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언 박태유가 장관과 귀척들의 과실을 추단할 것을 상소하다
정언(正言) 박태유(朴泰維)가 상소(上疏)하기를,
"윗사람의 근심은 위축(委縮)되어 떨치지 못하는 데 있고, 아랫사람의 근심은 구차하게 영합하여 용납되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그 소(疏)의 초본(初本)은 이 아래에서 송시열(宋時烈)이 태조(太祖)의 휘호(徽號)를 청한 일의 잘못을 논하고, 온 세상이 구차히 송시열에게 부합하려 한다고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그만둘 것을 청하였으므로 가져다 다시 깎아버렸다. 그러나 그 소가 이미 현도(縣道)에 붙여졌기 때문에 소어(疏語)가 일세(一世)에 전파(傳播)되었다.】 전하께서는 건강(乾剛)236) 이 부족하시어 존귀(尊貴)한 이에게는 떳떳함이 있지만 비천(卑賤)한 이에게는 떳떳함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대각(臺閣)과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이 구차하게 영합하여 용납되기를 바라는 마음만 품고 있으며, 곧고 강직(剛直)한 절조(節操)가 부족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탁지(度支)의 정관(長官)은 마땅히 신간(愼簡)하여야 할 것인데, 지금 이 직책(職責)에 있는 사람은 재물(財物)을 다스려 백성을 편하게 해준 실적(實績)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자질구레한 이익까지 긁어내어 백성의 원망이나 크게 불러일으키고, 스스로 재물이 풍부한 곳에 처해 있으면서도 능히 청근(淸謹)함으로써 자신을 지키지 못해 작년과 같은 흉년 기세(凶年飢歲)에 상하가 근심히고 두려워하는데도, 사삿집의 잔치에서는 온갖 사치(奢侈)를 다하였고, 그 자제(子弟)를 위해 잇달아 큰 집을 지으니, 물정(物情)이 같이 놀라고 사람들의 말이 시끄러웠습니다. 그리하여 대석(臺席)에서 누차 발론(發論)되었음에도 연연해 하며 눌러앉아 떠나가지 않으니 부끄러움을 모르기가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여러 신하들을 청렴(淸廉)한 절조(節操)로써 책려(責勵)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먼저 윤계(尹堦)를 물리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귀척(貴戚)이 다투어 사치하여 혼인의 비용(費用)에 이르러서는 날마다 더욱 사치스러워갑니다. 그리하여 재상(宰相)의 며느리를 맞이할 때 장렴(粧奩)237) 의 비용이 천금(千金)을 넘어 그 명목(名目)을 벌여 써놓은 것이 여항(閭巷)사이에 돌아다니니, 부(富)를 자랑하고 사치를 뽐내는 것을 서로 돌아가며 본받고 있습니다. 만약 이 풍습을 혁파(革罷)해 버리고자 한다면 마땅히 먼저 법으로써 귀근(貴近)한 집안을 재억(裁抑)하여 교화(敎化)에 폐(弊)를 끼치고 풍속을 해치는데 이르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옛제도에 국구(國舅)는 조정(朝廷)에 간여(干與)할 수 없었으니, 기미를 방지하고 조짐을 막는 계책을 만든 바가 깊었던 것입니다. 광성 부원군(光成府院君) 김만기(金萬基)는 퇴읍(退挹)하여 스스로를 지켜 영명(令名)을 손상시키지 않았으니, 거의 고가(古家)의 풍류(風流)가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에 이르러서는 청아(淸雅)하다는 이름이 여태까지 드러났으나, 자리가 귀(貴)해지고 은총(恩寵)을 입고 외람되이 여러 직임(職任)에 처하게 되자, 이미 평소의 조행(操行)이 이지러짐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사이 하는 바를 보건대 방자한 행동에 거리낌이 없어, 송사(訟事)를 결단(決斷)하는 데 공평(公平)함을 잃었다 하여 사사로이 추조(秋曹)238) 의 아전을 다스리고, 해청(該廳)의 자잘구레한 일로 후사(喉司)의 신하를 추문(推問)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이는 전하께서 교만(驕慢)하게 한 과실에서 말미암은 것이니, 마땅히 일찍 칙려(勅勵)를 더하시어 스스로 삼가고 법을 두려워하며 다시는 외정(外政)에 간여(干與)하지 못하게 해서 조정(朝廷)의 체통을 엄숙하게 만드소서."
