직임에 관해 청하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단하(李端夏)가 사창(社倉)에 관한 절목(節目)을 바쳤는데, 그 첫째는 ‘대여하는 관곡(官穀)은 그 인구수를 헤아려 고르게 나누어 주되 치우치게 받는 호호(豪戶)가 있으면 그 유사(有司)를 죄주고 호호도 아울러 다스릴 것’이라 하고, 그 둘째는 ‘6년 동안 준수하여 거행하여 참으로 보람을 이룬 사창의 유사가 있으면 각 고을에서 진휼청(賑恤廳)에 알려서 낭계(郞階)로 상줄 것’이라 하고, 그 셋째는 ‘각 고을에서 향임(鄕任) 한 사람을 시켜 사창의 문서를 맡아보게 하되 그 근만(勤慢)을 살펴보아 혹 부지런히 봉행하지 않거든 경하면 향임을 죄주고 중하면 수령(守令)을 죄줄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것이 모두 일곱 조목이었고, 또 나아가 말하기를,
"갑인년133) 의 사목(事目)은 백성이 사창에 곡식을 모아 들이게 하였으므로 백성의 뜻이 바라지 않아서 마침내 폐기되고 시행되지 않았으니, 이제는 진휼청의 곡식을 덜어내어 사창에 대여하고 모곡(耗穀)134) 을 10분의 2로 정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6년 동안 모곡을 받아서 원곡(元穀)을 갚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올가을부터 각리(各里)에 사창을 두고 봄에 곡식을 내어 주었다가 가을에 거두어들이되, 반드시 그 고을에서 진휼청에 전보(轉報)하고 그 염산(斂散)을 통제하고 그 출입을 살피게 하면, 관조(官糶)보다 나르느라 소비하는 폐단을 덜 수 있으므로 10분의 2를 받더라도 관조의 10분의 1보다 이해(利害)가 절로 판별될 것이니, 백성의 뜻이 누구인들 즐거워하지 않겠습니까?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사창은 주(周)나라의 의창(義倉)의 유제(遺制)인데 수(隋)나라가 가멸진 것은 참으로 이 때문이었다.’ 하였는데, 이제 나라에는 한 해의 저축이 없고 백성 중에는 사사로 축적한 집이 없으므로 사람들에게 모두 굳은 뜻이 없으니, 정자(程子)가 말한 ‘공사(公私)가 서로 저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오늘날 급히 힘쓸 일입니다. 양서(兩西)에는 진휼청의 곡식이 없으므로 신이 황해 감사(黃海監司) 이세백(李世白)과 이 일을 의논하였더니, 해서(海西)의 각 고을에는 관향곡(管餉穀)135) 이 있는데 마찬가지로 백성을 위하여 설치한 것이니 이것을 대여하도록 허가하여도 안될 것이 없을 것이라 하였는데, 그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민정중(閔鼎重)이 이선(李選)을 개성 유수(開城留守)의 직임에서 갈아서 국장 도감(國葬都監)의 당상(堂上)의 직임을 그대로 살피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단하가 말하기를,
"산릉(山陵)의 일이 끝난 뒤에는 안릉전(安陵奠)136) 과 선릉(先陵)에 고유(告由)하는 일을 거행해야 할 것인데, 《오례의(五禮儀)》에는 내상(內喪)이 먼저 있고 외상(外喪)이 뒤에 있으면 신좌(神座)의 전물(奠物)도 함께 진설하는 예(禮)가 있으나, 내상이 뒤에 있고 외상이 먼저 있었으며 함께 진설하는 글이 없는 것은 대개 낮은 이가 원존(援尊)하지 않게 하는 뜻에서 나왔을 것이며, 졸곡(卒哭) 전에는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도 다 폐지하여 거행하지 않으니, 선릉에 고유할 때에는 전물이 없어야 마땅하겠으나, 새 능에서 바야흐로 안릉전을 