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주가 왕대비의 행장을 찬진하다
김석주(金錫胄)가 왕대비의 행장(行狀)을 찬진(撰進)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삼가 공경히 생각하건대 우리 대행 왕대비(大行王大妃)의 성은 김씨로서, 세적(世籍)은 청풍(淸風)이며, 그 선조는 대개 신라(新羅) 왕자(王者)의 후예이다. 고려(高麗) 때 현달(顯達)한 분은 시중(侍中) 김대유(金大猷)이다. 3세 뒤 김창조(金昌祚)에 이르러 다시 벼슬이 시중에 이르렀으며, 청로 장군(淸虜將軍) 김중원(金仲源)을 낳았고, 이 분은 감찰(監察) 김정(金瀞)을 낳았다. 비로소 아조(我朝)에 들어와 또 2세를 거친 뒤 김질(金耋)에 이르러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가 되었고, 집의가 성균 생원(成均生員) 김숙필(金叔弼)을 낳았으며, 생원이 김식(金湜)을 낳으니, 중종조(中宗朝)의 현량과(賢良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벼슬은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이르렀으며, 세상에서 기묘 명현(己卯名賢)이라 칭하는데, 곧 후(后)의 6대조[六世祖]이다. 고조(高祖) 김비(金棐)는 판관(判官)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고, 증조 김흥우(金興宇)는 생원으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조(祖) 김육(金堉)은 우리 인조(仁祖)·효종(孝宗) 두 조정을 섬겨 세 번 정승에 올랐는데, 졸시(卒諡)는 문정(文貞)이다. 고(考) 김우명(金佑明)은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에 봉해졌고, 졸시(卒諡)는 충익(忠翼)인데, 증(贈) 찬성(贊成) 김흥록(金興祿)과 증(贈) 영의정(領議政) 김지(金址)는 또 충익의 후사가 된 조예(祖禰)400) 관계가 되는 양세(兩世)이다. 충익의 배우(配偶)는 은진 송씨(恩津宋氏)로, 덕은 부부인(德恩府夫人)에 봉해졌으며, 증(贈) 좌찬성(左贊成) 송국택(宋國澤)의 딸이다.
숭정(崇禎)임오년401) 5월 17일 진시(辰時)에 장통방(長通坊) 사제(私第)에서 후(后)를 낳았다. 송 부인(宋夫人)이 잉태한 지 여덟 달에 어떤 새가 옥(玉)을 물고 날아와 침방(寢房)을 지나다가 떨어뜨리니, 조(祖) 김육(金堉)이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여기고 초역(焦易)으로 점을 쳐 어진이를 기를 조짐을 얻었는데, 그 다음날 후(后)께서 탄생하셨다. 후께서는 어려서부터 덕스런 용모가 하늘이 낸 듯하였고, 정한(貞閒)·완예(婉嫕)하여 말과 웃음과 행동거지에 모두 법도(法度)가 있었다. 신묘년402) 에 효종(孝宗)께서 현종(顯宗)을 위하여 배우(配偶)를 가리셨는데, 후(后)께서 바야흐로 10세의 나이로 세 번 간선(揀選)에 들자, 효종께서 곧 더욱 기특하고 사랑스럽게 여기시어, 드디어 명하여 왕세자빈(王世子嬪)으로 삼으시고는 이어 극히 칭찬하며 말씀하시기를, ‘아리땁다! 아 며느리여, 마침내 반드시 우리 나라의 복이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해 12월에 가례(嘉禮)를 행하고, 후(后)께서 들어오시자 효종대왕(孝宗大王)과 인선 왕대비(仁宣王大妃)를 받을어 섬김에 좌우에서 복근(服勤)403) 하여 밤낮으로 게으르지 아니하셨다. 물러나 곧 다섯 공주(公主)와 한 집에서 거처하매, 여러 공주로서 후(后)보다 나이가 많은 이들에게는 후(后)께서 더욱 공손히 하고 나이가 후(后)께 미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가까이하여 우애로 대하시니, 옹용(雍容)·열목(悅睦)함이 시종 차이가 없어 궁위(宮闈)에 화기(和氣)가 흘러넘쳤다. 현묘(顯廟)께서 사복(嗣服)404) 하시자, 후(后)께서도 또한 중곤(中壼)에 나아가 자리잡으셨는데, 더욱 윗사람을 섬기고 의(義)로써 아랫사람을 거느리셨으며, 더욱 내외(內外)를 막고 삼가 외가(外家)를 돌아봄에 일찍이 정례(程例)가 있어 여러 아우들에게 교태(驕忲)하지 말라고 훈계(訓戒)하니, 끝내 감히 털끝만한 것으로도 간택(干澤)하는 자가 없었다. 