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강에 나가다. 교리 김창협이 문의로 인해 정심의 도리를 논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교리(校理) 김창협(金昌協)이 문의(文義)로 인하여 정심(正心)의 도리를 논하여 말하기를,
"주자(朱子)가 이남(二南)312) 의 덕화(德化)를 논하여, ‘성의(誠意)·정심(正心)의 공(功)이 피어오르듯 모두다 관통(貫通)하고 녹아흐르듯 두루 퍼진다.’고 하였으니, 그 성의·정심의 공을 발명(發明)한 것이 극히 좋습니다. 조용하고 한가하실 때 능히 착실하게 공부하지 아니하고, 단지 경연(經筵)에 임(臨)하여 강독(講讀)하는 것을 일로 삼으신다면, 주자(朱子)가 이른바, ‘짧은 시간에 정심(正心)하여 음영(吟咏)하고 성의(誠意)로 음영한다.’는 것과 서로 떨어짐이 거의 드물 것입니다."
하고, 끝에 또 뜻을 세우는 말로 군도(君道)의 요점(要點)으로 삼으니, 임금이 모두 가납(嘉納)하였다. 우의정(右議政) 김석주(金錫胄)가 말하기를,
"영변(寧邊)의 철옹 산성(鐵甕山城)은 【곧 영변(寧邊) 고을에서 다스리는 곳이다.】 둘레가 27리(里)인데, 산맥(山脈)은 묘향산(妙香山)에서 시작되고 성(城)의 동쪽은 큰 낭떠러지의 형세를 이루고 있으며, 남쪽은 큰 들판을 굽어보아 형세가 몹시 넓습니다. 그 중 약산 동대(藥山東臺)에 성을 쌓았던 옛터가 있는데, 어떤 이는 ‘이 성은 연무(延袤)313) 가 이미 크니 다시 자성(子城)을 쌓을 필요가 없다.’하고, 어떤 이는 ‘옛날에 세 겹의 성이 있었으니 다시 내성(內城)을 쌓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세화(李世華)·민유중(閔維重) 【모두 본도(本道)를 안찰(按察)했던 사람이다.】 및 지금의 방백(方伯)인 신익상(申翼相)이 모두 마땅히 쌓아야 한다고 말하였으므로, 지금 바야흐로 이광한(李光漢)으로 하여금 성을 쌓고 대포(大砲)를 만들게 하고 있는데, 물력(物力)이 넉넉하지 않습니다. 청컨대 묘당(廟堂)에서 수철(水鐵) 1만여 근(斤)을 주고, 본도(本道)에서 구관(句管)하는 나무 및 중[僧], 가선(嘉善)·통정(通政)의 첩(帖)을 주어 그 쓰임에 보태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석주가 말하기를,
"몽고(蒙古)가 쇠약해지자 금(金)이 창성(昌盛)하였고, 여진(女眞)이 창성해지자 원(元)이 쇠약해진 것은 반드시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치인 것이었으니, 우리 나라는 마땅히 스스로 힘쓸 따름입니다. 그런데 만약 완급(緩急)이 있으면 강도(江都)는 양식이 적고 성지(城池)가 견고하지 못하여 믿을 수가 없습니다. 선조(先朝) 때 민유중(閔維重)이 말하기를, ‘서로(西路)는 양식이 풍부하고 병사(兵士)가 강(强)하며 산천(山川)이 험조(險阻)하니, 보장(保障)으로 삼을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 말이 옳습니다. 만약 감영(監營)을 영숭전(永崇殿)의 기지(基地)로 옮긴다면 사세(事勢)가 극히 편리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에 의거하여 옮겨 짓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였다. 김석주가 신명규(申命圭)·이정기(李鼎基)를 석방(釋放)해 줄 것을 청하여 말하기를,
"신명규의 노모(老母)가 가련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이 선조(先朝) 때 있었으므로 지난(持難)하게 여겼던 것인데, 지금 이미 10년이 지났고 경(卿)의 말이 또 이와 같으니, 마땅히 본도(本道)의 장계(狀啓)를 보고 처리할 것이다."