거행하고 때를 같이하여 선릉에 고유하는 데 선릉에만 전물을 진설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미안하고 또 능역(陵役)이 끝난 뒤에 고유하는 것도 전에 거행한 규례가 없으니, 제문(祭文)은 산릉의 일이 끝나서 고유하는 것으로 이름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졸곡 전에 제사를 폐지한다는 글이 있더라도, 안릉(安陵)을 고유하는 것도 때를 같이하여 거행하는 일이라면, 마찬가지로 전물을 진설하고 제문도 아뢰는 바대로 지어 바치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어영 대장(御營大將) 윤지완(尹趾完)이 말하기를,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민서(李敏敍)가 백마(白馬)·문수(文殊)·진강(鎭江) 세 곳에 성을 쌓고 장진(長津)·주문(注文) 두 섬에도 진(鎭)을 두어서 강도(江都)의 문호(門戶)가 되게 하기를 바란다고 청하였습니다. 대개, 백마는 승천진(昇天津)에 있어서 요해(要害)가 아닌 듯하나 문수는 갑진(甲津)에 높이 솟아 강도를 임압(臨壓)하므로 반드시 성이 있어야 강도를 굳게 할 수 있으며, 또 얼음이 녹아 흘러 강물에 찼을 때에 적이 갑자기 온다면 앞에는 갑진이 있고, 뒤에는 쫓는 기병(騎兵)이 있을 것인데, 이러한 때에 문수에 성이 있으면 거기에 가서 굳게 지키다가 편의한 때를 타서 강을 건널 수 있을 것입니다. 장봉·주문은 참으로 문호 같으나 오히려 문수처럼 가장 긴급하지는 못합니다. 강도의 군향(軍餉)은 7만 석(石)에 지나지 않으니, 군사가 일어날 때를 당하면 며칠이나 지탱할 수 있겠습니까? 연안(延安)·배천(白川) 등에 해창(海倉)을 두고 이어서 창성(倉城)을 쌓고서 조적곡(糶糴穀)을 거두어 두었다가 강도가 급할 때에 구제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만전한 계획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전에 이선·윤지완이 강도(江都)의 일을 논한 것을 보니, 나라를 굳게 하려는 계획은 대개 또한 지극하나, 이 두 사람은 성지(城池)에만 잗달게 마음이 얽매여 이것으로 이기는 좋은 계책이라고 여기니, 아! 위태롭다. 예전에 효종께서 연신(筵臣)과 정축년137) 의 강도(江都)의 일138) 을 말할 때에 ‘강진흔(姜晉昕)은 싸우지도 못하였거니와 달아나지도 못하였다.’ 하셨다. 이제 다시 강진흔 같은 자를 시켜 이 성을 지키게 한다면, 안팎의 험조(險阻)가 모두 두 사람이 논한 것과 같더라도 패하게 되지 않는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다. 접때 돈대를 쌓은 일은 본디 일을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의 상받기를 바라는 생각에서 나왔는데, 나라의 재력(財力)과 백성이 고혈(膏血)이 여기에서 다하였거니와, 이 두 신하가 또 두 성을 쌓아서 더하기를 바라니, 참으로 천치만첩(千雉萬堞)139) 이 절로 우뚝 높을 뿐이어서 사나운 적이 오지 않더라도 절로 무너지게 될 것이니, 한탄스러움을 견딜 수 있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16책 15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683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재정-창고(倉庫) / 구휼(救恤) / 군사-군정(軍政) / 역사-사학(史學)
- [註 133]갑인년 : 1674 숙종 즉위년.
