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조하 송시열이 왕대비의 지문을 올리다
임금이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이 장차 남쪽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말을 듣고 승지(承旨)을 보내어 도타이 일러서 만류하므로, 송시열이 드디어 진견(進見)하였다. 물러 나와서는 또 차자(箚子)를 올려 고귀(告歸)하고, 왕대비(王大妃)의 지문(誌文)을 올렸는데, 그 지문에 이르기를,
"신(臣)이 삼가 살펴보건대, 주아(周雅)019) 에는 태사(大姒)020) 를 칭송하여 견천지매(俔天之妹)021) 라 하였고, 송(宋)나라 사람은 선인 고 태후(宣仁高太后)를 칭송하여 여중 요순(女中堯舜)이라 하였는데, 아! 우리 대행 왕대비(大行王大妃)께서는 여기에 견주어도 남음이 있지 않으시겠습니까? 처음에 후(后)께서 규문 밖을 나가지 아니할 나이에 왕가(王家)에 빈(嬪)이 되어 들어오셔서는 우리 자의전(慈懿殿)과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인선 대비(仁宣大妃)께서 그 효경(孝敬)을 자주 칭찬하셨고, 내치(內治)를 주장하게 되셔서는 궁중이 다 그 인애(仁愛)를 입고 국중이 다 그 교화(敎化)를 받았으며, 동조(東朝)에 계시게 되어서는 안팎에서 더욱 그 덕(德)에 대하여 흠잡는 일이 없었습니다. 지난 계해년022) 겨울에 미쳐서는 하늘이 그 지극한 정성에 감동하여 우리 주상전하(主上殿下)께서 병환이 없어지시는 경사(慶事)를 맞게 하여 천하의 모든 백성이 바야흐로 억만 년의 긴 복을 축원하였는데, 아! 무슨 까닭으로 하늘이 그 정성에 감동하면서도 그 수(壽)에 인색하여 경사에 따른 사유(赦宥)가 반포되자 유교(遺敎)가 곧 선포되게 합니까? 아! 이른바 신(神)은 참으로 밝혀 알기 어렵고 이(理)는 미루어 알 수 없다는 것이겠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반호(攀號)하여 가슴을 치고 발을 굴러도 뒤미치지 못하시니, 울며 생각하기를, ‘선(善)이 있어도 모르는 것은 불명(不明)이요 알고도 전하지 않는 것은 불인(不仁)이다.’ 하시며, 드디어 평일의 언행(言行)을 손수 적어서 폐부신(肺腑臣) 청성 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에게 명하여 글을 지어 행장(行狀)을 만들게 하시고, 행장에 따라 신(臣) 송시열(宋時烈)에게 명하여 유지(幽誌)를 만들게 하시매, 신이 명을 받고는 황공하여 여러 번 사양하였으나, 끝내 윤허하시지 않았습니다. 신이 삼가 행장을 살펴보니, 이러하였습니다. 후(后)의 성(姓)은 김씨(金氏)인데, 옛 신라(新羅)의 김성(金姓)인 왕(王)의 후예이며, 청풍부(淸風府)에 관적(貫籍)을 받았습니다. 고려(高麗)에 이르러 현달(顯達)한 이는 시중(侍中) 김대유(金大猶)이고, 이어서 사대부(士大夫)가 끊이지 않았으며, 본조(本朝)의 김질(金耋)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이었고, 그 손자 김식(金湜)은 중종(中宗) 때에 대사성(大司成)이 되어 조정(朝廷)의 관원과 선비를 가르쳐 이끌었습니다. 군자(君子)가 말하기를, ‘뭇사람의 눈을 뜨게 하면 반드시 뒷날의 경사가 있다.’ 하였는데, 더구나 성리(性理)의 학문으로 한 세대에서 문을 연 것이겠습니까? 그 현손(玄孫) 김육(金堉)은 인종(仁宗)·효종(孝宗) 때의 명신(名臣)으로서 벼슬은 영의정(領議政)이고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며, 그 둘째 아들 김우명(金佑明)은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청원 부원군(淸原府院君)인데, 졸서(卒逝)하여 시호를 충익(忠翼)이라 하였고, 후사(後嗣)로 들어간 바의 선고(先考)는 김지(金址)인데, 증(贈) 영의정(領議政)입니다. 충익공이 은진 송씨(恩津宋氏)를 아내고 맞았는데, 봉작(封爵)은 덕은 부부인(德恩府夫人)이며, 그 선고는 참의(參義) 증(贈) 찬성(贊成) 송국택(宋國澤)입니다. 숭정(崇楨)023) 임오년024) 5월에 송 부인(宋夫人)이 임신한 지 겨우 여덟 달 만에 새가 옥(玉)을 물고 침방(寢房)을 날아서 지나다가 떨어뜨렸는데, 문정공이 점쳐서 어진이를 기를 조짐임을 알았고, 이튿날 17일(을유) 진시(辰時) 후(后)께서 한성(漢城) 장통방(長通坊)에 있는 사제(私第)에서 나셨습니다. 