하였다. 뒤에 본도(本道)의 품계(稟啓)로 인하여 방송(放送)하라 명하였다. 김석주가 또 말하기를,
"신이 조지겸(趙持謙)·오도일(吳道一) 등을 파직(罷職)시키고 외직(外職)에 보임(補任)하는 일을 진달(陳達)하여 윤허(允許)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외간(外間)에서 시끄럽게 의논하여, 혹은 신을 참람되다고 하고, 혹은 신이 천단(擅斷)한다고 하며, 혹은 신이 성상의 앞에서 소환(小宦)을 지휘(指揮)하여 관안(官案)을 올리게 하고서 어떤 고을을 가리키며, ‘마땅히 이곳에 보임(補任)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하니, 세상에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이어 스스로 파척(罷斥)될 것을 청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조지겸(趙持謙)의 일에 대해서는 처음에 이미 발락(發落)314) 하였으나, 사관(史官)이 미처 기록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시 하교(下敎)한 것이다. 그리고 오도일(吳道一)의 일은 내가 영동(嶺東)·영서(嶺西)의 도리(道里)를 상세히 알지 못하였기에 처음에 김화(金化)로 정하였다가, 관안(官案)을 보고서야 비로소 평해(平海)로 고쳤던 것인데, 지금 얽어서 날조한 것이 이에 이르니, 극히 놀랍다. 이는 반드시 연설(筵說)을 함부로 퍼뜨린 소치이니, 사관(史官)은 자수(自首)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사관(史官) 이현조(李玄祚)·김홍복(金洪福)이 모두 연설(筵說)을 전파(傳播)하였다 하여 스스로 죄를 받을 것을 청하였는데, 김홍복은 더욱 관안(官案)의 설(說)을 전파해 말하였다 하여 스스로 감당할 것을 청하였다. 【김홍복이 하번(下番) 이었기 때문이다.】 임금이 처음에는 엄하게 구문(究問)하고자 하였으나, 김석주(金錫胄)와 여러 신하들이 논죄(論罪)하는 것은 과중(過重)하다고 하였으므로, 죄주지 말라고 명하였다. 김석주가 물러나와 또 소(疏)를 올려 말하기를’
"신이 조지겸(趙持謙) 등 여러 사람의 죄를 청한 이후 여러 사람들이 노여움이 날로 깊어져 욕설과 비방이 사방에서 이르며, 신을 사림(士林)을 구해(構害)한다고 배척하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신은 일찍이 국조(國朝)의 고사(故事)를 들었는데, 고(故) 상신(相臣) 심연원(沈連源)은 김여부(金汝孚) 등 여러 사람을 물리칠 것을 청하여 모두 삭출(削黜)하는 데 이르렀고,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는 김효원(金孝元)을 내보낼 것을 청하여 처음에 또한 궁벽(窮僻)한 고을에 보임(補任)시켰으며, 신의 선조(先祖) 신(臣) 김육(金堉)에 이르러서는 이시해(李時楷)의 죄를 청하여 또한 부처(付處)하는 데 이르렀습니다. 그런즉 이번에 한 번 지휘한 일로 해산(海山)에 소요(逍遙)하게 한 것은 오도일(吳道一)에게 불행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조지겸(趙持謙)의 일은 외간(外間)에서 진실로 상세히 알지 못함이 있습니다. 그날 신완(申琓)·한태동(韓泰東)의 일에 대해 모두 체임·파직으로써 답하셨으나, 유독 조지겸을 파직(罷職)할 것을 청한 데 대해서는 곧 ‘그렇게 하라.’는 하교(下敎)가 있었지만, 좌우의 붓을 잡은 신하들이 주록(註錄)하는 데 마음을 두어 미처 모두 승청(承聽)하지 못하여 ‘조지겸은 발락(發落)함이 없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은 비록 상교(上敎)가 이미 내려졌으나 사관(史官)이 미처 쓰지 못한 것을 알았으므로, 신이 이에 다시 나아가, ‘조지겸은 발락(發落)함이 없었습니다.’