자성(資性)이 총예(聰睿)하여 한 번이라도 귀와 눈을 거친 일은 모두 종신토록 잊지 아니하였고, 서사(書史)에 통효(通曉)하여 능히 고금의 치란을 알았으며, 견식이 밝고도 넓고 도량이 빼어나니, 16년 동안 안으로 선왕(先王)의 관대하고 인자하여 공손하고 검소한 교화를 도운 것이 지극하였다. 효묘(孝廟)의 대상(大喪)을 당하자, 항상 애모(哀慕)하시며 제도(制度)를 다하셨고, 갑인년405) 봄 잇달아 인선 태후(仁宣太后)의 상(喪)이 있자, 후(后)께서는 마침 위예(違豫)하신 지 오래 되어 몸소 선찬(饍餐)을 잡지는 못하셨으나 더욱 슬픔을 이기지 못하셨으며, 여러 공주를 권무(眷撫)하시고 석뢰(錫賚)의 은혜를 한결같이 대비께서 세상에 계실 때와 같이 하여 털끝만큼도 감하거나 깎지 아니하시니, 궁인(宮人)들이 더욱 감탄(感歎)하고 열복(悅服)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그해 가을 현묘(顯廟)께서 예척(禮陟)하시자, 후(后)께서는 오랫동안 병을 앓으신 나머지임에도 곡벽(哭擗)하심이 제도를 넘었으며, 추도(菆塗)가 열리기 전에는 단지 싸라기 죽만 잡수시니, 우리 전하께서 매번 곁에서 눈물을 흘리며 억지로 올리기를 청하셨다. 그러나 그 송종(送終)하는 일에 있어서는 크건 작건간에 모두 손수 정리(整理)하시고 여어(女御)에게 맡기지 아니하셨으며, 교금(絞紟)·복습(複褶)으로서, 재비(梓槹) 안에 주선할 것은 모두 안에서 주선하여 갖추게 하고 국력(國力)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셨다. 그때 우리 전하께서 어린 나이로 사위(嗣位)하시고, 또 계속하여 병이 있어 후(后)께서 항상 밤낮으로 몹시 걱정하시며 보도(輔導)하고 조호(調護)하는 방법을 다하셨다. 그런데 죄인(罪人) 종실(宗室) 정(楨)·남(柟) 형제 세 사람이 친속으로 가장 가까와 금지(禁地)에 출입하고 또 가장 긴밀하였는데, 또 여러 외삼촌 형제와 빈객(賓客)이 우익(羽翼)이 되어 날이 갈수록 더욱 교만하고 방자하여 바랄 수 없는 일을 넘겨다 보았으니, 대개 말하기 어려운 것이 있었다. 을묘년406) 봄에 청나라 사람이 조제(弔祭)하는 일로 왔는데, 빈신(儐臣) 오시수(吳始壽)는 남(柟)의 내형(內兄)이었다. 통관(通官)의 터무니 없는 공갈로 인하여 입으로 한 말을 키우고 부풀렸는데, 말이 선조(先朝)를 범(犯)하였으므로 조신(朝臣)들이 모두 경악(驚愕)하였으나, 입을 다물고서는 아무런 계책도 세우지 못하였다. 후(后)께서 들으시고 크게 통탄하고 슬퍼하시며, 즉시 여러 대신(大臣)에게 하교(下敎)하시기를, ‘일찍이 선왕(先王)의 신하가 되어 어찌 감히 변명(辨明)하지 않는가?’ 하시고, 또 수상(首相)에게 통관(通官)에게 가서 나온 곳을 힐문(詰問)하라고 하자, 빈신(儐臣)의 빙의(憑依)하고 환혹(幻惑)한 단서가 탄로났다. 얼마 지나서 충익(忠翼)이 소(疏)를 올려 정(楨)과 남(柟)이 궁인(宮人)과 더불어 교란(交亂)했던 실상을 죄다 폭로하고, 그 죄를 논할 것을 청하자, 정(楨)의 외삼촌 오정창(吳挺昌)이 곧 그 당류(黨類)인 윤휴(尹鑴)와 허목(許穆)을 사주(使嗾)하여 급히 대처(對處)할 것을 노리고, 심지어는 구문(究問)하여 죄를 되려 뒤집어 씌우겠다고 말하니, 충익이 마침내 창황(蒼黃)히 금오(金吾)의 밖에서 명(命)을 기다리게 되었다. 후(后)께서 들으시고 놀라고 애통해 하시며, ‘정(楨)과 남(柟)의 일은 선왕(先王)께서 아시던 바이고, 선왕의 교시(敎示)는 미망인(未亡人)이 들었던 바이니, 내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나의 친속(親屬)이 바야흐로 욕된 지경에 빠져 있으니, 내가 또 어찌 길이 거처해 마음만 애통해 하면서 절부(竊負)407) 의 의(義)를 잊을 수 있겠는가?’ 하시고는, 즉시 당시의 상신(相臣)과 여러 재신(宰臣)을 염전(簾前)에다 부르셨는데, 유지(諭旨)가 격절(激切)하니, 비록 완악하고 사특하다 하더라도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었다. 유사(有司)가 비로소 정(楨)과 연(㮒)의 죄를 감정(勘定)하여 남쪽 변방에 곧 유배(流配)하였다. 후(后)께서는 을묘년408) 부터 통명전(通明殿)으로 이어(移御)하셨는데, 환후(患候)가 미류(彌留)하시어 병진년409) 6월에 이르자 갑자기 심해지시니, 우리 전하께서 밤낮으로 탕제(湯劑)의 시중을 들고, 대신(大臣)들을 나누어 종묘(宗廟)·사직(社稷)·산천(山川)에 기도하라고 명하시었으며, 또 왕옥(王獄)을 활짝 열어 죄수를 풀어 주게 하니, 후(后)의 병이 다시 회복되었다. 