후의 덕용(德容)은 천성이고 정숙하고 유순하며 동지(動止)에 법도가 있었는데, 신묘년025) 효종께서 현종(顯宗)을 위하여 배필을 가리실 때에 후께서 세 번 간선(揀選)에 드시니, 효종께서 곧 더욱 기특히 사랑하시여 드디어 왕세자빈(王世子嬪)으로 책봉하고 이어서 자주 칭찬하기를, ‘아름다운 이 며느리는 마침내 우리 국가를 복되게 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이해 12월에 가례(嘉禮)를 거행하였는데, 후께서 들어가 세 궁(宮)을 섬기고 물러나오면 곧 다섯 공주(公主)와 한 방에 같이 거처하니, 궁위(宮闈) 사이에 화기(和氣)가 찼습니다. 효종께서 일찍이 한 폭의 그림을 내리며 말하기를, ‘이 백발의 늙은 신선이 어린 사내 아이를 안고 가는 것은 곧 내가 신손(神孫)을 안기를 바라는 뜻이다.’ 하셨습니다. 기해년026) 여름에 현종께서 사업을 이으시니, 드디어 중곤(中壼)에 진위(進位)하여서는 세심하게 공경하고 삼가서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게을리하지 않았으므로 16년 동안에 선왕(先王)의 관인(寬仁)하고 공검(恭儉)한 정치를 돕는 방도를 다하셨습니다. 기유년027) 현종께서 인선 대비(仁宣大妃)를 모시고 온양 행궁(溫陽行宮)에 거둥하실 때에 후께서 문안을 못하게 된다 하여 청하여 따라가셨습니다. 후께서는 상례(喪禮)에 더욱 성신(誠信)을 다하셨으므로, 효종·인선대비의 훙서(薨逝) 때에 늘 애모(哀慕)하여 제도대로 다하셨고, 공주들을 사랑하셨으므로 공주들이 금석(今昔)의 차이를 몰랐습니다. 갑인년028) 가을 현종께서 승하하셨을 때에 후께서 통곡하다가 기절하고 미음을 들지 않으므로 우리 전하께서 곁에서 울며 청하여 억지로 드시게 하셨습니다. 그 금모(衾冒)029) 의 제구를 다 친히 장만하고 유사(有司)에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이때 죄지은 종실(宗室) 이정(李楨)·이남(李柟) 형제030) 가 가장 가까운 족속으로서 금중(禁中)에 출입하고 그 외숙 형제·빈객(賓客)이 우익(羽翼)이 되어 바랄 수 없는 일을 엿보아 일이 대개 말하기 어렵게 되었고, 또 외세(外勢)를 끼고 터무니없는 말로 속이고 협박하여 거짓말이 선조(先朝)에까지 미치므로, 조정의 신하들이 놀라와 눈이 휘둥그레져서 감히 숨소리도 내지 못하니, 후께서 듣고서 몹시 분통하여 ‘전에 선왕의 신하였던 자가 어찌하여 감히 밝히지 못하는가?’ 하시고, 드디어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그 근원을 구명하셨습니다. 정(楨)·연(㮒) 등이 궁인(宮人)과 외람된 짓을 하여 궁금(宮禁)을 더렵혔으므로031) , 충익공이 놀라고 근심하여 상소하여 이것을 말하였는데, 윤휴(尹鑴)·허목(許穆) 등이 급히 청대(請對)하여 반좌(反坐)032) 로 논하려 하고 충익공은 금오(金吾)033) 에서 대령하니, 사기(事機)가 급박하여졌습니다. 후께서 두려워 어쩔 줄 몰라, 드디어 상상과 함께 밤에 선정전(宣政殿)의 서무(西廡)에 나아가 성상은 동쪽을 향하여 앉으시고 후는 문을 닫고 합내(閤內)에 계시며, 드디어 대신(大臣)과 재신(宰臣)들을 불렀습니다. 소리내어 슬피 우시고 나서 분명히 말하기를, ‘정·연 등이 간통한 일은 아침·저녁 사이에 있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선왕께서도 전에 이것을 말하셨으며, 확실하여 다 분명한 증거가 있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위에서 궁인을 국문(鞫問)하시매 궁인이 다 사실대로 자수하니, 정·연 등이 비로소 죄받게 되었는데, 후께서는 또 정 등의 죄를 관용하여 그 궁인과 어울려 찬배(竄配)만을 명하도록 성상께 권하셨습니다. 후께서 을묘년034) 부터 선왕의 혼궁(魂宮)에 가까이 계시느라 통명전(通明殿)에 옮겨 계실 때에 조금 편찮으시다가 병진년035) 6월에 갑자기 심해지시니, 우리 전하께서 몸소 탕제(湯劑) 시중을 들고 대신(大臣)을 나누어 보내어 종묘(宗廟)·사직(社稷)·산천(山川)에 기도하고 옥수(獄囚)를 죄다 풀어 주어 신명의 도움을 비셨습니다. 조금 나으시어 대내(大內)로 돌아오시니, 성상께서는 번번이 조정의 일이 파하면 늘 입시(入侍)하시고 의심스러운 일이 있으면 반드시 여쭈어 결단하셨습니다. 후께서도 ‘주상(主上)이 어리므로 내가 감히 잠자코 있을 수 없다.’ 