라고 하고, 이어 재차 성교(聖敎)를 받든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곡절(曲折)이 소문이 나서 돌아다녀 역차(易差)하게 되자, 원한을 품은 마음으로 걸핏하면 곧 의심하니, 이 또한 이치와 형세상 반드시 이르는 바입니다. 어제는 또 어떤 사람이 와서 한 가지 말을 전하였는데, 신이 감히 탑전(榻前)에 소환(小宦)을 지휘(指揮)하여 관안(官案)을 가져와 올리게 하고서, 한편으로는 청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협박하기도 하였다는 것입니다. 아아!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저으기 생각하건대 그날 오도일을 영동(嶺東)의 한적한 고을로 내보낼 것을 청한 뒤, 성상께서 군명(郡名)을 기억해 내시느라 마침 발락(發落)함이 있지 아니하였으므로, 신이 우연히 승지(承旨) 홍만종(洪萬鍾)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구군(九郡)을 기억해 내고자 하매 관안이 없는 것이 한스럽다.’고 하였으니, 이는 신이 군명(郡名)을 상세히 기억하지 못하여 무릎을 맞댄 가까운 사이에서 혼잣말을 한 것입니다. 그 어찌 일찍이 위로 천청(天聽)을 번거롭게 하였으며, 또한 어찌 내시(內侍)를 불러 작용(作用)한 일이 있었단 말입니까? 신은 그때 바야흐로 고개를 숙이고 앞으로 엎드려 있었으므로 감히 어좌(御座) 가까운 곳의 일을 우러러 살펴볼 수가 없었는데, 문득 소환(小宦)이 종종걸음으로 서상(西廂)으로 가서 책자(冊子) 하나를 가져와 상전(上前)에 올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신은 마음속으로, ‘이는 반드시 황문(黃門)에서 서방(書房)의 일을 맡아보는 자이고, 성상(聖上)께서 보시기 위해 가져오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드디어 가져다 올린 것이라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오직 이것만을 스스로 마음속에 기억할 뿐인데, 어찌 이 일이 와전(訛傳)되고 함부로 전파(傳播)되어 마침내 사람을 무고(誣告)하고 얽어맬 근거가 될 줄을 헤아렸겠습니까? 아아! 위안(威顔)이 지척(咫尺)에 계시었고 천일(天日)이 조림(照臨)하시었으니, 이 일의 있고 없음에 대해서 신은 진실로 감히 누누이 번거롭게 되풀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온실(溫室)의 수목(樹木)은 원래 잘못 새어나갈 물건이 아니고, 두세 사람의 기주(記注)는 묘년(妙年)315) 에 잠필(簪筆)316) 한 선비라, 또한 거짓말로 사람을 해칠 리가 없습니다.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어떤 허망(虛妄)한 사람이 어디에서 듣고 터무니없이 과장하고 꾸몄기에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批答)을 내리고 승지를 보내 효유(曉諭)하기를,
"언근(言根)의 출처(出處)를 구핵(鉤覈)할 수 없어, 끝내 왕법(王法)으로 쾌하게 바로 다스리지 못하니, 이것이 가장 한스럽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14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657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정론-정론(政論)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군사-병법(兵法) / 재정-잡세(雜稅) / 인물(人物)
- [註 312]이남(二南) : 《시경(詩經)》의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의 두 편명(篇名).
- [註 313]
연무(延袤) : 연(延)은 횡(橫)으로 동서(東西)의 길이, 무(袤)는 종(縱)으로 남북(南北)의 길이.- [註 314]
발락(發落) : 결정지어 끝냄.- [註 315]