성상께서 후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기다리시어 즉시 대내(大內)로 돌아오실 것을 청하고, 아침저녁으로 모시고 봉양(奉養)하니 기쁨이 무르녹고 흘러넘쳤으며, 혹 조회(朝會)가 파(罷)하고 입대(入對)할 때,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받들어 여쭌 뒤에 결정하기도 하였다. 무오년410) 과 기미년411) 사이에 당인(黨人)이 권세를 다투어 자기와 다른 이들을 삼제(芟除)하려고 계획하였으나 끝내 성사되지 못하였고 경신년412) 에 이르러 남(柟)과 여얼(餘孽)인 허견(許堅)·이태서(李台瑞) 등이 불궤(不軌)를 꾀하다가 이미 복주(伏誅)되자 그 당여(黨與)를 다스림에 차등(差等)이 있었는데, 정(楨)의 후사(後嗣)가 되었던 아들을 본생(本生) 부모(父母)에게 돌려주어 연좌(緣坐)를 면제하고, 내사(內司)에서 관금(棺衾)과 의서(衣絮)를 마련해 주어, 죄를 지은 종실(宗室)을 편한 곳에다 옮겨 매장하게 한 것은 후(后)의 하교(下敎)로부터 나온 것이 많았다. 후께서는 평소에 자애롭고 어지시며 사물을 사랑하시어, 비록 꿈틀거리는 미물(微物)이라 하더라도 또한 일찍이 상해(傷害)한 적이 없었다. 일찍이 경덕궁(慶德宮)의 광명전(光明殿)에 납시었는데, 작은 뱀 한 마리가 방으로 들어와 어욕(御褥) 아래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궁인(宮人)으로 이를 본 자가 모두 실색(失色)하니, 후(后)께서 태연히 하교하시기를, ‘이 전(殿)은 산과 가까이 있으니, 이러한 물건이 있어도 괴이할 것이 없다. 해칠 필요가 없느나라.’고 하시고, 무고(巫瞽)로 하여금 푸닥거리를 하지 말게 하셨다. 명선(明善)·명혜(明惠) 두 공주가 서로 잇달아 일찍 세상을 뜨고, 명안 공주(明安公主)도 또 어려서부터 병약(病弱)하여, 후께서 몹시 가엾게 여기시고 사랑하셨으나, 그 출합(出閤)함에 미쳐서는, 의복(衣服)·기완(器玩)·궤찬(饋餐) 등속이 모두 예전의 제도에 대해 손색이 있었다. 또 일찍이 경계(警戒)하시기를, ‘검소(儉素)한 데서 사치(奢侈)한 데로 들어가기란 쉬우나, 사치한 데서 검소한 데로 들어가기란 어렵다. 이는 옛사람의 밝은 가르침이니, 소홀히 여겨서는 아니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때 수재(水災)와 한재(旱災)의 재이(災異)가 들자, 후께서는 곧 근심스런 안색(顔色)을 지으시고 몇날 며칠 동안 풀지 않으셨다. 지난해 가을 팔로(八路)에서 모두 재이(災異)를 고하고, 백성들이 다시 곤궁(困窮)해지자, 후(后)께서 들으시고 슬퍼하시어 침식(寢食)을 전폐(全廢)하시기까지 하였으며, 특별히 수진(壽進)·어의(於義) 두 궁(宮)에 명하시어 내탕고(內帑庫)에 남아 있는 쌀과 포(布)를 죄다 진휼청(賑恤廳)으로 돌려 백성을 살리는 물자(物資)에 보태게 하셨다. 무오년413) 가을 우리 전하께서 이질(痢疾)을 앓아 위중(危重)해지시자, 후께서는 밤낮으로 근심하고 마음을 졸이시며, 몸을 재결(齋潔)하고 머리를 감으시면서 하늘에 호소하여 대신해 줄 것을 청하셨는데, 성상의 병이 얼마 안가 나았다. 후(后)께서 매번 우리 전하께서 두창(痘瘡)을 겪지 않으셨다 하여 보호(保護)함이 더욱 지극하였는데, 계해년414) 10월 성상께서 감기가 들어, 이틀 만에 진두(疹痘)가 비로소 나타나니, 후께서 크게 놀라고 근심하시어 비저(匕箸)415) 를 줄이시고 무오년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목욕 재계하여 대신해 줄 것을 청하셨다. 11월에 성상께서 점차 평상시와 같이 회복되시었으나, 후께서는 이미 조금씩 병의 증후를 보이셨는데, 병이 약간 낫자 친히 성상께서 계신 곳으로 가시어 성상의 부스럼 딱지가 이미 떨어진 것을 보시고는 기뻐하시며 낯빛을 바꾸셨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다시 위중(危重)해지자, 내국(內局)에서는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할 것을 청하고, 성상께서는 대신에게 명하시어 종묘(宗廟)·사직(社稷)과 산천(山川)에 가서 기도하게 하기를 병진년416) 과 같이 하였으나, 12월 초5일 미시(未時)에 후께서 마침내 저승전(儲承殿)의 서쪽 별당(別堂)에서 승하(昇遐)하시니, 춘추(春秋) 마흔 둘이셨다. 