하여, 문득 더불어 조용히 헤아리셨으니, 그 사업을 이은 성상을 도와 국가를 안전하게 한 방도가 크셨습니다. 이때 윤휴·허목·홍우원(洪宇遠) 등의 의심과 노여움이 더욱 심해져서 감히 방자하게 범하여 배척하고, ‘허물을 두번 짓지 말게 하기 위하여 동정(動靜)을 조관(照管)036) 해야 한다.’는 따위 말까지 있었고, 이수경(李壽慶)·조사기(趙嗣基)·박헌(朴瀗) 등이 앞뒤에서 고무하고 선동하여 헐뜯고 속이며 패악하여 도리를 어겼습니다. 성상께서 노하여 박헌의 소(疏)를 배척하셨더니, 허목 등이 또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데에서 나왔다.’고 하였으니, 우리 양궁(兩宮)의 지극히 효도하고 지극히 인자하신 덕이 아니었으면, 흉악한 무리가 그저 그만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술책이 행해지지 않으니, 윤휴가 조관(照管)을 간고(幹蠱)037) 라 속이고, 윤휴를 위하여 변명하는 자는 한기(韓琦)038) 도 조관이라는 말을 하였다 하였습니다. 한기 때에는 태후(太后)와 소제(少帝)가 서로 싫어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크게 일으켜서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이 있었으므로, 한기가 마지못하여 태후에게 조관하기를 청한 것이니, 이제 이 일을 끌어대어 말한다면, 그 뜻이 더욱 도리어 어그러질 것입니다. 경신년039) 에 남(柟)이 허견(許堅)·이태서(李台瑞)·오정창(吳挺昌) 등과 함께 불궤(不軌)를 꾀하다가 이미 복주(伏誅)되니, 후께서는 옥사(獄事)가 지나치게 될까 깊이 염려하여 정(楨)의 아들을 그의 소생이 아니라는 것으로 핑계하게 하여 죽지 않게 하셨습니다. 대개 후의 성품이 인자하므로 꿈틀거리는 벌레 따위 미물도 상해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작은 뱀이 침실에 서려 있어 궁인들이 다 실색(失色)하였을 때에, 후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며 ‘숲의 그늘이 가까우니 괴이할 것이 없다.’ 하고 쫓아보내게만 하고 고사(瞽史)040) 에게 묻지도 않으셨습니다. 무오년041) 우리 전하께서 설리(泄痢)가 위중하셨을 때에, 후께서 목욕재계하고 한 데에서 빌어 자신이 갈음하기를 청하시니, 성상의 병이 곧 나으셨습니다. 후께서는 늘 우리 전하께서 두창(痘瘡)042) 를 겪지 않으신 것을 근심하셨는데, 계해년043) 10월에 전하의 몸에 두창이 나매, 후께서 크게 놀라고 염려하여 무오년처럼 목욕재계하고 자신이 갈음하기를 청하시니, 11월에 성상께서 병환이 나으셨는데 후께서는 이 때문에 지쳤다가 조금 나으셨으나 전하께서 스스로 이겨 내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친히 가서 살펴보시고는 성상께서 병환이 태반은 나으신 것을 보고 반가와 몹시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후께서 병환이 다시 위독하시매, 성상께서 병환을 무릅쓰고 입시(入侍)하셨는데, 후께서는 성상께서 기후가 지치실 것을 염려하여 안정하기를 청하셨으나, 성상께서는 끝내 물러가지 않고 이어서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병진년044) 처럼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12월 5일 미시(未時)에 마침내 저승전(儲承殿)의 서별당(西別堂)에서 승하하시니, 춘추는 42세였습니다. 유교(遺敎) 수백 마디가 계셨는데, 대개 ‘초상부터 묻을 때까지 쓸 제구를 내가 다 만들었으니, 다시 유사(有司)를 번거롭히지 말고, 중외(中外)에서 진향(進香)하는 것도 다 멈추고, 아침·저녁 궤전(饋奠)의 그릇 수도 모두 태반을 줄이게 하라.’하고, 또 ‘지금 나라의 저축이 다 없어지고 백성의 힘도 다하였으니, 대부(大夫)들이 구례(舊例)를 따르지 말고 일체 줄여 절약하면, 내 넋이라도 편안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또 ‘주상은 인자하고 효성하여 반드시 내 뜻을 본받을 것이므로, 이렇게 말한다.’ 하셨습니다. 