묘년(妙年) : 스물 안짝의 꽃다운 나이.- [註 316]
잠필(簪筆) : 붓을 휴대함. 옛날 중국 사람이 일이 있을 때 쓰기 위하여 붓을 머리에 꽂고 홀(笏)이나 독(牘)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는 고사(故事)에서 온 말.○御晝講。 校理金昌協因文義, 論正心之道曰: "朱子論二南之化, 以爲誠正之功, 薰蒸透徹, 融液周遍, 其發明誠正之功極好。 燕閑之中, 不能實下工夫, 而只以臨筵講讀爲事, 則其與朱子所謂: ‘將正心吟詠一餉, 將誠意吟詠一餉。’ 者相去幾希。" 末又以立志之說, 爲君道之要, 上皆嘉納。 右議政金錫胄曰: "寧邊 鐵甕山城 【卽寧邊邑治。】 周廻二十七里, 山脈來自妙香, 城東面勢極巉巖, 南則俯臨大野, 形勢甚曠。 其中藥山東臺有築城古址, 或云此城延袤旣大, 不必更築子城; 或云古有三重城, 更築內城爲當。 李世華、閔維重 【皆按本道之人。】 及今方伯申翼相皆言其當築, 故今方使李光漢築城造大砲, 而物力未贍。 請自廟堂, 給水鐵萬餘斤, 且給本道句管木及僧嘉善通政帖, 以補其用。" 上從之。 錫胄曰: "蒙古衰而金盛, 女眞盛而元衰, 必然之理也。 我國則惟當自强而已。 脫有緩急, 江都糧少, 且城池不固, 不可恃也。 先朝時, 閔維重以爲: ‘西路餉富士强, 山川險阻, 可爲保障。’ 此言是矣。 若移設監營於永崇殿基, 則事勢極便。" 上曰: "依此移建似好。" 錫胄請釋申命圭、李鼎基曰: "命圭母老可矜。" 上曰: "事在先朝, 故持難矣。 今已過十年, 卿言又如此, 當觀本道狀啓而處之。" 後因本道稟啓, 命放送。 錫胄又曰: "臣以趙持謙、吳道一等罷職補外事, 陳達蒙允。 外議譁然, 或以臣爲僭猥, 或以臣爲專擅。 或以爲臣於上前, 指揮小宦, 進官案, 指某縣曰當補此處云, 世豈有如此事乎?" 仍自請罷斥, 上曰: "予於持謙事, 初已發落, 而史官不及記, 故更爲下敎。 道一事, 予未詳嶺東西道里, 初定以金化。 及考官案, 始定以平海, 而今乃構捏至此, 極可驚駭也。 此必筵說浪傳之致, 史官自首可也。" 史官李玄祚、金洪福皆以傳播筵說, 自請受罪, 而洪福尤以傳說官案之說, 請自當。 【洪福乃下番故也】 上初欲嚴究, 錫胄及諸臣皆以論罪爲過, 上命姑不罪之。 錫胄退而又疏曰:
臣請罪趙持謙諸人以來, 衆怒日深, 詬謗四至, 有斥臣以構害士林。 臣嘗聞國朝故事, 故相臣沈連源之請退金汝孚諸人也, 俱至削黜。 先正臣李珥之請出金孝元也, 初亦補塞邑。 至於臣先祖臣堉請罪李時楷也, 亦至付處則今此一麾之行, 俾得逍遙於海山者, 其於道一, 非不幸也。 惟是持謙之事, 外間眞有未得其詳者。 自上於伊日申琓、韓泰東等事, 皆以遞罷爲答, 而獨於持謙罷職之請, 乃以曰兪爲敎, 左右秉筆之臣, 着心註錄, 俱未承聽, 有以趙持謙無發落爲言者。 臣則雖已知上敎之已下, 而史官旣未及書, 臣乃更進曰: "趙持謙無發落矣。" 仍有再勤聖敎之擧。 此等曲折, 流聞易差, 憾懟之心, 動輒生疑, 此亦理勢之所必至。 昨又有人來傳一說以爲, 臣敢於榻前, 指揮小宦, 取進官案, 以請以脅。 噫嘻! 此何言耶? 竊念, 伊日請出道一於嶺東閑邑之後, 自上記想郡名, 適未有發落, 臣偶顧承旨洪萬鍾言: "欲記九郡, 無官案可恨。" 此蓋臣未得詳記郡名, 發此私語於接膝之間, 其何嘗上煩天聽, 亦何有呼召內侍, 有所作用之事哉? 臣於其時, 方在俯首前伏之中, 未敢仰察御座傍近之事, 而忽見小宦趨至西廂, 取一冊子以進上前。 臣意以爲, 此必黃門之主事書房者, 而自上有下顧取來之命, 故遂爲取進耳。 惟以此自記於心而已, 豈料此事訛傳浪播, 終爲誣人構人之資耶? 噫! 威顔咫尺, 天日照臨, 此事有無, 臣固不敢覶縷煩複, 而溫室樹木, 元非誤泄之物, 則數三記注, 妙年簪筆之士, 亦無讆言害人之理。 未知何等虛妄之人從何聽聞, 譸張飾捏, 乃至此耶?
上下優批, 遣承旨, 諭以言根出處, 無以鉤覈, 卒不得快正王法, 此最可恨。
- 【태백산사고본】 15책 14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657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정론-정론(政論)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군사-병법(兵法) / 재정-잡세(雜稅) / 인물(人物)
- [註 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