하늘도 믿기 어렵고 덕(德)과 수(壽)도 징효(徵效)가 없으며, 게다가 나라의 경사(慶事)가 반포(頒布)되자 국애(國哀)가 곧 혹독(酷毒)하니, 경하(慶賀)와 조문(弔問)이 서로 뒤섞여 온 나라가 망해버린 듯하다. 아! 슬프다. 후께서는 평일(平日)에 쓰신 유교(遺敎)를 가지고 계셨는데, 유교 안에 뒷일을 갖추어 말씀해 놓으셨다. 이에 이르러 여관(女官)이 가져다 성상께 고하니, 성상께서 명하여 대신(大臣)들에게 전하여 보이셨다. 그 유교에는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습(襲)·대렴(大殮)·소렴(小殮)과 입관(入棺)하는 때의 여러 도구·의대(衣襨), 그리고 명정(銘旌)·소금저(素錦褚)·구의(柩衣)·현궁(玄宮)을 내릴 때의 삼중 구의(三重柩衣)·영좌(靈座)의 휘장·신문(神門)의 휘장·교의(交椅)·방석(方席)·상욕(床褥)·탁의(卓衣)·산릉(山陵) 영침(靈寢)의 욕(褥)·찬궁(欑宮)의 욕(褥)·퇴광(退壙)에 들이는 함자(函子)의 안팎 복(袱), 발인(發靷) 때의 영침함(靈寢函)·유의함(遺衣函) 및 다른 것을 담는 함자(函子)와 복(袱)은 내간(內間)에 있는 몇 가지가 또한 족히 쓸 만하니, 이것을 가져다 쓸 것이다. 중궁(中宮) 책례(冊禮) 때의 교명(敎命)과 옥보(玉寶)·책보(冊寶) 이 세 가지 물건의 안팎 복(袱)은 모두 새로운 필단(疋段)으로 바꾸었는데, 이상의 각 물건은 글로 써 놓은 대로 이미 비치(備置)하였으니, 즉시 먼저 분부(分付)하여 밖에서 겹쳐 만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삭망제(朔望祭)의 과실 그릇의 수는 전례(前例)를 따르지 말고 모름지기 모두 절반(折半)으로 할 것이며, 아침저녁의 전(奠)은 비록 행하지 않는다 해도 좋을 것이나, 만약 예(禮) 때문에 다 폐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유과(油果)와 이병(餌餠)을 각각 한 그릇씩 차릴 것이며, 다른 전물(奠物)도 또한 반으로 감할 것이다. 그리고 각도(各道)·각사(各司)와 여러 궁가(宮家)의 진향(進香)도 아울러 정지(停止)시키는 것이 편하겠다. 제사(祭祀)에 쓰는 상탁(床卓)은 혹 전날 쓰던 것이 있다면, 그대로 다시 쓰도록 할 것이며, 또 초상(初喪)에서부터 발인(發靷)하여 현궁(玄宮)을 내리고 반우(返虞)하는 데 이르기까지 일체의 응용(應用)하는 여러 기구(器具)는, 만약 혹 예전의 물건으로 쓸 만한 것이 있다면, 또한 다시 만들지 않게 하여 폐단을 줄이는 바탕으로 삼을 것이다. 그리고 비록 혹 너무 검약(儉約)한 것을 불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이는 위에서부터 곧장 감하고 줄이는 것과는 다름이 있는 것이다. 내 뜻은 이와 같으니, 모름지기 내 뜻을 유사(有司)에게 하언(下言)하여 이에 의거해 하도록 하라. 나머지 여러 일도 또한 절약을 따르는 데 힘쓸 것이니, 이것이 나의 바람이다. 해조(該曹)에서 저축한 바가 텅텅 비고, 민력(民力)이 또한 고갈되었으니, 지금의 국사(國事)는 망극(罔極)하다 이를 만하다. 지금 만약 한갓 옛 예(例)만을 따르지 말고 절손(節損)하는 바가 있다면, 비록 나의 혼백(魂魄)일지라도 또한 편안할 수가 있을 것이다. 오직 주상의 마음이 어질고 효성스러워 어김이 없을 것을 믿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다.’ 우리 전하께서 가르침과 명을 받드시고는 애통(哀痛)해 하심이 더욱 격절(激切)하였는데, 습렴(襲殮)과 빈전(殯奠)에서부터 모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한결같이 유교(遺敎)로 종사(從事)하게 하였다. 그리고 갑인년417) 복토(復土)의 역사(役事)418) 때 바야흐로 가운데 표시를 해 두어, 이미 왼쪽을 비워 두는 제도를 썼기 때문에 능(陵)의 공력(功力)이 또 크게 절약되었다. 아! 후(后)의 아름다운 뜻과 공렬(功烈)과 같은 것은 진실로 임사(任姒)419) 와 아름다움을 짝할 만하였는데, 탁룡(濯龍)의 경계와 영녕(永寧)의 가르침이 바야흐로 이것은 없어졌도다. 후(后)께서는 병진년420) 에 ‘현렬(顯烈)’이란 존호(尊號)를 받으셨는데, 이에 이르러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 등이 같이 후의 시호(諡號)를 의논하여 ‘명성(明聖)’이라 하고, 또 휘호(徽號)를 올려 ‘정헌 문덕(貞獻文德)’이라 하였다. 