우리 전하께서 덕음(德音)을 공경히 받들어 곧 유사에 명하여 조금도 어기는 것이 없게 하셨고 깊은 산골짜기까지도 누구나 다 받들어 읽고는 슬퍼하고 사모하며 ‘성모(聖母)께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는 것이 지극하셨었는데, 이제 우리를 버리셨으니, 우리는 어찌하는가?’ 하였습니다. 병진년 우길(憂吉)045) 때를 당하여 뭇 신하가 존호(尊號)를 올려 현렬(顯烈)이라 하였고, 이때에 이르러 대신(大臣) 김수항(金壽恒)·민정중(閔鼎重) 등이 재신(宰臣)들을 거느리고 시호(諡號)를 올려 명성(明聖)이라 하고 휘호(徽號)를 올려 정헌 문덕(貞獻文德)이라 하였습니다. 이에 앞서, 숭릉(崇陵)046) 의 역사(役事) 때에 그 왼쪽을 비워 두었다가 4월 5일(경자)에 거기에 부장(祔葬)하였는데, 실로 치명(治命)047) 이었습니다. 순위(巡衛)하는 상(象)의 설치가 이미 전에 갖추어졌으므로 역사하는 힘이 또 크게 줄었으니, 뭇 유사는 화락(華樂)하게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죄를 면할 수 있고 지친 백성은 더욱 인자하고 검소한 덕을 받았습니다. 후께서는 크게 천경(天慶)을 받아 우리 주상 전하를 낳으셨고, 처음에는 인경 왕후(仁敬王后) 김씨(金氏)를 맞아들였습니다. 또한 신라(新羅)임금의 후예(后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따님인데, 경신년048) 10월에 훙서(薨逝)하셨습니다. 이듬해 정월에 후께서 계비(繼妃)를 가릴 것을 의논하셨는데, 조정의 신하들이 너무 빠르다고 말하였으나, 후께서 ‘강한 나라가 옆에 있으니, 고집할 수 없다.’ 하셨으니, 대개 전조(前朝)의 일에 징계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깊이 근심하고 멀리 염려하시는 것이 대개 이러하셨습니다. 그 해 5월에 지금의 중궁 전하(中宮殿下)께서 정위(正位)에 뽑히시니, 영돈녕부사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따님입니다. 명안 공주(明安公主)는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에게 하가(下嫁)하였습니다. 아! 우리 성모의 성덕(盛德)·지선(至善)은 태임(太任)049) ·태사(太姒)에 견주어도 부끄러울 것이 없고, 오직 그 차분하여 나타나지 않은 것을 사람들이 이름지을 수 없을 뿐입니다. 그러나, 언행이 아름다운 것은 자연히 도리어 맞으셨습니다. 윤휴·허목이 충익공을 모함하여 정(楨)·연(㮒)의 죄를 벗기려 할 때에 후께서 ‘내 어버이가 죄없이 망측한 데에 빠지려 하니, 내가 몰래 업고 달아나더라도 괜찮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셨으니, 그 효덕(孝德)이 여기에서 더욱 나타났습니다. 그 뒤에 권흉(權凶)이 무함하여 헐뜯으니, 또 수찰(手札)을 내려 깊이 스스로 인책하고 조금도 원망하고 분노하시는 뜻이 없었습니다. 그때 전하여 칭송하는 자는 무지(無知)한 하천(下賤)일지라도 누구인들 목메여 울지 않았겠습니까? 기미년050) 봄에 역적 허견(許堅)이 분하여 다투다가 손으로 후의 작은 어머니를 때려 이까지 부러뜨렸으나, 후께서는 끝내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그런 일이 있는 줄 모르는 듯이 하셨으니, 그 침착하여 큰 도량이 있는 것을 여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갑인년051) 이후로 구신(舊臣)이 다치는 것을 보고 늘 몹시 근심하고 상심하셨는데, 우리 전하께서 뜻을 받들었으므로 놀랄 기틀을 여러 번 겪었어도 끝내 보전하여 별일이 없었습니다. 흉악한 무리가 법에 처치된 뒤에는 그 중에서 의심스러운 자는 가볍게 죄주고, 분명히 죄가 있는 자라도 반드시 살릴 방도를 찾으셨습니다. 죄를 지은 종실(宗室)·경전(磬甸)052) 의 후손을 성상께서는 오히려 ‘우리 선왕의 골육(骨肉)이다.’하여 관금(棺衾)을 갈아서 그 고장(藁葬)을 고치게 하셨는데, 대개 후의 뜻이었습니다. 그 뒤로 구신 중에 물러가려는 자가 있으면 수찰(手札)로 만류하셨으니 또한 선인(宣仁)의 고사(故事)와 같은 것입니다. 후께서는 자성(資性)이 총예(聰睿)하시어, 한 번 귀와 눈을 거친 일은 다 종신토록 잊지 않고, 견식(見識)이 밝고 넓어서 고금의 치란(治亂)을 통달하셨습니다. 