- [註 134]
모곡(耗穀) : 각 고을 창고(倉庫)에 저장한 양곡(糧穀)을 봄에 백성에게 대여했다가 추수(秋收) 후 받아 들일 때 말[斗]이 축나거나 창고에서의 손실을 보충하기 위하여 10분의 1일 첨가하여 받는 곡식.- [註 135]
관향곡(管餉穀) : 군량으로 보관 관리하는 곡식.- [註 136]
안릉전(安陵奠) : 임금 또는 왕비의 장례(葬禮) 때에, 매장이 끝난 뒤에 제물을 차려 지내는 제전(祭奠).- [註 137]
정축년 : 1637 인조 15년.- [註 138]
강도(江都)의 일 : 인조 15년(1637)에 강화도가 청병(淸兵)에게 함락되었던 일을 이름.- [註 139]
천치만첩(千雉萬堞) : 수많은 성(城)가퀴.○己卯/引見大臣、備局諸臣。 禮曹判書李端夏進社倉節目,
其一曰。 官穀稱貸者, 計其口數, 平均分給, 而如有豪戶偏受者, 罪其有司, 竝治豪戶。 其二曰。 社倉有司, 如有六年遵行, 實有成效者, 各邑報知賑廳, 賞以郞階。 其三曰。 各邑以鄕任一人, 句管社倉文書, 察其勤慢, 如或不勤奉行, 輕則罪鄕任, 重則罪守令。 如是者凡七條。
又進曰: "甲寅事目, 令民聚穀於社倉, 故民情不願, 終廢不行。 今宜除出賑廳之穀, 以貸社倉, 定爲什二之耗, 則收耗六年, 可償元穀。 自今秋置倉於各里, 春糶秋糴, 必自本邑, 轉報賑廳, 制其斂散, 照管其出入, 則比之官糶, 可除轉輸耗費之弊。 雖取什二, 其視官糶之什一, 利病自別, 民情孰不樂爲哉? 朱子謂: ‘社倉是周家義倉之遺制, 隋之富庶, 實由於此。’ 而今也國無一年之蓄; 民無私積之家, 故人莫有固志, 程子所謂: ‘公私交有積儲。’ 此實今日之急務也。 兩西無賑廳穀, 故臣與黃海監司李世白議此事, 則以爲: ‘海西各邑有管餉穀, 均是爲民而設, 則以此許貸, 亦無不可。’ 其言誠是矣。" 上竝可之。 左議政閔鼎重請遞李選 開城留守之任, 使之仍察國葬都監堂上, 上允之。 端夏曰: "山陵事畢後, 當行安陵奠及先陵告由矣。 《五禮儀》, 內喪在先, 外喪在後, 則神座奠物, 有竝設之禮, 而若內喪在後, 外喪在先, 則無竝設之文, 蓋出於卑不援尊之義。 卒哭前大中小祀, 亦皆廢而不行, 則先陵告由, 宜無奠物, 而新陵方行安陵奠, 同時告由於先陵, 而獨不設奠, 實涉未安。 且陵役畢後告由, 亦無已行之規, 祭文宜以山陵事畢告由爲號矣。" 上曰: "卒哭前雖有廢祀之文, 安陵告由, 同時行事, 則不可不一體設奠, 而祭文亦依所奏, 使之撰進。" 御營大將尹趾完曰: "江華留守李敏叙請城白馬、文殊、鎭江三處, 長峰、注文二島, 亦欲置鎭, 爲江都門戶。 蓋白馬則在於昇天津, 似非要害, 而文殊則高峙甲津, 臨壓江都, 必有城, 可以固江都。 且流澌滿江之時, 賊若猝至, 則前有甲津, 後有追騎, 當此際, 文殊有城, 則可以就此堅守, 乘便渡江。 長峰、注文誠若門戶, 然猶未如文殊之最急也。 江都軍餉不過七萬石, 若値軍興, 能支幾日, 宜置海倉於延安、白川等處, 仍築倉城, 收置糶糴, 以濟江都之急, 則可爲萬全之圖也。" 上然之。
【史臣曰: "嘗觀李選、尹趾完論江都事, 固國之計, 蓋亦至矣。 然二人者, 徒區區於城池, 而以此爲制勝之良算, 嗚呼, 危哉! 昔孝廟嘗與筵臣言丁丑江都事, 謂姜晋昕旣不能戰, 又不能逃。 今若復以晋昕輩守此城, 表裏險阻, 雖一如二人者所論, 其不至於僨敗者幾希矣。 向者築墩之擧, 固出於喜事人徼賞之計, 而國之財力、民之膏血, 已盡於此矣。 是二臣者, 又欲築兩城以益之, 誠恐千雉萬堞, 徒自巋然, 而不待暴客將至自崩也, 可勝歎哉?"】
- 【태백산사고본】 16책 15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683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재정-창고(倉庫) / 구휼(救恤) / 군사-군정(軍政) / 역사-사학(史學)
- [註 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