장차 개새(開歲)하는 갑자년421) 4월 초5일에 숭릉(崇陵)에 부장(祔葬)하는 것이 예(禮)이다. 후께서는 1남 3녀를 낳아 기르셨는데, 남자는 곧 우리 전하이시고, 여자는 명선(明善)·명혜(明惠)·명안(明安) 공주(公主)이다. 두 공주는 모두 미처 정혼(定婚)하기 전에 죽고, 명안 공주는 해창위(海昌慰) 오태주(吳泰周)에게 하가(下嫁)하였다. 우리 전하의 원비(元妃)는 인경 왕후(仁敬王后) 김씨(金氏)로 영돈녕 부사(領敦寧府事)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딸이고, 계비(繼妃)는 지금의 중궁 전하(中宮殿下) 민씨(閔氏)로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딸이다. 우리 전하께서 막 여학(厲虐)을 겪으시자 또 거창(巨創)을 만나시어, 지극히 애통해 하심이 마음속에 있는 날을 당하여 손수 선후(先后)의 행록(行錄)을 찬(纂)하시고, 이어 눈물을 흘리시며 신(臣) 김석주(金錫胄)에게 명하시기를, ‘여기 기록한 데 빠지고 누락된 것이 많으나, 내가 정신이 없고 마음이 찢어지는 듯하여, 능히 찬술(撰述)할 수 없으니, 선후(先后)의 아름다운 덕(德)을 장차 다가올 훗날에 드리워 알리지 못할까 깊이 두려워한다. 경(卿)은 폐부(肺腑)422) 에 속해 있으므로, 또 갑인년 이후의 일을 능히 다 알 것이니, 그 모든 것을 차례대로 찬술(撰述)하여 행장(行狀)을 짓되, 사양하지 말라.’고 하시었다. 신(臣)이 명(命)을 받들고 떨리고 두려워 사양하고자 하니, 또 감히 못할 바가 있어, 이에 감히 중외(中外)에서 같이 보고 들은 것을 모아서 기록하였으되, 서차(序次)를 위와 같이 하였다. 그리고 신이 엎드려 듣건대, 요사이 조정의 의논이 바야흐로 요무(妖巫)의 죄를 다스리려고 하고, 간혹 ‘우리 선후(先后)께서는 현명하시고 슬기로우시어 이치를 통촉하시니 사사(私邪)로움에 미혹(迷惑)되지 않았을 것인데 그래도 무축(巫祝)의 일에 이끌리고 관계됨이 있다.’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대개 뜬소문을 들은 사람의 잘못이다. 국속(國俗)이 평소에 진창(疹瘡)을 두려워하여, 이에 걸린 집에서는 곧 신(神)이 있다고 휘장과 상(床)에다 자리를 설치하고 온갖 물건을 걸고서 비는데, 민간에서 모두 그렇게 해도 금할 수 없다. 우리 전하께서 처음 진역(疹疫)에 걸리셨을 때, 궁중(宮中)의 사람들이 이미 능히 이러한 일이 없을 수 없다 하고, 또 스스로 역신(疫神)을 섬긴다고 말하는 어떤 무당이 있었으므로, 외택(外宅)에서 따로 스스로 공신(供神)하게 하였다. 그런데 성상의 병이 이미 낫자 외간에서 점차 ‘궁중에서 장차 다시 무당을 맞이하여 송신(送神)할 것이다.’라고 전언(傳言)하여, 오랫동안 더욱 떠들썩하였다. 그 때 후(后)의 병환(病患)이 더욱 위중해지자, 후(后)의 아우 김석익(金錫翼)과 김석연(金錫衍)이 성상의 명으로 들어가 탕약(湯藥)의 시중을 들었는데, 틈을 타 드디어 후께 아뢰기를, ‘외인(外人)들이 무어라고 하는 것은 정녕 궁금(宮禁)에서 마땅히 있어야 할 바가 아니니, 특별히 금지(禁止)를 더하실 것을 청합니다.’ 하니, 후께서 놀라시며,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이는 내가 아는 바가 아니나, 마땅히 물어보겠다.’ 하시고는, 드디어 궁중(宮中)의 일을 관장(管掌)하는 여관(女官)을 불러 힐문(詰問)하시었다. 그리고 이어 하교하시기를, ‘마음대로 일을 만들지도 말 것이며, 요란스럽게 하지도 말 것이다.’고 하시었다. 김석익과 김석연이 이미 물러나와서 직접 말명(末命)에서 받들었던 바를 신(臣)에게 말하였으므로, 신이 다시 행장(行狀)의 말미에 기록하여, 후세의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한 가지 일이 뱀을 기도해 물리치지 않은 것과 서로 같고 다름을 알게 하니, 후(后)의 괴신(怪神)에 미혹되지 않은 지극한 덕을 위함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14권 52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669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역사-편사(編史)
- [註 400]조예(祖禰) : 조부(祖父)와 부(父)의 묘(廟)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조부와 부를 가리킴.