이미 곤극(坤極)에 자리하시고서는 정성으로 위를 섬기고 의리로 아래를 경계하셨고, 더욱이 안팎을 엄히 방금(防祭)하여 그 사친(私親)을 돌보는 데에는 정례(程例)가 있고 아우들에게 교만하고 방자하지 말라고 훈계하셨으므로, 끝내 감히 티끌만큼도 은택을 바라는 자가 없었습니다. 공주 세 사람 중에서 맏이와 둘째가 다 어린 나이에 서거하고 명안 공주만이 남았으므로 그 사랑이 심하였다 하겠으나, 출합(出閤)053) 하기에 미쳐서는 《소학(小學)》을 외고 써서 경계하기를, ‘사치로부터 검약으로 들어가기는 어렵다.’하고 그 자송(資送)054) ·장속(裝束)을 다 구제(舊制)보다 줄이셨습니다. 이때 큰물과 가뭄이 있어서 백성이 굶주렸는데, 후께서 슬퍼하여 음식을 폐하고 공상(供上)한 물건과 탕장(帑藏)055) 을 내어서 진구(賑救)를 돕기까지 하셨습니다. 후께서 승하하신 뒤에 여염(閭閻)에서 혹 전하기를, ‘주상께서 병환이 심하실 때에 궁중에 요사한 무당의 일이 있었다.’ 하므로 법사(法司)가 가두고 유신(儒臣)이 말하였으나, 성상께서 유신의 소(疏)에 답하기를, ‘자성(慈聖)께서는 평소에 식견이 고명하여 무당의 떳떳하지 않은 말은 아닌게 아니라 매우 미워하여 몹시 끊으셨으니, 어찌 믿고 현혹되셨을 리가 있겠는가?’하셨습니다. 그래서 뭇사람의 의혹이 얼음 녹듯이 풀리니, 《전(傳)》에 ‘천지의 성(性)에 밝은 자는 신괴(神怪)로 현혹할 수 없다는 것이 틀림없다.’하셨습니다. 대개 옛일로 논하면 송(宋)나라의 고 태후(高太后)가 거룩하기는 거룩하였으나, 주 부자(朱夫子)가 말하기를, ‘철종(哲宗)이 매우 유감을 품고 고 태후가 늘 크게 슬퍼하였으니, 그 만남은 불행하다 하겠다.’하였는데, 우리 성모께서는 위에서 의롭고 아래에서 받들어서 인자와 효성이 하늘에 사무쳤으므로 뭇 흉악하고 패역(悖逆)한 계책이 끝내 행해지지 못하였으니, 고 태후에 비하면 어찌 견주어서 남음이 있을 뿐이겠습니까? 대개 마찬가지로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남(二南)056) 의 교화를 논한 자가 후비(后妃)만을 칭송하고 문왕(文王)을 근본삼지 않은 것은 주 부자가 매우 그르게 여겼으니, 이제 성모께서 여기에 이르신 것이 어찌 우리 현종께서 자신을 바루고 집을 다스리신 분명한 보람이 아니겠습니까? 아! 우리 성모의 큰 덕은 하늘의 도움을 받아 마땅하나, 불행히도 현종께서 병환이 잦아 우리 성모께서 늘 마음 졸이고 효종·인선 왕후의 상(喪)에 여섯 해 동안 애모(哀慕)하고 갑인년057) 의 대상(大喪)에는 외로이 근심을 머금고 또 두 공주와 인경 현비(仁敬賢妃)의 상을 통곡하셨고, 이어서 우리 전하께서 나이 어리고 병약하시기 때문에 마음이 근심되시는데 밖에는 권간(權奸)이 줄지어 섰으므로, 나라의 명백이 철류(綴旒)058) 이니, 이때를 당하여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절박하였던 짓을 어떻게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 겨울 성상께서 이상한 병에 걸려 증세가 비상하실 때에는 또 추위를 무릅쓰고 없는 힘을 다하여 하늘에 목숨을 빌어서 겨우 신명의 위로를 받게 되자 곧 스스로 병환에 걸리셨습니다. 아! 하늘이 어찌하여 이 큰 덕이 있는 이를 내고서 복록(福祿)은 내리지 않아 우리 성상께서 몹시 슬픔을 더하시고 이 신민이 울부짖고 사모하는 것이 더욱 깊게 합니까? 그러나, 자신에 성덕(聖德)이 있어서 지위를 얻고 명예를 얻어, 공(功)이 사직(社稷)에 남고 은택이 백성에 미쳐서 후세 억만 년에 음덕(陰德)을 내리시니, 참으로 하늘이 덕 있는 이를 낸 뜻을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무슨 유감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성상의 효사(孝思)를 조금 위로 하고 또 신민의 지극한 슬픔을 늦출 것입니다. 아! 아름답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도타이 비답(批答)하고 장려하여 하유(下諭)하고, 이어서 올라와 시간(時艱)을 구제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15권 2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674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어문학-문학(文學)
- [註 019]주아(周雅) : 《시경(詩經)》의 소아(小雅)·대아(大雅) 두 편(篇)을 이르는 말.