하니, 임금이 비답(批答)하기를,
"탁지(度支)를 논척(論斥)한 것이 몹시 준엄(峻嚴)하니, 비록 허실(虛失)이 어떠한지는 알지 못하나, 그 이른바 ‘자질구레한 이익까지 긁어모은다.’는 것과 ‘눌러앉아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는 것은 또한 너무 박절한 것이 아닌가? 이미 그 자리에 있으면 일에 따라 규찰(糾察)하여 바로잡는 것은 저절로 그 직분(職分) 안의 일이되는 것이거늘, 무슨 털끝만큼이라도 조정(朝政)에 간여(干與)함이 있다 하여, 심지어 ‘방자한 행동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등의 말로써 크게 모욕을 더하기를 마치 은총(恩寵)을 믿고서 제맘대로 하여 거리낌이 없는 것이 있었던 것처럼 하는가? 이는 어떤 사람이 말하였기에 심각함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가소롭고 또한 놀랍다."
하였다. 그 이른바 재상(宰相)이 며느리를 맞았다는 것은 곧 영부사(領府事) 김수흥(金壽興)을 가리킨 것인데, 김수흥이 이 때문에 진소(陳疏)하였으나 단지 인구(引咎)만 하고, 또한 크게 스스로 변명하지는 않았다. 이 이후에 김수흥이 양주(楊州)로 돌아가 잇달아 사직(辭職)하는 소(疏)를 올리니, 임금이 사신(史臣)과 승지(承旨)를 보내 위유(慰諭)하고 서울로 올라오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14권 8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64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왕실-비빈(妃嬪) / 사법-법제(法制) / 사법-탄핵(彈劾)
- [註 236]
○正言朴泰維上疏曰:
上之患在委靡不振, 下之患在偸合苟容。 【其疏初本, 此下論宋時烈論上太祖徽號之非, 而以爲擧世皆偸合於時烈云云矣, 有勸止之者, 故取還刪去, 而其疏旣付縣道, 故疏語大播於一世。】 殿下乾剛不足, 所可常於尊貴, 所否常於卑賤。 是以, 臺閣近列, 咸懷偸合苟容之心, 而乏骨鯁忠直之節。
又曰:
度支之長, 尤宜愼簡, 而今之居是職者, 未聞有理財便民之實效。 剝取細利, 厚招民怨, 身處脂膏, 而不能以淸謹自持。 昨年凶飢, 上下憂惶, 而私家宴席, 窮極侈靡, 爲其子弟, 連起大宅, 物情俱駭, 人言喧藉。 發於臺席者屢矣, 而粘戀不去, 其無恥甚矣。 殿下若欲責群臣以廉節, 宜先斥尹堦也。 貴戚競爲侈靡, 而至於婚娶所費, 日漸奢泰。 宰相迎婦粧奩之資, 至踰千金, 列書名目, 騰諸閭巷, 夸富矜侈, 轉相倣效。 若欲革去此習, 宜先以法, 裁抑貴近之家, 無至於弊化傷俗。 舊制國舅不得干朝政, 所以爲防微杜漸之計者深矣。 光城府院君 金萬基退挹自守, 不損令名, 庶幾有故家之風流。 至於驪陽府院君 閔維重淸雅之稱, 固著於向來, 及乎席貴負寵, 冒處諸任, 已不免素履之虧缺, 而近日所爲, 恣行不顧, 謂斷訟失平, 而私治秋曹之吏, 以該廳微事, 而請推喉司之臣, 此由殿下驕之之過也。 謂宜早加勑勵, 俾其謹身畏法, 而勿復令得與外政, 以嚴朝廷之體。
上批以: "論斥度支甚峻, 雖未知虛實如何, 而其所謂剝取細利, 蹲據無恥者, 不亦太迫乎? 噫! 旣在其位, 隨事糾正, 自是職分內事, 有何一毫干與於朝政, 而至以恣行不顧等語, 大加侵凌, 有若恃恩怙寵, 縱肆無忌憚者然, 是何人言之深刻, 一至此哉? 可笑亦可駭也。" 其所謂宰相迎婦, 卽指領府事金壽興也。 壽興以此陳疏, 而只爲引咎, 亦不甚自明。 是後, 壽興歸楊州, 連呈辭疏, 上遣史官承旨慰諭, 使之上來。
- 【태백산사고본】 15책 14권 8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64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왕실-비빈(妃嬪) / 사법-법제(法制) / 사법-탄핵(彈劾)