- [註 401]
임오년 : 1642 인조 20년.- [註 402]
신묘년 : 1651 효종 2년.- [註 403]
복근(服勤) : 힘드는 일에 부지런히 종사함.- [註 404]
사복(嗣服) : 선인(先人)의 사업을 이음.- [註 405]
갑인년 : 1674 숙종 즉위년.- [註 406]
을묘년 : 1675 숙종 원년.- [註 407]
절부(竊負) : 《맹자》 진심편(盡心篇) 안에 맹자와 제자인 도응(桃應)과의 문답(問答)에서 도응이 묻기를, "순이 천자의 위에 있고 아버지인 고수(瞽瞍)가 살인(殺人)했다면 어떻게 하였겠습니까?"고 하자, 맹자가 답하기를, "순은 천하를 버리기를 헌짚신 버리는 것과 같이 생각하여 아버지를 남몰래 업고 도망갔을 것이다."라고 한 데서 나온 고사(故事).- [註 408]
을묘년 : 1675 숙종 원년.- [註 409]
병진년 : 1676 숙종 2년.- [註 410]
무오년 : 1678 숙종 4년.- [註 411]
기미년 : 1679 숙종 5년.- [註 412]
경신년 : 1680 숙종 6년.- [註 413]
무오년 : 1678 숙종 4년.- [註 414]
계해년 : 1683 숙종 9년.- [註 415]
비저(匕箸) : 수저.- [註 416]
병진년 : 1676 숙종 2년.- [註 417]
갑인년 : 1674 숙종 즉위년.- [註 418]
역사(役事) : 현종(顯宗)의 묘역(墓役)을 가리킴.- [註 419]
임사(任姒) : 문왕(文王)의 모(母)인 태임(太任)과 무왕(武王)의 모인 태사(太姒)를 가리킴.- [註 420]
○金錫胄撰進王大妃行狀。 其文曰:
恭惟我大行王大妃姓金氏, 世籍淸風, 其先蓋新羅王者後也。 其顯於麗者曰大猷侍中。 三世至昌祚, 復官侍中, 生仲源, 淸虜將軍, 生瀞, 監察。 始入我朝, 又二世至耋, 司憲府執義, 執義生叔弼, 成均生員, 生員生湜, 魁中宗朝賢良科, 官至成均館大司成, 世稱己卯名賢, 卽后六世祖也。 高祖棐判官, 贈左贊成, 曾祖興宇生員, 贈領議政, 祖堉事我仁祖、孝宗兩朝, 三爲上相, 卒謚文貞。 考佑明領敦寧府事, 封淸風府院君, 卒謚忠翼, 而贈贊成興祿、贈領議政址, 又忠翼之所後祖禰兩世也。 忠翼之配曰恩津 宋氏, 封德恩府夫人, 贈左贊成國澤之女。 以崇禎壬午五月十七日辰時, 生后於長通坊私第。 宋夫人有娠, 纔八朔, 有飛鳥銜玉, 過寢房而墮之。 祖父堉心異之, 以焦易筮之, 得育賢之兆, 翌日而后誕焉。 后自幼德容天成, 貞閒婉嫕, 言笑動止, 俱有度則。 歲辛卯, 孝宗爲顯宗擇配, 后年方十歲, 三入揀選。 孝宗輒益奇愛之, 遂命冊后爲王世子嬪, 仍亟稱之曰: "佳哉此婦! 終必福我國家。" 是歲十二月, 行嘉禮, 后入而承事孝宗大王及仁宣王大妃, 左右服勤, 夙夜靡怠。 退則輒與五公主同處一室, 諸公主年長於后者, 后敬之彌恭, 不及后者, 后友之彌親, 雍容悅睦, 終始無間, 宮闈之間, 藹如也。 及顯廟嗣服, 后亦進位中壼, 益小心謙畏, 以誠事上, 以義飭下, 尤防愼內外, 其顧視外家, 嘗有程例, 訓戒諸弟, 以毋驕忲, 終無敢以纖芥干澤者。 資性聰睿, 事之一經於耳、一接於目者, 皆終身不忘, 通曉書史, 能知古今治亂, 見識昭曠, 度越倫萃。 