- [註 020]
태사(大姒) : 주나라 문왕의 비(妃).- [註 021]
견천지매(俔天之妹) : 천제(天帝)의 누이에 견줄 만한 어질고 아름다운 여인.- [註 022]
계해년 : 1683 숙종 9년.- [註 023]
숭정(崇楨) : 명(明)나라 의종(毅宗) 때 연호.- [註 024]
임오년 : 1642 인조 20년.- [註 025]
신묘년 : 1651 효종 2년.- [註 026]
기해년 : 1659 효종 10년.- [註 027]
기유년 : 1669 현종 10년.- [註 028]
갑인년 : 1674 현종 15년.- [註 029]
금모(衾冒) : 시신을 덮는 것.- [註 030]
이정(李楨)·이남(李柟) 형제 : 인조(仁祖)의 손자.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아들로서, 정은 복창군(福昌君), 남은 복선군(福善君), 이연(李㮒)은 복평군(福平君)인데, 숙종 6년(1680) 허적(許積)의 아들 허견(許堅)과 역모를 꾀하였다고 하여 이른바 삼복(三福) 사건이 일어나, 숙종 6년(1680) 경신 대출척(庚申對黜陟)을 가져왔음.- [註 031]
정(楨)·연(㮒) 등이 궁인(宮人)과 외람된 짓을 하여 궁금(宮禁)을 더렵혔으므로 : 숙종 원년(1675)에 복창군(福昌君) 정(楨)과 복평군(福平君) 연(㮒)이 내전에 무상 출입하면서 궁녀[紅袖]들과 통간한 사건, 즉 홍수지변(紅袖之變)을 이름.- [註 032]
반좌(反坐) : 무고(誣告)하여 무죄한 사람을 죄에 빠뜨리는 자에 대하여 피해자가 입은 만큼의 형벌을 주는 제도.- [註 033]
금오(金吾) : 의금부(義禁府).- [註 034]
을묘년 : 1675 숙종 원년.- [註 035]
병진년 : 1676 숙종 2년.- [註 036]
조관(照管) : 살피고 맡아서 처리함.- [註 037]
간고(幹蠱) : 잘못을 감싸서 바로잡음.- [註 038]
한기(韓琦) : 송(宋)나라 인종(仁宗) 때의 제상.- [註 039]
경신년 : 1680 숙종 6년.- [註 040]
고사(瞽史) : 주대(周代)의 두 벼슬 이름. 고(瞽)는 태사(太師)로서 임금을 곁에서 모시고 송시(誦詩)와 풍간(諷諫)하는 일을 맡았으며, 사(史)는 태사(太史)로서 천문(天文)을 맡았음.- [註 041]
무오년 : 1678 숙종 4년.- [註 042]
두창(痘瘡) : 마마.- [註 043]
계해년 : 1683 숙종 9년.- [註 044]
병진년 : 1676 숙종 2년.- [註 045]
우길(憂吉) : 상기(喪期)를 마치고 길복(吉服)을 입음.- [註 046]
숭릉(崇陵) : 현종의 능.- [註 047]
치명(治命) : 병이 위독하기 전, 정신이 맑을 때의 분부.- [註 048]
경신년 : 1680 숙종 6년.- [註 049]
태임(太任) : 문왕의 모(母).- [註 050]
기미년 : 1679 숙종 5년.- [註 051]
갑인년 : 1674 숙종 즉위년.- [註 052]
경전(磬甸) : 공족(公族)이 사죄(死罪)가 있으면 교야(郊野)를 맡은 관원에게 목을 매어 죽이도록 한 고사(故事). 경우전인(磬于甸人).- [註 053]
출합(出閤) : 왕녀(王女)가 하가(下嫁)함.- [註 054]
자송(資送) : 혼수를 장만하여 보내는 길.- [註 055]
탕장(帑藏) : 내탕고(內帑庫)에 보관된 재물.- [註 056]
○上聞奉朝賀宋時烈將欲南歸, 遣承旨敦留。 時烈遂進見旣退, 又留箚告歸, 上王大妃誌文, 其文曰:
臣謹按, 《周雅》稱太姒曰: "俔天之妹。" 宋人稱宣仁高太后曰: "女中堯、舜。" 嗚呼! 若我大行王大妃, 擬之而有餘者非歟‘! 始, 后以不出之年, 作嬪于王家, 則我慈懿殿及我孝宗大王、仁宣大妃亟稱其孝敬。 及主內治, 梱內戴其仁, 域中承其化。 及居東朝, 則外內益無間然於其德矣。 及乎去年癸亥冬, 皇天感其至誠, 俾我主上殿下, 克膺無疾之慶, 宇內含生, 方祝億萬年遐福矣。 嗚呼! 何故, 皇天格於誠而靳於壽, 慶赦纔頒, 遺敎遽宣。 嗚呼! 豈所謂神者誠難明, 而理者不可推者歟? 我殿下攀號擗踊, 靡所逮及, 則乃泣惟以爲有善, 而不知不明也。 知而不傳, 不仁也。 遂手錄平日言行, 以命肺腑臣淸城府院君 金錫冑, 文以爲狀, 而以狀命臣時烈, 俾爲幽誌。 臣承命悸恐屢辭, 終不兪。 臣謹按狀曰: "后姓金氏, 昔新羅 金姓王之後, 受籍淸風府。 至麗而顯者曰侍中大猷, 仍士大夫不絶。 本朝耋司憲府執義, 其孫湜, 中廟朝爲大司成, 訓迪朝紳及章甫。 君子曰: "開千眼, 必有後。" 矧以性理之學, 啓牖一世乎? 其玄孫堉, 仁、孝兩朝名臣, 官領議政, 諡文貞。 其第二子佑明, 領敦寧府事淸風府院君, 卒諡忠翼, 所後考曰址, 贈領議政。 忠翼娶恩津 宋氏, 封德恩府夫人, 其考參議, 贈贊成國澤也。 崇禎壬午五月, 宋夫人有身纔八朔, 有鳥銜玉, 飛過寢房而墮之, 文貞公筮得育賢之兆。 越翌日乙酉辰時, 后誕于漢師長通坊私第, 后德容天成, 貞閒婉嫕, 動止有則。 歲辛卯, 孝廟爲顯宗擇配, 后三入揀選, 孝廟輒益奇愛之, 遂冊爲王世子嬪, 仍亟稱之曰: "佳哉此婦, 終必福我國家。" 是歲十二月行嘉禮, 后入而承事三宮, 退則輒與五公主同處一室, 宮闈之間藹如也。 孝廟嘗賜一幅畫曰: "此白髮老仙, 抱童男以行者, 卽予願抱神孫之意也。" 己亥夏顯廟嗣服, 遂進位中壼, 小心翼翼, 夙夜靡怠。 十六年之間, 其所以內資先王, 寬仁恭儉之治者備矣。 己酉顯廟奉仁宣大妃, 幸溫宮, 后以定省之曠, 請從焉。 后於喪禮, 益致誠信, 孝廟、仁宣之薨, 常哀慕盡制, 撫愛諸主, 諸主不知有今昔之異。 甲寅秋, 顯廟禮陟, 后哭擗隕絶, 罕御糜粥。 我殿下從傍泣請爲之强進, 其衾冒諸具, 皆親自辦治, 不任有司。 時, 罪宗楨、柟兄弟屬最近, 出入禁密, 其諸舅兄弟賓客, 爲之羽翼, 窺覬非望, 事蓋有難言者。 又挾外勢, 譸張虛喝, 誣及先朝, 朝臣愕眙, 不敢出氣。 后聞而痛盡曰: "曾爲先王臣子者, 何敢無辨?" 遂命大臣, 究詰其根因。 楨、㮒等與宮人, 踰濫以穢禁嚴, 忠翼公駭且憂, 上疏言之。 鑴、穆等急求對, 意欲論以反坐, 而忠翼待命于金吾, 事機迫矣。 后怔悸罔措, 遂與上夜御宣政殿西廡, 上東向坐, 后蔽牖而處閤內, 遂召大臣、諸宰, 旣擧聲哀哭, 明言楨、㮒等姦事, 非朝夕之故, 先王亦嘗言之, 鑿鑿皆有明證。 於是上鞫問宮人, 宮人皆首實。 楨、㮒等始就勘。 后又勸上, 寬楨等罪, 而竝其宮人, 只命竄配。 后自乙卯, 爲密邇先王魂宮, 移御通明殿。 微不豫, 丙辰六月猝劇, 我殿下躬侍湯劑, 分命大臣, 禱于廟社山川, 盡釋獄囚, 以祈冥祐, 旣少間, 還大內。 上每罷朝, 常入侍, 有疑事必稟決焉。 后亦以爲: "主上幼沖, 予不敢噤默。" 輒與之從容商量焉。 其所以擁佑嗣聖, 全安宗國者大矣。 時, 鑴、穆、宇遠等疑怒益甚, 敢肆侵斥語, 至有毋令貳過, 照管動靜等說, 而壽慶、嗣基、瀗等, 前後皷煽, 詆誣悖逆。 上怒斥瀗疏, 則穆等又以爲, 出於愛君憂國。 倘靡我兩宮止孝止慈之德, 則凶徒將不但已也。 旣不售則於是鑴誣以照管爲幹蠱, 而爲鑴分疏者, 乃曰韓琦亦有照管語。 在琦時, 太后、少帝大生嫌怨事, 有不忍言者, 故琦不得已而請后照管, 今引此爲言, 則其意益悖矣。 庚申, 柟與堅、台瑞、挺昌等謀不軌, 旣伏誅, 后深慮獄事或濫, 至使楨之子, 諉以非所生而不死焉。 蓋后性慈仁, 雖蝡蠢之微, 亦未嘗害傷。 有小蛇盤旋於寢室, 宮人皆失色, 后逌然曰: "林樾近, 此無怪也。" 只令驅而放之, 亦不詢諸瞽史。 戊午, 我殿下泄痢危重, 后齋沐露祝, 請以身代, 上疾尋愈。 后每以我殿下未經痘瘡爲憂, 癸亥十月, 痘發上躬, 后大驚慮, 齋沐請代, 如戊午時。 十一月上疾平復, 而后因示憊少愈, 而念上不自克, 親往臨視, 見上祛疾太半, 爲之欣然失喜。 未幾疾復革, 上力疾入侍, 后念上氣疲亟, 請就安, 而上終不退, 仍命大臣行禱, 如丙辰焉。 十二月初五日未時, 竟昇遐于儲承殿之西別堂, 春秋四十有二。 有遺敎數百言。 蓋曰: "由初終以至窆藏, 其諸具皆自予具修, 勿以復煩有司。 其中外進香, 亦皆停止, 而朝夕饋奠器數, 竝令太半減省。" 