十六年之間, 其所以內贊先王, 寬仁恭儉之化者至矣。 當孝廟大喪, 常哀慕盡制, 及至甲寅春, 繼有仁宣太后之喪, 而后適違豫日久, 未得躬執饍餐, 益悲悼不自勝。 眷撫諸主, 錫賚之恩, 一如大妃在世時, 無毫髮脧削, 宮中之人, 尤莫不感歎悅服。 其秋顯廟禮陟, 后於寢瘵之餘, 哭擗踰制, 菆塗未啓, 只歠糜粥, 我殿下每從傍涕泣, 以請爲之强進。 而其於送終之事, 無大無小, 皆手自整理, 不委之女御, 絞紟複褶之周於梓椑之內者, 悉自內辦, 不以煩國力。 時, 我殿下以沖弱嗣位, 且繼有疾𧏮, 后嘗日夜焦憂, 以盡輔導調護之方, 而罪宗楨、柟兄弟三人屬最近, 出入禁地, 又最密, 又有諸舅兄弟賓客, 爲之羽翼, 惟日益驕恣, 覬覦非望事, 蓋有難言者。 乙卯春, 淸人以弔祭來, 儐臣始壽卽柟之內兄也。 因通官虛喝, 增益口語, 語至犯先朝, 朝臣皆駭愕, 墨墨無以爲計。 后聞之, 大加痛衋, 卽下敎諸大臣, 曾爲先王臣子者, 何敢無辨? 又命首相, 往詰通官語言所出, 而儐臣憑依幻惑之端露矣。 已而, 忠翼有疏, 盡暴楨、柟與宮人交亂狀, 請論其罪, 而楨之舅挺昌, 輒嗾其黨鑴及許穆, 求爲急對, 至以究問反罪爲言, 忠翼遂蒼黃胥命於金吾之外。 后聞之驚痛以爲: "楨、柟之事, 先王之所知也。 先王之敎, 未亡人之所聞也。 吾不可以不言, 而況吾親方陷於僇辱, 則吾又何可深居內衋, 而忘竊負之義乎?" 卽召時相及諸宰於簾前, 諭旨激切, 雖庶頑宿詐, 亦有爲之出涕者。 有司始議勘楨、㮒罪, 就配南邊。 后自乙卯, 移御通明殿, 患疾彌留, 至丙辰六月猝劇, 我殿下晝夜侍湯劑, 分命大臣, 禱于廟社山川, 又洞開王獄釋囚, 后疾復甦。 上俟 后體康復, 卽請反于大內, 朝夕侍奉, 歡洽融融, 或於朝罷入對, 有大事則必奉稟而後決焉。 戊己之間, 黨人柄事, 計欲芟除異己, 而竟不果。 至庚申, 柟與逆孽堅、台瑞等謀不軌, 旣伏誅, 治其黨與有差, 而如歸楨所後子於本生父母, 俾除緣坐, 內司辦治棺衾衣絮, 移瘞, 罪宗於便地, 其出於后敎者爲多矣。 后素慈仁愛物, 雖肖翹蝡蠢之微, 亦未嘗害傷。 嘗御慶德之光明殿, 有一小蛇入室, 盤旋於御褥之下。 宮人見者皆失色, 后逌然下敎曰: "此殿邇山, 有此物無怪, 不必害也。" 亦不令巫瞽祈筮。 明善、明惠兩公主相繼早逝, 明安公主又自少病弱, 后甚憐愛之, 及其出閤, 衣服器玩饋餐之屬, 俱損於舊制。 又嘗戒之曰: "由儉入奢易, 由奢入儉難, 此乃古人之明訓, 不可忽也。" 時有水旱災異, 后輒憂形於色, 彌日不解。 上年秋, 八路皆告災, 民復大困, 后聞之, 愀然至廢寢食, 特命壽進、於義兩宮, 發帑中所餘米布, 盡歸于賑廳, 以補活民之資焉。 戊午秋, 我殿下患痢危重, 后日夜憂煎, 嘗齋身浴髮, 籲天請代, 上疾尋愈。 后每以我殿下未經痘瘡, 保護彌至, 至癸亥十月, 上感疾, 兩日疹痘始見, 后大驚慮, 爲減匕箸, 復齋沐請代, 如戊午時。 十一月, 上漸向平復, 而后已微示疾, 疾小愈則親往上所, 見上瘡痂已除, 爲之欣然動容。 未幾疾復亟, 內局請設侍藥廳, 上命大臣往禱廟社、山川如丙辰。 至十二月初五日未時, 后竟昇遐于儲承殿之西別堂, 春秋四十有二。 穹昊難諶, 德壽無徵, 加以邦慶纔頒, 國哀旋酷, 賀弔錯互, 率土如喪。 嗚呼痛哉! 后有平日所書遺敎, 敎中俱言後事。 至是女官始取以告于上, 上命傳示大臣。 其敎若曰, 襲大小殮、入棺諸具、衣襨、銘旌、素錦褚、柩衣、下玄宮三重柩衣、靈座帳、神門帳、交椅、方席、床褥、卓衣、山陵靈寢褥、欑宮褥、退壙所納凾子、內外袱、發靷時靈寢凾、遺衣凾及他所盛凾子與袱, 內間所有件數, 亦足用之, 以此取用。 中宮冊禮時敎命、玉冊寶, 此三物內外袱, 俱改以新段。 已上各件, 依所書旣已備置, 卽先分付, 勿令自外疊造可矣。 朔望祭果器數, 勿用前例, 須皆折半爲之, 朝夕奠雖不爲亦好, 而如以爲禮不可盡廢, 則油果、餌餠各具一器, 其他奠物亦須減半。 至於各道各司諸宮家進香, 幷令停止則爲便。 祭用床卓, 或有前日所用者, 仍復用之。 且自初喪至發靷、下玄宮、返虞, 一切應用諸具, 苟有舊件可用者, 亦勿更造, 以爲省弊之地。 雖或有以太儉爲不可者, 此與自上徑自減削有異。 予意如此, 須以予意, 下言于有司, 而依此爲之。 其餘諸事, 亦務從省約, 是予之望也。 該曹所儲蕩竭, 民力亦盡, 卽今國事可謂罔極。 今若勿爲徒循古例, 而有所節損, 則雖吾魂魄, 亦可以安矣。 惟恃上心仁孝無違, 故如是言之。 我殿下奉承訓命, 哀痛彌切, 自襲殮殯奠, 俱命有司, 一以遺敎從事, 而當甲寅復土之役, 方中象設, 已用虛左之制, 陵功又大省。 噫! 若后之徽旨懿烈, 眞可以匹美任姒, 而彼濯龍之誡、永寧之詔, 其方斯則蔑矣。 后於丙辰, 曾受尊號曰顯烈, 至是領議政臣金壽恒等共議后謚曰明聖, 又上徽號曰貞獻文德。 將以開歲甲子四月初五日, 祔葬于崇陵, 禮也。 后誕育一男三女, 男卽我殿下, 三女明善、明惠、明安。 兩主俱未字而歿, 明安下嫁海昌尉 吳泰周。 殿下元妃仁敬王后 金氏, 領敦寧府事光城府院君 萬基之女, 繼妃卽今中宮殿下閔氏, 驪陽府院君 維重之女也。 我殿下纔經厲虐, 又遭巨創, 當至慟在心之日, 手纂先后行錄, 仍泣涕命臣錫胄曰: "玆錄多有闕漏, 予荒迷, 摧裂不能纂綴, 深恐先后懿德將無以垂詔于來後。 卿屬在肺腑, 又能悉甲寅以後事, 其悉撰次爲狀, 無辭。" 臣承命震恐, 欲辭則又有所不敢, 乃敢裒錄中外所共覩聞者, 序次如右。 抑臣伏聞, 近日朝議, 方欲治妖巫之罪, 而或有疑我先后之明睿燭理、不惑私邪, 而尙有牽係於巫祝之事者, 此蓋流聞者之誤也。 國俗素畏疹瘡, 其得之之家, 輒以爲有神, 帷床設席, 懸百物而祝之, 閭里皆然不可禁。 我殿下初得疹疫, 宮中之人旣不能無是事, 又有一巫自言能事疫神者, 令自外宅別自供神。 上疾旣愈, 外間浸傳宮中, 將復迎巫送神, 久而益喧。 時, 后病已谻, 后弟錫翼、錫衍等以上命入侍湯藥, 乘間遂白后曰: "外人所云云者, 殊非宮禁所宜有, 請特加禁止。" 后驚曰: "豈有是耶? 此非我所知, 然當問之。" 遂召女官之掌宮中事者詰之, 仍敎曰: "毋擅作事, 毋擾亂。" 錫翼、錫衍等旣退以所親承於末命者, 言於臣, 臣復得以詳錄於狀末, 俾後之見者, 知此一事與不禳蛇異同, 爲后不惑怪神之至德云。
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實錄卷之十四下
- 【태백산사고본】 15책 14권 52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669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역사-편사(編史)
- [註 4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