又曰: "目今國儲蕩竭, 民力亦盡, 諸大夫毋循舊例, 一切省節, 則雖予魂魄, 亦可以安矣。" 又曰: "主上仁孝, 必體予意, 故如是言之。" 我殿下祗奉德音, 卽命有司, 一無所違, 而深山窮谷, 莫不奉讀悲慕曰: "聖母之哀我至矣, 今焉棄我, 吾其奈何?" 當丙辰憂吉, 群臣上尊號曰顯烈。 至是, 大臣金壽恒、閔鼎重等率諸宰, 上諡曰明聖, 徽號曰貞獻文德。 先是, 崇陵之役, 虛其左方, 以四月丙申朔初五日庚子祔葬焉, 實治命也。 巡衛象設, 已具於前, 事力又大省焉, 群有司得免華樂不臣之罪, 而疲氓益受慈儉之德矣。 后丕膺天慶, 誕我主上殿下, 初聘仁敬王后 金氏, 亦新羅王冑出, 領敦寧府事光城府院君 萬基女。 庚申十月薨逝, 翌年正月, 后議選繼妃, 廷臣以太速爲言, 后曰: "强國在旁, 不可膠守。" 蓋懲勝國事也, 其深憂遠慮, 類如是。 其五月, 今中宮殿下, 膺選正位, 領敦寧府事驪陽府院君 閔維重女也。 明安公主下嫁海昌尉 吳泰周。 嗚呼! 我聖母盛德至善, 雖方之任 姒, 可以無愧, 而惟其沈潛不顯, 人不得以名焉。 然其言行之懿, 自然暗合乎道。 當鑴、穆欲陷忠翼, 以脫楨、㮒也, 后之心以爲: "吾親將以非罪, 而陷於不測, 吾雖竊負而逃可矣。" 其孝德, 於是而益著矣。 其後權凶誣詆, 則又下手札, 深自引咎, 而無一毫怨怒之意。 其時傳誦者, 雖無知下賤, 孰不嗚咽哉? 己未春, 逆堅因忿爭, 手歐后小母, 至於拉齒, 而后終無一言, 如不知有此事, 其沈幾睿量, 此亦可見。 甲寅以後, 見諸舊臣創殘, 恒切憂傷, 我殿下承旨意, 雖屢經駭機, 終保無他。 至於凶徒伏法之後, 其疑者從輕, 雖明有罪者, 必求其可生之道。 罪宗磬甸之後, 聖上猶以爲我先王骨肉也, 易棺衾, 改其藁葬, 蓋亦后意也。 其後舊臣有欲退者, 以手札勉留, 亦宣仁故事也。 后資性聰睿, 事有一經於耳目, 皆終身不忘, 見識昭曠, 通曉古今治亂。 旣位坤極, 誠以事上, 義以飭下, 尤防嚴內外, 其顧視私懿, 嘗有程例, 訓戒諸弟以無驕忲, 終無敢以纖芥干澤者。 公主三人, 長次俱夭逝, 只有明安公主, 其愛之可謂甚矣。 而及其出閤, 誦《小學》書戒之曰: "由奢入儉難。" 其資送粧束, 俱損於舊制。 時有水旱, 人民飢餓, 后惻然廢食, 至發上供帑藏, 以資賑活。 后昇遐後, 閭閻或傳: "主上疾甚時, 宮中有妖巫事, 法司囚之。" 儒臣言之, 上答儒臣疏曰: "慈聖於平日, 見識高明, 巫覡不經之說, 未嘗不深惡而痛絶, 則寧有信惑之理哉?" 於是, 群疑氷釋。 《傳》曰: "明於天地之性者, 不可惑以神怪。" 信哉! 蓋嘗論之, 宋朝高太后, 聖則聖矣, 而朱夫子嘗以爲, 哲宗甚銜, 而后常大慟, 則其所遭可謂不幸, 而若我聖母, 則上義下承, 慈孝格天, 使群凶悖逆之計, 終不得售焉, 其視高后, 奚但擬之而有餘? 蓋不可同年而語矣。 然而論二南之化者, 只頌后妃, 而不本於文王, 則朱夫子深以爲非。 今我聖母之臻玆, 豈非我顯考正身齊家之明效哉? 嗚呼! 我聖母大德, 宜受天佑, 而不幸顯考善病, 使我聖母, 長時煼煎, 孝廟、仁宣之喪, 六年哀慕, 及其甲寅大喪, 惸然含恤, 又哭二公主及仁敬賢妃喪, 仍以我殿下沖年病弱, 一心憂惱, 外則權奸堵立, 國命綴旒。 當是時也, 其隕穫崩迫, 何可勝言? 及如去冬, 上嬰奇疾, 證情不常, 則又冒寒竭蹙, 請命于天, 纔蒙神勞, 旋遘自疾。 嗚呼! 天之胡爲生此大德, 而福祿不降, 使我聖上, 彌增隕慟, 使此臣民, 號慕益深耶? 雖然, 身有聖德, 得位得名, 而功存社稷, 澤及生民, 以垂陰隲於億萬斯年, 則眞不負上天生德之意矣。 復何憾焉? 此足以少慰聖上之孝思, 而亦以紓臣民之至慟矣。 嗚呼, 休哉!
上優批奬諭, 仍令上來, 以濟時艱。
- 【태백산사고본】 16책 15권 2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674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어문학-문학(文學)
- [註 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